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학교 가기 싫다.


물론 학생 중에서 학교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대체 졸업은 언제 하는 거야.”


드르륵―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곧 수업이 시작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래, 매일 이런 느낌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는 일상. 지루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평생 이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내 소박한 소망은 스마트폰 

알림음에 의해 부서졌다.


띠링―


「점심시간 되자마자 해당 위치로.」


또, 매일 그렇듯 이 문자가 왔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아니 명령이다.


나는 명령대로,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는 여느 때처럼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꼬붕 왔어? 내가 벨 울리자마자

튀어오라고 했지? 또 늦었네, 응?”


자칭 나의 주인님, 이다혜.

훤칠한 키에 육감적인 몸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얼굴을 가진 여자아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 같은 놈이 말을

섞을 기회조차 없을, 카스트의 최상위권에

앉아있는 지배자.


그리고 지난 10년 가까이 날 괴롭혔던

나의 천적이다.


“우, 울리자마자 온 거 맞아.”


“씁, 토 달지 말고 이리 와서 앉기나 해.”


나는 그녀에게 거역할 수 없다.

만약 심기를 거슬렀다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보복이 따라올 게 뻔했다.


내가 쭈뼛거리며 옆에 앉아, 다혜는

자연스럽게 내 다리 위에 다리를 올린 뒤

눕듯이 길게 앉았다. 


“아, 편하다. 역시 쿠션이 있어야지.”


“…….”


“그나저나 수업 더럽게 지루한데, 너

뭐 재미있는 거 몰라? 이대로 가면 나

지루해서 죽을 것 같은데~”


“미, 미안.”


“쳇, 네가 제일 재미없어.”


그렇게 말한 뒤, 다혜가 스마트폰을 꺼내

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빵을 꺼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빨리 졸업하고 싶다, 그럼 여행이나 가고

온종일 집에서 놀 수 있을 텐데.”


“일은……?”


“일은 노동 계층이나 하는 거지. 아, 넌

열심히 일해야 하지? 미안해서 어쩌나~”


전혀 미안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엑, 또 왔다. 이 새끼는 왜 자꾸 나한테

문자질이지?”


“누군데?”


“3학년에 그……뭐더라? 아무튼 축구하는

놈. 얼마 전에 나랑 말 한번 섞었다고 

자꾸 껄떡거리네. 머리에 뇌수 대신 좆물이 

흐르나.”


누군지는 몰라도 이 녀석한테 그러다니.


아니, 다혜의 외모와 세간의 평가를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본성을 알게 되면 모두가 기겁하고 도망칠

게 분명했다.


“으, 징그러워. 난 연하 취향이라고.”


“그, 그렇구나.”


“아 짜증나 진짜. 안 되겠다, 너라도 좀

괴롭히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겠어.”


가만히 있는 나는 왜?!

진짜 싫다, 그냥 집에나 가고 싶다. 


“어쭈, 표정 안 풀어? 주인님이 괴롭혀준다

그러면 손뼉 치며 기뻐해야지. 으음, 그래.

이 아름다운 다리를 한 번 평가해봐.”


다혜가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갑자기?”


“빨리해, 근데 대충 하면……알지?”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다혜의 명령이다,

거스르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음……먼저 군살도 없고 의외로 근육이

탄탄하네. 피부는 하얗고 잡티도 없어.”


“후, 당연하지. 난 자기관리 하나는 정말

철저하게 하거든. 그래서? 빨고 싶어?”


무……! 내가 당황한 순간, 다혜가 깔깔

웃으며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변태 새끼, 지금 상상했지?”


“아, 아니야! 안 했어!”


“아~ 무서워라, 고작 다리 하나 가지고

흥분한 거야? 가슴이라도 보여주면 진짜

덮치는 거 아냐?”


네가 하라며! 그러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꾸해봤자 놀림만 더 당할 뿐.

내가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다.


생각해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이다혜라는 여자는

내 인생에 멋대로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당시의 나는 이 무시무시한 여자의 본성을

전혀 알지 못했고― 떠올리는 것조차 싫은

일이지만, 한때나마 다혜를 짝사랑하여

고백까지 해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백을 빌미로, 다혜는 나를

장난감 삼아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았다.


‘근데 내가 뭘 할 수도 없고.’


이다혜와 나의 수준 차이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본래, 난 이 녀석하고 어울리기

힘든 부류였다.


이다혜라는 여자의 ‘겉’은, 어지간한 여자를

오징어 미만으로 보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를 지녔으며, 성적도 우수하고

어른들과 주변 애들에게 받는 평가 또한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심지어 집안도 꽤 좋다. 

아버지가 어디 교육감이라고 했던가?


그런 다혜를 종종 질투하는 여자애들이 

나오곤 했지만, 그녀는 일단 성격조차 좋은

편이라고 알려졌다.


즉, 자길 적대하는 애들조차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아예 매장해버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이다혜라는 여자에게 함부로 덤빈

바보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했다.


“그보다 다, 다혜야. 너 생일이라고 했지?”


“오, 기억해주고 있었네? 맞아, 나흘 뒤에.”


다혜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팬티가 보일 것 같았지만, 괜히 눈길을

줬다가 피를 보고 싶진 않았다.


“호텔 빌려서 파티할 거다~ 부럽지? 그치?

내 친구들이랑 부모님 친구분들도 오기로

했어. 진짜 엄청 크게 할 거야, 으흐흐.”


그렇겠지, 사실 난 별 관심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설마 내가 거기

강제로 참석하게 될까 뿐이었다.


“나는…….”


“너? 네가 거길 왜 와? 넌 오지 마, 이상.”


만세! 다행이다, 아는 사람도 없는 파티에

강제로 끌려가는 건 진짜 싫다고.


“그, 그럼 재미있게 놀아.”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거든~ 아,

슬슬 밥 먹일 시간이네.”


그리 말한 다혜가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빵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내 엉덩이로 깔아뭉갠 빵이야, 감사한

마음으로 먹도록.”


“……으응.”


난 그런 취향 아닌데.

그러나 결국, 난 그 빵을 먹고 말았다.






그야말로 최고의 일요일이었다.

이다혜가 문자를 보내지 않는 주말이라니.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게임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최고의 인생이다, 정말 이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그리하여 최고의 주말을 보내고 오후 6시가

됐을 무렵,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준비해서 7시까지 역 앞에 나올 것.」


뭐……? 왜?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역 앞이라면 시내를 말하는 건데, 도대체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하지만 몸은 솔직했다. 나는 다혜에게 욕을

듣지 않을 정도로만 옷을 갖춰 입은 뒤

서둘러서 역 앞으로 향했다.


“늦었어.”


“아, 아직 6시 30분…….”


“어쨌거나 내가 더 빨리 왔으니까 늦은 거

맞잖아. 요즘 빠졌어? 응?”


다혜는 평소와 달리 사복을 입고 있었다.

짝 달라붙는 하얀 셔츠에 청바지. 평범한

의상이지만, 입는 사람이 다혜였기에 꽤

맵시가 살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리고 넌 옷이 이게 뭐야? 아, 안 돼.

이런 구린 패션을 본 내 눈한테 사과해.”


“이게 그나마 최선을 다한 거야…….”


“이게?! 와씨, 너희 부모님은 옷도 제대로

안 사주셔? 안 되겠다, 너 다음에 내가 옷

하나 사놓을 테니까 그것만 입고 다녀.

너 좋으라고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네

그 꼬라지를 보고 다니기 힘들어서 그래.”


아무렴 그렇겠지, 그런데 그냥 안 사줘도 

되니까 나랑 안 보고 살면 안 되겠니?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래서 난 왜 부른 거야?”


“일단 따라와, 그리고 거기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눈치껏 행동해.”


대체 무슨 짓을 시키려고……?

나는 성큼성큼 어딘가로 향하는 다혜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목적지에 다다랐다.


“어, 여긴…….”


“두 사람 예약한 거요, 네, 이다혜.”


딱 봐도 무서울 정도로 비싸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평소 내가 받는 용돈으로는 절대

꿈도 못 꿀, 그런 파인 다이닝이었다.


이름도 봐라, 뭐라고 읽는지도 모를 프랑스

말이다. 이거 진짜 뭐라고 읽는 거지?


“그만 두리번거리고 앉아.”


“넵.”


그나저나 나 이런 곳에서 밥 먹을 돈은

안 가지고 나왔는데. 


나는 메뉴판을 펼쳤다가, 곧바로 덮었다.

0이 하나가 더 많다. 뭔데 단위가 다르지?

왜 음식값이 십만 원을 넘는 거냐……?


“저녁 정식이면 되겠지? 내가 사는 거니까

넌 그냥 입 다물고 먹기나 해.”


“어, 그, 갑자기 왜? 오늘 네 생일…….”


“다물고 먹으라고.”


“넵.”


대체 다혜가 왜……? 또 이걸 빌미로 무슨

짓을 시킬 셈이지? 좋은 식당에 와서 기쁜

마음이 들기는커녕, 불안감 때문에 배가 다

아플 지경이다.


‘무슨 가게가 이렇게 화려한 거지?’


천장에는 전구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고,

일렬로 늘어놓은 테이블에는 커플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주방은 가게 중앙에 있었는데, 요리사들이

화려한 불꽃 쇼를 펼치며 바쁘게 요리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리고 바깥. 저녁 시간대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몇몇 사람들이 가게

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잠시 뒤 나온 식사는 한술 더 떴다.

난 이름도 모를 묘한 음식들이 나왔는데,

대부분 양이 엄청나게 적었다. 그리고

접시에 뭔 장식을 요란하게 해놨다.


“오, 여기 평이 좋던데 진짜 괜찮은 곳

같네. 나중에 친구랑 와야지~”


다혜가 찰칵찰칵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야, 네 얼굴 나오잖아. 얼굴 가려.”


“나는 무슨 죄야……?”


“비싼 밥 먹여주니까 조용히 해.”


아하, 난 이제야 내가 여기 불려 온 이유를

눈치챘다.


보통 이런 가게에선 일인 식사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다혜는 여기 오고 싶어했고,

아마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날 여기로

데려온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뭐 비싼 밥 얻어먹으니

나야 좋긴 한데…….’


뭐 사실 다혜랑 먹을 바엔 그냥 안 먹고

집에서 라면이나 먹는 게 낫지만.

……이런 말, 얘 앞에서 했다간 진짜 얻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뭐해? 빨리 먹어, 다 식겠다. 넌 어떻게

비싼 밥을 사줘도 먹질 못해?”


“……잘 먹겠습니다.”


먹으라니 먹어야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음식은 진짜 혀가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소고기가 이렇게까지 부드럽고 풍미 깊은

음식인 줄은 몰랐다. 씹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음~ 와, 여기 진짜 괜찮다. 나중에 남친

생기면 꼭 데려와야지.”


“그래……얼른 생기면 좋겠네, 다혜야.”


그래야 네가 날 덜 괴롭히지.

제발 빨리 아무나 얘 좀 데려가주십쇼.


“아, 왜 내 주위에는 괜찮은 남자가 없나

몰라. 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으음.

뭐 딱 한 명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 있긴

하지만…….”


“친구들한테 소개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됐네, 이 사람아.”


또 왜 화내는 거야, 알다가도 모르겠네.

아니, 그냥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식사 중간 중간 다혜의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아, 잘 먹었다. 그럼 이제 내놔.”


“뭐? 바, 밥은 네가 산다며?”


“그거 말고! 내 생일 선물 말이야!”


아.

그거, 당연히 준비 안 했는데.


“설마 준비 안 했어?”


“…….”


야단났다, 설마 생일 파티에 부르지도 않은

나한테 선물을 내놓으라고 할 줄이야.


“지, 지금이라도 뭔가…….”


“됐어. 와, 내가 이렇게 배신을 당하네.

먹이고 키워줬더니 선물도 안 준비해오고.

누가 명품백이라도 기대한 줄 알아? 참나.

최소한의 성의도 안 보이고…….”


좆됐다, 어떻게든 풀어줘야 한다.

이걸 내버려뒀다간 앞으로 몇 달은 이걸로

두고두고 우려 먹힐 게 뻔하다!


“미안해!!”


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대, 대신 뭐든지 할 테니까! 응?!”


“오호……뭐든지? 너 지금 분명히 뭐든

하겠다고 말한 거지?”


아뿔싸, 아무리 그래도 뭐든지 하겠다고

한 건 너무 나갔나?


“좋아, 따라와. 사내가 내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지?”


또 무슨 짓을 시키려고……나는 두려움에

떨며 다혜를 따라갔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


“뭐해? 빨리 들어와, 슬슬 추워.”


모텔……? 왜? 왜 모텔이지?

내가 아는 모텔이 맞나? 보통 연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오는 거기?


“오, 침대 나이스~ 근데 우리 집 침대보단

별로다.”


다혜가 침대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


“그럼 일단 벗어.”


“네?”


“벗으라고, 팬티까지 싹 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아, 아니 그건 좀!”


“뭐든지 하겠다며? 나한테 거짓말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미치겠네, 신이시여.

또 이걸로 얼마나 놀릴지 벌써 두렵다.


“아, 양말은 벗지 마. 그게 더 꼴……아니,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결국 난 다혜의 명령대로, 양말만 빼고

전부 벗었다. 팬티까지 싹 다.


“흠……나쁘진 않네……근데 너무 물살

아니야? 너 운동 좀 해라.”


“…….”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밖에 뛰쳐나가 도망치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지막

존엄성인 그곳을 손으로 가리는 것뿐이다.


“벌써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다혜가 그리 말하며 펜을 꺼내 들었다.


“아참, 이거 수성펜이니까 걱정하진 마.”


그리고 내게 다가와, 몸이 온갖 낙서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수치스럽고 음탕한 내용이었다.


노예남이라던가, 정액 탱크라던가…….

사회에서 대놓고 썼다간 그 자리에서 변태

취급당하고 매장당할 말들이었다.


“후, 다 썼다. 이건 벌이니까 내일까지

지우지 마. 누구한테 들키지도 말고.”


“우…….”


“아~ 진짜 변태 같네. 솔직히 말해봐, 지금

썩 나쁘진 않지? 발기할 것 같아? 응?”


다혜가 사악하게 웃으며 발가락으로 나를

툭툭 쳤다.


“변태 새끼, 진짜 너 같은 변태랑 어울려

주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걸? 나한테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에 질렸을 뿐이다.


“왜 이리 죽상이야? 어, 잠깐…….”


아, 이런 젠장.

실수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이 녀석 앞에선 울면 안 되는데.


“아이 씨……왜 울고 그래? 장난 좀 친 거

가지고……괜히 미안하게.”


“난 갈 거야.”


더는 이런 꼴 못 보고 산다.

이 녀석하고 같이 있다간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버리거나 자살할 것만 같다.


나는 옷을 다 입은 후, 날 멈춰 세우는

다혜를 무시하고 곧장 집으로 갔다.


‘전학 갈 거야.’


식칼을 들고 엄마를 협박해서라도, 더는

이딴 식으로 살 순 없다. 어디 멀리 통학을

하는 한이 있어도 전학을 가고야 말겠다.


설령 다혜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처음엔 순수한 장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뭣도 모르고 내게 고백한 남자아이.

얼마나 놀리고 괴롭히기 좋은 먹잇감인가.


아마 분풀이였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내게 너무 많은 걸

바랐고, 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일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그 또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의 표현

이라지만, 내겐 그저 무거울 뿐이었다.


‘아무한테도 보여줄 수 없었어.’


‘이다혜’는 똑똑하고 착실한 딸.

‘이다혜’는 친절하고 재미있는 친구.


진짜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나는 네 앞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처음엔 순수한 친밀감, 편안함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어느새 자각할 수밖에

없는 애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너는 그다지 특출난 게 없는 남자아이.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나는 네

앞에선 나로 있을 수 있었다.


진짜 나는 짓궂고 장난치길 좋아하며, 종종

잔인해지고, 질투가 심하고, 욕심쟁이여서.

그런 주제에 솔직하지는 못해서.


“미안.”


뭐라고 사과해야 할까.

선을 넘었다, 이번엔 분명 내 잘못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망상만 하던 짓을 저질러

버렸다. 변명의 여지 없이 내 잘못이다.


“이다혜 미친년아, 뭔 짓을 한 거야……!”


나는 애꿎은 베개를 뻥뻥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했다, 홀딱 벗기고

몸에 낙서를 해? 이 정도면 어디 뉴스에

나와도 할 말이 없다. 장난이라고 넘어가긴

좀 심한 짓이긴 했다.


“……나……진짜 싫겠지…….”


좋아하는데, 진짜진짜 좋아하는데.

그냥 좋아하면 솔직하게 잘 대해주면 되는

문제인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 녀석 앞에만 가면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가학심이, 내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비겁한

마음이 날뛰고 만다.


‘하긴, 고백을 그렇게 거절한 주제에.’


이제 와서 네가 좋다고 말하면 잘도 믿겠다.

또 무슨 장난을 치는 거냐고 하겠지, 분명.


“…….”


이건 내 버릇이었다.

울적하고 기분이 나빠지면, 스마트폰의

갤러리로 들어가 사진과 동영상을 본다.


내가 몰래 찍은 그 녀석의 사진.

그 녀석의 영상, 그 아이의 표정과 목소리.


‘나중에 혹시 사귀게 되면.’


그땐 둘이 찍은 사진과 영상으로 여길 꽉

채울 것이다. 너를 나로만 채우고 싶어서,

나만 보게 하고 싶어서, 종종 더없이 참을

수 없는 탐욕이 불타오른다.


“……사과……해야겠지.”


내일, 제대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앞으론 절대 괴롭히지

않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할 거다.


그리고 언젠가 상처가 아물면.


“좋아해.”


아니, 사랑해.


“진짜진짜……사랑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아니, 다시 시작할 거야.


처음부터, 다시.






“뭐?”


“나……전학 갈 거야.”


뭔가가 잘못됐다. 그것도 아주 크게.

왜 오늘 하루 종일 내가 문자로 불러도

대답도 안 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못 들었어? 나, 전학 갈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너는, 평소와 달리 더없이

진지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석양에 비친 네 눈동자는 물기로 젖었지만,

그럼에도 또렷하게 날 보고 있었다.


“……날 두고 간다고?”


“그래. 그러니까 내 전화번호 지워, 아니.

네가 안 지워도 바꿀 거야. 우리 집에도

이제 오지 마. 너랑 연 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라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난 당연히 그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걸지도 모른다.


그야, 이럴 만도 하지.

거의 십 년을 가지고 놀았는데.


“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너랑 지낸

그 10년은 나한테 지옥 같았어. 매일 네

눈치나 보고, 내 삶도 없고, 이딴 식으로

살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사라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차갑게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분노? 아니, 그보다 더 깊고 어두운…….


“하.”


그래, 결국 그렇게 될 순 없구나.

너와 난 처음부터 단단히 어긋난 거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니.

그런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는데.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 앱을 켰다.


‘야……벌려……좋아? 응? 좋냐고…….’


“어?”


이건 가짜, 합성으로 만든 녹음 파일이다.

본래 이렇게 쓰려고 만든 건 절대 아니다.

……원래는 내가 밤에 혼자 몰래 쓰려고

만든 것이다.


“그, 그건 뭐야? 왜 내 목소리가 나와?”


“너 가면, 나 이거 가지고 부모님께 가서

말할 거야. 저 강간당했다고.”


내 선언을 들은 그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 우리나라 법 알지? 너 재판받을 쯤엔

미성년자 딱지도 없을 걸? 사회생활을

감방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 것 같아?”


“너……너…….”


내가 너무했다고 생각해?

아니, 맞아. 내가 너무한 게 맞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어떤 형태로든, 널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알겠어, 저번에 그건 내가 너무했지……

인정할게. 그리고 사과할게, 미안해.”


나는 그에게 다가가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하는 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다혜, 너…….”


우린 평생 함께야.

설령 이렇게 뒤틀리고 망가진 관계라도.


“알아들었으면 이리와.”


그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끝내 포기한 듯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옳지, 잘했어. 앞으로도 내 말 잘 들으면

제대로 보상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두 번 다신 나한테서 도망칠 생각하지 마.”


평생, 널 장난감으로써 사랑해줄게.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하니까.




















오늘도 1편을 썼다. 그리고 내일도 1편을 쓸 것이다. 

욕쟁이 성녀를 쓰고나서 난 장편 따윌 연재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진 얀순이가 얀붕이를 가스라이팅 조교하는 그런 소설이 보고 싶어서 썼음

호불호 갈릴 순 있지만 뭐,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