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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기사였던 농부에게 (5)

 

 

 

 

 

“몸은 좀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내가 며칠이나 잠들어있던 거지?”

 

루크마이어가 처음 눈을 뜨고 한 말이었다.

 

“나흘하고 반나절 정도.”


“황금 사자단은?”


“아직 안 왔어.”


그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온 몸이 무거웠다. 아직 열이 다 내려가지 않았고, 상처가 불에 지진 것처럼 쓰라렸다.

 

“날 버리고 갔어야지. 그나저나 이게 다 뭐야?”

“코볼트들이 침입해서 싸웠어.”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루크마이어가 엘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친 곳은!?”


“……없어. 아빠 딸도 꽤 쓸 만하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왜 도망치지 않은 거야?”


“아빠가 있는데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이다, 하마터면 나 때문에 그녀가 죽을 뻔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어서 산을 넘자, 조금이라도 멀리 가야 돼.”


“알겠어.”


그들은 곧장 동굴을 떠나 산으로 향했다. 루크마이어는 병든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걸어 엘리자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혹시나 또 아버지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거의 반나절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은 끝에, 그들은 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멀리서 본 것보다 크군.”


“넘으려면 며칠 정도 걸릴 거야. 그나저나 넘어가면 어쩔 거야?”


“적당한 곳을 찾아서 또 농사를 지어야지.”


“나랑 같이 떠돌이 용병이라도 해볼래?”


“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는 상상했다. 둘이서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산의 입구로 향했다. 그곳엔 크릭의 병사들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밀입국자를

 

잡으려고 초소를 세워놓았으나 경비가 삼엄하진 않았다. 일단 산이 너무 넓어서 

 

전부 경계할 수 없을뿐더러 그들 대부분은 노예여서 굳이 성실하게 일하진 않았다.

 

산은 경사가 심하고 대부분 절벽이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산의 정상엔 우디언트나 트롤 같은 포악하고 위험한 괴물들이 살았는데, 거기로 가지만

 

않으면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렇더라도 사람이 살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벌써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이었지만, 낮에는 경비병에게 잡힐 수 있어서

 

차라리 밤에 움직이는 게 나았다. 

 

“아빠, 계속 걸을 수 있어?”


“옛날엔 바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도 했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냐.”


“하여간 허세 부리긴.”

 

“진짜야.”


그 때, 그의 발에 넝쿨이 걸렸다. 그러나 그게 넝쿨이 아니라는 건 곧 깨달았다.

 

삐이이이익-!

 

“무슨 소리야!?”


“젠장, 함정이 있었나.”


순식간에 주변이 환해졌다.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무어라 소리쳤다.

 

크릭의 경비병? 루크마이어가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을 보았다. 금선이 그어진 흰 갑주.

 

“황금 사자단이다!”


“뭐!?”

 

“저기다! 놓치지 마!”


왜 그들이 여기 있지?


그가 생각하기를 멈추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엘리자, 뛰어! 계속 달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 사방이 환했다. 분명 본대가 여기까지 온 게 분명했다.

 

그제야 루크마이어는 막시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녀, 그 여자가 그들이 여기 올

 

것이라는 걸 예언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 매복할 이유가 없다.

 

“활을 쏘지 마라! 공주님이 맞으면 안 된다!”


그들은 민첩하게 산을 타 그들을 쫓아갔다. 왕국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을 따돌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쐐액-

 

바람 소리가 들렸다. 자각과 동시에 그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아빠!!”


“이건……화살……제기랄, 하필이면 또 어깨에 맞다니…….”


막시무스에게 다친 그 부위였다. 루크마이어가 있는 힘껏 화살을 뽑자 고름과 피가 흘렀다.

 

“오랜만입니다, 루크마이어 대장님.”


“너냐 로멜드?”


어느새 병사들이 그들의 등 뒤에 있었다. 그리고 세 대장이 위에서 내려왔다.

 

“많이 늙으셨군요.”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옆의 그 놈들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오트하이머랑 제프입니다. 제프가 꼬리고 오트하이머가 눈입니다.”


루크마이어가 그들을 보았다. 과연, 딱 봐도 강해보였다.

 

“지금부터 두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첫째, 항복한다.”


“그럼 뭐, 날 살려주기라도 할 거냐?”


“그건 안 됩니다. 하지만 반역죄가 아닌 살인죄로 기소할 것이고, 처형은 참수나 교수형으로

 

이뤄질 겁니다. 비교적 깔끔하고 편하게 죽는 길이죠.”

 

“둘째는?”


로멜드가 밑으로 내려왔다. 그는 20년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 때와 달리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했다. 방패와 장검, 쓰는 무기도 달라지지 않았다.

 

“추하게 발악하다 잡히는 것이죠. 당신은 반역자로서 죽을 때까지 고문 받을 겁니다.”


“부탁인데 제발 항복하지 마라.”


제프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보내줘. 부탁이야, 내가 여왕이 되더라도 그것만은…….”


“안 됩니다, 공주님. 루크마이어는 기사로서 절대 저질러선 안 될 죄를 범했습니다.”

 

전우 살해, 탈영, 하극상- 모두 하나 같이 극형에 처해질 죄다.

 

루크마이어가 겨우 일어나 검을 뽑았다. 

 

“내 목숨 하나 살리자고 머리 숙이지 마라, 엘리자.”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제프가 신이 나 미늘창을 빼들었다. 오트하이머도 그의 날카로운 레이피어를 꺼냈다.

 

“로멜드, 그리고 너희 둘에게 사자의 결투를 신청한다.”


“반역자한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제프, 우리 황금 사자는 ‘절대로’ 결투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사자의 결투. 그것은 황금 사자단끼리 의견 차이나 재판을 할 때 일어나는 결투였다.

 

황금 사자단의 일원은 절대로 이것을 거부하거나 도망칠 수 없다. 그게 유일한 규칙이었다.

 

“왜 그래 애송아? 나랑 싸우면 털릴 것 같아서 오줌이라도 지린 거냐?”


“이 빌어먹을 반역자가 어딜 감히 아가리를 놀려! 오냐, 널 멧돼지 먹이로 주마!”


“아빠…….”


“엘리자, 틈이 보이면 도망쳐. 넌 절대로 잡히지 마.”


그가 조용히 속삭인 후,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왕국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었다. 

 

만전의 상태에서도 그 세 사람을 동시에 싸워 이길 순 없다. 하물며 지금 부상과 감염으로

 

망가진 몸으론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3분? 5분? 과연 버틸 수나 있을까?

 

그들이 각각 정면, 왼쪽, 오른쪽에 섰다. 그리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한꺼번에 덤벼라!!”


선공은 제프였다. 그가 커다란 미늘창을 휘둘렀고, 루크마이어가 뒤로 펄쩍 뛰어 피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트하이머가 파고 들어 루크마이어의 오른팔을 베었다.

 

“아빠!”

 

그가 반격했지만 로멜드가 방패를 들어 그걸 막았다. 그 다음 장검으로 그를 내리찍어

 

짓눌렀다. 이미 한계였다. 그는 싸우기 전부터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랑인 쌍검도 쓸 수 없는 모양이군. 안 그래?!”


제프가 그를 발로 걷어차 저 멀리 날려버렸다. 그가 겨우 일어났지만 순식간에

 

오트하이머가 검을 휘둘러 공격했다. 단 한 순간도 틈을 내주지 않는 무시무시한 연계였다.

 

“너희 정돈 한 팔로도 충분해!”


그가 오트하이머의 발을 걸어 균형을 무너트렸다. 그 직후 팔꿈치로 그의 안면을 찍었다.

 

“커윽!?”


하지만 투구 탓에 별 피해는 주지 못했다. 잠깐 뒤로 밀어낸 게 전부였다.

 

“방심하지 마라, 오트!”


“그라아아아아악!”


제프가 고함을 내지르며 미늘창을 휘둘렀고- 루크마이어가 검을 들어 막았지만

 

충격을 다 버티지 못하고 넘어져 굴렀다. 충격 탓에 팔이 벌벌 떨렸다.

 

힘, 속도, 합. 모두 완벽했다, 루크마이어가 어떻게 해야 틈을 만들까 생각했다.

 

“아참, 말을 못 했는데……막시무스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아나?”

 

“뭐야?”


“제발 자기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내 발을 붙잡고 애원하더군. 이젠 황금 사자단도

 

끝장난 모양이야. 그런 노망난 노인네한테 대장 자리를 주다니!”

 

오트하이머와 로멜드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 때문에 머리에 피가 몰린

 

제프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감히, 감히 반역자 주제에 우리를 욕보이다니?


“네 놈의 뼈를 갈아 마셔주마!!”


“제프, 안 돼!”


제프가 미늘창을 내리찍었다. 그러나 아주 살짝, 루크마이어가 몸을 돌려 그것을 피했다.

 

“헛!?”


다시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땐, 너무 늦었다. 

 

루크마이어의 검이 투구의 틈을 비집고 그의 오른쪽 눈에 박혔다.

 

“크아아아악!!”


“이 멍청한 놈, 방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일단 하나, 루크마이어가 오트하이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냉정한 그는 이미

 

루크마이어의 의도를 깨닫고 공격하는 대신 방어 태세를 취했다.

 

“당신이 황금 사자단에 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루크마이어 엔더스.”


루크마이어가 검을 휘둘렀지만, 오트하이머가 그것을 막는 동시에 검의 방향을 바꾸어

 

그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검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쇄골을 찔렀다.

 

“크악!”


동시에 로멜드가 달려들어 방패로 그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던 어깨뼈가 부러졌다. 그리고 등 뒤에서, 제프가 고함을 내지르며 미늘창을 휘둘렀다.

 

“잡았다!!”


퍼억-

 

왼팔이 허공을 갈랐다. 미늘창에 잘린 팔이 피를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세 사람이 완벽하게 자신만을 보고 있을 때를.

 

“뛰어, 엘리자!!”

 

그녀가 쏜살같이 그들을 지나 산 위로 달아났다.

 

“안 돼! 공주님을 붙잡아, 당장!”


그리고 다음 순간, 화살이 날아갔다. 그것은 정확하게 엘리자의 다리를 꿰뚫었다.

 

“아윽!?”

 

그녀가 넘어지며 굴렀다. 그리고 나무에 거칠게 부딪혔다.


“누구냐! 어떤 멍청이가 공주님한테 활을 쏜 거냐!? 


끝이다.

 

보통이라면,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피보다 더 끈끈한 ‘맹세’로 이어진,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다.

 

“내 딸한테 무슨 짓이야!!”


팔이 잘렸다는 걸 잊은 채, 루크마이어가 순식간에 오트하이머에게 파고 들어 검을

 

튕겨내고 안면을 베었다. 그 일격에 투구가 찌그러지며 얼굴이 찢겨져나갔다.

 

“하, 한 팔로 이런 힘이……!”


“네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


미쳐 날뛰는 짐승, 그는 분노로 완전히 미쳐버려 고통조차 잊고 사자처럼 포효했다.

 

로멜드가 방패로 그의 공격을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도저히 죽어가는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이미 죽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괴물처럼 날뛴다.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멜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포를 느꼈다.

 

“루크마이어!”

 

“크아아아아아!!”


로멜드가 방패를 들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루크마이어가 자세를 낮추며

 

그의 하단을 베었다. 갑옷 틈 사이로 난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제프가 루크마이어를 붙잡아 일격에 쓰러트렸다.

 

“이거 놔!! 죽여 버리겠다, 네 놈들 전부 찢어 버리겠어!!”


“이 미친 괴물 같으니……! 뭣들 해?! 얼른 붙잡아라!”

 

그제야 이 결투를 숨죽인 채 지켜보던 기사들이 나와 루크마이어를 구속했다.

 

“우리……세 사람을 상대로……신이시여…….”


오트하이머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가 말했다.

 

“로이어 왕의 딸이자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서 명한다. 멈춰!”


어느새 엘리자가 화살을 뽑아내, 그것을 자기 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

 

“공주님……!”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자살하겠다!”


그건 진심이었다. 세 사람 모두 그걸 알고 얼른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아빠를 놓아줘.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그는 이미 끝났습니다, 공주님. 이 상태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 말대로, 루크마이어는 벌써 의식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로멜드라고 했나?”


“네, 공주님.”

“항복할게. 너희를 따라갈 테니, 아빠를 살려줘…….”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는 처형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럼 나도 여기서 죽겠어. 아빠가 죽는 꼴을 두 눈 뜨고 볼 바엔 이게 나아.”


엘리자가 화살을 자기 목을 찔렀다. 피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어떤 신분이라도 상관없어. 풀어주란 말도 안 할 게. 그냥……

 

그냥 살려줘. 뭐가 됐든 상관없으니까 목숨만은 살려줘. 제발…….”

 

“…….”

 

로멜드는 생각했다. 

 

반역자를 살려줬다는 게 세간에 알려졌다간 그 자체만으로 이미 나락까지 떨어진

 

왕권을 끝장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덜 난 국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외국,

 

그리고 권력을 노리며 군침을 흘리는 반역자들. 이 나라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엘리자가 죽으면 정당한 계승자는 아무도 없다. 또 그 때처럼 왕권 투쟁이 벌어지고

 

결국 왕국은 멸망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맹세 하십시오 공주님. 루크마이어 엔더스를 살려주면 여왕이 되겠다고.”

 

“맹세할게. 내 모든 걸 걸고.”

 

엘리자가 유리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로멜드…….”


“날 믿어라. 내게 생각이 있다, 오트하이머.”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로멜드는 한 때 친구였던, 그리고 자신의 대장이었던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를 치료해라. 우린 지금부터 ‘여왕님’을 호위한다.”


그가 말했다.

 

 

 

 

 

 

 

 

 

 

 

 

 

 

 

우리 모두 기다리고 염원하던 얀데레 파트가 시작된다. 빌드업 존나 기네 시발...

몸이 날이 갈수록 병신이 되어가지만 완결 전까진 죽지 않게 노력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