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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고 필 받아서 썼음


***


얀은 베틀 앞에서 무릎 꿇었다.


이곳이 그의 종착역이었다.

지령을 쓰는 자가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답,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지령에 의해 희생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해답,

그 잔혹한 종이조각을 전달하는 것이 그여야만 했던 이유.


노력하는 자는 방황하기 마련이니,

계속해서 묻고 또 방황해온 그는 비로소 해답을 마주한다.


우우우웅-


도시의 심장 박동이 다시금 추를 움직여 베 위에 불가해한 문양을 그린다.

베가 기괴한 기계 안에 들어가자 깨끗한 종이 한 장이 이윽고 기계로부터 흘러나왔다.

그가 지금껏 전달하던 바로 그 종이였다.


"결국, 뭐, 그런 거죠."


모이라이는 종이를 흔들며 빙긋 웃었다.


"지령을 쓰는 건 도시의 의지예요. 지령을 내리는 존재 같은 건 없어요."


모이라이는 종이에 인장을 찍고는 파이프 앞으로 다가갔다. 파이프 안에 종이를 내던지듯 넣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진 저도 몰라요. 도시에게 정말로 의지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이 모든 설비를 설계한 사람에게 어떠한 의도가 있었던 걸까요? 저에게도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가 있었죠."

"있… 었죠…?"


얀의 의혹 어린 시선이 모이라를 향한다. 모이라는 이에 다시금 빙긋 웃어보였다.


"네, 있었어요. 대체 어떻게 이 괴랄한 시스템이 생겨난건지, 왜 이런 종이 쪼가리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건지, 골이 아플만큼 궁금해하곤 했었죠."

"근데, 왜…"

"왜, 그만뒀나고요? 글쎄요…"


우우우웅-


다시금 도시의 심장 박동이 추를 움직인다.

우연일까, 그 진동에 조명이 흔들리며 모이라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편이 편하니까?"


그 순간, 모이라는 그저 하나의 인영에 불과했다.

특징도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하나의 검은 인형.

얀은 그에 연결된 수천 가닥의 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얀, 그 자신에게도 각인처럼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실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의지.

그 총체가 그 잔인한 지령들을 내렸던 것이다.


도시의 사람들이 그 참사를 원했던 것이다.


그 순간, 얀은 깨달았다.


사람은 다만, 잔인한 존재다.

잔인한 존재이기에, 이런 참혹한 결과를 원했고,

그 결과는 지령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 모든 게, 그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를 증명하고자 한 얀의 노력은, 발악은, 수많은 아픔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그의 삶이,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얀은 무너지듯 바닥에 웅크렸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울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딴 걸…


[너도 편해지면 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가슴에 차분히 스며오는, 가랑비 같은 목소리.


[자유 의지라는 게 정말로 중요해? 그토록 많은 날을 번민으로 보내고, 죄책감에 괴로워할만큼?]


속삭임이 진정으로 달콤할 수 있음을, 얀은 그때서야 알았다.

마치, 녹아내린 초콜릿이 심장 위에 툭,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의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게 너를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아, 가슴이 따스해진다.

몽롱한 행복감이 머리로 퍼져나간다.


[그냥, 따라가는거야. 머리를 비우고… 마음도 비우고… 시키는 대로.]


[나는 네가 상처 받지 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래, 이미 그는 충분히 아팠다. 충분히 번민했다.

이제는 안식을 찾아도 좋으리라. 이제는 편해질 자격이 있으리라.


[그래, 얀. 눈을 감는 거야. 편해지는 거야…]


얀은 그리 했다.

눈을 감고, 편안하게…


-정말로 그러한가?


비단을 칼로 찢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녹아내린 사탕처럼 엉겨붙었던 사고들이, 단번에 얼어붙는다.


-정말로 그 모든 악행이 다만, 인간의 본성이 잔인하기에 그런 것인가? 한 명의 의지란 무의미한 것인가?

[아인, 조용히 해.]

-직면하라. 찾아라. 구하라. 정말로 그것이 진실이었는가?


돌연 나타난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신경에 거슬렸다.

얀은 목구멍 안쪽을 간질이는 짜증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진실이야."


[안 돼, 얀, 대답하지 마.]

-어째서 그러한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점차, 거친 목소리에 지워져간다.

아니, 어쩌면 얀 그 자신의 분노에 묻혀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확인했잖아! 지령은 우리의 잔인한 본성의 표출이야! 우리가 그런 악행을 원했던 거라고!"

-정말로 그러한가?

"그게 무슨…!"

-도시의 소음이란 무엇인가?


거친 목소리는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걸음,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기계를 돌리는 소리, 마음에 위안을 얻기 위한 노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내지르는 비명, 아이와 놀아주며 터트리는 함박 웃음, 칼을 맞고 죽어가는 자의 신음, 새 직장을 얻은 자의 상쾌한 콧노래.


-도시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허공에 새기는 삶의 흔적이자 표현.


-그것은 정말로 잔혹함을 원하는가?


-잔혹함은, 단지 살고자 하는 본능, 그로부터 비롯된 방어 기제의 부산물이 아닌가?


"닥쳐!"


얀은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격분하여, 소리 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열로 들뜬 머리로부터 담아두었던 말이 곧장 혀로 쏘아져나갔다.


"설령, 그렇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데?! 결국, 개인의 의지란 건 무의미하잖아! 나도 증명하려 해봤어! 나도 증명하려 해봤다고!!"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얀은 지령을 조작했다.

지령의 의지를 거스르려 했더랬다.

그러나, 그 시도는 결국, 그가 지령의 의지에 매여있음을 재차 증명할 뿐이었다.


그의 반역조차 지령에 담겨있었다면,

그의 의지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정말로 네 의지는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뭐…?"


언제부터였을까, 거칠었던 목소리는 어느새 무뚝뚝한 남자의 것으로 변해있었다.


-너는 지령을 조작하여, 검지의 의지를 거스르고자 했다. 그러나, 지령은 이에 네 조작된 지령을 따르라 조직원들에게 명했다.

"그걸 어떻게…?"

-그렇다면 이것은 지령이 네 의지에 응한 것이 아닌가?


얀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는 마치 강의를 하듯 거침없이 질문을 이어갔다.


-너는 계속해서 지령의 정체를 알고자 했다. 지령의 의미와 그 의도를 알고자 했다. 그리하여, 지령은 너를 이곳으로 인도했다. 지령의 정체가 있는 곳, 지령의 기원으로.

"…"

-이 또한 지령이 네 의지에 답한 것이 아닌가?


사고가 엉킨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이 흔들리고 무너져내린다.


"궤, 궤변이야… 그딴 개소리를…"

-얀, 너는 이곳에 와서 진실을 마주했다. 지령을 움직이는 것은 도시의 소음이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협주곡이다.

"다, 닥쳐… 나는…"

-그리고, 얀, 너 또한 그 협주곡의 일부다.


그 말은 천둥과 같이 얀의 상식을 무너뜨렸다.

그에게 있어, 도시 사람들에게 있어, 도시란 개별적인 존재였다.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사람을 집어삼키는 잿빛 괴물이었다.


그러나, 도시를 이루는 것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직면하라. 찾아라. 구하라.


-구름을 한 조각 떼어낸다 하여, 그것이 구름 아닌 것이 되겠느냐? 바위로부터 떨어져 나간 조각이 돌 아닌 것이 되겠느냐?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총체이며, 또한 일부이니. 만약, 이 지령을 만드는 것이 도시의 의지라면, 그 의지 속엔 네 것이 없겠느냐?


-네 의지는 무의미하지 않다. 네 선택은 유효하다. 삶은 운명의 궤적이 아닌, 선택의 집합이다.


무너진 생각들이 마른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린다.

지금껏 얀을 감쌌던, 두터운 껍질이 뜯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니, 답하라.


-네 죄는 무엇이냐?


죄, 그것은 도덕과 함께, 도시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어였다.

모두가 그를 담았기에, 모두가 어느샌가 잊어버리고 만 단어였다.


그러나,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얀은 그를 더없이 친숙하다 느꼈다.


부조리한 지령으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 받았을 때,

지령을 수행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갔을 때,

얀이 그저 시선을 피하며 그 모든 우행을 방관했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에서 피어났다.

깊이 뿌리 내려, 그를 지금껏 움직이게 했다.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


"나는…"


비로소 눈물이 걷히고,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은, 그의 손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그를 이 곳으로 인도한 지령 또한.


"내 죄는…!"


얀은 주먹을 쥐어, 지령을 구겨뜨렸다.


그 악행을 방관한 것은 누구였는가.

때론 그 악행을 거든 것은 누구였는가.

그 죄책감을 지령 따위에 떠넘긴 건 또 누구였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걸… 그 많을 사람들이 아파했던 걸… 이딴 망할 종이 쪼가리에… 이딴 별 것도 아닌 것에… 그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입니다…!!


목소리는 그 외침에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앗다.

다만, 조금은 상냥해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면하라. 찾아라. 구하라.


-그리고…


-선택하라.


그리고, 목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얀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혼자 중얼중얼… 혹시 정신이라도 나간거야? 그러면 곤란… 어?"


얀은 제 망토를 고정하던 옷 핀을 뽑았다.

그리고는, 그 핀의 끝을 제 눈으로 향했다.


"잠깐…!"


푸욱-!


시야가 핏빛으로 물든다.

조각난 눈알이 그의 두 눈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미, 미친 거야…? 자신의 눈을 핀으로…!"


그러나, 얀은 이제 그 어느때보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검은 정장은 남루한 로브가 되었고,

대검은 한낱 지팡이가 되었으나,

검을 옭아맸던 사슬은, 이제 그의 발목에 감긴 채, 바닥에 늘어지고,

그의 눈 안엔 별빛이 서린다.


E.G.O 발현,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예언된 삶을 살았으나,

자신의 파멸만큼은 제 손으로 이룩해냈다.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는 거대한 흐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얀은 지팡이로 추를 후려쳤다.


터엉-!


추가 격하게 흔들리며 베 위에 잉크를 흩뿌린다. 모이라이는 창백한 표정으로 재빨리 베를 향해 달려갔다.


"뭐, 뭐하는 짓이야!! 이랬다간 지령이…!!"

<내가 곧 도시이니, 이 또한 도시의 의지라.>

"무슨 미친 소리를…!!"

<지령을 만들라.>


묘한 울림이 지닌 말이었다.

식은 땀을 흘리던 모이라이는 문득, 베 위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수년간 지령을 만들어온 모이라이이기에 알 수 있었다.

추가 인위적으로 움직였음에도, 그 문양은 평소의 그것과 비슷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지령을 만들라.>


모이라이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베를 잘라내, 그를 기계 안에 넣었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기계는 전과 동일한 지령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현 시간부로, 검지의 전 조직원은 얀 비스모크의 명령을 따른다.

그리고, 모든 방직자는 제 업무를 중단한다.-


모이라이는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느끼며 얀을 바라보았다.

얀은 별빛이 서린 눈으로 천장을, 아니, 도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도시의 잔혹함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방어기제라면.

겁 먹은 사람들이 휘두르는 칼날 끝에 불과하다면.


그가 도시를 안전하게 만드리라.

도시의 의지가, 공포가 아닌 친절함을 품게 하리라.


얀은, 그리 선택했다.


***


들: 들려주어

박: 밝게 하다.


그러니까, 암튼 들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