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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망가져버린 남자 이야기 리메이크)


re:감정이 망가져버린 남자 이야기




새빨개진 눈으로 소리지르며 자식을 향하는 폭력을 막아내는 엄마.


엄마의 눈물 맺힌 눈처럼 붉은 얼굴로 빈 술병을 휘두르는 아빠.


장롱에 들어가 웅크려있는 진우.


씩씩거리며 문을 거세게 닫고 나가는 아빠.


이마에 흐르는 뜨거운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않고 진우를 껴안아 달래주는 엄마.


진우의 어릴 시절은 이러했다.


추운 겨울, 헤진 이불을 덮고 시시한 얘기를 나누며 엄마의 품에서 잠들 때, 진우는 엄마의 온기를 느꼈다.


상처뿐인 기억에 유일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추억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그날 또한 별 다른 것 없는 날이었다.


엄마의 고운 얼굴에는 새빨간 손찌검이 나있었고 부드러운 입술은 찢어져 피가 맺혀있었다.


"우리 진우. 뭐 갖고 싶은거 있어?"


고개를 젓는 진우의 손을 살포시 잡아낸 엄마는 마트에 가자고 했다.


마트로 가는 길에서 엄마는 진우가 학교에서 배웠다던 동요를 부르며 걸었다.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엄마는 많이 아파보였다.


분명 행복해야할 미소는 물감을 내린 것처럼 위태로웠다.


엄마를 보던 진우는 그저 동요를 더 크게 불렀다.


엄마도 진우를 따라 높혔다.


둘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속도를 낮추었다.


이 길이 영원했음을 바랐다.


"흐흐, 엄마는 우리 진우가 좋아하는 걸 이제야 알았네~"


마트에 들어와 빈 카트만 수시간째 끌던 둘은 장난감 코너에서 멈춰섰다.


진우는 잡았던 엄마의 손을 잠시 놓고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다.


용을 무찌르는 왕자와 옆에 선 공주, 그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왕비와 왕이 그려진 레고 왕국 세트였다.


진열대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던 손은 조금씩 내려와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레고를 잡았고 카트에 넣었다.


오천원 남짓의 레고였다.


"괜찮아. 괜찮아 진우야."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엄마가 다가와 담았던 레고를 내려놓고 왕국 세트를 카트에 담았다.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가격이 적혀있었다.


당황한 진우가 고개를 들었을때 엄마의 따듯한 포옹이 느껴졌다.


"우리 진우 사주고 싶은거 다 사주고 싶은데.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해주고 싶은데, 미안해. 이런 엄마라도 용서해줄거지?"


무릎을 꿇은채로 진우를 안고 있는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네. 엄마."


아직 어린 진우에게 엄마의 품은 시리게도 따듯했다.


"아구... 엄마는 이런거 전혀 모르겠는데. 역시 우리 아들은 똑똑해!"


5평 남짓한 집에서 나란히 앉은 둘.


가운데 거대한 레고가 있으니 약간은 허전했던 방이 가득 채워진 것만 같았다.


작은 레고조차 조립해 본적 없는 둘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먼저 바닥부터 천천히 쌓아올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자 그것조차 막혔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설명서를 꺼냈다.


글자를 읽는 속도가 느린 진우 대신 엄마가 맡았다.


"설명서 좀 읽어볼게. 엄마 혼자 설명서 읽어도 괜찮지?"


엄마는 설명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설명서를 코앞까지 갖다 대고 읽었다.


대부분이 그림으로 이루어진 설명서를 한참이나 읽었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읽는걸 반복했다.


엄마가 읽으려 설명서를 들면 넓은 설명서로 가려져 엄마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 읽었다며 설명서를 내리던 엄마의 눈은 어느 때처럼 새빨갰다.


그렇게 만들어 밤을 샜음에도 여러개의 성 중 딱 하나 밖에 만들지 못한 둘은 머쓱하게 웃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잠에 든 진우를 깨우는건 평소처럼 따듯한 엄마의 입맞춤이 아닌 열린 문에서 새는 찬 바람이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진우가 문을 열고 나오자 술에 취하지 않은 아빠가 식탁에 앉아있었다.


"가자. 짐 챙겨라."


아빠는 거대한 레고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없는 짐을 싸 차에 탔다.


어디로 가는지,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


아빠도 말하지 않았다.


덜컹이는 차에서 진우는 어제 엄마가 보던 설명서를 펴봤다.


엄마가 모르겠다며 한참을 들여다보던 설명서의 페이지는 가득 젖어 번져있었다.


다음장도, 다음장도, 다음장도.


맨 마지막장에 왕비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왕자의 그림엔 사랑하는 진우에게라는 짤막한 글씨만이 적혀있었다.


진우는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설명서에 남아있던 엄마의 눈물을, 그리워하는 아들의 눈물로 덮었다.


엄마의 흔적을 지웠다.


엄마를 지웠다.


*


백서연은 부쩍 한 신입이 신경쓰였다.


백서연에게 남자란 알기 쉬운 동물이었다.


본인은 아닌척하더라도 그들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떻게든 덮쳐보겠다는 마음이 심어져있다. 그것을 살짝 건들여주기만 하면 된다.


보호심을 자극하는 가녀린 이미지의 외형에 남자 여럿 울릴 외모는 그것을 더욱 쉽게 만들어주었다.


갖고 싶은게 있다면 호구 하나를 낚아 뽑고 버렸다.


어린 나이에 부장이라는 직위에 오른 것도 그런 영향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녀는 예쁜 여자로 낳아준 부모님에게 항상 감사했다.


역겨운 짐승들에 질린 백서연은 성관계를 한 번도 맺지 않았다.


사람 말하는 짐승과 교미를 나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적이 없다.


언제는 진지하게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닐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남자란 갖고 놀기 쉬운 장난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럴터였다.


"부장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백서연은 자신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약간 갸름한 외모와 적당한 몸매, 그리고 특유의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표정까지.


자신이 평소에 장난감으로 쓰던 남자들에 비하면 격이 달린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의 남자다.


"거기 잠깐만 서있어."


백서연은 짜증이 치미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김진우를 훑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감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남자 따위에 이렇게까지 머리가 복잡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런 길거리에 흔할 남자에게 말이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괜히 심장이 뛰었다.


"시발, 심근경색인가."

"예?"

"됐어. 신경 꺼."


백서연의 심정을 더욱 긁는 것은 그를 향한 유혹을 해봐도 전혀 넘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골골대는 80세 할배도 벌떡 일어날 정도의 구애를 해봐도 일부로 모르는척 하는건지, 정말 둔탱이라 모르는건지 반응 하나 없었다.


그가 가끔 표정의 변화를 보이는건 지갑에서 어떤 낡은 종이를 꺼내거나 인터넷에서 레고 관련 글을 볼 때 뿐이었다.


'이 백서연이, 레고 쪼가리보다 못하다는 거잖아.'


백서연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살짝 풀고, 사원증을 풍만한 가슴골 안에 집어넣은 뒤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머, 사원증이 가슴에 묻혀버렸는데 꺼내줄 사람 없나?"


D가 넘는 가슴을 천천히 그의 몸에 비벼가며 눈웃음을 지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깔보듯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진우는 그대로 목에 걸린 줄을 힘껏 쥐어 뽑았다.


"여기 꺼내드렸습니다. 왠만하면 목 밖으로 꺼내고 다니세요."

"꺄아악! 이, 이 미친새끼! 너! 일부로 이러는거지?"


남자의 악력으로 힘껏 꺼낸 탓에 와이셔츠의 단추들이 전부 뜯겨 떨어져나갔다.


벌어진 와이셔츠 틈으로 보이는 브래지어를 가리기 위해 팔로 상체를 싸맨 백서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기도 예상 못 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던 진우가 어쩔줄 몰라하는걸 보며 백서연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싶어 진우의 아랫도리로 향한 시선을 끝으로 백서연의 자존심은 산산조각났다.


정말로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너 고자야?"


분했다.


가슴이 뛰고 있음을 애써 부정했다.


*


한동안 회사를 뜨겁게 달군건 얼음 부장 백서연과 누군지도 모를 김진우라는 사원의 결혼 소식이었다.


워낙 말도 없고 회식에도 끼질 않아 사수나 같은 팀에 있던 사람들이 아닌 이상 인지도가 없는 탓에 대체 누가 백서연을 데려갔는지로 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것도 결혼 후 바로 퇴사하자 점차 식어갔다.


감히 백서연에게 물어볼 간 큰 인간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6년이 넘게 지나자 가끔 술자리에서 나올 정도로 잊혀졌다.


"잘 다녀와요."

"하아... 응."


백서연은 인사를 받고 회사로 향했다.


분명 나쁘지 않은 결혼생활이었다. 아니, 좋았다.


남편이 가진 취미란 레고를 맞추는 것뿐이었고 심지어 그것마저 같은 성 모양의 레고만 주구장창 맞추어댔다.


맥주나 마시면서 다큐 보듯이 남편이 맞추는 걸 보는 자신조차 구조를 전부 외울 정도로 해체했다, 조립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항상 깨끗하게 닦았다. 때 하나 묻어있지 않은 레고 조각에는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 가득했다.


레고 성을 보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공허한 것만 같았다.


다른 여자를 만나지 말라는 자신의 부탁 같은 강요로 퇴사 시킨 후 집안일만 전담시켰는데 썩 잘했다.


남자랑 자진 않았더라도 이런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게 꽤나 찔렸으나 진우를 만난 후로 남자 관계를 모두 정리했으니 된 것이라고 애써 다잡았다.


남편이 서연에게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였다.


레고의 처분과 관련된 건 꼭 자신과 먼저 상의해줄 것,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자신과 함께 할머니를 찾아 뵐 것.


하나 더 있다면 부모님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그냥 진우에게 부모님 관련 언급을 하면 급격히 어두워지는 표정이 보기 싫은 백서연이 지키는 암묵적인 규칙일뿐이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라 흔쾌히 수락했고 지금까지도 해오고 있다.


항상 신경질적인 자신을 따듯하게 감싸주는 그가 좋았다.


무슨 일이 있건 묵묵히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그가 좋았다.


하지만 사람이란 간사하게도 익숙한 것에 점점 고마움을 잃어간다.


"그래서 너 아직도 그 놈 만나니? 그 잘난 얼음 백소연이 대체 무슨 일일까?"

"입 닥쳐. 그 좆같은 말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네."


저 짜증나는 년 옆에 붙어있는 뺀질이가 K그룹 손주였댔나.


오랜만에 놀자해서 나왔더니 아마도 엿 먹이려는 속셈이었나 보다.


애써 독한 술을 들이켰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년이 낄낄거렸다.


"병신 같은 년. 그렇게 잘났다고 뻗댈 때부터 알아봤지. 결국 니 수준에 딱 맞는 새끼 만나서 잘 어울리는데 뭘."


꼬부랑거리는 발음으로 서연의 속을 긁을 단어들만 추려서 잘도 뱉었다.


쨍그랑!


"한 번만 더 내 남편 가지고 지랄 떨면 니 먼저 죽여버릴테니까 명심해."

"꺄악! 미친년아! 이 옷이 얼마짜린데!"


벽에 부딪힌 유리잔이 깨지며 소리를 울려댔다.


황급히 들어오는 가드들을 무시하고 택시에 올라 핸드폰을 켰다.


[누나, 어디에요. 벌써 세 시인데 괜찮은거 맞아요? 확인하면 문자 줘요.]

[사랑하는 남편♥ 부재중 전화 2통, 문자 3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 앞에 선 백서연의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정말 내 잘못인가?


나는 그냥 사랑했다고 생각한 남자랑 결혼했을 뿐인데.


내가 이런 취급 받는것도 다 얘 떄문 아니야?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뭔 생각을... 취했나보다.'


삑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탁에서 졸고 있는 진우가 보였다.


식탁에는 식은 저녁이 남아있었다.


괜히 서연은 울컥했다. 그것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야! 김진우! 내가 밥 차리지 말라고 했잖아!"

"쓰읍, 누나 왔어요? 그래도 술 마시고 그냥 자면 속 상해..."


짜악!


말도 맺지 못한 진우의 뺨이 돌아갔다.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의 진우를 보는 서연의 심정은 당혹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대체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분명 사과해야 할 상황에서 술기운 탓일까, 얄팍한 자존심 탓일까. 그가 듣고 싶어했을 말과는 정반대의 폭력을 휘둘렀다.


"대체 니가 하는게 뭐야? 하, 씨발. 야. 고작 집안일? 다른 년들은 좋은 병신 하나 꼬셔서 잘만 사는데. 하는 것도 그 조그만한 장난감 맞추는 딸딸이 밖에 없고."

"...누나 많이 취했어요. 우선 자요. 내일 얘기해요."

"놔! 이 무능한 새끼야! 니 같은 새끼랑 사는 내가 병신이지."


서연은 그대로 안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궜다.


애처롭게 방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 있었냐고, 괜찮은거 맞냐고 걱정하는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작 맞은건 자기일텐데 오히려 서연을 걱정하는 멍청하리만큼 착한 그를 향한 마음에서 점점 악의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이리도 뛰는걸까, 아니면


아, 모르겠다.


*


그날이 있은 후부터 둘의 사이는 굉장히 소원해졌다.


사실은 일방적인 단절이었으나 말이다.


진우가 애써 차린 아침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채로 너나 실컷 처먹으라며 비웃고 나갔다.


술에 절어 비틀비틀 돌아오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진우의 손이 닿는 것도 싫어해 서연이 아예 바닥에 뻗어버리고 나서야 간신히 옮길 수 있었다.


신경쓰일까 한두 번 하는 전화조차 짜증난다며 차단해버려 진우는 그저 아무런 일이 없기만을 바라며 밤을 새웠다.


아무런 연락 하나 없이 외박하는 날도 늘어났다.


가끔 일찍 들어오는 날도 진우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온갖 폭언과 폭력을 일삼으며 감정 쓰레기통으로 대했다.


멍이 없는 곳이 없었다.


"아가, 요즘 며늘아가는 왜 안 오니?"

"일이 바쁘데요.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네요."


병원 침대에 누워계시는 할머니와 옆에서 사과를 깎던 진우.


진우는 애써 웃어 넘겼다.


아빠가 맡긴 후로 서연과 결혼하기 전까지 자신을 돌봐주신 할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부디 할머니가 조용히 넘어가주시길 바랐다.


허나 수십 년 동안 진우를 돌봐온 할머니는 어딘가 비틀린 웃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이 길렀던 딸의 웃음과 똑같았다.


"혹시... 무슨 일 있니?"

"아뇨. 정말 아무일도 없어요. 저희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요. 할머니! 저 지금 갑자기 호출와서 먼저 가볼게요."


진우가 쫓기듯이 나간 병실에는 왕비와 왕자, 그리고 공주가 서로 사이좋게 앉아있는 레고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


"그냥 내가 다 버려버렸어. 왜, 혹시 불만이라도 있어?"


할머니에게 말했던 호출의 정체는 서연의 문자였다.


[집으로 와]라는 짧은 문자임에도 몇 달만에 처음 온 문자이기에 진우는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달려온 참이었다.


그런 진우를 반기는 건 분명 레고가 있어야할, 이제는 텅빈 방이었다.


서연은 우두커니 서서 그 어떤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 진우를 보고 더욱 화가 나 매도했다.


"병신새끼야. 너는 니 아내가 팔아버렸다는데 화도 안 나냐? 썅년한테 뭐라고 좀 해 봐. 욕이라도 해보라고!"

"...왜 그랬어요?"

"니가 맨날 갖고 노는 장난감 버리면 어떨지 궁금해서 그랬다. 이젠 좀 살맛 나디? 하필이면 한심해 죽겠는데 애새끼도 아니고 그딴거나 갖고 노는거 꼴보기 싫다고. 내가 어른으로 만들어줬..."

"...야, 백서연!! 넌 그게 나한테 어떤 의민지 알기나 해? 알기나 하냐고!"


눈물로 가득찬 그의 눈은 처음 본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격한 감정 반응을 보여주는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아닌, 이딴 아무런 가치도 없을 레고 쪼가리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몰라! 내가 알아야 해? 니 같은 새끼 만나서 망가진 내 인생보다 저딴게 더 중요하다고? 니도 마음 같아선 버려버리고 싶어. 아파트 쓰레기장에 던져놨으니까 그거랑 같이 제발 꺼져주라. 응?"


서연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어대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얼마 안 가서 버린 레고와 함께 들어와 사과하겠지.


이번엔 그래도 불쌍하니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받아줄까.


서연은 그가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렸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


소나기를 맞으며 쓰레기장을 뒤졌다.


설명서는 여러 조각으로 찢어졌으나 남아있었다. 소중하게 모아 품에 안았다. 나머지 조각을 찾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조각들이 많아서 찾기 꽤나 힘들었으나 이번 기회에 그녀와 얘기를 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설명서 조각을 전부 모으자 레고를 줍기 시작했다.


트라우마로 남은 엄마처럼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었기에.


언젠가는 그녀도 알아주지 않을까라는 희망 하나로 버텼다.


불행은 동시에 온다고 했는가.


얼마 안 가서 걸려온 전화는 진우의 너덜너덜한 마음을 완전히 깨트려버렸다.


[김진우 보호자님? 유감입니다. 현옥화 환자께서 방금...]


어릴적 용을 무찌르고 멋지게 공주와 결혼하여 살겠다던 꿈이 떠올랐다.


현실의 용은 진우에게 너무 거대했다.


그를 지켜봐줄 왕비도, 왕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왕자가 아니었다.


가슴이 뚫려 거센 바람이 통하는것만 같았다.


듣기 싫은 전화를 끊은 진우를 위로하는 것은 이미 떠난 엄마도, 아내도 아닌 하늘에서 새차게 내리는 비뿐이었다.


비가 멎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서연이 일어나 밖으로 나설때까지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 했다.


"병신,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사과는 안 하나 봐?"


진우가 있을 방문을 열며 평소처럼 표독한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 안에 진우는 없었다.


설마 싶어 옷장을 열었다.


몇 년 전에 서연이 사줬던 옷을 계속해서 입고 다니던 그다.


애초에 얼마 없을 옷조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갓 지은 밥이 차려져있어야 할 식탁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지, 진우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리 없어.


서연은 온 집을 샅샅이 뒤졌다. 나중에 가서는 침대 매트리스까지 엎어가며 그를 갈구했다.


그녀가 찾을 수 있던 것은 책상에 홀로 올려져있던 공주 레고 하나였다.


*


그가 떠나고 한동안은 괜찮았다.


어차피 먹지 않았을 밥도, 어차피 받아주지 않았을 인사도, 어차피 입지 않았을 다려진 옷도, 어차피 보지 않았을 그의 모습도.


분명 괜찮았어야 했을 그 모든 것들이 서연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이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 회사는 그만두었다.


나온 돈과 모든 돈을 전부 저금해두었다.


그가 해준 마음이 담긴 따듯한 밥을 먹고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고 싶었다.


무뚝뚝한 그가 사랑을 드러내 전해주는 인사를 받아 나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가 냄새를 빼고 다려줬을 옷을 입고 그의 넓었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와 함께 다정하게 레고를 맞추고 싶었다.


이런 자신이 너무나도 역겨워서 속을 긁어냈다.


팔과 다리엔 흉터가 없는 부분을 찾아내는게 더욱 빨랐다.


그가 좋아해주었던 가슴과 얼굴 부분은 건들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런 씨발련이라도 용서해줄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혹시라도 그가 돌아온다면 이 역겨운 몸이라도 바쳐서 잡아야하니까.


그런 그를 내가


푸욱!


칼날을 박았다.


제대로 박히지 않은 칼날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상처를 벌려갔으나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가 느꼈을 고통에 비하면 바다에 물 붇기였으니까.


오히려 이 몸에서 고통이 느껴지면 느껴질 수록 회개하는 느낌이 들었다.


도수 높은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상처에 부웠다.


격통이 몰려와 기절할 뻔 했으나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반복한다.


어느새 젖어가는 음부를 느낀다.


"으응... 진우님. 서연이가 잘못했어요.. 서연이가 잘 할게요.. 네, 거기잇! 조금만 상냥하흐읏!"


그의 크기와 딱 맞는 사이즈의 딜도를 꽂았다 빼며 왕복한다.


이것이 그의 자지라고 생각하며 애써 달랜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의 손길을 상상하며 절정한다.


침대가 피와 애액으로 흠뻑 젖고 나서야 간신히 수음을 멈추고는 약에 취해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


"...잘 지냈어요?"

"...그쪽은?"


인부들이나 입을 작업복에 묻어있는 마른 시멘트, 낡은 갈색의 가죽 작업화.


담배를 물고 있던 진우를 찾아온 것은 서연이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존댓말을 쓰는게 서연이고, 반말을 쓰는게 진우라는 점일까.


시선이 쏠리자 서연을 데리고 골목으로 돌아온 진우를 감히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자... 잘 지내셨나요? 저, 저는 진우님이 없어서 단 하루도 제대로 못 살았는데... 헤헤."

"갑자기 왜 찾아온 겁니까? 저 당신 다 잊었습니다. 할 말도, 미련도 없으니 돌아가주세요. 구역질이 나서 미칠것만 같으니까요."


진우가 돌아서자 서연은 깜짝 놀라서 그에게 매달렸다.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자 다급해진 서연은 아무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도, 돈! 진우님 다 드리려고 돈 엄청 모아놨어요! 진우님 한평생 돈 걱정없이 사실 수 있어요! 어... 어, 그리고 몸도! 딱 만지기 좋게 관리해놨어요! 쓰고 버리셔도 좋아요, 제가 알아서 임신하던 말던 다 관리할테니!"

"됐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세요."

"아아아아!! 할머니, 할머니께서 우리가 다시 합치시는걸 보시고 싶으시지 않을까요? 네? 제발!"


굳었던 진우의 표정에 분노가 가득했으나 한숨을 크게 내쉬는 것으로 참아냈다.


"할머니 돌아가실때. 내가 공주라고 소개했던 너랑, 아마 할머니한테는 왕자였을 나랑. 우리 둘이 잘 지내기를 바라셨는지 공주랑 왕자 레고를 손에 꽉 쥔채로 돌아가셨어. 그걸 깨트린건 너야. 제발 양심이 있다면 내 눈앞에서 사라져줘.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조용히 죽을테니까."

"아... 으아...  흐... 흐윽... 미안, 미안해요... 미안. 미안해요."


그녀는 어딘가 뒤틀려 보였다.


"주, 주인님! 저 주인님의 개가 될게요! 멍멍멍! 멍... 멍멍! 시키는대로 다 하고, 성욕처리도구로 써도 괜찮으니까... 제발, 제발,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진심으로 사랑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좋은 남..."


진우는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저, 저 같은 년에게 주인님보다 더 좋은 남자는 없어요."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주입된 약물에 점점 흐릿해져가는 시선 끝에 보이는 서연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주, 주인님... 오늘도 굶으시면... 안 되는데요."

"풀어. 너하고 할 얘기 없어."


의자에 묶인 진우와 풍만한 몸매를 부곽하는 메이드 복을 입은 서연.


원색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진우와 서연은 그의 분노조차 황홀하게 받아들였다.


"아, 안 돼요. 그럼, 주인님이 저 같은 년은 버리고 또 떠나실게 분명해요. 응, 그래요. 제, 제가 다 돌봐드릴테니까."


그의 몸에 얼굴을 비비며 축축히 젖어가는 음부를 손으로 거칠게 쑤시며 절정하는 서연을 경멸하며 바라보는 진우.


"하, 하으윽! 주인님은, 하응! 이런 저급한 년의 보지로는, 흐읏, 만족을 못하시겠지만, 흐우, 하아아앙! 죄송해요, 이런 불량품 보지라 죄송해요!"


서연은 이미 벗겨져있던 진우의 위로 올라타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그가 자신을 향한 분노와 경멸을 표출해낼수록 배덕감, 종속감 여러 가지가 합쳐져 절정을 이어갔다.


자신의 자궁에 세 발이 넘는 정액을 담고 나서야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아아아아아! 주인님의 씨가! 하나도 흘리면 안 되는데..."


보지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을 황급히 쑤셔 넣고는 딜도로 막았다.


자궁에서 느껴지는 충족감만으로도 절정할 것만 같았으나 치녀처럼 보일까 봐 애써 참아냈다.


만족스럽게 웃고는 진우의 다리에 앉아 그의 향기를 맡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시간 개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식사, 처리, 섹스, 식사, 처리, 섹스, 식사, 처리, 섹스, 수면


오직 그가 자신을 돌아보게 해줄 아이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임신 테스트기가 600개가 넘어갈 때 즈음엔 서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매일 성관계의 반복이었다.


차마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까 그것이 두려워 병원에 가 검사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눈을 뜨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강제로 쑤셔넣는 음식물과 그 처리만이 그가 죽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주, 주인님... 저 천벌을 받았나 봐요... 이, 임신이 안 돼요. 주인님이 다시 절 봐주실 기횐데... 왜, 왜, 왜, 왜, 왜!!"


신경질적으로 허리를 내려 찍었다.


"아, 아아아. 죄송해요. 주인님 잘못이 아닌데. 제가 잠시 미쳤나 봐요. 용, 용서해주실거죠? 안 미워해주실거죠?"


당연하게도 대답이 없었다.


서연은 환청이라도 듣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마워요. 역시, 주인님은 저 같은 년에게도... 아앗, 씨가 가득해요... 으응... 사랑해요."


다시 보지를 막고는 요도에 남아있는 정액까지 전부 빨아먹었다.


입에 남아있는 정액을 한참 동안이나 음미하듯 굴리고는 그에게 매달렸다.


"사랑해요. 좋아해요. 주인님과 함께 있게 되어 너무 기뻐요. 비록 제 잘못으로..."


원망어린 표정을 한 서연은 그대로 주사기를 자신의 허벅지에 내려 꽂았다.


"흐으윽... 맞아요. 그건 제가 아니라 다른 서연... 응... 제가 감히 주인님께 그랬을리가 없잖아요..."


또 하나의 임신 테스트기에서 한 줄이 떴다.


*


먹을 것을 들고 들어온 서연을 향해 진우는 몇 달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서연아. 밧줄이랑 수면제 좀 줄래?"

"...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의 둘은 기이하게 미소를 지었다.


밧줄을 들고 들어온 서연을 향해 고맙다고 웃는 진우.


서연도 황홀하게 마주 웃었다.


두 개의 밧줄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진우의 요청을 따라 묶인 구속을 풀었다.


문을 닫고 나가있어 달라하여 문 밖에 기대 서있자니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끼익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서연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서연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멎을때 즈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목 메달려 웃고 있는 진우가 있었다.


약 한 통을 모조리 입에 부웠다.


그가 안배해준 나머지 하나 남은 밧줄을 걸었다.


"아아, 사랑해요. 영원히."


또 한 번의 덜컹이는 소리가 들렸다.


목을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끼며 그와 입을 맞췄다.


다시는 이 감촉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연은 활짝 웃었다.


한참 후에 경찰이 신고를 받아 출동한 현장에서는 수백 종류의 왕자와 공주의 레고가 가득했다.


그들이 원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진우에게]라는 낡은 종이와 아기 레고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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