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쓸쓸히 불어오는 어느 가을날.



모처럼 있던 휴일이었기에 이불 속에 웅크려 SNS를 하던 당신은, 집에 군것질 거리가 떨어진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이 느낌을 잃고 싶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허기진 배도 채울 겸 이것저것 사오기로 해, 당신은 주변 편의점에 가기로 한다.


당신은 외투를 입고 문 밖을 나선다.




집 밖을 나와 편의점으로 가는 길.


대충 귀에 박아넣은 이어폰에선 적당히 노래가 흘러나오고,


바람막이를 뚫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은은하게 풍겨오는 단풍의 풀내음이 당신에게 가을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해준다.


추운 날씨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당신이지만

당신에게 가을은 나름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었기에, 쓸쓸한 공기와 고약한 은행냄새 마저도 마냥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기분좋게 걸어가던 중.


여기저기 흘러보던 당신의 시야에 무언가 번쩍이는 물체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무언갈 잘못 봤다는 듯 흘러넘기려 했던 당신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짝이는 그 물체를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홀린 듯 그것에 다가서게 된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것에 가까워질 만큼 당신의 정신이 몽롱해지고, 




세 발자국, 

네 발자국,


그 빛이 당신의 시야를 완전히 채울 때 쯤.


차가웠던 바람은 온데간데 없이 당신의 곁은 따뜻한 공기가 감싸돌게 된다.





당신은 어느샌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





당신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깨어났다.


깨어남과 동시에 거슬리는 두통이 찾아왔지만, 

그보다 상황판단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당신은 주변을 둘러본다.



넓이가 어느정도 되는지 짐작도 가지않는 깜깜한 방. 


당신의 눈이 서서히 어둠에 적응해 나가, 서서히 방의 실루엣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고, 그 무렵 당신은 당신의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당신의 손엔 검은색 라이터가 쥐어 있었다.


눈은 이미 어둠에 적응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었기에 당신은 라이터의 톱니를 튕겨 불을 밝히기로 한다.



-틱



-틱


 


그러나 한번. 두번. 몇번을 돌려도 라이터의 톱니는 틱틱 거리며 돌아가기만 할 뿐, 정작 나와야 할 불빛은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십 수번을 튕겨봐도 불이 켜지지 않자, 당신은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집어 던져버린다.


달빛 하나 제대로 들지 않는 암전의 공간에서 당신은 홀로 두려움에 떨며 누군가 와주기를 빌었다.


그 때.




[ 어이구야…. ]




인기척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던 방 안에 갑작스런 의문의 목소리가 울렸다.


혹여 잘못들은건가. 

가만히 앉아 생각해봐도 방 안에 울려퍼진 그 생생한 목소리를 잘못들은거라 칭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두려워 경직되어 있던 당신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소리의 근원지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기어가며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을 때.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가 당신의 귀에 속삭이듯 다시 들려왔다.




[ 안녕하십니까. 인사가 늦었군요. ]




예상치 못한 속삭임에 당황한 당신은 곧장 벽에 등을 기대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은 커녕 조그마한 스피커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던 방 안에서 당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매개체는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 많이 당황하셨나봅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급히 사람을 구하고 있어서 말이죠. ]



" 누, 누구...세요…? "



[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아르센입니다. ]




자신을 아르센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당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긴 어딘지.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묻고싶은게 쌓여있는 당신이지만, 

모습도 없이 목소리만 울리는 그에게 막연한 공포를 느껴 입술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게 당신이 벽에 등을 기대어 패닉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아르센의 말은 이어져갔다.




[ 이렇게 불러들인 이유는 운명이 꼬이고 정상적인 흐름에 차질이 생겨… 아, 아닙니다. 말해도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죠. ]




" …어, 아... "



[ 너무 당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적임자로 채택된 것이니, 일이 모두 종결되고나면 그에 맞는 보상을 약속드리지요. ]



" 저… 제가 왜.. 여,여기에… "



[ 이 곳은 제가 임의로 만들어 둔 공간입니다. 적임자분과 만나기 위해 잠시 만든 방이지요. 아, 혹시 너무 어두웠나요? ]



-달칵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불이 훤히 들어왔다.


하얀 벽에 부딪쳐 들어오는 빛이 당신의 눈을 찌르듯 빛내왔고, 눈이 적응할 즈음 저 멀리 던져버린 검은색 라이터와, 보이지 않았던 아르센의 육신이 당신의 시야에 들어왔다.


검은색 정장과 희끗한 백발, 군데군데 주름진 얼굴 하며 190cm는 족히 넘어보이는 그의 체구에,

당신은 그에게 꽤나 큰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당신의 앞에 우뚝이 서, 바닥에 앉아있는 당신을 내려다 보았다.




" 저기, 그 문제...라는게 혹시 뭔가...요…? "



[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만. 먼저 이 책을 읽으시면 이해가 빠르시겠죠. ]




정장 안 쪽을 뒤적거리던 아르센은 이내 곧 당신에게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책자를 건네주었다.



제목은 써있지 않았지만,촉감에서부터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과 표지의 얼룩짐, 

그리 두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길한 기운이 잔뜩 들어있을것만 같은 그 책에,


당신은 약간 손을 떨며 책자의 초장을 천천히 넘겼다.






○●○●○





각기 다른 세계관에서 살아남으십시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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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아 리디아


2. 한예지


3. 백라빈


4. 올리비아 세레빈





- 주의



본서의 내용을 타인에게 발설할 시 불이익이 생길 수 있음을 알리는 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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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리디아
[Lia Lydia, 17XX]




그녀는 왕가의 인물이었습니다.



왕족이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했던 그녀는 교양보단 검술에 재능을 보인다는 말에 제국군에 들어가길 희망하게 됩니다.


공주가 군에 입대하는 것은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지만, 제국엔 수도 없는 왕자와 공주가 있었기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리디아는 왕의 큰반대 없이 군장교로 입대하게 되었죠.



그리하여 장교가 된 리디아는, 제국군의 전열을 가다듬어 타국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강력하게 재정비 하였습니다.


리디아의 제국군이 성문을 향해 돌격할땐, 성주들은 먼저 백기를 들고 성문을 열고있을 정도였죠.


때문에 왕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리디아는, 빠른 진급과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필연적이게도 의회내부에선 그녀의 능력을 부정하는 반대파들이 존재했습니다.


반대파 없는 고위간부가 어디있겠느냐만, 리디아의 경우엔 그 정도가 꽤나 심한 편이었죠



의회의 바람인지, 그녀에 대해 악마와 손을 잡았다느니 마녀가 인간으로 둔갑한거라느니 말도 안되는 소문들이 돌았습니다.



물론 그녀 본인은 흘러들었겠지만 주변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고, 




그 소문이 무성하게 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에선 마녀사냥이 유행하게 됩니다.



*




이미 전부터 마녀라는 소문이 돌았던 리디아는, 당연하게도 마녀사냥이 시작되자마자 잡혀가게 됩니다.


아무리 군의 고위간부니 왕의 핏줄이니 하더라도 종교와 손잡은 의회, 그리고 선동당한 시민들을 막을수는 없었죠.



그렇게 리디아는 고문실에 끌려가 며칠 간 갖은 고문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그녀의 고문은 제국군의 타부대 소속이었던 당신이 맡게 되었죠.





당신은 오래전부터 그녀를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언젠가 우연히 보게 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어질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단 것을 당신도 잘 알고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리디아를 사랑했습니다.


마음을 접기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으니까요.



때문에 주변에서 그녀를 마녀라고 폄하해도 당신은 그녀가 그럴리 없다며 사서 변호했었죠.


그런 그녀를 고문실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피고와 고문집행자의 위치로 말입니다.



아름답던 머릿결은 산발이 되어있었고 정갈하던 옷매무새도 여기저기 찢겨져 있긴 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당신이 기억하던 그녀의 강렬한 눈빛이었기 때문에 당신은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리디아라는 것을 알아채고 말았죠.



처음 얼굴을 마주본 그녀를 보곤, 혼란을 겪으며 어쩔줄 몰라하던 당신은 충동적으로 그녀와 함께 탈출을 감행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뒷 일은 생각하지 않으며.



*




어찌저찌 삼엄한 경비를 뚫고 나와 그녀를 이끌고 깊은 산 속 버려진 가옥에 자리를 잡은 당신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냉정했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납치했다 여기며,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치고는 했었죠.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다른 당신의 따듯한 보듬음에,

그녀는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그녀가 소리칠 때마다 당신은 따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정시켜주었고, 

그녀가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 때마다

당신은 목숨을 걸고 그녀를 품에 안아 진정시켜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전혀 통하지 않을것만 같았던 대화도,

그녀의 심경변화에 따라 천천히 진행되었죠.


리디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열려가는 마음의 문에,

그녀는 당신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였던 왕의 무관심과, 그런 왕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자원입대를 택한 것.

그로인해 따라오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모두 견디어내며 재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더니 찾아온 마녀사냥 등.


그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여러 시련들과 사건들을 모두 당신에게 뱉어내며 울분을 토하였고,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 나올 때마다 당신은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해주며 곁에 머물러주었습니다.



그런 당신의 행동에, 리디아는 처음 느껴본 관심과 공감에 익숙치 않은 듯 어색해하는가 싶으면서도 당신 옆에 꼭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




그 날 이후.

당신을 대하던 그녀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라면 어디가서 무얼하든 상관치 않던 그녀가

당신이 밖을 나설 때마다 어디가냐며 붙잡는다던지,


장작을 패러 나가거나, 식량을 구하러 사냥을 갈 때마다 당신의 뒤꽁무니를 조용히 쫒는다던지 하는

그 전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행동과 서글서글해진 어투로 당신을 대하고는 했죠.



그리고 그런 변화는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더욱 심각해지게 됩니다.



당신과 그녀가 함께 살게 된 지 반 년정도 지났을 무렵.

당신은 여느때와 같이 저녁거리를 구하기 위해 창을 들고 산속 깊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그만,

멧돼지의 습격을 받고 맙니다.



다행히도 당신을 몰래 따라오던 리디아에 의해 거처에서 눈을 뜨긴 했습니다만, 그 시점을 계기로 그녀의 과보호가 시작되었죠.



사냥과 장작은 이제 리디아의 몫이 되었고, 

그녀의 과보호 아래, 당신은 거처 밖으로 발 한 발자국도 디딜 수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나가려고 할 때마다 어디선가 그녀가 나타나 당신을 붙잡으며, 공허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거처로 들어가라 조용히 읊었죠.



더불어, 당신의 외출시도와 비례해 늘어가는 스킨십과 애정표현 그리고 집착심은 날이 갈수록 그 강도와 점도가 짙어져만 갔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하루종일 본인 옆에 붙어있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당신은 리디아 옆에 붙어 옴싹달싹하지 못했죠.

마치 미취학 아동이 매일 안고 자는 애착인형처럼 말입니다.



전처럼 당신을 경계하고 멀리했던 그녀는 이제 없습니다.

그녀는 당신 옆에 붙어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통제하였죠.

때로는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을 정도로요.



물론 당신이 밖을 나가겠단 의지를 보이지 않을 때는, 리디아 또한 당신에게 높은 애정과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녀는 마치 수줍은 소녀와도 같았죠.

당신에게 서툴리 사랑고백을 하기도 하고,

자고있는 당신에게 입맞춤을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자고있는 당신의 몸을 몰래 더듬기도 하면서 그녀 혼자 위로를 하기도 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아, 이건 소녀같지 않나요.



좌우지간.



그녀는 당신이 떠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 하였습니다.

정신적으로 심각히 의존하고 있었죠.


리디아는 당신을 삶의 구원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작은 거처에서 당신에게 안긴 그 순간부터 어쩌면 당신을 유일한 빛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때문에 리디아는 그런 당신에 집착하고, 광애했으며 때로는 그녀를 흠모하던 당신마저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의 사랑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리디아도,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평범한듯 아닌 이런 일상이 평화롭게 이어질 것 같았죠.



적어도 제국에 리디아가 마법을 부려 당신을 납치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기 전까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간 활동하지 못하던 제국의 특수부대 '황금올빼미'는 1년의 기다림 끝에 당신과 리디아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예지
[韓叡智, 20XX]




그녀는 20대 초반의 축구선수입니다.

소속팀이 2부리그를 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에 승선할 만큼 매우 뛰어난 축구선수죠.


SNS 등지에서 훈녀 축구선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며,

실력 또한 어린나이임에도 팀의 주장을 맡을 만큼 소녀가장을 자처하던 선수였습니다.


다만 그녀의 팀은 2부리그에서도 강등권을 헤메는 최약체였죠.



또한 한예지 그녀 자체로도 유리몸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어, 소위 '빅클럽'이라 불리우는 상위리그로의 이적을 단행하지 못했습니다.


무릎부상만 없었더라도 해외진출까지도 노릴 수 있는 상당한 재능에 소유자였음에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한예지에게 무릎부상이란 유일한 단점이자 컴플렉스였죠



*




당신은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촉망받는 유망주였습니다. 

뛰어난 축구지능과 화려한 발기술, 어쩌면 프로선수보다 넓은 시야각 등.

당신의 스카우트 보고서에는 긍정적인 내용으로만 앞뒷면이 채워져있었죠.


그러나 불행하게도 3학년 후반, 옆 고등학교와 진행한 친선경기에서 반월판 파열이라는 축구선수로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맙니다.


스포츠신문에도 다수 실릴 정도로 유망한 선수로 꼽혔던 당신이었지만,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부상을 입자마자 프로의 관심은 불에 지져진 밧줄처럼 뚝 끊기고 말았죠.


당신은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는 절망감도 잠시,  그간 갖고있던 축구선수라는 꿈을 딛은 채 지도자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 지도자 교육을 받다가 군 전역을 하고 나오니 어느새 졸업을 목전에 둔 당신은, 선수생활을 하지 못했던것에 대한 보상심리인 것인지 유소년 팀의 감독이 되기보단 성인팀의 감독을 맡고 싶어하였습니다.


물론 나이도 적고 경험도 없는 당신에게 감독직을 제안 할 성인팀은 전무하였지만, 


단 한 팀.

여성축구리그의 강등권을 전전하던 어떠한 한 팀만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계속된 성적부진과 재정악화, 선수단 안팎의 여러가지 이슈 등. 온갖 악재로 망가질대로 망가져 파산 위기에 직면한 구단이었죠.


하지만 감독 커리어의 첫 스텝을 성인팀 감독으로 끊을 수 있다는 메리트와 포트폴리오에 넣을 수 있는 경력이 절실했던 당신은 구단의 사정을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계약을 맺게됩니다.



그리고 구단의 주장이자 에이스, 한예지를 만나게 되었죠.



*




감독이 되고 난 후 선수들과의 첫 만남.


그 첫 만남부터 한예지는 당신을 환영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전무한 경험, 구단의 어려운 상황, 본인과 비슷한 나이의 감독이라는 점 등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남성 감독이라는 점이 그녀에게 당신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놓았죠.



구단의 전 감독은 한예지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에게 추행과 희롱을 일삼다 어느 선수의 폭로로 경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 감독도.

그 전 전 감독도 모두 비슷했죠.


특히, 주장 한예지는 그 외모와 나이 때문에 전 감독의 가장 많은 눈빛을 받았으며, 


부상당한 상황에서도 병동에 찾아온 그 전 감독의 그윽한 시선을 기억하던 그녀에게는 현재, 남성 감독에 대한 감정이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선수단은 그녀와 같은 생각을 가졌고, 

개중에서도 그녀, 한예지는 당신이 하루빨리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죠.



그런 분위기에, 당신은 부임 후 첫 미팅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에 당황할 뿐,

어떠한 말로도 대처하지 못한 채 훈련장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교수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후로도 선수단은 당신을 냉대하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가령, 당신이 밤새 준비한 트레이닝 플랜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며 주장인 한예지의 훈련플랜을 따른다거나,

때로는 당신의 전술 지시를 무시하며 경기 조직력을 와해시킨다거나,

심한 경우엔 경기 사전 훈련에 무단지각 혹은 불참하는 등.


선수단의 태도에, 당신의 입지는 서서히 좁아져 갔습니다.


더불어 구단주가 팀에 관심이 없는 상황 속,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죠


그저 언젠가는 선수단이 당신의 지시를 듣고 따라주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리그 경기를 하던 중, 태클을 피하던 한예지는 무리한 돌파로 무릎이 뒤틀리는 부상을 입게 됩니다.


검진결과, 전치 5주. 다소 치명적인 부상이었죠.


서술했듯, 유리몸인 그녀였기에 부상 자체에 별 다른 감정은 없었지만,

서술했듯, 부상은 그녀의 컴플렉스였기 때문에 그 전부터 부상 이력이 차트에 쌓일 때 마다 그녀의 멘탈은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죠.



병동에 앉아 무릎에 대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뇌해가며 우울해하고 있었습니다.


공을 다룰 때마다 늘 한 군데씩 어긋나는 상황.

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고, 때문에 자신을 원하는 타 팀의 발걸음도 끊긴 상황에, 과연 이 길을 계속 걸어가는게 맞는걸까. 하면서 말이죠.



그 때, 그녀의 병동에 당신이 찾아가게 됩니다.

그녀의 컴플렉스에 대해서 코치에게 전해들었기 때문에 위로의 말을 전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다, 당신을 마주친 그녀는 당연하게도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고, 곧장 나가달라 말하죠.



하지만, 이미 마음을 다잡고 온 당신은 그녀의 침대에 걸터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고등학교때의 화려했던 기억들과,

그 기억들을 깨뜨려 버린 그 날의 악몽과,

뚝 끊겨버린 프로의 연락들.


그리고 근 몇 주간 상실에 휩싸여 좌절하던 나날들에 시간을 버린 일.

마음을 다잡고 지도자교육을 받게된 일,

그리하여 이 곳에 오기까지의 과정들을.




처음에는 말을 끊고 나가달라 하거나 아예 딴청을 피우던 그녀도 중간이 되어서는 고개를 숙이고는 가만히 앉아 경청하고 있었고,


당신은 여전히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는 나처럼 좌절하지 말고 언제든 다시 일어나 네 꿈을 쫓아라. 내 능력이 되는데까지 너를 돕겠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좋은 몸 상태로 복귀하는 날을 기다리겠다면서요.




당신이 떠난 자리에 그녀는 혼자 남아, 전보다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그녀가 불쾌를 느꼈던 그 장소에서

그녀가 적대시하던 성별을 가진,

그녀가 혐오 했던 그 직책을 가진,


그 사람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감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수 주가 흐르고, 그녀는 다시 훈련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말에 따르기 시작했죠.


물론 여전히 틱틱대는 성격은 변함이 없었지만,

팀의 유일한 리더격이었던 그녀의 태도에,

나머지 선수들도 당신의 지시를 조금씩 조금씩 이행합니다.


당신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패스를 하며, 득점하는.


그렇게 부임 후 처음으로 성공적인 전술 훈련을 마치게 됩니다.



*




당신은 뛰어난 축구지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직책이 바뀌었다고 그 지능이 어디 가진 않았죠.



전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선수들의 항명으로 빛을 보지 못하였지만, 상황이 바뀌었고,

당신은 이윽고 뛰어난 전술로 강등권을 전전하던 팀을 상위권으로 올려놓는데에 성공합니다



늘어가는 승수만큼 선수단의 태도또한 눈에 띄게 유순해졌고, 훈련장에는 전에 있던 싸늘함은 보이지 않았죠.


가장 큰 변화는 한예지에게서 일어났습니다.


병원에서 당신을 쫓아내던 그녀는 온데간데 없이, 이제는 당신 곁에 붙어 떨어질 생각조차 없어보였죠.



그녀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물론 당신의 진지한 태도와 급상승한 성적에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날 병원에서 만난 후, 본디 두달에 한번 씩 크거나 작은 부상들이 찾아왔던 전과 달리,


당신과 함께 있자, 그 부상들이 마치 애초에 없었다는 듯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전술적 변화로 그녀가 무리하게 돌파할 일이 줄어들어 무릎에 과부하가 없어진 것이었지만, 그녀는 당신 곁에 있는 것을 일종의 징크스처럼 여기며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죠.



처음에는 단순 접근이었던 징크스가


한주가 지나고는 손을 잡는다거나.


한달이 지나고는 몰래 숙소 뒤 골목에서 포옹을 한다거나.


지금에 와서는 경기 전 화장실 청소기구함에서 입을 맞춘다거나 하는.


징크스를 가장한 스킨쉽을 행하였습니다.



또, 경기가 끝날 땐 득점을 했다며 당신에게 달려와 쓰다듬어 주라하거나,

같은 날 항상 당신에 집에 찾아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등 

연인같은 행보를 보이며 당신과 접촉을 늘렸죠.



당신과 함께라면, 당신에게 스킨쉽을 가할 때면 

그녀의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비워져있는 무언가가 꽈악 채워지는 기분이었기에,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몰려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었기에,


마치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에 그녀는 당신을 놓지 못하였던겁니다.



*




그녀에게 당신은 마치 부적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어쩌면 징크스는 핑곗거리 뿐이라는걸 그녀도 은연중에 알고있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그런 핑곗거리라도 대지 않는다면 일전에 있던 그녀의 괴롭힘을 이유삼아 당신이 어디 멀리 떠나버릴것만 같았기에 본인까지 속여가며 당신을 붙잡던 것이었죠.



실제로도 당신은 더 높은 수준의 리그에서 오퍼가 온다면 떠날거라는 투의 말들을 지인에게 흘렸는데, 

그런 말들은 흘러 흘러 한예지의 귀에 들어가 그녀의  분리불안을 배로 불리는 증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집착은 더욱 더 심해져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신을 시야에 두고싶어 했으며, 될 수 있다면 그 상황에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신체접촉을 원했죠.


가령, 훈련장은 물론 경기 전 사전스트레칭을 할 때에도 당신과 포옹을 한다거나,


하프타임, 라커룸에서 전술 지시를 할 때 당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경기 재개 전 통로에서 기습 입맞춤을 한다거나,


휴일 날, 당신의 집에 찾아가 육체관계를 시도하는 등.



그녀는 당신을 강하게 원했습니다.





현재로서, 당신을 기피하던 한예지는 이제 없습니다.

당신을 원하고, 의존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한예지만이 남았죠.


아마도, 당신이 떠난다면 그 시궁창같았던 기억이, 악몽과도 같았던 무릎의 저주가 떠올라 더욱 더 붙잡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건, 그녀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죠.


그래도 이런 위태로운 듯 평화로운 나날들이 당분간은 계속 될 듯 보였습니다.




적어도,


당신에게 이적제의가 온 것을

그녀가 먼저 확인하기 전까진 말입니다.










- 백라빈
[百Lavigne, 20XX]




그녀는 캐나다계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입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부모의 사정으로 여덟살때부터 어머니와 단 둘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죠.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 전부터 한글을 배우며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지만, 그녀의 한국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습니다.


이유인 즉슨.

학급의 대부분 인원들이 낯설고 익숙치 않은 그녀의 외모를 약점 삼아 손가락질 하고 따돌렸으며 몇몇 극성인 아이들은 그녀와 닿는것조차 질색하며 피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 마저 늦은 시간까지 직장에 남아 그녀를 돌보아주지 못하였기에, 여덟살이라는 어리디 어린 나이임에도 그녀의 마음 속은 피폐해져 갔죠.





그런 그녀의 앞에 당신이 나타나게 됩니다.


당신은 여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그녀에게 호의적인 말들을 건네며 관심을 내비췄죠.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향해 흡혈귀라고 손가락질 하며 자리를 피하고 떠들어 댈 때, 


당신만은 그녀에게 레몬사탕을 쥐어주며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등 여러 사소한것들을 질문하며 이야기 꽃을 피어내곤 했습니다.



처음엔 당신을 경계하던 그녀도, 시간이 지나자 마음을 열고 당신과 단란히 담소를 나누거나 간식거리를 주고받으며 서서히 웃음을 되찾아나갔죠.


여전히 교내의 따돌림과 가정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라빈은 괜찮았습니다.


당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그녀는 당신에게 의지하며, 

당신은 그런 그녀를 케어하며 성장해갔습니다.



*




시간은 흐르고, 당신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물론, 당신의 옆에는 라빈이 있었죠.


둘은 초,중,고를 붙어다니며 근 10년 간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변모하였습니다.

당신도 그녀도, 이제는 모르던 날들보다 함께한 날들의 개월수가 더 길었을 정도로 말입니다.



또, 그 일련의 시간동안 폐쇄적이던 그녀의 성격은, 당신과 함께 지내며 상당히 부드러워졌습니다.


누군가 말을 건넨다고 경계부터 하던 전과 달리 여유롭게 되받아치는 법을 알게되었으며, 

가령 혹자가 공격적인 어투로 그녀를 대할 때에도 그것을 적당히 흘릴 수 있게 되었죠.


워낙 빼어난 외모를 가진 라빈이었기에 그런 그녀 주위로는 친구들이 몰려, 그녀는 금세 학급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물론, 당신의 케어와 도움이 큰 역할을 하였죠.

그리고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라빈은 당신에게 유별난 감정을 갖고있었습니다.

단순한 친구. 그 보다 더 이상의 연심 말입니다.


때문에 그녀는 잊을 때마다 한번씩 당신에게 은근한 표현을 해보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신은 라빈에게 그다지 특별한 감정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친구일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했죠.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혹여 그녀와 이어졌다가 모종의 이유로 그것이 끊어진다면,

지금까지 유지했던 그녀와의  한순간 무너져 그 전보다도 못한 관계가 될 것이라 당신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신은 가까웠던 그녀와의 사이에 확실한 거리를 두고선 그 중간에 벽을 세웠습니다. 


당신도, 라빈도 함부로 넘어설 수 없을만큼의 높은 벽을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서로가 엇갈린 상황에서 그녀가 당신의 감정을 눈치채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




오랜 기간동안 함께했던 그녀와 당신이었기에,

라빈은 당신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것이라며 굳게 믿어 마지 않았습니다만,


이내, 그것이 틀렸다는것을 깨닫고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당신이 보내던 시선이,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이 연심이 아니었다는걸 그녀는 인정하지 못했죠.



때문에 라빈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입니다.

실의, 절망, 좌절, 배신감 등.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지막 남은 감정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질척한, 마치 파인타르처럼 검고 끈적한 사랑 말입니다.




반면, 그러한 그녀의 상황을 알리가 없었던 당신은, 자신과의 약속대로 그녀와의 거리를 두었습니다.


등하교를 먼저 한다거나, 문자를 확인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사소한것부터, 그녀와의 식사자리를 의도적으로 피한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러한 행동을 할 때마다,


그녀는 먼저 당신의 집 앞에 찾아왔고, 

항상 정문에서 당신을 기다렸으며, 

전화를 받지 않을 때엔 친구의 폰을 빌려 전화하였죠.



한번은 그런적도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런 그녀에게 지쳐 무음모드로 바꿔놓은 후, 학교 후편 분리수거장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그녀가 찾아와 당신에게 안기고는, 본래의 푸른 눈동자가 아닌 칠흑빛의 검은 눈동자로 '그만 도망가'라며 경고아닌 경고를 했었던것이죠.



그 사건을 계기로 일전의 행동들은 거진 중단하였지만, 

여전히 벽은 굳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




라빈은 당신과 더 이상 다가갈 틈이 없을 정도로 친했지만, 서술했듯, 그녀는 단순히 친하다는 개념에서 만족하지 못하였고 당신이 그녀를 이성으로 바라봐주길 원하였죠.


하지만 라빈은 그리 할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이성으로 생각하는 상대도, 이성으로 바라봐주길 원하는 상대도 당신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녀에게 반해, 혹은 흑심을 품고 다가가는 남성은 많았습니다만, 그녀는 그러한 남성들에게 전혀 관심을 느끼지 못하였고,


그들이 라빈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면, 그녀는 당신 생각에 그 고백들을 받아줄 추호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성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옳지 못한 선택을 하고야 말았죠.


라빈은 익숙한 듯 자신의 집이 아닌 어딘가의 잠금을 해제하였습니다.





당신은 귀가 후,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매일 오던 문자가 멈추고, 항상 정문 앞에서 당신을 기다리던 그녀가 연락도 없이 먼저 가버린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며 말이죠.


다만 그것에 깊게 생각하지 않는 당신이었습니다.

그저, 드디어 그녀가 지쳤구나 하며 내심 다행이라는 말을 뱉었죠.



허나, 얼마지나지 않아 당신은 왜인지 모를 수마에 빠집니다.

늘 갖던 수면시간은 아직 두세 시간이나 남아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흐려지는 시야와 멍해지는 정신 속, 침대 밑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는 당신의 머릿 속에 마지막으로 저장되었죠.




방법이 잘못되었다는것은 라빈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라도 이음점을 만들지 않는다면 당신이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았기 때문이죠.


당신의 옆자리에 본인이 아닌 다른 여성이 앉아있는 장면을, 라빈은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행동합니다. 

고이 잠든 당신에게 가녀리지만 목적을 가진 손을 뻗으며


당신의 허물을 하나, 둘 벗겨내죠.


그리고 그것이 하나만 남았음에도, 그녀의 손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 손은 당신이 세워 두었던 견고하면서도 높은 벽을 부숴버렸죠.

 


*




사건이 일어나고 몇 주가 지났음에도, 라빈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중독적인 행동에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하는것이 옳겠죠.


이제는 레몬사탕에 울음을 그치던 소녀는 사라졌습니다.

본래 자기 것을 갖는 것이라며 합리화하고, 쾌락을 좇는 여성이 남아있을 뿐이죠.


그녀에게 더 이상 참을성은 찾아볼 수 없게되었고, 

밤이 되면 당신의 위에 올라타 낮에 받지 못했던 사랑을 듬뿍 받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기에 한동안은 탈 많고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는 듯 했습니다.



약에 내성이 생겨버린 당신과 그녀의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요.










올리비아 세레빈
[Olibia Celevin, 20XX]




21세기 최고의 팝스타.

더 퀸 싱어송라이터.

아티스트 오브 아티스트.


모두 올리비아 세레빈 그녀를 지칭하는 수식어입니다.



언젠가 혜성처럼 등장해 각 음반사의 신인상을 휩쓸고는,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죠.


그녀의 천재적인 작곡능력과 무대에서의 스타성은 안티팬들마저 미치게 만들었고, 발매하는 앨범마다 차트를 도배해 세계 어디를 가던 그녀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다만, 누구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이면이란 존재했죠.



어린나이에서부터 많은 주목과 큰 관심을 받게 된 그녀는 그 관심과 비례해 늘어나는 욕과 악플에 심한 내상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외향적이기만 하던 그녀의 성격은, 떨어지는 먹에 젖어드는 도화지처럼 천천히 어두워져갔고,


결국에는 대인기피증과 공황장애, 편집증이 생기며 그 정점을 찍게 되죠.



*




당신은 그런 그녀의 팬이자, 무명 가수였습니다.


비록 기타 하나를 들고 선술집을 전전하며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였지만, 언젠가 종합운동장의 공연장에서 노래할 자신을 상상하며 희망을 놓지않았죠.



낭만이라고 할까요.

비록 배는 고파도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게 즐거웠고, 그 낙은 당장의 굶주림 마저 잊게 해주었습니다.



가끔은 아무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아 하루를 쫄딱 굶는 날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연주와 노랫말에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이들을 생각하며, 

앞으로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즐거워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타줄을 튕겼죠.



그저 당신은, 그 사람들이 당시 즐겁던 순간을 회상할 때, 자신의 음악을 흥얼거릴 것이라며 행복해 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자신도 슈퍼볼의 하프타임 쇼를 할 것이라며 터무니 없는 망상을 하기도 했죠.



그렇게 당신이 잡념에 빠져 행복하다는 듯 웃어보일 때, 통화가 걸려왔습니다. 


발신자는 친한 위스키 바의 사장님이었습니다.



*




그 날도 올리비아는 하루분량의 앨범작업을 갈무리한 후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숙소는 명성만큼이나 넓고 현란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것에 여유를 느끼지 못하였죠.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열 평 남짓한 침실에서만 활동하였는데,


편집증 탓에 넓은 공간에서는 심한 불안감에 떨어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가령. 화장실에 가는 길이 무서워 소변을 몇시간 며칠이고 참는다거나,

근 몇달동안 낮에도 암막커튼을 쳐놓아 햇빛을 차단 시킨 뒤 모니터 불빛으로만 생활한다거나,

늘 다음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술을 마셔야 겨우 숙면을 취한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생활을 반복하였죠.



소속 레이블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있었기에 전담 심리치료사를 붙혀 케어도 해보았지만, 이젠 약도 잘 들지 않는 그녀에게 이러한 수고는 그저 번거로울 뿐이었습니다.



올리비아의 개인사정을 들어 콘서트 투어는 여러번 취소되었으나, 앨범 출판이 얼마 남지 않은 현 상황에, 더 이상은 무를 곳이 없어보였죠.



때문에 올리비아의 공황은 더욱 심해졌고, 그녀는 손을 떨며 알코올을 찾기에 이릅니다만.


숙소에는 술이 전부 떨어진 상태였고, 겨우 마켓까지 발걸음을 옮기려 해도 이미 늦은 시각에 문을 연 가게는 술집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고는 어느 위스키 바에서 흘러나오는 통기타소리에 마치 홀린 듯 들어가버렸죠.






그녀가 처음 들어가서 본 광경은, 약간은 시끌벅적한 바의 단상 위에서 홀로 기타를 치던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코드를 잡는데 바빠 앞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점은 마이너스 요소였지만, 단순 곡 자체로서는 그녀가 듣기에도 썩 괜찮은 음악이었죠.



문 앞에서 덩그러니.


자리에 앉지도, 주문을 하지도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아 당신의 음악을 감상하던 그녀는,


어느새부턴가 본인의 손이 떨리지 않고있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뿐만 아니라 바텐더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안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과 섞여있는데도 발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되죠.



때문에 올리비아는 술 한모금 마시지 않고 당신의 음악에 취한 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섭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당신의 음악을 감상했죠.



주문 안할거면 나가라는 바텐더의 말에도 대충 100달러짜리 몇장을 쥐어주며 당신만을 바라봤습니다.



그렇게 눈을 감고는 천천히.

흘러나오는 음표들을 귀에서 귀로.

그러고는 당신의 목소리를 머릿속 가장 깊은 곳으로 보관했습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평범한 순간에,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눈을 감고는 당신의 음악을 감상했죠.




한동안 눈을 감고 편히 서서 평범함을 만끽하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보니 당신이 단상에 내려왔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순간, 그녀의 손이 감전된 듯 다시 떨려오고 

잠시 사라졌던 공황이 몰려왔죠.


모두 자신을 쳐다보는것만 같은 역겨운 느낌에.

눈을 질끈 감으며 밖으로 뛰어나갈 참이었습니다.



그 때, 당신이 올리비아를 붙잡습니다.


통기타와 매직을 들고 말입니다.


당신은 올리비아에게 팬이라 말하며 들뜬 상태로 기타와 매직을 건네죠.



그것을 건네받은 그녀는 멈춘듯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당신에게 함께 일하자 말합니다.



*




21세기 최고의 팝스타라는 칭호는 결과적으로 올리비아를 망가뜨리고 말았지만, 그녀는 희망을 찾았습니다.


어떠한 치료로도, 갖가지의 약으로도 진정이 되지 않았던 공황이, 당신을 만난 뒤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해결되었던거죠.


그 날, 올리비아는 당신의 음악이 아닌 당신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것을 깨닫고는, 당신을 붙잡기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이 설령 그녀 본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한편 당신은 그 날 이후로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그녀의 숙소에서 지내게 됐습니다.


처음 제의를 받고선 성공이라는 꿈에 가까워졌다며 기뻐하던 당신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한 이후 행보는 음악활동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죠.


레이블이 아닌 숙소로 이끌려 간 처음부터,

그 숙소에서 마음대로 나오지 못하는 현재까지



동경하던 탑스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의 관심을 오롯이 받는다는것이 기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을 대하던 그녀의 태도는 그저 관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당신을 마치 갓 태어난 아이처럼 과보호하였으며,

이제 막 입학한 초등학생의 애착인형처럼 끌어안기를 반복하였고,

필로폰을 찾다 금단현상이 와버린 중독자처럼 당신을 찾았죠.



때문에 그러한 그녀의 대한 팬심은 시간이 흐르며 식어갔습니다만, 이제와서 그녀를 내팽개치고 떠날수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첫 날 작성한 계약서에 있었죠.



그 날, 들 뜬 마음으로 계약서를 받은 당신은,


애석하게도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 계약 내용을 읽지 않은 채 그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어마어마한 액수와 10년이라는 계약 기간만을 보고 서명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추후 다시 확인한 계약내용에는 당연히도 당신을 구속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당신이 따르지 않을때면 그녀가 계약서와 위약금을 내걸며 붙잡았기에 당신은 무력히 그녀 옆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죠.



*




위스키 바에서 당신과 우연히 만나 계약까지 마친 그 날, 올리비아에게 공황은 씻은듯이 사라졌습니다.

감옥과도 같았던 침실에서 벗어나 거실로, 거리로 나갈 수 있게 되었죠.


물론 당신과 동행한다는 가정 하에서 말입니다.



그 전부터, 그녀에게는 마음 속, 필연적으로 당신에 대한 연심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연심에서 애착으로, 사랑으로, 집착으로 번져갔죠.



다만, 그녀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그녀를 괴리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대로 당신은 그녀 옆을 지키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투가, 눈빛이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설레여하는 창작가의 그것이 아닌,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사회인의 우중충한 감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괴리는 그녀를 너무나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당신의 마음을 돌리려 갖은 노력을 하였지만,


당신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죠.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올리비아 세레빈의 손은 시나브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




올리비아는 이제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자산과 명성을 버릴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신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날을 바라왔죠.



허나 그녀는 그것만은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혹여, 당신의 음악이 유명해진다면,

위약금을 지불할 능력이 생겨버린다면,

또 다시 그 암전의 고통에 빠져버릴 것이라며 말입니다.



하여, 올리비아는 행동합니다.

계약서 따위가 아닌, 정말 당신을 구속버릴 수 있는

'기정사실'을 만들기 위해 주사기를 들고.














.

.

.












손을 떨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당신에게, 아르센은 말을 걸어왔다.



[아, 재미있게 읽으셨습니까. 어떠셨는지요?]



" 제..제가 어떻게 하면 "



[별건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으시면 됩니다.]



말을 끝낸 아르센은, 바닥에 던져진 라이터를 집어들고선, 부싯돌을 튕겼다.

이내 당신의 정신은 다시금 암전에 빠지며,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줄도 모른채 쓰러진다.










깨어난 당신은, 넓고 푸른 하늘을 보게된다.


제국의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