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17)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38.

 

머리가 아프다.

 

온통 뒤죽박죽에, 대체 뭐가 진실이고 거짓이지 구별조차 할 수 없다.

 

내가 보았던 그건 정말 일어났던 일일까?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이 분노를 터뜨릴 뿐.

 

“페르세프!!”


나의 외침에 성이 뒤흔들렸다.

 

다리에 온 힘을 집중해, 일순간 폭발시킨다.

 

나는 순식간에 복도를 지나 공주가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나는 그것과 마주쳤다.

 

“야단났다……!”


“네가 마녀 페르세프, 맞아?”


긴 청록색 머리카락, 눈동자의 무늬, 10살 전후로 보이는 외모.

 

딱 봐도 마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깨어난 게야? 얀센은……결국 살아남아버렸나.”


“덕분에 지금 간당간당하거든. 내 부하를 그 꼴로 만들다니…….”


“방해하지 말라는 게야. 이 몸은 공주의 목만-”


“지금.”


나의 주위로 냉기가 뿜어져 나와 근처의 물건들을 꽁꽁 얼렸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 딴소리를 해?”


“윽……!”


“결정했어. 너는 사형이야, 그 몸뚱이를 꽁꽁 얼린 다음 조각상으로 만들어주지.

 

……뭐하고 있어? 지금부턴 네가 도망쳐야 할 때라고.”

 

“으, 으으……! 이곳에 그대의 육신과 정신을 소환하노니, 만티그!”


마녀가 거대한 사마귀를 닮은 마물을 소환했다.

 

“쉬이이익-!”


“저 여자를 죽이는 게야!”


만티그가 달려들어 팔의 낫으로 나를 베었다.

 

“……그래서?”


“뭐, 뭐야……어떻게 된 게야? 어째서 베이질 않는 게야!?”


“이유야 뻔하지. 이 마물이 나보다 한참 약하니까.”


낫은 내 상의를 베었을 뿐,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마물한테 베일 정도로 약해진 적은 없다.

 

“그리고 말이야. 나는 지금 정말, 아주, 심각하게, 많이 화났거든. 이 분노를

 

해소하려면 그냥 죽이는 걸론 부족해.”

 

나는 만티그의 양팔을 붙잡은 뒤, 그대로 잡아당겨 뽑았다.

 

“키시이이이익!?”

 

콰드득-!

 

그 다음, 머리를 잡아 한 손으로 으깨 죽였다.


“최대한의 공포와 고통을 느끼게 해준 다음에 죽여줄게. 자, 얼른 뛰지 그래?”


“히이……히이이익!”


페르세프가 꼴 사나운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이곳에 육신과 정신을- 데디보어!”


이번엔 멧돼지인가? 새까맣고 커다란 멧돼지가 이쪽으로 돌진했다.

 

“꾸이이이이익-!”
 
“하아……마녀치곤 학습 능력이 떨어지네.”


자세를 잡고, 정권을 내질러- 멧돼지의 미간을 손으로 관통했다.

 

콰직!

 

시체를 들어 올려 바닥에 꽂자, 바닥이 무너지며 시체가 흩뿌려졌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꽁무니 빼고 달아나는 것뿐이라고.”


“무……뭐 이런……괴물! 완전히 괴물인 게야!”


나는 일부러 페르세프를 붙잡지 않았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게 만들었다.

 

절대로 내게서 달아날 수 없다는 공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가 우위에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으, 으하악! 히이이이이익! 오지 마! 오지 말라는 게야!”


“소환수는 벌써 다 썼어? 다른 마법은 없고? 흠, 실망이네. 마녀라고 해서

 

그럭저럭 싸울 수 있나 싶었는데. 너 같은 푼수를 죽이는 건 꽤 지루한 일이거든.”

 

페르세프가 어느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옆의 벽을 뚫고 들어갔다.

 

“왜 문을 쓰지 않는 게냐!?”


“굳이 써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자, 일단 팔부터 뽑아보실까?”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원수의 팔다리를 묶는 사슬이여! 체인씰!”


그 순간, 바닥에 솟아난 수 개의 사슬이 내 팔다리를 묶었다.

 

힘으로 깨부수려고 했지만 꿈쩍도 안했다. 구속 마법이라, 꽤 하잖아?

 

“이, 이걸 풀 순 없겠지……! 그건 물리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마법 회로 역분석, 다중 구조 분해, 해제.”

 

쨍그랑! 사슬 하나가 바닥으로 튀어 산산조각 났다.

 

“어……?”


“미안하지만 말이야. 나, 마법에도 소질이 있거든.”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대체 못하는 게 뭐인 게야!?”

 

“음, 너를 살려주는 거?”

 

“히야아아악!”


페르세프가 방에서 뛰쳐나가 달아났다.

 

그 사이, 나는 구속 마법을 역분석하여 해제했다.

 

과연 마법의 문외한이라면 풀 수 없는, 상당한 고급 마법이지만 내겐

 

약간의 수고가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이제 마무리를 할까.”


나는 공주의 방으로 향했다.

 

페르세프는 이미 안에 들어간 듯했다.

 

사실 공주를 죽여도 나로선 그리 큰 감흥은 없다.

 

오히려 죽여주면 좀 기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아니 그 쓰레기 자식은 이제 아무 상관없기도 하니까.

 

“하아……하아……! 이, 이 여자만……이 여자만 죽이면……!”


페르세프가 잠든 공주의 위에 올라타, 단검으로 목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망설이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떨고 있었다.

 

“왜 그래? 공주를 죽이러 온 거잖아? 해치워버리지 그래?”


“너……!”


“사람 하나 죽이지 못하는 어설픈 각오로 여기까지 와서 죽다니.

 

그나저나 너의 묘비엔 뭐라고 써줄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무능한 마녀가

 

여기 잠들었다? 유언 정도는 들어줄게. 뭐라고 말해보지 그래?”

 

페르세프가 울먹거리며 벽에 달라붙었다.

 

어린아이들이 겁에 질리면 으레 그러듯 말이다.

 

“오, 오지 마……다가오지 마! 이 몸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게야!”


“죽이기 전에 몇 가지만 물어보자. 너희 마녀들은 왜 왕가를 노리는 거지?”
 
“이 몸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게야!”
 
“그래?”

 

그 순간,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페르세프의 발가락을 얼렸다. 

 

“아그……아아악……! 아파, 아파아……!”


“솔직히 왕족이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는데, 이유는 알아두고 싶어서 말이지.

 

다음엔 손가락을, 그 다음엔 코와 귀, 그 다음엔 눈알을 얼려줄게.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죽고 싶으면 아무거나 씨부렁거려봐.”

 

“전부! 이건 전부, 네놈들이 먼저 시작한 일인 게야!!”
 
페르세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왜 그런 짓을 한 게냐? 왜 그런 게야! 대체 엄마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우리도, 나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게야! 이런 짓, 하고 싶지 않았다고!”

 

“더 자세히 설명해주지 그래?”

 

“너 같은 괴물한테 더 할 말 따윈 없는 게야. 죽여! 이미 각오는 한 게야.

 

버려졌을 때부터, 그리고 여기 온 순간부터, 죽을 각오는 오래 전부터 했으니까!”

 

페르세프가 덤벼보라는 듯 몸을 크게 펼쳤다.

 

“……한심하긴. 너의 각오 따윈,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을 거야.

 

그래도 난 무의미하고 멍청한 개죽음이었다고 기억해줄게. 감사는 필요 없어.”

 

죽어.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그림자가 나타났다.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크아……아아아아……!”


“얀센?!”


그 찰나의 순간, 얀센이 페르세프를 감쌌다.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그런 치명상을 입고도 걸을 수 있다니.

 

얀센의 등이 얼어붙어 연기가 피어올랐다. 

 

“뭐하는 짓이야? 거기서 비켜.”


“안 됩니다……저는, 할 수 없습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명령에 거역할 셈이야?”


“예.”


얀센이 뒤로 돌아섰을 때, 나의 몸이 굳었다.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남자였던가.

 

이토록 단호하고 굳센 얼굴로, 나와 마주할 수 있다니.

 

“페르세프는……페르를 죽이게 두진 않겠습니다.”
 
“그 마녀는 적이야. 널 죽이려고 했고, 공주와 나도 죽이려고 했어.”
 
“알지만……안 됩니다.”
 
얀센이 피를 토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그저, 실수한 것뿐입니다.”


“……얀센, 네 놈……어째서 이 몸을 감싸는 게야……?”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더더욱 그렇죠. 그러니, 어른인 저는

 

페르를 용서해줄 겁니다. 아이의 잘못을 용서하고 고쳐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니까!”

 

“네 뒤에 있는 건 아이가 아니라 마녀야. 적이라고. 비켜, 세 번 명령하진 않겠어.

 

내가 아까 말했지? 나는 내가 키우던 개라도 날 물면 죽일 수 있어.

 

너처럼 어설프게 용서해주고 봐주는 일 따윈 하지 않아.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그렇군요.”


얀센이 씩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작별이겠군요. 아가씨,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 멍청이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아니, 이해했을 터다. 그럼에도 얀센은 ‘나를 막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말 안 듣는 개는, 조금 혼내줄 수밖에.

 

쩌저적-!

 

“으……아……아그그극……!”


나는 얀센의 팔을 얼렸다. 격통을 느끼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
 
“아뇨……그리고 저도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죽이게 두진 않겠습니다.”


“그 마녀가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존재냐고.”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고를 떠나서, 아이를 죽이는 게 잘못됐다고 하는 겁니다.

 

이 아이의 잘못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용서해줄 겁니다, 페르는 나쁜 아이가

 

아닙니다. 이번 일은 실수일 뿐입니다. 그리고 실수는- 고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번엔 다리를 얼렸다. 그러자 얀센이 앞으로 쓰러졌다.

 

“으아아아……! 아, 으으으으……!!”


“엎드려있어. 다음엔 죽일 거야.”


나는 얀센을 지나쳐, 페르세프에게 다가갔다.

 

마녀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는 게 아니었다.

 

“어, 어째서……대체 왜……이해할 수 없는 게야. 이 몸은 너를 속인 게야!

 

너를 이용하고, 너를 죽이려고 했고! 그런데 왜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게야?!


바보도 이런 바보가 따로 없는 게야! 자, 나를 죽여! 죽이라고! 이 몸이, 내가!

 

내가 기대하게 만들지 마! 사는 걸! 사랑받는 걸! 배신당하지 않는 걸!

 

후회하지 않는 걸……기대하게 만들지 마. 죽여, 어서 죽이라고 말하고 있잖아!!”

 

그가 일어섰다.

 

얀센은 다시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죽이게……두진 않아.”


“멈춰. 명령이야, 더 이상 움직이지 마. 나를 방해하지 마. 이번엔 정말 죽일 거니까.

 

너는 나의 사람, 나의 개야. 내 명령을 듣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저는! 당신의 개가 아닙니다!!”


얀센이 페르세프를 감싸 안았다.

 

“저는 저의 의지로 살고 행동할 겁니다! 그러다가 죽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구하겠어! 당신이 이 아이를 죽이게 두진 않아!!

 

이 목숨이 다하더라도, 설령 당신 손에 살해당하더라도! 버려져도! 옳다고

 

믿는 일이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겠어. 당신이 뭐라고 명령하든!! 나는 물러서지 않아!!”

 

나는 얀센의 뒷덜미를 잡아 저 멀리 내팽개쳤다.

 

“얌전히 누워있어! 널 죽이고 싶진 않아. 그만 포기해!”

 

“후우, 후우우……! 으그윽! 으그아아아악!”


얀센이 바닥을 기어 내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어째서야? 이해할 수가 없어. 이 마녀는 널 속이고 이용했어. 너의 적이라고.

 

분명 또 배신당하겠지. 구해봤자 너한테 도움 될 거 하나 없단 말이야.

 

용서 따위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결국 너만 손해 보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거야!?”

 

“구한다……구하겠어……죽이게, 두진, 않아. 절대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얀센은 내 다리를 놓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정말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 나를 막으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고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절박하게 만드는 걸까?


“모두가……행복해지는 결말 따윈……없을지도……그래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고작 그 정도가 전부니……할 수 있는 모든 걸……다해서……

 

당신이, 내가……누군가를……구할 수 있다면…….”

 

“그만하는 게야!!”


그 순간이었다. 페르세프가 튀어나와 얀센을 감쌌다.

 

“그만해! 이제 그만! 얼른 날 죽이고 끝내란 말이야! 이 바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괴롭히는 거야? 네 사람이라며! 그런데 왜 죽이려고 하는 건데!?


여기서 잘못한 사람은 나뿐이니까! 그러니까, 죽이지 마……얀센을 죽이지 마……!”

 

마녀가 울음을 참으며 내게서 얀센을 지키려했다.

 

용서라고?


나는 용서하지 않는다. 믿지 않으며 의존하지 않는다.

 

오로지 혼자이기에 강한 것이다. 

 

너는 정반대다. 용서하고, 믿고, 의존하기에 약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째서 너를…….

 

“저기- 감동적인 장면에서 미안하게 됐슴다.”


그 순간,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온통 보라색에, 머리가 꼬불꼬불하게 얽힌 여자였다.

 

뭐지, 이 여자는? 설마 또 다른 마녀인가?!

 

“역시 여러분에겐 못 맡기겠단 말이죠. 그런 이유로! 공주는 받아 가겠슴다!”


“기다-”

 

낯선 마녀가 공주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구멍’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멍은 그 순간 사라졌다. 뭘 어쩔 겨를조차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금 그건-”
 
“얀센! 정신 차리는 게야! 숨을, 숨을 쉬지 않아! 일어나! 제발!”


…….

 

저 마녀를 쫓는 것과, 얀센을 살리는 것.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얀센에게 다가갔다.

 

“알겠어.”


그게 너의 뜻이라면.

 

이것이 네가 내게 바라는 일이라면.

 

“용서해줄게. 그러니 부디,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해줘.”

 

 

 

 

 

 

39.

 

낯선 천장이다. 

 

근데 낯선 천장과 낯설지 않은 천장이 따로 있을까? 결국 천장은 천장 아닌가?

 

아무튼 깨어났는데……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천장이 좀 가려졌다. 이 둥근 건 뭘까? 그리고 이 목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은 뭐지?

 

“일어났어?”


“……아가씨, 생각보다 가슴이 크십니다.”

 

“그런 건 알아채도 말하는 거 아니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가씨가 내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몸이 아팠다. 손가락 하나 까딱도 못할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네 억지를 받아줬지. 그 마녀는 살려뒀어.”
 
“……그 대신 저는 해고 되겠군요. 명령, 어겼잖습니까.”


“네가 내 명령어긴 게 처음은 아니지.”


“어쨌든 용서 안 하실 거잖습니까?……그나저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나는 당연히 아가씨가 노발대발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페르만 죽이지 않으시면 다 괜찮습니다.”


“네 목숨은?”
 
“아가씨께 맞선 시점에서 포기했습니다. 삶든 굽든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오, 정말?”


아가씨가 씩 웃더니- 내 뺨을 꼬집고선 주물렀다.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말랑말랑해보였거든.”


“……화나지 않으신 겁니까?”


“화났어. 아주 많이.”


그런 것치곤 기분이 좋아보이시는데?

 

늘 느끼지만 참 알기 어려운 분이다. 

 

“내게 거역한 것은 분명 큰 잘못이지만- 동시에 네가 내 목숨을 구한 것도

 

사실이지. 그러니 그건 용서해줄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는 거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쨌거나 네 죄는 묻지 않겠다는 뜻.”


다행이다. 아니, 다행인가? 차라리 뭐라도 벌을 받는 게 마음 편할 거 같았다.

 

“페르는…….”


“그 마녀의 대한 처분은 너한테 맡길게.”


“그래도 되는 겁니까?”


“내 멋대로 죽였다간 네가 날 미워할 거 같아서.”


그런 걸 신경 쓰셨던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공주는 납치됐어. 그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자.”


“그거 큰일 아닙니까!? 어서 가서-”
 
“네가 완치되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왜, 불만 있어?”


“……없습니다.”


“이래야 우리 말 잘 듣는 강아지지.”


아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보다도 너한테 하나, 사과할 게 있어.”


“네?”


“널 개 취급한 것에 대해 사과할게.”


아가씨의 목소리가 조금 침울하게 들렸다.

 

“내 과거를 보고 하나 깨달은 게 있어서. 남을 도구 취급하는 건 정말 기분 더러운

 

일이구나……라는 걸 배웠거든. 그리고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너는 내게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야. 어떤 의미에선 나와 동등하게, 나를 마주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지.”

 

“과찬이십니다.”
 
“과찬? 나는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하지 않아. 오직 올곧게 평가할 뿐이지.”


아가씨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이어서 말했다.

 

“나의 인간관계란 둘 중 하나야. 나보다 낮거나, 높거나.”

 

“네…….”


“동등한 사람 따윈 없었어. 나는 언제나 그랬어, 대부분의 인간은 나보다 약하고

 

미천하니까 말이지. 당연히 내게 거역하는 바보도 없었어.”

 

“그건, 좋은 거 아닙니까?”


“하지만 내가 틀렸을 때 틀렸다고 말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

 

참 신기한 일이구나.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또 무언가를 배우다니 말이야.

 

아가씨가 속삭이듯 말하며 내 뺨을 매만졌다.

 

“너는 나의 사람도, 개도 아니야.”


“…….”

 

“너는 유일하게 나와 동등한 인간이야. 내가 틀렸을 땐 틀렸다고 말할 수 있고

 

때론 나의 뜻에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게 바로 너야.

 

……마찬가지로 나도 네가 틀렸을 땐 틀렸다고 말하겠지만.”

 

“보통은 제가 틀리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해.”


그러더니 아가씨가 눈치를 보듯 주위를 살펴보셨다.

 

“이제 슬슬 가야겠네. 그럼 마지막으로,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준 공로에

 

대한 포상을 해줄게. 우수한 상관은 부하의 공로를 인정해주는 법이니까.”

 

“네?”


쪽.

 

아주 짧고, 얕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순간 뇌가 멈췄다. 사고가, 논리도 멈춰버렸다

 

어?

 

어어? 어? 어어엉? 으으으으으응……?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말하면 죽일 거니까.”


“……네…….”


“고작 이 정도로 얼굴 붉히지 마. 내가 다 부끄러워.”


아가씨가 나를 침대에 눕혀준 뒤 방을 나갔다.

 

…….

 

내가 침대에 누워서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왔다는 것이었다.

 

 

 

 

 

 

 

 

 

chapter 2. 경비병은 영웅과 나란히 섰다. 完

 

짧은 후기 2.

 

빌드 업이 길고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함다

 

공부와 노동과 모델링과 기타 등등을 동행하면서 쓰느라 진도가 좀 느리지만

 

꾸준히 쓰는 걸로 만족함. 챕터 3는 공주를 구하기 위한 세 사람의 여행이란 느낌일 듯.

 

왜 챕2가 끝날 때까지 얀데레가 안 된 거냐? 라고 물어보면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 소설의 컨셉은 ‘한 여자가 얀데레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얀데레화엔 시간이 걸린다. 나도 빨리 쓰고 싶은데 망치지 않으려고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임. 서두르다가 맛을 망치진 않겠다. 푹 고아먹는 사골 같은 거임.

 

챕터가 끝날 때마다 그레이시아와 얀센의 관계가 변하는데 챕1에선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되고 신뢰하기 시작했고, 챕2에선 그레이시아가 얀센을 부하나

 

자신의 개가 아닌 한 명의 동료, 동등한 인간이라는 걸 인지하게 됨.

 

이런 식으로 챕터가 지날 때마다 변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즐겨주길 바란다.

 

이제 좀 쉬었다가 챕3 쓰기 시작함. 금방 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