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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장은.. 혹시 거지야?


옆에 우두커니 서서 몇분씩 가만히 함장을 응시하기만 하던 엘리시아가 마참내 입을 열었다. 

꺼내기 힘든 말이라도 있겠거니 싶긴 했지만, 대뜸 튀어나온 예상을 뛰어넘은 발언에 변수라면 이골이 난 대머리 함장조차 얼이 빠진 모습을 보였다. 

함장은 튀어나온 어이를 추스른 뒤 엘리시아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내가 거지면 어떻게 히페리온의 함장이겠어.


함장이 걸터앉은 의자 너머로 함내의 풍경이 보였다.

150뽑을 풀로 채운 미시브, 천명무기고산 투르게네프 상상중중중하를 등여맨 브로니, 구석탱이에 쳐박혀있는 약수 3성과 벨라 3성 등.

이래저래 가성비를 신경 쓴 라인업이라 부자라기엔 조금 구질구질했으나 거지라면 불가능할 돈지랄이 이곳저곳에 산재해있었다.

적어도 히페리온의 함장이란 직책은 무과금 거지가 함부로 달 수 없는 꼬리표임에 분명했다.

그런 사실이 와닿은 엘리시아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고, 그것이 곧 표정으로 드러났다.


대체 왜 그러는데?

...이거 봐, 함장.


함장의 입에서 왜 그러냐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엘리시아가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최신 물품이 담긴 카탈로그였는데, 손가락이 가리킨 페이지에는 '엘리시아 맞춤형 메이드복! 단 돈 1680 패키지 코인!' 라는 문구가 써있었다.

제 딴엔 자존심을 버려가며 직접 떠먹여준 것이었으나, 함장이 다소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엘리시아에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이게 왜?

...아무 생각도 안들어?

응.

아니면... 함장은 혹시 게이야? 털어놔도 괜찮아. 엘리시아는 세상의 모든 취향과 아름다움을 포용할 줄 아는 소녀니까.

왜 그렇게 되는건데..?

아니, 그야.... 


엘리시아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메이드복은 남자의 로망과 페티쉬가 응축된 복장이잖아?그런데 이렇게 이쁜 나를 두고 나에게 딱 맞춰서 제작된 메이드복을 입혀보고 싶단 생각이 안 든다면 밥 먹을 돈도 없어서 쫄쫄 굶어야하는 거지거나, 혹은 여자라는 성별에 관심이 없는 게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거 아니겠어? 생각해봐, 함장. 함장 인생에서 나같은 절세미녀가 고풍스러운 메이드복을 입고 '어서오세요, 주인님♪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아니면 목욕? 아니면, 저? 후훗♪' 같은 말을 해주는 걸 들을 기회가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어. 거기다 나정도 되면 일반적인 메이드를 초월한다구? 요리면 요리, 빨래면 빨래, 수유대딸 플레이면 수유대딸 플레이, 함장이 마망을 찾으면 마망이 되어줄거고, 아예 아기로 회귀해서 똥 싼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떼써도 표정 구기지 않고 갈아줄텐데? 방금 말했듯이 엘리시아는 세상의 모든 취향과 아름다움을 포용할 줄 아는 소녀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게 몇백, 몇천만 원이 아닌 단 돈 1680 코인이고. 채팅앱에서 알게 된 헐값에 해준다는 추녀를 불러다 메이드복을 입혀서 주인님 대접을 받더라도 이것보단 더 나올 걸? 고작 1680 코인에 엘리시아가 메이드복을 입어준다는, 로또 1등보다 얻기 힘든 기회를 얻어놓고 뻥! 차버린다니.. 만약 내가 함장 입장이었으면 단숨에 결제해다가 여기다가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므흣한 망상들을 적나라하게 풀어봤을텐데, 함장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게 상식선에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그렇네... 아, 혹시 함장은 페도필리아? 함내에 어린 여자애가 많은 게 그런 이유? 확실히.. 가끔식 테레사 보지 탐구? 같은걸 하려고 하기도 했던게 이렇게 말하니까 설명이 되는구나. 으음~ 방금 전까지 취향을 존중한다 해놓고 이런 말 하기도 뭐하지만... 저기, 함장. 페도필리아는 건전한 취향이 아니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미성숙한 여자애들한테 자신의 성욕을 푸는 건 짐승들조차 안 할만한 행동인 거 알아?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구? 함장은 내 생각 따위 상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함장이 인간이었으면 좋겠어. 뭐, 테레사쯤 되면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상태니까 괜찮으려나.. 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너무 과하게 어려보여서 좀 그렇지. 그래, 차라리 화는 어때? 지금은 후카던가? 아무튼 후카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몸은 중학생쯤에서 발육이 멈춰있지만 정신적으론 5만년 넘게 살았으니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귀엽지. 특히 목석같은 부분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니까? 가끔씩 놀려주면 얼마나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는데♪ 쑥맥이라 남자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고. 어쩌면 조용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처럼 의외로 타고난 면을 보여줄지도 몰라. 후카는 너무 순진해서 그럴 일 없으려나? 좀 궁금해지는걸. 혹시라도 보게 되면 알려주기야? 약속♪ 남자한테 익숙하지 않은 여자애일수록 인내심을 갖고 상냥하게 대해줘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혹시나 후카가 나한테 울면서 오는 일이 생기면 나도 함장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음, 이건 만약의 얘기니까 덮고 넘어가는게 좋겠다. 방금 한 말은 잊어줘. 그나저나, 우리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아, 맞아. 메이드복이었지. 메이드복 너~무 좋지 않아? 내가 원래 이쁜 건 다 좋아하긴 하지만 없던 페티쉬가 생겨나는 느낌이랄까? 주인님과 하인이라는 주종관계에서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고 할지... 그런 의미에서는 개인적으로 집사복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메이드복쪽이 하늘하늘하고 나풀나풀거려서 더 좋은 거 같아. 특히 사납거나 우락부락한 애들한테 입혔을 때의 갭모에가 장난 아니잖아. 뫼비우스, 칼파스, 케빈같은 애들이 입었다고 생각해봐. 게이가 아니어도 불끈불끈해지지 않아? 나는 불끈불끈해져! 남자들이 나만 보면 정신을 못차리는게 무슨 기분인지 알 거 같을 정도야. 실제로 한번은 칼파스한테 입혀봤는데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 그 체구랑 우락부락한 몸을 들고 얼굴을 울그락 불그락하면서 울려하는데... 아, 이 이상은 칼파스의 체면을 위해 비밀로 할게. 아무튼 그걸 봤으면 함장도 게이가 됐을 지 몰라. 근데 페도 아니면 게이라니, 함장 취향은 끔찍한 이지선다밖에 없네♪ 후훗. 이건 교정하는 수밖에 없으려나. 예전에 내가 살던 시대 때는 전기 요법으로 게이나 페도같은 이상성욕을 교정하기도 했거든. 요즘도 있나? 이렇게 진보된 시대에 남의 취향을 굳이 교정하려 한다는 건 정말 부끄럽고 미개한 얘기지만, 아무튼 그거로 교정이 된 사례가 꽤 있긴 했다나 봐. 가령 페도인 함장이 어린애 사진을 볼 때마다 뇌를 지져서 반응을 못하게 막는 거라 정확히는 교정이라기보단... 파블로프의 개? 그런 느낌이지만... 어쩌면 함장의 취향도 그런 식으로 교정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는 얘기는 아냐. 뇌를 직접 전기로 지지는건 너무 야만적이잖아. 그냥 전기급의 충격을 줘보자는 거지. 이를테면 <나>라든가. 예전에 대원들이 비에 젖은 나를 보고 '전기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거든. 코피를 흘린다거나, 실제로 심장이 잠깐 멎었던 사례까지 있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말하다보니 조금 부끄러워지는데.. 과장 아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구? 심장이 잠깐 멎었던 건 다른 이유도 있긴 한데, 하여튼 함장에게 <나>라는 충격을 계속 노출시키다보면 좀 더 노멀한 취향으로 돌아올지도 몰라. 그때가 되면 내가 없이는 못산다든가? 나는 그래도 괜찮은데 함장은 싫으려나?♪ 앗! 이거 내가 함장을 사랑한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줘. 인간으로서의 호감이 반드시 성애와 일치하는건 아니니까. 종종 이런 걸 이해 못해서 내가 말하는 '좋다'를 '사랑해'로 이해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어서 곤란해. 좋아서 좋다고 하고 싶을 뿐인데 좋다는 말조차 맘대로 못한다니, 나도 참 죄 많은 여자라니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 그도 그럴게 <나>잖아. 절세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좋아'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정신이 나가버리는거지. 그럴싸하지 않아? 함장은 어떻게 생각해?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떨 거 같아? 시험삼아 말해볼까? 좋아해, 함장♪ ...의 책상에 올라와있는 호무 인형을   어머, 설마 진짜로 좋아한다고 할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아무리 쉬워보여도 결국엔 여자인걸. 여자아이는 무드에 민감하다구? 좋아한다는 말은 좀 더 근사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해야지. 아무리 내가 말하는 쪽이고 함장이 듣는 쪽이더라도 말야. 어디가 좋을까... 함장은 어디서 듣고 싶어? 아, 이번에 과거의 낙원에 칵테일 바가 하나 생긴다고 들었는데, 거기는 어때? 함장은 술 괜찮아? 그보다 술을 해도 괜찮은 나이? 요즘 사람들은 얼굴만 봐서는 나이를 모르겠어. 액면가로는 족히 30세가 넘어보이긴 하는데... 으음... 머리숱이 없어서 그런가? 더 나이들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응! 모르겠네. 아무리봐도 40은 넘어보여. 그렇게까지 나이를 먹었을 리가 없는데도.... 없는 거 맞지, 함장? 응? 어째 표정이 좀 우울해보이는데... 혹시 나이 들어 보인다고 해서 그래? 괜찮아, 함장. 사람의 매력은 외관이 전부가 아니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함장에겐 수많은 장점이 있잖아. 이를테면 돈. 재력은 중요하지.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신상이 나오면 군말않고 지르러 가는 호쾌한 씀씀이? 아, 이건 이제 아니구나. 나는 함장이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고작 1680 코인 짜리 복장도 사주지 않을줄은 몰랐다고 할까. 이거로 실망했다는 건 아니고, 흐음... 그냥... 만약 내가 함장이고 뫼비우스나, 후카나, 기타 등등에게 1680 코인으로 이쁜 메이드복을 입힐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하면... 그게 1680 코인이 아니라 9600 수정이었어도 바로 질렀을텐데 함장은 왜  고작 1680 코인을 아끼는 걸까?그런 생각이 드는 거 뿐이야. 심지어 여태까지 돈을 아예 안 쓴 것도 아니고 꽤 썼잖아? 내 기억으론 바로 이전 픽업에도 트럭을 두 대나 박았거든. 그렇게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 어째서 1680 코인 따위를?혹시 거지는 아니었는데 거지가 됐다거나? 설마하던 햇살론 가챠는 아니지..? 함장, 이런 거에 자존심 세울 필요 없어. 만약 함장이 돈이 없어서 그러는거라면... 나는 괜찮으니까 꼭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난 언제나 함장의 편...


함장은 그대로 엘리시아의 대가리를 깼다.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