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가 사는 집 밖을 나선 나는 대문을 나가자마자 바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필터를 깨물어 캡슐을 터트린 뒤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시원한 박하가 목구멍을 서늘하게 만들고 끝 부리에서 진한 모히토 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춤을 추는 것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담배 연기를 보니, 정신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릴것 같다.


백일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나는 허공을 떠도는 연기를 보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옛 속담을 아는가?


뭐 별 볼 일 없는 집에 태어나도, 어떻게 노력을 하는가에 따라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이 있었다.

개천에서 용, 얼마나 간지는 속담인지, 말 그대로 인생사 새옹지마, 사람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게 바로 인생의 묘미지 않냐.


뭐 켄드릭 라마도 어린 시절에는 시럽 샌드위치랑 싸구려 위조지폐로 사기를 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자기 회계사랑 같이 진짜 100달러 지폐를 헤아리면서

호세 쿠에르보를 물 에이즈처럼 마시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느냐, 뒷골목의 깜둥이가 그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게 분명하다.


뭐 국적이나 일하는 종목은 별개의 문제로 집어치우고 나는 내가 정말로 노력하면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진짜다. 지금은 이렇게 뭐 대행 아르바이트나 뛰면서 주머니에 몇만 원이라도 쑤셔 박는 그런 자질구레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고등학교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난 정말 내가 신사임당을 퇴계 이황처럼 만지작거리는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에 가까웠다.


인제 와서는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나는 고등학교 당시에 공부를 정말 잘했다.

뭐……. 엄마, 아빠도 없는 고아가 샤샤 대에 입학 원서를 넣어서 합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 만으로도 그건 굉장히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그 당시에 나는 샤샤 대에 입학 원서를 넣으면서, 아 드디어 내 인생에 빛이 들어오겠거니.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어떻게든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수모를 한 번에 갚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 뭐 등록금이니 입학금이니 그런 건 전혀 생각 안 한 게 머저리지.


그냥 그 나잇대의 고등학생들은 전부 다 눈가리개를 한 경마장의 말처럼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뭐 되지도 않았다.


예비 2번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번호가 안 빠지더라.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여러 번의 경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혜택을 전부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난생처음 겪은 내 인생의 실패는 너무나도 쓰리고 또 고통스러웠다.


나에게는 재수를 지원해줄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나 스스로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 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재수 비용을 마련하면서, 다음 수능을 준비하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 아는가? 정말로 20살 시절의 나는 아팠다. 


뼈가 으스러지고 이가 갈리고, 생활비, 재수 비용, 뭐 그리고 이것저것 잡다한 금액들을 다 감당하기 위해서는

정말 내 온몸이 아플 정도로 돈을 끌어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살의 재수 성적은 참담했다.


뭐 당연히 돈을 벌면서 수능을 했으니 현역 시절 때보다 성적이 더 나오지 않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다음부터는 악순환의 연속. 


보육원에서 쫓겨난 이후로 겪은 사회의 험난한 물살은 나를 점점 지치게 하였고, 점점 그런 시련을 겪을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갈수록 나는 점점…. 무너졌다.


고등학교 때 그런 성적을 받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내 성적은 점점 무너져갔지만, 나는 그런데도 수험 공부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번에 성적이 잘 나와서 샤샤 대에 아니 연연 대나 고고 대라도 좋으니 그런 대학에 들어가면 지난날의 고통을 전부 청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부터는 이미 공부가 아니라 도박에 가까웠다. 부질없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열심히 달려간 끝에 달려간 끝에 꾸역꾸역 연연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게 내 인생의 정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났다.


내 인생에서 제일 마지막 수험표를 받은 후에 나는 집에서 울고 말았다.


정확히 5년 고3 시절을 포함하면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동안 내 인생, 내 젊음, 그리고 내 청춘은 이미 절반의 시간이 흘러가 버린 후였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오니 내 인생에 남은 것이라고는 악밖에 남지 않았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거짓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냥 가진 자들이 아랫것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내뱉는 말치레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애초에 내가 사는 곳이 개천이라는 것도 의문스러워졌다.


그래 지금까지 내가 몸을 담고 있었던 곳은 개천이 아니었다, 그냥 더러운 구정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하수구였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지만, 하수구에서는 용이 날 수 없는 법이었다.


가재, 붕어, 개구리가 어떻게 용이 될 수 있단 말인지, 그렇게 억지로 마음을 잡으니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이 학교를 졸업해도 평생 하수구에 처박혀 있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내 발목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올라 내 목을 조르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지…?


25살, 또래 여자애들은 졸업하고 남자애들도 군대를 슬슬 졸업 준비를 할 시기에 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대학까지 포기하면…. 정말 내 인생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에 나는 대학교에 다녔다.

말이 대학교를 다닌 거지, 그냥…. 시체처럼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25살의 늙은 새내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 1학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잖아도 학과에서 깍두기 신세였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후배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입시를 위해서 투자한 돈을 만회하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20대의 절반을 공부에 때려 박았는데 장학금이라도 받아야지 않겠느냐는 이유였다. 

뭐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었다. 어떻게 장학금을 받으면 그만큼의 돈을 벌지 않아도 되니까. 남들은 개강파티다 뭐다 할 때 이렇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신세다.


그리고 나는 예리를 만났다.


"선배님 오늘 새내기끼리 파티 여는데 같이 가실래요?"


"누구신데요?"


"...선배…. 저희 같은 조잖아요."


처음 예리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과 나를 착각한 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런 늙다리에게 관심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어딨다는 말인가?


분명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게 분명하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예리, 분명 나와 같은 교양 수업을 듣는 같은 학과 여자애였다.


그래도 꼴에 후배라고 선배를 챙겨주는 건가?


어디를 가나 오지랖이 넓은 사람 한둘은 있는 법이었다.

이건…. 아주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보고 있던 전공서적에 시선을 거두고 내게 말을 걸어온 예리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날씨에 어울리는 그런 패션이었다.


전형적인 새내기, 새하얀 민소매 블라우스에 꽃무늬 미니스커를 입은 그녀는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짧은 단발머리, 길게 쭉 뻗은 눈썹과 짙은 쌍꺼풀, 그리고 햇볕을 가리는 가림막처럼 길게 쭉 뻗은 속눈썹과 커다란 눈동자, 그래 예리는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누군가에게 적의나 혐오, 질투, 원한 같은 건 품어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그 커다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런 느낌,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관심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면 예리가 갈 줄 알았다.

... 그러나 오히려 그녀는 내 옆의 빈 의자에 자리를 잡고 나를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아니겠는가?


"그럼, 저도 안 갈래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는 선명하게 내 귓가에 꽂혀 들어갔다.

그건 일종의 시위, 아니면 협박에 가까웠다.


"그럼 가지 말든가"


나는 읽고 있던 전공서적을 가방에 집어넣은 후 도서관 바깥을 빠져나갔다.


...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그녀가 나를 바라볼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서관을 빠져나가자, 예리 역시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가죽 재질의 핸드백을 챙겨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확히 다섯 걸음. 팔을 뻗어 잡으려 하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거리를 유지한 체 예리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같은 모습에 가까웠다.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지면 예리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척을 하였고, 내가 다시 앞을 보며 걸으면 그녀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는 했다.

... 예리 나름대로는 미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모양새가 매우 어설펐다.


대체 어디까지 따라오는 걸까…? 혹시 그녀도 볼일이 있어서 어디론가 가는 건데, 경로가 겹친 건 아닐까? 

그녀가 날 따라오고 있다는 건네 착각은 아닐까?


솔직히 그게 더 가능성이 있었다. 저렇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여자애가 뭐가 좋다고 나 같은 늙다리에게 꼬이겠는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원래 끼리끼리 논다고, 저렇게 예쁘장한 애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다줄 일이 없지 않은가…?


걷고 있는 보폭을 넓혔다. 그러자….


"강준 선배 같이가욧!!!"


내 뒤에 있던 예리가 그렇게 소리를 돌아오고 지르는 게 아니겠는가?


유리잔이 깨지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어서 경보를 하고 있던 내 발걸음을 따라잡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키도 거의 20㎝ 정도 차이가 났으니, 거기에서 나오는 보폭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게 분명하고.


예리가 내게 걸음을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살짝 숙인 뒤 나를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 걸음 속도를 따라잡기 힘든 모양이었는지, 예리의 피부가 잘 익은 복숭앗빛으로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오늘 뭐 딱히 약속도 없으시잖아요, 어차피 집에 가면 하릴없이 그냥 나오지도 않으면서…."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아이!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선배는 대학 생활을 즐기겠다는 거에요!! 

무려 청춘이라고요 청춘! 어떻게 이렇게 불꽃 같은 시기에 쾌쾌한 도서관에 처박혀서 공부나 하고 있는 게 이 시대를 사는 진정한 연연 인들의 삶의 태도란 말입니깟!!!"


"아니 그것보다 너 혹시 미행하느냐…?"


"애초에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선배 때문이에요, 

도무지 사람이란 거 눈치가 없어, 맨날 말 좀 붙이려고 하면 어디론가 휙 하고 사라졌다가, 또 강의만 시작하면 또 그림자처럼 휙 하고 들어오고


뭐 개강파티도 안가, 중간고사 쫑파티도 안 나가, 조별과제 단톡방에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강의 끝나고 조별 모임 있으면 조장 선배가 하라면 하는 대로 딱 과제만 재깍재깍 내고

그게 뭐예요 하나도 재미없잖아요! 그렇다고 딱히 선배 동아리 활동이나 그런 것도 안 하잖아요. 


좋아하는 것도 없어, 뭐 딱히 관심 있는 것도 없어, 주위에 친한 사람도 없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말을 걸고 싶어도 어떻게 말도 못 걸 것 같은 그런 분위기나 팍팍 풍기고 있고, 진짜 내가 오죽 답답하면 무슨 스토커처럼 남의 뒷조사나 하고 있어야겠냐고요.


제가 이렇게 남의 뒤 꽁무니나 밟는 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배가 잘못한 거에요.

뭐 강의 끝나고 맨날 어디 가나 했더니만, 여자 친구도 없던데, 그냥 강의만 듣다가 집에 가고, 또 강의만 듣다가 집에 가고


집, 학교, 집, 학교, 그게 뭐예요 다람쥐 쳇바퀴도 그것보다는 더 자유롭겠다."


"집하고 학교 말고 다른 데도 가고 있거든?"


이건 사실이다, 집이나 학교 말고 근처의 편의점과 슈퍼에서 캐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의 관심을 이렇게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소름 돋았다.


도대체 얘는 정체가 뭘까? 왜 이렇게 내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뭐 다단계? 보험사기? 아니면 신천지?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즈음, 예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내게 뭔가를 원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손짓.


"휴대전화 주세요"


".. 휴대전화는 왜?"


"우리 인간적으로 자랑스러운 연대 선후배끼리 연락은 하고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까까오 있잖아."


"아니, 그거는 전화가 안 되잖아요, 선배"


"보이스톡 있을…."


"아이!!! 그냥 달라고 주세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하는 예리 때문에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의 이목이 한 번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주름살 하나 없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는 예리의 성화에 못 이긴 나는 휴대전화를 그녀에게 주었고,


예리는 터치스크린을 몇 번 톡톡 건드린 후, 다시 내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 예리라니, 이 무슨…."


"갑자기 이렇게 밀어붙이니까 선배도 많이 당황스러울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선배…. 그럼 다음에 봐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제 전화 안 받거나 아니면 마음대로 연락처 이름 바꾸지 마요, 저 나중에 다 확인할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뒷걸음질을 치는 예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