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


러시아 제국 시절 손초프카(현 우크라이나 드네프르)에서 태어나 러시아 격동의 시기였던 소련 시절 굉장히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음악 시도로 

천재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천재가 두각을 제대로 나타내기 직전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 정책에 의해 실험적인 작품을 쓰면 정부로부터 악평과 욕을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고 이전보다는 유한 방식으로 곡을 써냈지만

그마저도 형식주의적이라며 소련 공산당에게 까이는 신세가 되자 결국 "우리 시대의 노래", "건배" 등등 스탈린 애1널을 낼름낼름 핥는 작품을 써내려가다 독소전쟁의 풍파를 맞게 된다


이 시기 작곡된 제일 유명한 곡이 "피터와 늑대"

오보에와 클라리넷 등 악기 개별의 음악적 특징을 동물로 비유하는 재미있는 작품이며

작품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 입문 곡으로도 많이 추천된다



아무튼 독소전쟁 때문에 소련 동부로 피신했던 그는 영화 감독 예이젠시테인과의 교류, 교향곡 5번의 성공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는듯 했지만

낙상 사고를 겪고 뇌에 이상이 생겨 건강이 악화되고, 교향곡 6번이 당국으로부터 혹평을 받으면서 결국 경제 조건도 악화되고

끝내는 그의 뒤를 케어해주던 예이젠시테인마저 1948년 사망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5년 뒤 드라이빙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뇌출혈로 사망한다



그런데 같은 날 거의 동일한 시각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소식은 완벽하게 묻히게 된다

한때 천재라는 명성을 들었던 천재 음악가의 장례식마저 떡실신한 스탈린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었다

프로코피예프의 관은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한 인파를 뚫느라 길을 한참 돌아가야 했고

그나마도 조화마저 스탈린의 그것에 전부 사용되느라 제대로 된 꽃마저 놓지 못한 프로코피예프는 장례식조차 조촐하게 치뤄야 했다



훗날 그가 태어난 지역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국제공항을 짓게 된다

바로 "도네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 Міжнародний аеропорт «Донецьк» імені Сергія Прокоф'єва )" 이 그것이다






잠깐......"도네츠크".....?





그렇다....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곳이 맞다....

이 아름다운 음악가의 이름은 죽음 이후에도 볕을 보지 못해버린 것이다...



오늘만큼은 이 불쌍한 음악가의 작품을 한번씩 들어주며 그의 썩어버린 인생에 조의를 표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