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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가 집을 쑤시고 난 다음 대략 2주일 정도가 지난 오늘.
친구 녀석이 보내준 모바일 청첩장을 받고 예식장으로 가는 길이다.
엄청나게 친한 녀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자주 놀러 가던 사이였으니 예의상으로라도 갈만하다고 생각해서 오게 되었다.
단지,
이 작은 나라에서 생긴 인연이라면 조금만 움직여도 만나기 싫은 인간들을 만날 게 뻔하기에
기분 나쁠 상황이 무조건 올 것이라는 그런 꺼림칙한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게 많이 싫다는 것만 빼면.
별수 있나.
감내해야겠지.

예식이 시작하기에 앞서 40분 정도 전쯤에 도착해서 신랑인 친구 녀석에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그 녀석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정정하셔서 다행이었다.
이 녀석도 부모님 생각하는 건 끔찍이 강한 놈이었으니.

"진심으로 축하해요."
"고맙구나. 근데, 너희 아버지는 괜찮으시니?"

우리 집 소식을 오늘의 주인공 녀석에게 듣기도 하셨을 테니 여쭤보시는 것이겠지.

"네. 괜찮으셔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는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한 수준이지만,
살면서 한 손안에 들을 정도로 기분 좋으신 분들께 마음 아픈 말은 할 수 없었기에
진실은 숨긴 체 입을 열어 다른 뜻을 전해드린다.

당연히 학교 친구 결혼식이니 학교 친구를 아는, 또는 얘도 나도 알고 지내던 애들도 왔을 것이 뻔하기에 인사도 하고, 조그마한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물론,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들도 귀에 들어오기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덤.
관심도 없는 얘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장실로 가는 척 대화를 끊어버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 세상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이성 얘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짜증 난 것들이랑 어울리느니 차라리…
잠깐, 쟤가 왜 여기 있지?

"네가 여기 왜 있어?"

예식장에 온 하객 중 얄상한 몸매의 남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 안녕하세요!"

나랑 같은 이름을 가진 후임 녀석이 맞았다.
해맑게 웃는 회사 후임 녀석을 보니 조금 기분이 풀렸다.
남자 간이나 재보는 여자애들이나 하객 중에 괜찮은 여성 보이느냐고 묻는 놈들 보다 이 녀석이 훨씬 좋지.
무엇보다 대화 주제도 아주 비슷하니까.

"예전에 아르바이트할 때 알고 지내던 애가 저기 신부예요."

후임 녀석의 모습은 평상시처럼 안경이나 쓰고 꾸미지도 않은 체 부스스하게 다니는 그런 모습이 아닌
드라이기와 스프레이를 써서 단정하게 한 가르마.
평상시와 다르게 안경을 벗고 원래도 컸던 눈을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소프트 렌즈.
고생하는 비염 때문에 생겼다고 하는 다크서클도 자기 피부에 맞는 컨실러를 발라 깔끔해진 피부.
눈썹 칼로 정리해서 말끔해진 라인.
키가 많이 컸던 나와 다르게 이 나라 평균에 따르는 키였지만, 동양인 치고 상체가 작고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수치상의 키보다 더 커 보이는 키.
그것을 종합하면 귀티나 보이는 동양권 왕자님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이 정도로 세심하게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정도면
이 녀석의 형이 꾸며준 것이 분명하다.

"많이 꾸미고 왔네."

"네. 꼭 이렇게 하고 가라고 형이 많이 도와주었어요."

하긴, 얘네 형이 동생 아끼는 마음은 아주 컸으니까.
동생 꾸미는 맛이 난다고 하는 녀석이었으니.

"그렇게 하니 더 예뻐 보이네."

남자한테 이런 말 하긴 미안하긴 한데, 얘한텐 그 말이 제일 어울린다.

"어으… 예쁘단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요."

멋쩍은 표정을 짓는 후임 녀석.

"네 얼굴을 봐라. 멋지다는 말이 나올지 예쁘다는 말이 나올지."

"전…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자주 들어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리는 후배 얀붕이.

"그런데 어느 분 하객으로 오신 거에요?"

나와 이름이 같은 후배 녀석이 입을 열며 묻는다.

"난 저기 신랑 쪽."
"아. 그러셨군요. 많이 친하셨나 봐요?"

눈썹에 힘을 주고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 후임.
친했냐라…

"너희 형만큼은 아니고. 그냥 아는 사이."
"아. 그렇군요. 따로 같이 오신 분은 계세요?"
"없어. 나 혼자 왔거든. 넌?"
"저야 뭐, 당연히 혼…"
"얀붕!"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려 고개를 돌리려고 하니 내가 아닌 후임 녀석에게 다가가는 여성 한 분이 보였다.
내가 아니니 다행이군.

"어? 너도 왔어?"
"어. 당연히 수희 결혼식엔 내가 와야지~"

놀란 후배 얀붕이의 볼을 네일아트가 된 반짝이는 손가락으로 콕콕 누르는 여성.

"아. 그러니까. 잠깐만요."

얘가 이렇게 이성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처음 보네.
보통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행동하더니.

"아. 그래. 자, 이 분은 내가 다니는 회사 상사님이시면서 우리 형 친구분이시고."
"얘는 제가 아르바이트 할 때 같이 했던 친구이기도 하고 저기 신부 쪽 하객이에요."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개를 해주는 후임 얀붕이.

"처음 뵙겠습니다. 서 예진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강 얀붕입니다."
"와~ 얘랑 이름 같은 분은 처음 봬요."
"자주 들어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에 후임 얀붕이와 같은 콧날 쪽의 점.
달걀 형태의 갸름하고 여우상처럼 눈꼬리가 올라간 도도하게 생긴 얼굴형.
누가 보아도 예쁘다고 할 수 있지만, 하객으로 참여해서인지 화려하기보단 적당히 선을 그어 튀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보이는 외모.
키 차이는 조금 나지만 후임과 닮은 점이 많고 양쪽의 모자란 점을 보완해줄 것만 같은, 무언가 둘이 같이 있으면 어울려 보이는 한 쌍 같아 보였다.
물론, 후임 녀석은 사귀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모태솔로라고 했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둘을 살펴본 결과.
참 신기한 것은.
한쪽이 바라보면 다른 한쪽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눈을 마주치는 것도 아니고 시선을 일부러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시선이 가는 느낌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러한 행동을 종합적으로 보아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친구 동생 녀석과
사람을 휘어잡고 같이 활동적으로 행동할 것만 같은 후임 녀석의 친구.
무엇보다 여자 쪽에서 저렇게 행동으로 스킨쉽 할 정도면 마음이 있는 것 같고.
이건 연장자로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좋아 보이는데.
일부러 스마트폰을 꺼내며 진동상태로 만들어 흔들리게 하고 메시지 창을 보는 척 연기를 한다.

"음. 친구 하나가 불러서 만나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네? 어, 어느 분이요?"
"좀 급하네. 친, 구끼리 잘 있어 봐요? 난 좀 바빠서 가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후임 녀석에게 말을 대충하며 아는 여사친으로 보이는 여성 분의 눈을 보면서 얘기했다.
친구 동생 녀석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을 뒤로 빼고 내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는 것을 보니 여우 같은 여자애가 맞는 것 같다.

"그럼."
"엑, 설명은 해주셔야죠!"
"가신다잖아. 보내드려."

녀석의 말은 무시하고 몸을 돌려 빠르게 이동했다.

여자가 더 많이 좋아하는 연애라…
후임 녀석의 말을 생각하면 사귀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 모를 풋풋함.
하긴 나도 없던 것은 아니었구나.
끝은 안 좋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커피숍에서 혼자 앉아 음료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그 생각.
여우.

"후."

`내가 잠시 눈이 삐었었나 봐. 넌 원래 이렇게 잘났는데 잘 몰랐었어.`

말 하나하나로 날 세뇌하고 조종하던 그 악랄한 여우 같은 여자가 떠오른다.
그 인간 한 번 웃는 모습 보고 싶다고.
제대로 날 응시하면서 웃는 그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나 자신은 돌보지도 않은 체 그녀에게 미쳐 돌아다니던 그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다 잊은 줄 알았건만.
겨우 그 눈매 비슷하다고.
그저 한 번 봐버렸다고 이렇게 쉽게 떠오르나.

"오지 말걸 그랬나."

홀짝홀짝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사색에 잠기고 있을 때 불청객 한 명이 올 줄은 몰랐다.
아니, 만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것이지.

"오, 빠."

손에 턱을 괴고 고개를 돌려 나를 거슬리게 했던 소음의 근원지 쪽을 바라보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여성이 내 앞에 있었다.
임 희연.
얼마 전에 보았던 때처럼 웨이브를 준 연한 갈색의 머리.
작고 귀엽게 생겼지만, 몸매는 그 반대의 형상을 띄고 있던 너.
내 두 번째 여자친구였던 너.
내가 너무나 힘들어할 때 내 옆에 있어 주었던 너.
너의 사랑을 실로 삼아 망가졌던 내 심장 기워주었던 너.

그리고,
그 사랑의 실을 도로 뽑아내 심장을 다시 한 번 망가뜨린 너.
그런 네가 내 앞에 서 있지.

"오빠. 나, 할 말 있어."
"난 할 말이 없는데."

무슨 낯짝으로 할 말이 있다고 붙잡는 것인지.
얼굴에 무쇠 철판을 얼마나 깔아둔 것인지 참으로 신기하다.
드르륵
할 말이 없다고 말했는데도 내 앞 의자에 앉아 눈을 마주치는 너.

"내가 저번에 만났을 때…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미안하다.
미안하다라.

"지금 말했네."
"응…"


그래.
아마 본심은 그런 것이 아니겠지.

"볼일 끝난 것 같은데?"
"..."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오물쪼물하며 내 눈치를 보는 네가 보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를 생각하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가엾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연화랑 다르게 그나마 양심은 있는 것인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인가.

"..."

궁지에 몰린 햄스터처럼 오들오들 떠는 너를 보고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미안해. 오빠처럼 잔잔해도 오랫동안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전에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래. 그 말은 거짓말은 아닐 거야.

네가 누구와 사귀다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것으로 인해 너무나 힘든 것 때문인지.
지금 당장 너무나 외로워서인지
아무것도 몰라.
아니면 정말로,
나와 함께 있던 그때가 너무나 그리워
그 시절의 나에 대한 미안함에 사무쳐
감정의 후폭풍에 휘말려 그러는 것인지.
그것까지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정말
마지막으로,
그래도 나와 사귀었던 사람이며
내가 너무나 힘들어하며 나약해졌을 때
오만 나쁜 생각 하며 살던 나에게 힘을 주던 사람이기에
눈물로 호소하며 우는 너에게 딱 하나만 묻기로 했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의 나였더라면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매정하게 갔을 테지만,
적어도 연화와 다르게 넌 불행하기보다 조금은 행복하길 바라기에.

"너. 내가 묻는 것에 진실만 말해야 한다."
"응…"

"지금 네가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는 나는
과거에 너를 위해서 내 인생도 포기하면서
뭐든지 다 퍼주던 그때의 나일까?"
"아니면 그때와 달리 내 삶에 집중하고
또 많이 달라지고 멋있어진,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싶다고 하는 지금의 나일까?"

잘 선택하길 바란다.
네 답에 따라 내 행동도 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