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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기사였던 농부에게 (4)

 

 

 

 

그들은 나아갔다. 잠깐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잘 때를 빼면 한 시도 쉬지 않았다.

 

말을 구해보려고 루크마이어가 무던히 애썼지만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상처 입은 루크마이어를 보고선 말도 걸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다.

 

“아빠, 저 산 보여? 저길 넘어서면…….”

 

“크릭이 나오지. 거의 다 왔구나.”


크릭은 그들이 사는 왕국과 적대 관계였다. 과거 왕가끼리 결혼 동맹을 맺기도 하고

 

이런저런 교류를 했으나 로이어 왕과 그 아버지 세대에서 교류가 끊겼었다.

 

저기로 넘어가 숨는다면 제 아무리 황금 사자단이라도 함부로 넘어와 잡을 순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 순간- 루크마이어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이런, 안 되는데…….”


“아빠?”


그 직후, 그가 본 것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땅이었다.

 

 

 

 

 

 

 

 

*****

 

 

 

 

 

그녀는 남들과 달랐다.

 

생김새도 머리카락의 색도 달랐다. 어딘지 모를 기품이 느껴지던 아이였다.

 

“저, 저기 얘들아……나도 같이 놀아도 돼?”

 

“…….”


동네 아이들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귀여운 외모였지만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생김새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 아이들 중 대장격인 남자애가 말했다.

 

“안 돼.”


“왜?”

 

“왜냐하면 넌 엄마도 없는 고아니까!”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엘리자의 곁에 모여 툭툭 밀기 시작했다.

 

“너 머리카락이 왜 이래? 마귀할멈의 저주라도 받았냐?”


“아, 아니야. 난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


“그럼 넌 마녀의 자식이구나! 그래서 머리가 이런 색인 거야!”


“아니야! 우, 우리 엄마는 평범한 사람이야!”


“거짓말! 넌 거짓말쟁이야. 우리가 거짓말쟁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


남자 아이가 양동이에 무언가를 잔뜩 담아왔다. 그것은 변소에서 퍼온 썩은 똥이었다.

 

“어? 그, 그게 뭐야……나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만해!”


“마녀는 똥이나 처먹어라!”


두 아이가 각각 한 팔씩 엘리자의 팔을 붙잡고, 가장 덩치 큰 아이가 양동이를 

 

쏟아 부었다. 어마어마한 악취에 눈조차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야! 나한테도 튀었잖아!”

 

“마녀를 사냥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왜 그래 마녀야? 울 것 같아? 응?”


“나, 나 아무것도…….”


“야 마녀가 운다! 마녀가 울면 눈에서 불꽃이 나온다고 엄마가 그랬어!”


“와 도망치자! 마녀가 불꽃을 쏜다!”


아이들이 참새처럼 흩어졌고, 거기엔 똥을 뒤집어 쓴 엘리자만 남았다.

 

그녀가 울먹거리며 집으로 겨우 돌아왔다. 아빠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화낼지 무서웠다.

 

“엘리자? 너 그게 무슨……똥통에라도 빠졌어?”


“아빠…….”


겨우 참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엘리자가 끄윽, 끄윽 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나, 더러워. 만지면 안 돼…….”

“괜찮아. 아빠는 네 몸에 뭐가 묻어도 신경 안 써.”


루크마이어가 엘리자를 데리고 욕탕으로 향했다. 그는 얼른 물을 퍼와 엘리자를 씻겼다. 

 

“아빠……애들이 나보고 마녀래.”


“왜?”


“머리카락이 이상해서…….”


“예쁘기만 한데 뭘. 또 그러면 아빠 불러, 그 놈들 애비까지 혼쭐을 내줄 테니까.”


그가 위로했지만 엘리자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루크마이어가 고민 끝에 한 가지 계책을 떠올렸다.

 

“그 녀석들이 널 마녀라고 놀렸다면, 진짜 마녀가 되는 건 어때?”


“내, 내가? 하지만 나 마법 쓸 줄 몰라…….”


“마을 여관에 은퇴하고선 자서전만 쓰는 늙은 마녀가 있어. 내가 잘 말해서 너한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해볼게. 그러면 아무도 널 괴롭힐 수 없을 거야.”

 

“난 그냥 애들이랑 놀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엘리자가 울먹이자, 루크마이어가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넌 그깟 바보들보다 훨씬 대단한 아이야! 왜 굳이 바보들이랑 놀아야 돼? 아빠가 있잖아.

 

소꿉놀이든 숨바꼭질이든 뭐든 같이 하자.”

 

“그것도 좋지만, 난…….”


“엘리자.”


그가 엘리자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때론 혼자서 나아가야 할 때도 있어. 아무도 없이 너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그렇지만 잊지 마. 아빠는 여기 있을 거야, 너의 곁에. 절대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약속한 거야?”


“약속할게.”

 

그는 아버지였다. 스승이었고, 친구였으며, 그 누구보다 그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엘리자는 그가 자신의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렸다.

 

 

 

 

 

 

 

 

*****

 

 

 

 

 

 

 

 

여긴 어디지?

 

그가 눈을 뜨자 종유석이 보였다. 어딘가의 동굴이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

 

힘들었다. 어설프게나마 옷을 찢어 만든 붕대가 몸에 감겨있었다. 

 

“아빠 일어났어?”

 

“내가……기절한 건가?”


“치료도 제대로 안 하고 무리해서 그래. 열이 엄청나.”


엘리자가 물에 적신 천을 머리에 얹어주었다. 

 

“어깨랑 얼굴의 상처가 감염됐어. 약초를 먹이긴 했는데 회복엔 며칠 정도-”


“안 돼. 우린 이럴 시간이 없어.”


그가 일어서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시야마저 흐릿했다.

 

“무리하면 안 돼! 식사랑 수면도 제대로 못했잖아. 이대로 가면 죽을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돼. 산만 넘으면 여기서 달아날 수 있어…….”

“이 상태론 산을 넘을 수 없다는 거 아빠가 제일 잘 알잖아.”


루크마이어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인가.”


“뭐?”


“난 여기까지다. 엘리자, 넌 국경을 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나 혼자 도망치라고 한 거야?”


“그래.”


그녀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내 대답이 뭔지 알면서 그러지?”


“농담하는 거 아냐. 아마 며칠 안에 황금 사자단이 여기까지 쫓아올 거다. 아무리 우리

 

둘이라도 본대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

 

“그럼 아빠는?”


“어떻게든 되겠지. 운이 좋으면 네 뒤를 쫓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럴 리 없다. 아무런 도움 없이 이만한 상처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빠가 뭐라고 말해도 난 여기 남을 거야.”

“지금 고집부릴 때가 아니잖아. 잡히면 놈들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거야.”


“그렇더라도 아빠가 죽도록 내버려두진 않아. 절대로.”


“엘리자!”

“나한텐 아빠뿐이야. 아빠 빼곤 아무도 없단 말이야.”


친구도, 가족도 없다. 형제도 지인도 없다. 루크마이어를 빼면 그녀의 인생엔 아무도 없다.

 

“미안.”


“너-”


그녀가 루크마이어의 턱을 붙잡아 무언가를 먹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곧장 의식을 잃고 잠들었다. 

 

“이걸로 몸이 다 나을 때까진 잠들 거야. 미안해, 아빠.”


그녀가 잠시 쉬려고 몸을 웅크렸다. 

 

루크마이어가 움직일 정도로 회복하려면 적어도 나흘은 걸릴 것이다.

 

그 전에 황금 사자단이 오면, 어쩔 도리 없이 붙잡힐 수밖에 없다. 

 

여왕이 되면 어떻게 될까?

 

모두가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일단, 그녀의 아버지 루크마이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반역자로 낙인 찍혔기에 처형당하는 게 당연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 아빠가 없는 인생.

 

“그딴 건 개나 주라고 그래.”


엘리자가 모은 약초를 으깨고 아버지의 붕대를 갈아주는 동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달빛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엘리자는 뭔지 모를 불안감에 자신의 검을 뽑았다.

 

“나의 길을 비추라, 오울 파르소.”


그녀의 손을 떠나 둥근 빛의 구체가 날아갔다. 이윽고 그 빛에 반사된 그림자가 보였다.

 

“뭔가 있어.”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 그리고 작은 몸집, 쇠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

 

“코볼트다.”

 

악어와 비슷하게 생긴 머리를 가진 괴물. 수 십 마리씩 모여살고 사회성과 지능을 

 

지녔으며 거리낌 없이 인간을 습격해 약탈하고 죽이는 종족.

 

“아빠의 피 냄새를 맡고 온 건가……뭐가 됐든 상관없어.”


그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실전은 처음이었지만 엘리자는 등 뒤의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몰려오는 두려움을 떨쳐냈다.

 

“적의 두 눈을 멀게 하라, 하포라!”


엘리자가 얼른 두 눈을 가렸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엄청난 섬광이 번뜩였다.

 

그것을 맨눈으로 본 코볼트들이 눈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오울 파르소! 무, 무슨 놈의 코볼트가 이렇게 많아……!”


못해도 20마리는 넘을 것 같았다. 저마다 몽둥이나 약탈한 무기를 들고 있었고, 덩치는

 

작아도 힘은 성인 남성과 엇비슷했다. 지능도 어린 아이 수준은 됐다.

 

“나의 적을 막아서는 방벽이 되어라, 헤로드 실더!”


그녀가 바닥에 손을 짚자, 돌로 만들어진 가시들이 솟아나 길을 막았다.

 

실명을 회복한 코볼트 몇 마리가 돌격했지만, 가시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 틈을 타 그녀가 다가오는 괴물들의 가슴과 머리를 검으로 찔렀다. 

 

“크르르르! 크라라악!”


코볼트들이 곧바로 전략을 바꿔 뒤로 물러섰다. 그런 다음 쇠뇌를 꺼내들었다.


‘아빠가 위험해!’

 

그녀가 얼른 누워있던 루크마이어를 붙들고 가시 뒤로 숨었다.

 

발사된 화살이 벽과 바닥에 박혔다. 그러는 동안 방패를 든 코볼트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디서 보고 배운 건가? 하여간 쓸데없이 잔머리가 좋아……!”


이제 어쩌지?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자기가 쓸 수 있는 마법을 전부 떠올렸다.

 

“그거다! 무한의 벽을 꿰뚫는 가시여, 싱페르트!”

 

그녀가 벽에 손대며 마법을 쓰자, 벽에서 솟아난 가시들이 방패를 든 코볼트들을 덮쳤다.

 

“카아아악! 크이이이익!”


순식간에 꼬챙이처럼 변한 코볼트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다.

 

피와 내장이 튀는 그 끔찍한 광경에 눈을 돌릴 뻔 했지만- 엘리자는 견뎌냈다.

 

그 때였다. 뒤에서 쇠뇌를 쏘던 코볼트들 너머로 무언가가 뛰쳐나온 것이다.

 

“카라라라라락!”


“뭐, 뭐야 저거!? 뭘 타고 있는 거야!”


멧돼지에 타고 있는 코볼트 한 마리가 가시를 넘어 엘리자의 앞에 섰다.

 

머리에 쓴 해골과 커다란 덩치. 이 녀석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크라라락! 크르르르르……!”


“좋아……너만 죽이면 저것들도 물러난다 이거지?”


놈이 돌진했다. 생각보다 속도가 빠른 탓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엘리자가 멧돼지와

 

부딪혀 저 멀리 날아갔다. 큰 상처는 없었지만 충격이 꽤 컸다.

 

“쿨럭, 쿨럭……뭐 이리 빠른 거야…….”


마법을 쓸까?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시전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그 전에

 

놈이 먼저 공격할 게 뻔했다. 어떻게든 검술로 승부를 봐야했다.

 

“키리이이이악!”


코볼트가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엘리자는 자세를 낮게 잡고 기다렸다.

 

‘잊지 마, 기병을 상대할 땐 절대 네가 먼저 공격해선 안 돼. 반격만이 살 길이야’

 

아버지의 가르침, 그가 가르쳐 준 모든 것이 지금의 그녀를 싸우게 한다.

 

놈의 창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엘리자가 검으로 창끝을 빗나가게 했다.

 

“크륵!?”


“으라아아아!!”


이어서 코볼트의 속도를 역이용해, 그대로 코볼트의 몸통을 양단했다.

 

상하반신이 분리된 코볼트가 허공에 떴다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하아……후우……어때? 이게 아빠가 가르쳐준 검술이라고…….”


피투성이가 된 엘리자가 대장 코볼트의 목을 잘라 그것을 높이 들었다.

 

“너희 대장은 죽었다!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너희 모가지도 날려버리겠어!”


쇠뇌를 쏘던 코볼트들이 대장의 목을 보자마자 새하얗게 질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끝났다. 그 많던 코볼트를 혼자서 물리쳤다. 

 

만약 아빠가 검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스승이었던 마녀 할머니를 소개해주지 않았다면

 

여기서 둘 다 죽었으리라. 이 모든 게 루크마이어의 ‘사랑’ 덕분이었다.

 

아버지로서의 사랑.

 

하지만 엘리자는, 딸이 아닌 한 명의 여자로서 그를 사랑한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가 잠든 루크마이어의 위에 올라타 그를 껴안았다.

 

“피투성이가 됐지만 괜찮아. 아빠는 내가 더렵혀지더라도 날 사랑해 줄 테니까.”


그리고 키스했다. 살과 살을 맞대며 끓어오르는 욕정을 어떻게든 억눌렀다.

 

“날 사랑해 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령 그게 잘못된, 섭리에 어긋난 것일지라도.

 

루크마이어를 가질 수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엘리자 비중이 적었다고? 나도 안다. 벌써 뇌절각이라고? 나도 안다.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얀데레 각성은 후반부에 제대로 할 거니까 걱정마라.

그나저나 얀데레 소설은 이번 달부터 처음 쓴 거라 아직 감을 잘 못 잡겠음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