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와 사귄지 벌써 오래 지났다.


엄마 친구 분의 딸인 얀순이는 같은 동네에 사는 소굽친구였다. 


가끔씩 서로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도 했었고, 볼 거 못 볼거 다 본사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같은 곳을 다녔고, 졸업했다.


매일 매일 그녀와 같이 있는 날 뿐이였다.


단순히 친구끼리의 우정이 점점 연심으로 번져가는것을 서로가 느끼고 있었기에,


조금 더 연심을 가진 쪽이 먼저 고백하면 사귀는 정도였으니.


물론, 내가 얀순이를 더 좋아했으니까ㅡ 


하얀 새의 깃털 같이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을 듯 내리던 날,


눈처럼 쌓일대로 쌓인 내 감정이 터져 그 한조각 한조각들이 그녀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졸업을 했고, 연인이 되었다. 


이미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취향까지 맞았으니까.


어느 커플보다 더 진하고 굵은 붉은 실로 연결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데이트도, 첫날밤도 다 완벽했다.


나에게 이런 행복이 주어져도 되는 걸까. 매일 생각했다.


얀순이를 만나 행복했고,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 자체가 너무 소중했으니까.


그런 행복에 대한 댓가인 것인가, 최근들어 얀순이의 상태가 너무 걱정스럽다.


어느 날 부터 얀순이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연락은 줄었고, 같이 있는 시간도 줄었다.


데이트를 해도, 우리가 뭘 하러 왔는지, 뭘 먹으러 왔는지 잊어먹은 듯이 행동했다.


분명 함께 걸었던 길인데 처음오는 듯이 주위를 둘러 보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도 헷갈려 했다.


몇번이고 같이 다녔던 귀가하는 길도 내가 같이 가지 않으면 몇시간 동안이나 뱅뱅 돌 정도였다. 


어느 날은 얀순이가 친구를 만나고 온다 해서 저녁 재료를 부탁했지만 아무 것도 손에 들지 않은 채 돌아왔다.


"얀순아, 오늘 카레 해먹을건데 아까 내가 카톡으로 보내준 재료 사왔어?"


"아, 맞다!! 카레 재료!! 헤헤.. 미안해 얀붕아"


"괜찮아.. 아무튼 집에 잠깐만 있어 얀순아 금방 다녀올게."


이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겨우 시간을 맞추어 만든 데이트 날, 어제까지 분명 카톡을 하고 잠들었지만 얀순이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 그녀를 기다렸고, 그녀의 모습이 보일때 까지 나는 몇번이고 사람들의 얼굴을 헤아렸다.


"얀붕이하고 겨우 시간 맞춰서 하는 데이트인걸!"


이 한마디만을 믿고 기다렸다.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아도, 나는 버틸수 있었다. 


거리가 어두워 질때 까지 그녀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얀순이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집에 있었고, 평소와 같이 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얀순아. 오늘 우리 데이트하기로 한거 기억나?"


"뭐라고 얀붕아..? 우리 데이트 하기로 했었나..?"


"우리 일주일 전부터 만나기로 했었잖아. 오늘 밖에 시간이 나지 않았으니까 소중하게 여긴 날이었잖아."


늦게나마 어제 했던 카톡을 다시 읽어 봤는지 허겁지겁 그녀가 말했다.


"으아.. 얀붕아 미안해.. 진짜 미안해.. 오늘인지 모르고 까먹었어.."


"너는 항상 이런 식이더라. 다 까먹었고, 매일같이 미안해. 이 한마디."


"얀붕아..."


"나도 이제 질렸어, 내가 왜 지금까지 너를 믿었는지. 왜 좋아했는지 까지 나도 까먹을거 같아."


"얀붕아..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내가 요즘.."


"바람피는 거야? 아님 내가 싫어진거야? 아니 됐다. 더 이상 말 안해도 괜찮아.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더이상 나도 참을 수 없었으니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입히고 나는 돌아섰다. 

    

얀순이의 집을 나오자 마자 전화가 걸려왔고, 끊었다.


몇번이고 걸려오는 전화소리에 참을 수 없어서 폰을 꺼버리고 자리에 누웠다.


얀순이가 그저 미웠다. 내가 싫어진건지, 아님 다른 남자가 생겼던지. 나만 좋아했던 건지.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으니까, 유튜브를 켜고 잠에 들었다.


문을 부술듯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잠이 깨어 문을 열자, 얀순이가 서있었다.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하얀 옷에 넥타이. 이질적이게도 머리는 정돈이 안된 채였다. 


문을 닫으려 했지만, 그녀가 막아섰다.


얀순이의 모습을 가까히 보니 밤새 울었는지 눈을 빨갛게 부어 있었고, 팔에는 칼로 얼마나 그었는지


여러 줄의 굵기가 다른 선들이 얀순이의 손목을 채웠다. 


차마 저런 꼴을 하고 찾아온 얀순이를 되돌려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할말이 뭔데. 분명 내가 어제 얘기 했잖아, 헤어지자고."


얀순이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무슨소리야 얀붕아? 헤어진다니? 우리 오늘 데이트 날이잖아?"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데이트? 분명 어제 해어지자고 했는데?


"얀순아. 너 왜그래. 내가 분명 어제 해어지자고 말했잖아. 우린 어제 끝났어, 그냥 동네 친구사이라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얀붕아 너가 더 이상해~ 우리가 왜 헤어져 ㅎㅎ.. 늦을까봐 머리 정리도 못하고 왔단 말이야!"


그러면서 얀순이는 내 방에서 자기가 쓰던 고데기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네~ 금방 예뻐지니까 기다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일들이 사실인지 몇번이고 내 볼을 꼬집었다.


"얀순아..!"


"응? 얀붕아 왜? 금방 되니까 기다려~ 이따 데이트 끝나고 우리집에서 자고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고, 방치하면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병원에 데려 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근처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얀순이를 잠깐 옆의 방에 두고 의사와 상담을 했다.


"얀순씨는 현재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심한 상태입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이요?"


얀순이가 기억 상실증이었다니, 지금까지 보인 행동들이 다 이해가 갔다.


그런데도 나와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얀순이가 노력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약을 처방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좋아질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역겨운 감정이 수도꼭지를 열어버린듯, 쏟아져 나를 채웠다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대화해보기는 커녕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고 역겨웠다.


병원을 나와 얀순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얀붕아? 우리 오늘 겨우 시간 맞춘건데 집에 가면 어떡해?"


"얀순아 잠깐만 핸드폰좀 줘봐."


"응.."


그녀의 핸드폰을 넘겨 받고 화면을 열어보니 내 사진과 일기처럼 쓰여져 있는 글들이 홈화면을 매꾸었다.


나랑 무엇을 했었는지, 어떤 관계인지, 내 신상정보, 자기 가족에 대한 것


각종 기록들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나에 대해 적혀 있는 것들은 항상 맨 위였다. 

 

제일 마지막 기록을 살펴보니 어제 내가 헤어지자고 말했던 기록은 없었고, 데이트에 대한 기대만 잔뜩 써있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흐느끼는 나에게 얀순이가 다가와 눈물을 닦아줬다.


"얀붕아 갑자기 왜 울어~?


"미..미안해 얀순아, 내가 너무 미안해.."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파악이 안된듯하지만,  얀순이는 그저 나를 안아주었다.


한달동안 그녀의 옆에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난 얀순이를 하나하나 보살폈다. 거의 얀순이의 집에 살다시피 했으니까.


점점 얀순이의 증상은 심해졌고, 전등을 어떻게 켜는지 마저도 까먹을 정도가 되었다. 


얀순이의 핸드폰 메모장에는 더이상 문서를 적을 수 없을정도로 빡빡하게 채워져있었고


기록은 한달 전에서 멈춰 있었다. 그녀의 기억도.


그녀의 기억이 사라졌다.


내가 누군지 자신이 누군지 마저 헷갈려 했다.


나는 그럴떄 마다 하나하나 알려 주었고, 더욱 더 지극히 보살폈다.


매일 매일 알려주고 하루하루 늘어가는 기억들을 그녀에게 다 알려주어야 하니 점점 알려줘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얀붕..? 얀붕아? 어디 있는거야?"


그녀가 약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무언가 도움이 필요할때 뿐만이 아니라 내가 잠깐 화장실에 갔을때도.


"얀붕아.. 어디 가지마.. 무서워.."


"걱정하지마. 어디 안가. 계속 옆에 있을게"


점점 그녀의 집착인지, 기억을 잃는것이 무서워서인지. 나를 한시도 놓지 않는다. 


행복한 기억들로만 채워주고 싶으니까. 옆에 있어줘야 한다.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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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를 내 곁에만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얀챈을 들어가보니 은근 괜찮은 소재들이 많이 있었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얀순이..? 이거 마음에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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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써보는 소설이야. 잠깐 시간 내서 적어보는 거라 이번에는 별로 마음에 안들 수도 있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얀순이' 라는 글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번 써봤어. 소재도 따왔고. 마음에 들면 좋겠네.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