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운명의 붉은 실'이 보였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가락들이 붉은 실로 연결 된 것이 보였다.


어릴 땐, 부모님이 나만 빼놓고 실뜨기 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이내 부모님 사이를 잇는 이 빨간 실이 나만 보인다는걸 깨달았다.


조금씩 커가며 활동반경이 넓어지자. 부모님 말고도 붉은 실로 연결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들 중에서 항상 등하교를 같이하는 남자애와 여자애가 그러했다.

이 둘은 항상 붉은실로 연결된 손을 붙잡고 등하교를 같이했다.


담임선생님도 붉은 실이 한가닥 손에 묶여 있었으나,

교실 밖 멀리까지 이어져 있는 터라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담임선생님과 같이 하는 하교길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 남자의 손가락엔, 담임선생님과 연결된 붉은 실이 있었다.


여름방학에, 반 친구들과 선생님의 결혼식장에 가서 축가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우글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결혼식장과 뷔페라니… 선생님도 참 대단했다.


누구나 손가락 한마디엔 붉은 실들이 매듭지어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어져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붉은 실이 보이지 않는 저 먼곳까지 뻗어 있었다. 


누구든 운명의 상대가 한명 쯤은 있는 것이였다.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도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 까지 이어져 있는것을 보면,

필시 운명의 상대도 어딘가에 있으리라.


그럼 뭐하나.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을 구할 때 까지 연애 한번을 못해봤다.


다른 친구들은 운명의 상대가 아닌 사람들과 연애하다 헤어지기도 하고, 

일찌감치 운명의 상대와 만나 이른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살면서 호감가는 여자도 있었고, 나에게 고백해온 여자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나와 붉은 실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벽창호네 고자네 소리까지 들었지만 그 여자들은 모두 지금 다른 남자들과 만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다. 


연일 뉴스에선 남녀갈등이 어쩌네 저출산이 어쩌네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내 눈엔 다 부질없고 바보같은 일이였다. 돈이나 자존심이나 주변 상황같은걸 조금만 내려놓고, 본능이 이끄는데로 선택을 한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퇴근길 버스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본다. 결국 모솔의 신세한탄일 뿐이다.


"에휴, 그냥 다 포기하고 이 실을 따라가 봐?"

손가락에 걸려있는 붉은 실을 한번 퉁 튕겨보았다.

이 실을 감아올리며 따라간다면 필시 사랑을 할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랄까, 내 안의 무언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앗다.


 나 또한 로맨티스트다. 

실이 보이지 않는 남들도 잘만 운명의 상대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다. 

나도 그러한 사랑을 동경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 주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정류장에 앉아있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수수한 차림의 여성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그 여자가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뭐..뭐야. 괜찮아요?"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입에 약간의 거품이 있고,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빠르고, 눈에 초점 이란 게 없다.


이거 어릴 때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봤었는데…


"누구 비닐봉지 가지고 있는거 없어요?!"

급하게 주변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과호흡 증후군'


극심한 스트레스나, 혹은 원인불명의 사유로 호흡이 주체가 안되고 가빠지는 증상이다.

이럴 땐 호흡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비닐봉지로 입과 코를 덮어야 한다. 


할아버지 한분이 박카스가 담겨있던 비닐봉지를 건넨다.

조금 작지만, 비닐봉지 손잡이 양 끝을 여자의 귀에 걸었다.


"숨을 천천히. 천천히 쉬세요"

쓰러진 여자를 바로 눕히고, 턱을 들어서 기도를 확보한다.

맞는지 틀린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그동안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주머니가 119를 불렀다. 

스피커폰으로 들려오는 구급대원의 목소리는 '5분이면 도착하니 현 상황을 유지'하란다.


여자의 숨이 천천히 규칙적으로 돌아왔다.

삽시간에 도착한 구급대원이 들것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비닐봉지를 얼굴에 그대로 씌운 채, 총알같이 여자를 싣고선 사이렌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순식간에 사태는 정리되고, 정류장엔 나와 박카스를 들고있는 할아버지 뿐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댁까지 12개들이 박카스 박스를 들어다 드려야했다.


그리고 사흘이나 지났을까?

회사사람들과 사람을 구한 영웅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금새 잊어버린 뒤였다.

남사시럽게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닐 일도 아니다.

여느 때 처럼 다시 퇴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류장에서 내리자,


"저번엔 정말 감사했어요"

 모르는 여자가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번에 쓰러진 그녀였다.


"괜찮으셔서 다행이네요"

여자는 저번에 보았을 때와 확연히 다른 안색을 띄고 있었지만

약간 긴장한 모습이였다.


"덕분에 살았어요"


"뭘요, 저 말고도 아주머니라던가 할아버지라던가 모두가 도와주신걸요"


"실례가 안된다면, 제가 식사를 한번 대접해드려도 될까요?"

여자는 몸을 베베 꼬고, 손바닥을 비비고, 얼굴이 붉은 채로 나에게 식사를 권유했다.

 남중남고공대를 나온 모쏠이라도 이걸 오해할 수는 없었다.

허나, 내 손가락에서 나온 붉은 실은 그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완곡히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고, 몸을 돌려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그녀도, 언젠가 내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만나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굳이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그.. 그러지말고! 한번만. 딱 한번만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급작스럽게 그녀가 내 앞을 막으며 소리친다.

양 팔을 벌려서 내가 가려는 길을 통째로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손 끝에서 붉다 못해 시꺼먼 색의 실이 나왔다.

검은 실은 재빠르게 내 손목을 한 줄 휘감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했다.

분명, 그녀에겐 이 검붉은 실 말곤 다른 운명의 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은 저 멀리 어딘가 다른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검은 실이 의미하는게 뭔지 알고싶었다.


"그러면…염치불구하고 한번만 얻어먹을까요?"


멋쩍게 웃음짓는 나를 보고, 그녀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우리는 그날 전화번호와 간단한 일정을 교환하고 난 뒤에 헤어졌다.


"메뉴는 제가 고를게요! 기대하세요~"

그녀는 손을 흔들며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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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찾아온 주말.

나는 그녀가 일러준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내가 한참은 이르게 도착했으니 기다리는 건 문제가 아니였다.


문제가 있다면…


"살다 살다 이런데도 다와보네"

건물의 외관에 압도되어 혼잣말이 나온다.

시내에 유명한 5성호텔 라운지에 앉아서 휘양찬란한 조명들을 두리번 거렸다.


"오래 기다리셧어요?"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가, 어떻게인지 북적한 호텔 라운지에서 날 찾아내고선 말을 걸어왔다.


"주변에 일이 있어서 처리하고 먼저 왔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기대감에 부풀어 한참을 일찍 먼저와서 호텔 주변믈 두리번 거렸다.

이런 곳에 오는것도 처음이거니와, 하물며 그것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여성과의 만남이라니.. 

아까부터 화장실에 들어가 몇 번이나 머리를 고쳣는지 모른다.


"여기 호텔 뷔페가 맛있기로 유명해요.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호텔 1층에 위치한 뷔페로 나를 이끌었다.

그녀의 옷매무새가 저번과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 만낫을 땐, 검은색 셔츠와 롱 스커트에 커다란 쇼퍼백을 들고있는 수수안 차림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등이 약간 파이고, 치마길이가 무릎 위 정도 되는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저번과는 달리 웨이브처리가 되어 찰랑거리고 있었다.

힘이 꽉 들어간 그녀의 차림새에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식 사를 하는 동안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몰랏다.

아무말이나 내뱉으며 겨우겨우 대화를 이어갔다.

건강은 괜찮은 지, 일은 어떤걸 하는지, 요즘 영화는 뭐가 재미있고, 예능은 어제 무엇을 보앗는지 등등...

하지만 그녀는 내가 하는 이야기엔 항상 밝게 웃어주었다.


그렇게 디저트에 커피까지 해치우며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말씀해주신 대로 여기 정말 맛있네요"

설령 코로 음식을 먹었더라도, 이곳 뷔페는 각종 해산물과 양갈비, 파스타, 스테이크, 심지어 쌀국수에 냉면까지 음식 종류도 많거니와 맛도 좋은걸 알 수 있었다.


"저도 덕분에 맛있게 먹었어요. 그때 구해주시지 않으셧으면 지금처럼 즐거운 식사는 못했을 거에요"


"에이, 말씀도 참. 제가 구한게 아니라 그 TV프로그램이 구한거에요"


이제는 슬슬 헤어질 시간이었다.

하지만 호텔 바깥으로 나서는 그녀의 걸음은 점점 늦어졌다. 


"저기…"

이윽고 그녀가 호텔 문앞에서 멈춰선 채 나를 부른다.


"무슨 일이시죠?"

내가 멈춰선 그녀를 쳐다보자


"저기..그게… 그..다음에…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채 디시 손바닥을 비비고 있다.

누차 생각하던데, 이 의미를 모른다면 고자새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은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다음에, 제가 차라도 한잔 대접하려는데, 어떠세요?"


"좋아요!"

바로 그자리에 즉답이 나온다.

목소리가 컷는지 호텔 프론트맨이 이쪽을 잠시 쳐다본다.


"하하. 다음주 주말에 보는걸로 할까요?"

내가 적당히 얼버부리며 호텔을 나가려 하는데


"아뇨, 더 빨리도 좋아요. 평일 저녁이라도 괜찮아요!"

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말해온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커먼 색의 실 한가닥이 나와서 내 팔을 감싼다. 그녀에게서 나온 두가닥의 검은 실이 나를 묶는다.


분명, 호텔로 드나드는 연인들 중엔 붉은실로 연결된 자들도 보인다. 내가 헛것을 보는게 아니라면 그녀에게서 나온 실 두가닥은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고, 나에게서 나온 붉은 실은 어디론가 멀리 연결되어 있다.


운명이나 인연같은건 하늘이 정해주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사람이 직접 만들어 낼 수도 있는건가 싶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뭔가 로맨틱했다.

더군다나, 오늘 그녀와 시간을 보내며 나 또한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다.

이전에 나에게 호감을 표하던 여자들과는 달랐다.

이정도로 순수한 호의를 내비치는 사람도 처음이였고

하물며 당장 눈에 보이는 완벽한 증거도 있었다.


친구들이 운명이네 어쩌네 이상한 소리 씨부리지 말고, 당장 오는 사랑이라도 꽉 잡으라는 타박이 떠오르기도 햇다.


"그럼, 모레 저녁에 제가 퇴근하면서 연락 드릴게요"

나는 눈에 보이는 새까만 색의 실과, 친구들의 조언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내일도 좋아요!!"

그녀가 다시한번 단호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약간 놀란 내가 벙 찐 표정으로 반걸을 주춤했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다.


"그.. 죄송해요. 갑자기 이러면 불편하실텐데."

걸음을 멈춘채 어쩔줄을 몰라하는 그녀에게


"음.. 내일은 저도 좀 힘들어요. 월요일부터 칼퇴했다간 부장이 절 잡아먹으려 들거에요. 대신, 화요일엔 좀 일찍 나와볼게요"


"그럼…?"


"화요일날 같이 저녁식사 어떠세요?"

이번엔, 다시 한번, 내가 식사를 권유했다.


"네!"

그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이미 호텔 입구에선 좀 멀어졌지만, 목소리가 컷는지

호텔 프런트맨이 다시 이쪽을 쳐다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그녀를 집 주변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의 집도 이전에 쓰러진 버스정류장 주변에 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눳다. 

아까의 사건 덕분일까? 그녀의 긴장하는 모습을 보고나니, 나만 그러는 게 아닌 것 같아 긴장이 좀 수그러들었다. 식사할때보다 좀 더 자연스럽고,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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뱉은 말이 있다.

칼퇴를 하기 위해서 월요일부터 '열나게' 일하고 있다.


어제도 밤늦게 퇴근하면서, 그녀와 카톡을 나누기도 했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지만, 옆구리가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오늘도 점심시간에 잠깐 그녀에게 


[오늘 5시쯤 끝날것 같아요.]

문자를 보냈다.


점심시간에도 샌드위치를 먹으며 손에 든채로 일을 했다.


5시 5분이 되어서야 밀린 일들을 끝낼 수 있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부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부리나케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래, 여자 잘 만나고 오고. "

부장은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 쿠사리를 먹이며 손을 흔든다. 잠깐 잠깐 짬을 내서 주변 찻집이나 맛집을 검색한게 보였나..? 평소와 달리 너무 열심히 일했나?


그런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회사를 나오자 마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 어디세요?"


"여기 있어요"

'빵빵' 


회사 앞 이면도로 한켠에 주차된 티볼리에서 경적이 울린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오더니, 그녀가 얼굴을 내밀고 소리친다.


"타세요~!"

…뭐지? 여긴 어떻게.


나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저번에 이야기할 때 회사 이름 말해주셨잖아요. 검색해보고 왔죠."


"아아… 이거 덕분에 편하게 가겠네요. 감사합니다"

내가 회사 이름도 말했었나? 싶었지만

아무렴 말했으니까 그녀가 이곳을 찾아왔거니 생각했다.


나는 조수석 안전벨트를 채우고 그녀에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


'그' 버스정류장 주변 파스타가게에서 식사를 하고,

바로 옆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조용한 칵테일바로 향했다.


으례 여자를 만나보지 못한 모솔마냥 그녀에게 별별 이야기를 다 떠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웃으면서 나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칵테일바에서 나는 독한 보드카 베이스의 술을,

그녀는 운전 때문에 무알콜 칵테일을 주문했다.


안주로 나오는 나쵸를 나눠먹으며, 오늘 회사에서 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했다.


문득, 그녀가 내 술잔을 쳐다본다.

"그건, 무슨 맛이에요?"


"좀 독하고 써요. 여성분이 드시기엔 별 맛없을거에요"


"하. 저도 술 잘먹거든요?"


"하하.. 아쉽네요. 다음에 차 없이 한번 와서 마시죠"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사뭇 다른 듯 했다.


"...대리라도 부르죠, 코앞인데요 뭘"

그녀는 순식간에 내가 먹던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들이킨다.


"어어어어"

내가 그녀를 제지하기도 전에


"크아. 별거 아니네, 여기 메뉴판 주세요~ 술 한잔 더 시킬게요"

그녀는 잔을 비워 버리고, 바텐더에게 독한 술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

..



당연히 이렇게 될거라 예상했다.

술 잘 마신다는 사람치고…


"거봐요오. 내가 말햇쬬? 나 술 잘 마신다니까아~"

확연히 말투가 느려지고, 혀가 꼬이는 그녀를 데리고 바를 나왔다. 

자동차건 대리기사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텐데에게 내일 아침 일찍 차를 가지러 오겟단 약속을 한 채, 그녀의 집으로 향햇다.


"집이 어디세요?"


"히응.... 집에 안가 안가. 나랑 더 있어요"

확연한 술냄새를 풍기메 그녀가 나에게 앵겨온다.


"어휴. 술을 그러니까 좀만 드셧어야죠"

여기서 우리집은 단 5분이면 도착하지만, 그녀를 이렇게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다음에, 다음에 또 만나면 되니까.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죠"

술주정뱅이를 어르고 달래본다.


"정말.. 정말요?"


"그럼요. 다음에 또 같이 마시죠"


"거짓말. 내가 어떻게 믿어요?"


"진짜라니까요"


"그럼, 집에서 물 한잔만 줘요"


"저희 집이요?"


"여기서 가깝잖아요. 술 취한 사람한테 물 한잔 주는것도 어려워요?"


내가 우리집이 이곳 주변인걸 이야기 했엇나?

더군다나,

나올때만 해도 걸음마저 잘 못걷는 사람이, 우리 집에 가자니까 또 정신이 또렷해진다.


약간 음흉한 상상이 들기도 하지만, 설마 이번에 겨우 두번 만난 사람하고…



오만 생각을 하는데 집 앞에 도착했다. 이제는 현관에 쓰레기는 치웟는지, 설거지는 해놓았는지 마저 고민이 들었다.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물 한잔 드시고 나면 집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네~감사합니다."


그녀는 '찰칵' 현관문을 닫으며 신발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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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모닝. 굿 모닝"

다음 날 아침.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소리에 잠에서 일어났다. 손으로 더듬더듬 거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가늘게 뜬 눈에 보이는 시야엔, 빛나는 핸드폰 화면과 내 손에 감긴 여러가닥의 검은 실들이 보였다.


"이…게 뭐야?"

확연히 늘어난 검은 실들을 보며 몸을 일으키자


"으음.. 더 누워 있어요"

그녀가 날 다시 침대로 잡아당긴다.


척척한 침대, 상하의부터 속옷까지 바닥에 널부러져잇고, 왠지모르게 그녀의 가방속에 삐져나와있는 콘돔박스까지 어잿밤의 일을 증명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살며시 풀며 이야기 했다.

"출근해야죠. 지금 일어나야해요"


"피"


그녀는 토라진 듯한 소리를 내며 그녀는 나를 보내주었다.


욕실에서 살펴보니, 온 몸이 실타래 투성이다.

검은색 실들이 오른쪽 손에 세가닥, 왼쪽 팔에 두가닥, 허리에 하나, 목에 하나,  오른쪽 다리에 하나 감겨있다. 어젯밤에 무려 6가닥이나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건, 내 목부터 가슴 언저리까지 찍혀있는 십수개의 키스마크다.


목욕을 마치고, 그녀가 씻는동안 간단히 방 정리를 한다.

콘돔상자는... 약간 고민을 하다 다시 그녀의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서로, 어제 입었던 옷들을 그대로 입은 채, 출근길에 올랐다. 

버스정류장 까지 가는 동안, 우리 둘은 한동안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머릿속으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데, 막상 그녀에게 건넬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사귀자고 해야하나? 이제와서? 서로 볼짱 다본 사인데?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으니,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우리 이제.."

그녀도 생각하는 바는 비슷한 듯 했다.


"저기.. 그… 이제 우리.. 사귀는…그…"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녀를 보고나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녀의 행동력은 가히 최고였다. 얼굴만 아는 나를 찾기위해, 퇴원하자마자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올 때 까지 기다렸다. 나에게 식사대접이랍시고 한방에 5성호텔 뷔페를 사주었다. 나와 만나기 위해 이름밖에 모르는 회사의 정문까지 차를 이끌고 찾아왔다.


하지만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것은 사뭇 어려워 햇다.

이야기 할땐 언제나 나의 말을 듣고는 웃어줄 뿐이지, 자신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식사 권유도,  다음 만남의 약속을 잡는 것도, 지금처럼 우리사이를 확인하는 것도 그녀에겐 힘든 일 처럼 보였다.


바로 옆의 여성 힘들어 하는데, 남자가 되서 이걸 바라만 본다면 병신새끼가 틀림 없다. 

운명이건 붉은 실이건 뭐건 중요치 않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저와 사귀어 주시겠어요?"

앞뒤 다 자르고 최대한 간결히 말했다.


"네. 네!!"

그녀는 저 멀리 버스정류장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대답해 주었다. 


그녀의 손 끝에서 나온 시꺼먼 실이, 내 왼손 약지를 감쌌다.


—--------

처음 하는 연애는 너무나도 즐거웠다.


퇴근하면 이따금씩 그녀가 차에서 나를 기다려준다.

집이 가깝기 때문에 퇴근길에 들럿다며 능청이다.

항상 같이 저녁을 먹고, 늦은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 주었다. 어떨땐, 그녀의 집이나 내 집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친구들이 자랑하던 관광 명소도, 데이트 코스도 주말마다 돌아다녔다.


그녀와 사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에게서 나오는 검은 실들이 한가닥씩 나를 감쌌다.


지금에 이르러선, 꼰다면 밧줄 하나정도 나올 분량의 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녀와 나를 이루는 인연이 이만큼 강한 것인가 추측할 뿐이다.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아직 내 손에서 나온 붉은 실이 없어지지 않은 채 저 멀리 너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지도 못히는 운명보다, 현실에 충실하는것이 더 좋았다. 지금, 내 옆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집중하는 것이 좀 더 건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리라.


"그래서 그래서"

그녀가 갑자기 나를 보며 무언가 이야기를 한다.


"음? 무슨 말 햇어?"


"당신이 딴생각 하는 것 같아서, 괜히 말해봣어"

그녀는 감 하나만큼은 날카로웠다.


"딴 생각이라니, 자기 생각하고 있었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한쪽 팔로 강하게 안아주었다.


"흠.. 믿어보겠어, 이번주말엔 뭐할까?"


"저번에 가고싶다던 그 음식점, 이번에 가보자"


"그러자, 나도 거기 가보고싶어, 차 끌고가도 돼?"


"안 돼 요. 또 술마실거면서"


"피"


"안되는건 안돼"

솔직히, 닭발에 술을 참으라는건 나에게도 고역이다.


우리는 딱히 음식점 상호를 말하지 않아도, 같은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도 잘 통한다는 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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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맞이한 주말 저녁에, 이야기한 닭발집에서 저녁겸 야식을 먹었다.

서로 닭발에 계란찜에 소주까지 각 한병씩 나눠먹고선, 기분 좋게 밖으로 나섰다.

사랑은 같이 살찌는 거랫나? 그녀와 만나면서 먹는 양도, 술도 많이 늘었다.


"오늘은 당신 집에서 자고 가도 돼?"

그녀가 내 한쪽 팔을 잡은 채, 갑자기 못걷는 척 체중을 실어 기대온다


"그러니까, 내가 술 조금만 마시랫잖아"


"피,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알면서"

괜시리 그녀를 한번 골려보며 집으로 향하는데…


내 손에서 나온 붉은 실이 버스 정류장을 향한다.


"...어?"


이렇게 지낸다면 내 운명의 상대와 만날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내 운명의 상대는 지금 옆에 있는 그녀일 것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버스정류장 반투명 유리 너머로 실루엣만 보이는 여성에게서, 분명히 나와 연결된 붉은 실이 보였다.


"당신 왜 그래?"


"아..아냐."

이렇게 갑작스럽게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머릿 속 한켠에선 저 버스정류장 너머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자 생각했지만,

다른 한켠에선 호기심과 떨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버스정류장 유리 틈 사이로, 운명의 상대를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지자 무언가 느낌이 왔다.

만약, 운명의 상대를 확인한다면, 나는 지금처럼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행복을 위해선 돌리는 고개를 멈춰야 햇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조금만이면, 운명의 상대의 얼굴이 보일 것 같앗…


"당신, 지금 어딜 보는 거에요?"

급작스럽게 돌리던 고개를 검은 실 가닥들이 제지한다.

지금까지 얼기설기 감겨있기만 할 뿐, 어떠한 방해도 되지 않던 검은 실들이 

일순간 온 몸을 옥죄여왔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돌아가던 머리와 몸이, 검은색 실들에 막혀 내 옆의 그녀에게로 되돌린다.


그리고, 그녀가 나의 얼굴을 붙잡는다.


"당신, 지금 날 두고 어딜 보는거냐구요."

나의 시선은 운명의 상대를 쫒지 못한 채, 옆에 위치한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사귀고 난 뒤로 처음. 그녀가 나에게 존대로 질문을 한다.

더욱 더 무서운건, 그녀가 항상 지어주던 미소를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오늘은, 잠시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그녀의 손끝에선

무수히 많믄 검은색 실가닥들이 뿜어져 나온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몸을 칭칭 휘감아왔다.


실들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된 나를, 그녀가 팔짱을 끼고선 그녀의 집으로 이끌었다. 그녀에게 끌려가는 내 손 끝엔, 붉은 실이 한가닥 나와 있었지만, 이내 검은 실들에 휘감기고, 끊어져 버린다


버스정류장에선 멀어진지 한참이다.

내 시야엔, 검은 실들 사이 사이로 비추어지는 그녀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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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생각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정차하는 버스를 무심히 쳐다봣을 뿐이였다.


그렇게 버스 창문에 비친 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하늘에서 번개를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콘센트에 젓가락을 꼽으면 이런 느낌일까?


온 몸이 찌릿거리고, 숨이 가빠져 왓다.

간신히 날숨을 내뱉는데

하필 버스에서 그 남자가 내렸다.

내려오는 그이와 눈이 마주쳣다.


여자는 크게 들숨을 들이쉬고,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여자의 어머니는 여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에, 네 아빠를 맞선으로 만낫거든?.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 '이 사람이랑은 만나지 말아야겠다' 였다? 근데 이게 왠걸. 정신을 차려보니까 결혼식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진하고 잇는데, 그다음엔 네가 태어나 있는거야. 깔깔깔깔"


여자는, 지금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엇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남자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하룻밤을 보내고, 연애를 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이유가...


그래

"이 남자가, 날 두고 딴 여자를 보고 있었어"

자신의 집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남자에게

 괜시리 다시 화딱지가 나기 시작했다.


여자는 많은 사랑과 작은 질투를  담아서 남자를 꽈악, 

안아주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