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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벨라루스인의 시각으로 본 20세기를 보고 만든 것입니다.

 *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1909년, 포즈난 근교의 한 주택)


 나는 포젠 근교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어느 정도 직위가 있는 귀족작위를 가졌기에, 나는 큰 어려움 없이 클 수 있었다. 나는 막내고, 내 형이 2명, 누나가 2명이었다. 할아버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지방의 작은 귀족이었다가 공을 세운 덕에 더 큰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이어 군에서 복무하고 있었고, 내 큰형도 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작은 형은 곧 크릭스마리네(독일제국 해군)에 임관한다고도 했다. 두 누나는 내가 태어날 때는 학생이었다. 가족은 모두 행복했고, 모든 일이 잘 될것이라 생각했다.




(1914년, 서부 전선 중 큰형이 복무하던 지역)

 순식간에 전개된 나라 사이의 관계는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소용돌이 속으로 모두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시작될때는 사관학교에서 막 해군에 복무하기 시작한 작은 형도, 이제 어느 정도 군에 자리를 잡은 큰 형도, 군에서 큰 역할을 맡기 시작한 아버지도, 군에서 명예전역한 할아버지조차도 이 여름이 제국에 있어서 최악의 여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 큰 형은 다리를 다쳐 장애를 얻었다. 작은 형은 유틀란트 해전 이후로 본 사람이 없다. 나는 점점 어려워지는 집안 사정 때문에 형들과 누나들처럼 교육을 받지 못했다. 누나들은 화가와 작곡가라는 자신들의 꿈을 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의 집에서 바라본 거리)

 영광스러운 제국은 무너졌다. 조약이 효력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조국은 빛을 잃어버렸다. 내 고향 땅 포젠은 폴란드에게로 넘어가버렸다. 가족은 모두 베를린으로 집을 옮겼다. 제국은 무너졌고, 황제는 망명했으며, 국가에 남은 것은 전쟁의 상처와 끝도 없는 배상금의 빚더미였다. 베를린 시민들이 분노하며 어째서 강력했던 제국이 무너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버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도 분노한 시민들 중 하나였다. 어째서, 내 남편과 내 아들을 잃어가면서 지킨 나라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그게 왜 우리나라의 치욕으로 되돌아온건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은 잘나가는 군인 귀족 집안에서 몰락해서 가난한 노동자 집안이 되어버렸다.
 가족들은 나라도 어느 정도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교육을 시켰다. 나는 항상 보았던 것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인이 되고 싶었고, 사관학교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잃을 수는 없다며 사관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었고, 그 대신 육군이나 해군이 아닌 공군으로 복무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승전국들은 족쇄를 어느정도 풀었고, 폴란드는 자멸하기 시작하여 언젠간 국경을 지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 누나들과 큰 형은 공장 일에서 어느 정도 나은 일을 찾기 시작했고, 가족은 이제 행복을 되찾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자 온 가족이 축하해줬다.



(1929년,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거리 행진)

 실업자들이 넘쳐났고, 은행은 문을 닫았다. 돈으로 휴지를 사는 것은 종이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길거리에는 돈 뭉치를 가지고 블록쌓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일자리는 모두 사라졌고, 작은 누나가 일하던 연방 일자리만이 겨우 우리 집안의 수입이 될 수 있었다. 막 어른이 된 나는 조국이 다시 망가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10년 전 제국이 무너지던 것을 보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조국이 어떤 처지에 처해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군을 어느정도 늘릴 수 없었기 때문에 조종사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제국 시절이 훨씬 나았다고 이야기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는 뒤집히고 있었다. 투표를 하고 몇 달 있으면 다시 투표를 하게 되었다. 


(1935년, 나치 독일 베를린 연설장)

 그러자 조국을 구원할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국가의 경제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모두 일자리를 얻었다. 나는 불어나는 군대에 맞추어 조종사가 될 수 있었다. 국가에는 고속도로가 깔렸고,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졌다. 더러운 공산당원들은 그들이 모두 처리했다! 조국을 좀먹고 있던 자들이 모두 처리되었고, 나라는 날이 갈수록 강력해졌다. 마침내 조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가족들과 함께 경기를 보기도 하였다. 나는 조국이 이렇게나 성장한 것을 보고 기뻤다. 어머니도, 큰 형도, 두 누나도 조국의 구원자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서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도 조국의 구원자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독일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여자였다. 서로 마음이 맞았던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에 빠졌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너의 선택이라면 무조건 지지한다며 찬성했고, 아내의 가족도 공군 조종사인 나를 사위로 맞아서 기쁘다고 말했다. 우리 둘은 베를린에 집을 마련하고 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독일 민족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으니 하나로 모이게 해야 한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두개의 독일로 존재하던 두 나라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이제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판 외국에 갇혀있던 동포들도 조국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분해되었다. 이 조국의 영광의 순간에 태어난 내 아들에게는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조국의 기세에 눌려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고향을 뺏어간 폴란드의 차례가 되었다.


(1939년, 나치독일 점령 하의 포즈난)

 더러운 폴란드 놈들을 몰아내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폴란드는 순식간에 밀려났고, 소련도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폴란드를 밀어냈다. 폴란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로 포젠을 공격하면서 내 고향마을을 공중에서 바라보았다. 내 빼앗긴 고향을 다시 볼 수 있다니, 그것도 내가 태어날 때는 거의 없던 비행기로 하늘에서 볼 수 있다니 너무 기뻤다. 더러운 폴란드 놈들을 몰아내고 가족들은 고향 마을에 갈 수 있었다. 조국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지역들은 독일인들이 다시 깨끗하게 닦아내고 개발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큰형의 가족은 포젠에 계속 살기로 했고, 누나들과 나는 베를린에 계속 살기로 했다. 조국은 노르웨이를 손에 넣으며 더욱 강력해져갔다.
 나는 서부로 발령받았고, 나는 가족과 잠시 떨어져 생활하기로 했다. 프랑스는 손쉽게 무너졌다. 치욕스러운 조약은 완전히 갚아졌다. 잃어버린 땅은 모두 되찾았고, 나는 마지막 남은 적인 영국과 싸우기 위해 런던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빛나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것도 할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계속해서 버텼고,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지만 항복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 있으면 그 영국조차도 우리 발 아래에 놓이리라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1941년, 나치 독일 점령 하의 폭격당한 민스크)

 좋아! 좋아! 좋아! 나는 동부로 발령받았다. 더러운 공산주의자들을 쓸어내고 그 땅을 빛나는 조국을 위해서 쓸 것이다! 나는 빨갱이들을 씻어내기 위해 동쪽에 폭탄을 퍼부었다. 강력한 조국의 군대는 우리 민족을 위한 땅을 개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깝게도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조국의 군대는 조금 더 준비를 하기 위해 잠시 후퇴했다. 나는 그 동안 레닌그라드를 폭격하는 임무를 맡았고, 빨갱이들의 건물을 가루로 만들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나는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하는 임무에 배정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건물들은 무너졌으며, 우리 조국의 군대는 이 도시를 점령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해야 할 군대를 이끌던 지휘관은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스탈린그라드 폭격 임무가 끝나자 다시 서부로 배치되었고, 가끔씩 넘어오는 영국과 미국의 비행기들을 격추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나는 조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원한 영광을 얻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륙한 연합군을 막지 못했고, 나는 그들을 막기 위해 비행기를 몰고 출격했지만 격추당했다. 다행히 탈출할 수 있었던 나는 포로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들이 전하기로는 얼마 있지 않아 조국이 패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럴 수 없다! 조국의 강력한 군대는 조국을 무한하고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 것이란 말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 두번째로 겪는 조국의 패망을 경험했다.


 (1945년, 연합군 점령 하의 베를린)

 조국은 패망했다. 영광스러움 따위는 남지 않았다. 조국은 더 찢어졌다. 더러운 폴란드놈들에게 넘어간 땅은 더 많았다. 내 고향인 포젠은 더 이상 포젠으로 불릴 수 없었다. 이름도 잃어버렸다. 나는 내 조국이 패망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알고 있었다. 겨우 일으킨 나라가 또 쓰러진다면 정말로 일으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신분 상 장교였고, 또 나치당원이었기에, 전범 재판으로 넘겨졌다. 나는 임무를 단지 수행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린 적은 없었고, 단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기에, 몇몇 단서를 넘기는 조건으로 1949년에 완전히 풀려날 수 있었다.
 조국은 조각났다. 4개로 조각났다가 3개, 2개로 붙었고, 오스트리아는 더 오래 4조각으로 나뉘었다가 붙을 수 있었다. 서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나는 내가 원하던 조국의 미래가 이런것인지 생각하며 침울해졌다. 그리고 포젠, 또는 포즈난이라고 하던가, 에서 살던 큰형의 가족과 어머니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폴란드인에게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멀쩡히 살아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서베를린에 도착하자 아내와 이제 10살이 되어가는 아들은 잘 살아있었다. 하지만 누나들이 보이지 않아 수소문을 했고, 작은 누나가 동베를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큰 누나를 베를린 전투 이후로 볼 수 없었다고 작은 누나는 말했다. 다행히 큰형의 아내와 아이들은 베를린으로 피난을 와서 잘 살아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큰형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작은 누나의 가족과 큰형의 가족, 그리고 내 가족은 (어느 방향이든) 베를린에서 각자 집과 일자리를 얻어 살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전쟁으로 가족들을 많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조종사는 하기 싫었지만 그 일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이었기에 국내와 주변 가까운 나라들 사이를 잇는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1954년 월드컵 결승, 서독 대 헝가리, 결과는 3:2로 서독의 승)

 골! 골! 골! TV로 볼 수 있었던 이 멋진 경기는 침울해져 있던 독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서독에 사는 우리들은 동독으로 어느 정도 건너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나와 큰형의 가족은 동베를린으로 건너가 같이 경기를 볼 수 있었다. 독일은 빠르게 재건될 수 있었고, 희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두 번의 절망으로 배울 수 있었다. 독일을 무한하고 영원한 영광으로 넣겠다는 사실은 독일을 패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변 국가와 잘 지내는 것이 또 다른 영원한 영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점점 성장해가는 독일에서 살면서 나는 좀 더 좋은 집으로 이사갈 수 있었고, 멋진 국산 차도 운전할 수 있었으며, 아들도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시킬 수 있었다.



(1965년, 서독 베를린)


 나는 내 고향인 포즈난으로 가는 비행기를 운전한 적이 있다. 공산주의 체제 위에서 세워진 국가라 하더라도 완전히 빗장을 걸어 잠그고 사는 일은 없으니 종종 이런 비행 기회가 생기곤 한다. 비행 일정에 따라 파리에서 출발하여 포즈난으로 갔는데, 내가 나고 자랐던 곳은 흔적도 없이 바뀌어버렸다.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 거리에서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 거리는 잊을 수 없다.  난 아버지와 작은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며칠간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다음 비행 일정에 따라 비행기를 몰았다.

 엔지니어가 된 내 아들이 설계한 차로 차를 바꿔 탔다. 그리고 그 차를 타고서 유럽 이곳 저곳을 아내와 같이 여행하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폭격한 장소 몇몇이 재건되어 말끔한 도시로 바뀐 곳을 여행하다니 정말 묘했다.



(1980년, 동-서 베를린간 경계의 베를린 장벽)


 은퇴한 나는 아내와 유럽 여행을 종종 다니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리스본부터 헬싱키까지 달리는 여행은 그 중 가장 재밌었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차를 타고 종종 동베를린으로 건너가곤 했다. 대부분은 작은 누나와 작은 누나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작은 누나를 만날 때 약간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긴 했어도 건너갈 수 있었지만, 작은 누나는 동베를린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려면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이쪽의 청년들이 장벽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손자들 중 하나가 장벽에 낙서를 예술적으로 한다고 하는데 나는 다 그게 그것 같아 보인다. 내 손자와 손녀들은 징기스칸과 Boney M, ABBA와 같은 밴드들이 좋다고 따라다니고는 한다. 내가 그 나이에 들었던 음악들과는 전혀 다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독일이 하나다! 44년 전의 끔찍한 일들로 인해 벌어진 것들이 모두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고향 마을에 다시 살 수 없었고, 가족들도 두번의 전쟁으로 잃었으며,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 있는 많은 것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는 독일이 전쟁을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네오나치들은 자신들이 나치인 것 마냥 소리치고 다닌다. 그러면서 전쟁에 참전했었던 나를 보고서는 망할 영감탱이라고 한다. 그들이 확실히 잘못되었다고 난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미쳤다. 전쟁을 두번이나 겪은 나로써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제 독일은 주변 국가와의 협동으로 확실하게 성장할 것이다. 나는 이 땅에서 다시 총알이 날아드는 일이 없다며, 영원한 영광을 모두가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 손자는 베를린 장벽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망치를 들고 나가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자의 친구들은 불도저를 들고 와서 부수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독일은 분단에서 벗어났고, 작은누나도 마음대로 내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아마 이제는 이 땅에서 평화가 완전히 뿌리내릴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