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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는 드래곤들이 즐기는 놀이이다.

 

 즐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어떤 삶을 살아볼 것인지 컨셉을 정한다컨셉을 정했으면 원하는 종족으로 폴리모프하여 외형을 만든다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인간으로 외형을 정하지만 가끔 엘프나 오크 같은 마이너한 취향으로 노는 드래곤들도 있다.

 

 외형까지 정했으면 남은 건 세상으로 뛰쳐나가 잡은 컨셉을 지키면서 즐기는 것뿐이다그렇게 유희를 즐기다가 질리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냥 빠져나오고.

 

 가끔씩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드래곤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들이 원망하긴 하지만... 그래봤자 드래곤은 쥐뿔도 신경 안 쓴다.

 

 유희는 유희일 뿐이니까.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 끝난 유희에 감정이 붙어있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 아리아테스 디 드레이아의 경우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그녀가 아론을 떠난 후 일주일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그녀는 유희를 떠나기 전 그녀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 조금씩 그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언가를 먹을 때면 유희시절 아론과 먹었던 음식이 떠올랐고 잠자리에 들 때면 가슴이 시큰거렸다자고 일어났을 때 옆이 비어있다는 사실이 가끔 서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는 동족과 영토를 돌보는 일에 소홀해지고 말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리아테스가 외로움을 탄다고 생각해 그녀에게 다른 드래곤을 소개해줬었다.

 

 그 드래곤은 싹싹하고 잘생긴 레드 드래곤이었다.

 

 허나 어머니의 소개로 그와 대화를 나누어 봐도 그녀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통증에 결국 그녀는 앓아누웠다.

 

 앓아누운 그녀를 걱정해 찾아온 다른 드래곤들을 문전박대 하면서 아리아는 생각해봤다자신이 왜 이러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몇날 며칠을 생각해봤지만 원인으로는 아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지만 그녀는 유희 중에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그렇게 판단하고 나자 행동은 빨랐다.

 

 그녀는 곧바로 일어나 자신의 어머니께 찾아갔다그리고 어머니께 앓아눕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고 양해를 구했다.

 

어머니제가 없는 동안 붉은 산을 부탁드립니다.”

 

 아리아는 다시 유희 생활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붉은 산의 제왕이라는 자리 때문에 유희도중 돌아온 그녀였지만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붉은 산을 돌볼 수가 없었다.

 

 알겠구나...”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어머니는 한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허락해주었다.


 인간의 삶은 짧으니까유희를 끝까지 즐기고 오면 그녀가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붉은 산 문제가 해결된 아리아는 유희 생활 때 아론과 살던 집으로 날아갔다

 

 빠른 속도로 날아 이틀도 안되어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자신을 괴롭혔던 가슴의 답답함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대신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론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긴장감이 뒤섞인 것이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문을 열자...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나간건가?’

 

 아리아는 식탁을 손으로 쓸어봤다그녀의 손에 퀴퀴한 먼지가 묻었고 이는 아론이 오랫동안 집에 없었음을 의미했다.

 

 그에 아리아는 집 주변에 사는 이웃들에게 찾아가 물어봤다.

 

 ... 아론 씨라면 그쪽 찾겠다고 집 나간 지 꽤 됐수.”

 

 쯧쯧... 딴 남자 만나다가 원래 남편이 좋은 사람인걸 이제 깨달았나 봐어휴...”

 

 이웃들은 아리아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도 그럴게 그들은 아리아가 드래곤인걸 몰랐다.


 그저 아론이 폐인이 된 일과 아리아가 보이지 않게 된 일로부터 그녀가 다른 남자가 생겨 집을 나갔다고 추측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단 아론이 폐인이 된 일과 그녀를 찾아 옛 동료들과 떠났다는 이야기는 해주었다.


 그녀가 조금은 과거를 후회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를 후회하거나 하지 않았다

 

 후회하긴 커녕 아론이 자신을 찾아 떠난 것에 조금 기뻐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갈지 아니면 집에서 기다릴지에 관하여 고민했고 얼마간은 기다려보기로 결정했다.

 

 먼지가 쌓인 집을 청소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지 어느덧 한 달.

 

 슬슬 찾으러 가 봐야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고 그녀의 남편이 돌아왔다.

 

 옛 동료들과 함께 말이다.

 

 아론왔어?”

 

 ...?”

 

 떠날 때의 고압적인 말투와는 다른 상냥한 목소리에 아론은 당황했다

 

 자신을 간단히 버리고 떠났던 그녀가 왜 여기 있고왜 상냥한 말투로 자신을 맞이한단 말이가.

 

 이해가 되질 않아 벙쪄있는 아론의 모습을 보며 아리아는 피식 웃었다.

 

 오랜 여행 동안 힘들었을 텐데 탕에서 몸 좀 풀고 와따뜻하게 데워 줄 테니까에리카랑 렉시티나랑 레니까지 왔네반가워 얘들아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일단 피곤할 테니 조금 쉬고 내일 오는 건 어때?”

 

 벙찐건 아론뿐만이 아니었다아론의 새 아내들도 뻔뻔하게 아론의 아내 행세를 하는 아리아를 보며 벙쪄있었다.

 

 “...얘들아오랜만이라 반가운건 알겠는데 잠시 부부끼리 함께할 시간을 좀 줄래오랜만에 아론과 함께 있고 싶거든.”

 

 뭐라는 거야미친년이...”

 

 뻔뻔한 소리에 참다못한 렉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지 때문에 아론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저리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게 나오는 거지그녀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머...렉시오랜만에 보는 친구한테 미친년은 조금 심한 거 아니야나 때문에 고생한건 미안해그래도 욕은 안했으면 좋겠어.”

 

 ..!”

 

 이번엔 에리카였다아론이 힘들어 하는걸 가장 옆에서 지켜본 그녀는 아리아의 당당한 태도에 유례없이 분노했다

 

 그래서 에리카는 얼 타고 있는 아론의 뺨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치고 그걸 지켜보게 된 아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아리아가 성큼성큼 걸어가 둘을 떼어냈다그리고 에리카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에리카나 때문에 고생시킨 건 미안하게 생각해그렇지만 이건 선을 넘었어아무리 네가 아론을 좋아하더라도 그는 내 남편이고 나는 그의 아내야네 맘대로 손댈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그리고 아론너도 그래아무리 당황했어도 그렇지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따닥따닥 쏘아붙이는 아리아를 보며 에리카가 코웃음을 쳤다그런 에리카를 대신해 레니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아론의 아내라는 이야기는 차마 들어줄 수가 없군현재 아론의 아내는 네가 아니라 우리들이다너는 그날 아론의 곁에서 떠난 시점에서 그의 곁에 설 자격을 잃었다.”

 

 “...?”

 

 레니의 말에 아리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론을 쳐다봤다이게 무슨 일인지 해명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아론은 그녀에게 해명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

 

 아리아난 널 사랑했어.”

 

 아론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방금 레니가 한 말을...”

 

 진심으로 사랑했어너만 내 곁에 있으면 과거 따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말이야네가 있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어.”

 

 “...”

 

 하지만 네게 있어 난......그저 장남감일 뿐이잖아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널 사랑해도 넌 날 사랑하지 않잖아...!”

 

 아론진정하고 내 말 좀...”

 

 어떻게 진정해!!!”

 

 아론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버럭 소리 질렀다이것에는 아리아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는 자신에게 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가끔 의견이 충돌할 때조차 말이다.

 

 아리아는 지금 아론이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라고 판단했다지금 그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것이다.

 

 일단...일단 지금은 그를 달래줘야한다저 엘프의 말이 신경 쓰이지만 그건 나중에 캐내도 되었다.

 

 아리아는 아론을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얇은 손으로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론... 미안해... 미안해... 내가 사과할 테니까 잠시만 진정해줄래?”

 

 진정..?”

 

 진정하고 대화를 하자우리 사이에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까...”

 

 오해는 무슨 오해!!!”

 

 아론이 두 손으로 아리아를 밀쳤다밀쳐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은 아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론을 올려다봤다

 

 그녀가 바라본 아론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제야 그녀는 무언가 굉장히 잘못됐다고 느꼈다

 

 오해는 무슨 빌어먹을 오해야!”

 

 아론잠깐만 내 말을 들어봐다 설명할 테니까...”

 

 닥쳐또 그 빌어먹을 유희로 날 가지고 놀려는 생각이잖아내가 두 번이나 속을 것 같아?!”

 

 아니야아니라고!! 부탁이니까 진정하자?”

 

 지랄하지 마네 지금 말투가 그 빌어먹을 유희 때의 말투잖아!! 아니야?”

 

 ...!’

 

 분노한 아론의 외침에 그녀는 무엇 때문에 아론이 화가 났는지 파악했다.


 그는 그녀의 말투가 드래곤인걸 밝힐 때의 말투가 아니라 유희 때의 말투인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이었다또 다시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그저 다시 옛날처럼 지내려고 한 것이었다그가 이렇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대한 말을 하려고 아리아가 입을 떼려했지만 그녀를 향한 아론의 악감정 섞인 말에 떼어진 입이 다시 다물어지고 말았다.

 

 아론은 그녀에게 묵혀왔던 어두운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었고 단 한 번도 아론에게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었던 아리아는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같은 년을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실수야!! 남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빌어먹을 년사창가의 꽃뱀도 너같이 역겹진 않을 거야.”

 

 아론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 망설임 없이 집에서 빠져나갔다.


 예상치 못한 아론의 대노에 당황했던 새로운 아내들은 다급히 그를 쫓아나갔다.

 

 푸훕~”

 

 티나는 나가기 전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아리아를 비웃었다.

 

 아론과 그의 새 아내들이 모두 떠나고도 아리아는 한동안 멍하니 벽만 바라봤다

 

 그녀의 남편이...아론이 그녀의 품을 거절한 것뿐만 아니라 밀치고선 악의를 담은 말을 그녀에게 내뱉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고명한 정신을 가진 드래곤이어도 아론을 사랑하는 마음은 유희 따위가 아닌 진심이었으니까.

 

 아리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론이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고는 예상했었다그녀가 멋대로 떠난 거니 말이다.

 

 하지만 저 정도 일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대로라면 화해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미안하지만 네가 아론의 아내라는 이야기는 차마 들어줄 수가 없군현재 아론의 아내는 네가 아니라 우리들이다너는 그날 아론의 곁에서 떠난 시점에서 그의 곁에 설 자격을 잃었다.

 

 ...”

 

 불현 듯 떠오른 레니의 말에 아리아의 정신이 퍼뜩 들었다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여기서 꾸물거렸다간 그대로 아론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얼른 아론을 쫓아가서 그에게 해명과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만 했다.

 

 그 도둑년들이 자신의 남편을 채가기 전에 말이다.

 

 그녀는 재빠르게 밖으로 튀어나갔다얼마나 멍하니 있었던 건지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리아는 마법을 사용해 아론이 향한 곳을 쫓았다.

 

 행적을 쫓자 도착한 것은 신전이었다에리카가 성녀로 있는 신전 말이다.

 

 그녀는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천리안을 사용했다신전 안에 있는 아론을 찾을 생각으로 말이다

 

 천리안으로 신전을 뒤지면서 결국 그녀는 아론을 찾았는데...

 

 -흐으응..! 주인님..좋아요...

 

 -달링..키스..키스해줘..

 

 -아론의 향기... 언제 맡아도 좋아.

 

 -아론사랑해

 

 아론이... 그녀와만 정을 나눠야할 그녀의 남편이... 도둑년들과 몸을 섞고 있었다그렇게 몸을 섞고 있는 아론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아리아자신과 함께할 때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

 

 아리아는 주저앉았다.

 

 아아....”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아........”

 

 그녀는 절망했다.

 

 더 이상 이곳에 고명한 드래곤은 없다단지 어리석은 선택으로 남편을 빼앗긴 패배자만이 있을 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