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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늑대인간이라 본인도 늑대인간으로 태어난 얀붕이가 있었어.


얀붕이는 어릴 때부터, '순혈 늑대인간'의 불편함만을 느끼며 살았어.


연필은 잘못 잡으면 부러져 버렸고, 그래서 연필 위에 테이프로 빙글빙글 감아서 쉽게 안 부러지게 해야 했었지.

종이 노트는 페이지를 넘기려고 할 때마다 찢어져 버려서, 마치 바늘귀에 실 꽂는 것마냥 섬세하게 종이를 잡아야 했어.

책가방의 어깨끈은 심심하면 뜯어져서 나중엔 그냥 한 손에 들고 다녀야 했고.



그래도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는 좋았어


남들이 툭툭 쳐도 걍 헤헤 웃다가

남들 장난이 심해진다 싶으면 그냥 의자를 손으로 잡고 휘어버려서 겁만 주고, 때리진 않았거든.

조금이라도 살짝 남들을 건드리면 걔네가 죽거나 죽기 직전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장난은 잘 받아주는데, 진짜 화 나면 감당 안 될 애' 라는 이미지가 생겨서

나름 괴롭힘 당하는 것도 없이, 무난무난하게 학교생활은 할 수 있었어.


'왜 나는 남들보다 강하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라고 우울해했지만

그걸 남들 앞에서 드러내진 않았어.



심지어

가끔은 밤이 되면 늑대인간으로 변해버려서

온 몸에 늑대 털이 돋아나고, 귀가 늑대 귀로 변하고, 이빨도 더 날카로워져서

남의 눈을 피해 방구석에서 얌전히 숨어있어야 했어.


적어도, 평범한 밤이면, 그렇게 참을 수 있었어.



그리고

정말 못 견디겠거나, 보름달이 뜨면

얀붕이는 정말 미친것처럼 산을 뛰어다녔어.



힘이 제어가 안 돼.

평소 때보다 보름달 때는 덩치가 더 커져버려서 더욱.



입던 옷은 찢어지고 걸음 한번 한번마다 조심하지 않으면 땅을 내려치듯 소리가 울리니까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싶으면 일단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산으로 달려야 했어.

보름달이 뜨지 않더라도, 너무 갑갑하면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산으로 달렸고.



산은 그나마 자유로웠어.

거칠게 뛰어다녀도 누구도 다치지 않아. 두 발로 뛰건, 네 발로 뛰건.

가끔 밭에 농작물 파먹는 멧돼지가 보이면 싸울 상대가 생겼다고 옳다꾸나 하고 갈 수 있어

가끔 이빨이 걸리적거리면 근처 바위를 씹어가며 이빨을 갈았어.


그리고 이런 삶을 쭉 살아가야 한다는게 너무 억울해서, 너무 서러워서

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다음날 '야 산에서 또 늑대가 짖었대' 하는 소문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처럼 얀붕이가 산에서 미친놈처럼 뛰어다니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나무에 밧줄을 메고 있는 것을 보았어.


'뭐지 시발'


저 여자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이 밤중에, 아무도 없는 산에서, 밧줄을, 잠깐만, 저거 자살 아녀?




곧 얀붕이는 근처 바위를 박차고 뛰어나가서

밧줄이 묶인 나무를 후려쳐서 꺾어버렸어.




얀순이는 그냥 죽고 싶었어.


간호사의 꿈을 꾸었고

그래서 간호대에 진학했었어.


성적 때문에 인서울을 못가서 지방대 간호학과를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선배들 갑질 때문에 얼차려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고


다 참고 졸업해서 병원에 들어갔더니

또 태움 때문에 마음 고생만 한가득 했는데


환자들은 술 먹고 지랄이 일상이고

선배들은 태움으로 자기들에게 스트레스를 풀고


그냥 죽을까 하고

밧줄 하나 구해다가 유서 쓰고

근처 술집에서 술 엄청 퍼마신 다음

밤중에 산에 올라왔어.


근데 뭔 괴물이 자기 옆을 훅 지나가더니

나무를 하나 부려뜨려 놓은 거야.


"뭐, 뭐야, 뭐에요? 뭐야?"


방금 전까지 죽고 싶었던 주제에

갑자기 괴물을 만나니까 살고 싶어졌어.


"살, 살려줘, 살려줘! 살, 읍읍!"


살려달라고 목청껏 외치려는데

괴물이 갑자기 자기에게 쑥 다가오더니

자기 입을 틀어막고


"저기요, 좀 조용히 합시다. 지금 나도 들키면 큰일나요. 누나, 아니아니, 아가씨. 뭐 이상한 마음 먹지 말고, 집에 가서 자요. 오늘 나 봤다는 얘기는 하지 말고."


라고 말하고

어느샌가 후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 앞에서 사라졌어.




얀순이는 전치 3주를 받았어.

나무 쓰러질 때, 가지가 이리저리 튈 때 거기에 부딫혀 다친 것과

입 막을 때 턱뼈가 살짝 어긋난 것과


그 외 기타등등 타박상들.



선배들이 지랄하는 것도 엿같고

그래서 그냥 퇴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에 하릴없이 누워있는데

그냥 병원 안 이리저리 멍하니 돌아다니는데


한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뭔지 모를 애가

병원에서 이사람 저사람 막 기웃기웃 하고 있었어.


얀순이는 본능적으로 느꼈어.


'쟤구나'


덩치가 산만한 거에 비해서

얼굴은 은근 순하고


다른 환자 찾으러 온 것도 아니면서

이 환자 저 환자 둘러보는 것을 보니


나를 찾으러 왔나 보구나.


입막음을 요구할까?

아니면 다른 걸 요구할까?

협박을 하러 왔나?


온갖 머리 속으로 회로를 돌리다가

그 남자가 자기랑 언뜻 눈이 마주쳤어.


그리고

남자가 도망갔어.


'???'


뭐야 저건.




얀붕이는 죄책감에 하루 종일 마음 상태가 안 좋았어.


살짝 입을 막았는데 턱에 막 붕대를 감고 있더라.

온 몸에 멍도 들었어, 세상에.


아무리 늑대로 변했었다고는 해도, 내가 힘 조절이 미숙했었나 보다 하고

사과하러 가야 하나, 아니 근데 나도 내 정체 남들에겐 밝히기 싫은데

아니 그래도 저 사람은 나 때문에 다쳤는데...




결국

얀붕이는 작전을 세웠어.


'음, 처음 만났는데 반했어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병원비 어느 정도 내주자. 간호도 해 주고.


애 다운, 구멍투성이인 작전이지만 뭐 어쩌겠어. 죄책감 씻어내려면 그런 것 밖에 없는데.




"저기요."


얀붕이는 그렇게 얀순이에게 말을 걸었어.


얀순이는 쫄았지. 올 게 왔나 싶은데


"저기, 누ㄴ, 아니 아가씨, 그 쪽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혹시 어디가 얼마나 다친 거에요? 간호해드릴까요?"


긴장해서 살짝 뒤집힌 목소리 때문에

얀순이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어.


'맞네, 목소리도 그렇고, 누나라 그러려고 그랬다가 아가씨라 그러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그 때 걔구나.'


그리고, 장난을 좀 쳐 보고 싶었어.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마침 턱이 잘 안 돌아가서 좀 힘든 참이었거든요. 에휴..."


모른 척 하면서

얘가 어떤 반응을 보이나 보고 싶었어.



처음엔 괜찮았어.

얀붕이는 병원에 매일 왔고

잔뜩 움츠려 있다가

얀순이가 뭐 해달라고 하면 해 주고 그랬어.


손을 벌벌 떠는 게 좀 귀여웠다고 생각했지.

마치 '이거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거 아냐?' 하고 행동하는 그 모습이.



그 다음에는 좀 무서웠어.


술 왕창 먹은 노친네 환자가

간호사들에게 쌍욕하고 지랄할 때

바로 앞에서 손으로 쇠파이프를 간단히 휘어버리면서


"아저씨, 병원 내에서는 좀 조용히 합시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러면서 진상을 제압하니까

순간 그 날, 그 괴물의 모습이 겹쳐보여서.



그리고 그 다음엔

질투가 났어.


간호사들이 자기들 구해줘서 고맙다고 이것저것 막 챙겨주는거야.

'어머, 귀엽네' 하면서 등도 토닥여주고.



보통 사람이면

그냥 그러려니 할 텐데


얀순이도 간호사였잖아.


그리고 얀순이는 태움 때문에 때려쳤었고.



자기 앞에서 썅년짓 하던 그 선배 간호사들과

이 병원에서 얀붕이에게 친절히 대하는 간호사들이 순간 겹쳐 보였어.


나한테는, 후배들한테는 존나 개지랄맞은 년일 거면서

얀붕이에겐 저렇게 여우짓을 하네, 저 씨발것들이...


이런 생각으로 서서히

얀순이의 마음엔 먹구름이 드리워졌어.



얀붕이는 그런 것도 몰랐어.

그냥 얀순이가 다시 서서히 표정이 안 좋아지길래 안절부절 못 했지.


얀순이는

2주 정도 얀붕이를 보면서

어느 정도 얀붕이를 파악해냈고

계획을 세웠어.


"하아... 우울증 때문에 힘드네..."


얀순이는 얀붕이 앞에서 거짓말을 했어.


"괜찮아요? 아, 아니, 괜찮아?"


"내가 말 놓으랬지. 나 늙어보이게 하려고?"


"아니아니, 그게 아니고..."


핀잔도 살짝 주면서

얀순이는 덫을 쳤어.


"진짜, 하아... 모르겠다. 가끔 살다보면 산에서 목 메고 죽고 싶을 때가 많아..."


"그렇게 말하지 마..."


풀 죽어버린 얀붕이 앞에서

얀순이는 속으로 웃었어.


"아, 몰라. 오늘은 기분이 영 아니네. 내일 퇴원하는데. 하... 걍 산에 가서 목 메고 뒤질까."


"......"




다음날 저녁, 퇴원 후

얀순이는 밧줄과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이번엔 맨정신으로 산에 올랐어.


밧줄은 미리 면도칼로 칼집을 내 둬서

조금만 무게가 실려도 끊어지게 해 뒀어.



그리고 서서히

나무에 밧줄을 묶고, 밑에 플라스틱 의자를 두고

주변에 인기척을 살피며 밧줄에 목을 슬쩍 집어넣고


'안 오나?'


이러면 나가린데.



멈칫하다가 실망했다가 순간 잘못 생각했었나 하다가


해가 거의 다 지고

걍 집에 갈까 하는데

저 멀리서 짐승 뛰는 소리가 들렸어.


오는구나


그리고 플라스틱 의자 위에 올라가 밧줄 안에 목을 메고

의자를 걷어차려는 순간


얀붕이가 나뭇가지를 후려쳐서 꺾었어.


비슷한 모양이지만

좀 달랐어.


전에 그 괴물은 나무 밑둥을 쳐서 꺾어버렸거든.

근데 얀붕이는, 인간 모습으로 나뭇가지 위 쪽을 쳐서 꺾어버렸어.



곧이어

얀붕이가 화를 내기 시작했어.


"죽지 마! 왜 그래, 대체! 우울증 치료 받을 때, 같이 옆에 있어줄게! 그러니까, 좀 이러지 마!"


얘는 날 걱정해주는구나.


속은 감동을 받았지만

겉은 그러면 안 되지.


"얀붕아... 나 진짜 힘들어서 그래..."


그러면서 얀순이는 슬쩍 옷을 벗었어.


"나 좀... 위로해줘... 너무 삶이 지쳐서..."


얀붕이도 아직 덩치만 컸지 순 애니까

쉽게 넘어오겠지

이쯤이면 슬슬 날 덮치겠지 했는데


얀붕이가 움직이질 않아.


"...?"


"아니, 저기, 그... 내가 손 댔다가 다치면..."


얀붕이의 머리속에선

아직도 얀순이가 얼굴에, 턱에 붕대를 감았던 그 모습이 생생했어.


서로 교착상태가 벌어질 때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얀붕이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어.


당황하는 얀순이에게

얀붕이가 말했어.


"그럼, 내일 보자, 내일. 알았지?"


다급한 목소리

굵어져가는 목소리


금빛으로 빛나는 눈.


"너 지금 가면 나 진짜 죽어버릴 거야."


얀순이는 그렇게 얀붕이에게 말했고

얀붕이가 우물쭈물 하는 새에


서서히 얀붕이의 덩치가 커지고

온 몸이 털로 뒤덮이고

이빨이 더 크게 돋아나고

귀가 늑대 귀로 변하고


"역시, 그때 그 괴물이 너였구나. ...어?"


... 잠깐, 그 날보다 더 커졌는데?



보름달 밑에서

얀붕이는 어쩔 줄 모른 채 주저앉았어.


얀순이는 어느새 얀붕이에게 달라붙어있었고


떨쳐 내는 건 간단했는데

그럼 얀순이가 다치잖아.


오늘은 하필 보름달이야.

힘 조절이 평소보다 더 안 되는 날.



"있잖아... 이래도 나 거절할 거야?"


얀순이도 어느새 얀붕이처럼 옷을 다 벗은 채로

얀붕이의 몸에 달라붙어서


서서히 얀붕이를 유혹하기 시작했어.


"이건, 이건 아니야... 좀, 진정하고, 우울증 때문에 그러는 거 같은데, 일단 마음 추스리고..."


처음이라서 당황하는 얀붕이에게

얀순이는 씨익 웃으며 몰아붙였어.


"내가 싫으면 떨쳐내."



싫은 건 아닌데

이런 건 아니야.


그런데 밀칠 수가 없어.

조금만 잘못 밀치면, 이번엔 최소 팔다리 골절상이야.




곧이어 얀순이가 입을 맞춰오기 시작했지만

얀붕이는 저항을 하지 못했어.


잘못 움직였다가

얀붕이의 이빨로 얀순이가 다치면 안 되니까


덩치 큰 얀붕이는 어느새 자그마한 얀순이의 밑에 깔려서

얀순이를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만해, 잠깐만. 이러는 건 좀 아니야... 아니 지금은 진짜, 나 지금은 힘 조절이 안 되니까..."


맨날 타인에게서 스트레스만 받고

선배니 직장이니 하는 인간들은 자기를 휘두르려고만 하는데


이렇게 자기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가 자기 하나 못 다뤄서 쩔쩔매는 것을 보는 얀순이는 웃었어.


이대로 얌전히 얀붕이가 당해도 좋아.

얀붕이가 자기에게 거칠게 대해도, 그러다가 다치면 얀붕이는 또 자기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어. 그런 애니까.


어떤 쪽으로 가도 이득이라고 생각한 얀순이는

얀붕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p.s. 자신이 약한 걸 오히려 이용하는 얀데레는 어떤가 해서 써봄.


소재 제공 및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yandere/8328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