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놈의 도서관이 이러냐, 말만 도서관이지 책으로 이루어진 미로네."


검은 정장을 입은 흑발의 시종, 롤랑은 머리를 헝클이며 중얼거렸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을 이 도서관에서 지냈건만, 이놈의 도서관은 다닐 때마다 새로운 곳만 나타나는 것 같았다.


벌써 롤랑이 이 도서관에 무단침입하여 앤젤라에게 잡힌 지도 2주가 넘었다. 처음 도서관장이라는 앤젤라와 만났을 때 사지가 전부 잘려나간 것도 이제는 추억이었다.


그간 롤랑은 이 영문모를 '도서관'이란 곳에서 지내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었다. 초대장을 통해 이곳에 오는 손님들을 물리적으로 접대해주고, 말쿠트나 예소드 같은 지정사서들과 이야기하고, 사서답게 책도 정리하고. 몇 번 죽기도 했지만 이 기묘한 장소와 사디스트 도서관장은 죽음조차 롤랑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드물게도 앤젤라가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날이었다. 지정사서들 말로는 가끔 이런 날이 있다고 하는데, 그냥 한가롭게 쉬려는 롤랑에게 신기하게도 앤젤라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호드가 담당하는 문학의 층, 그곳의 구석탱이로 가보라고. 말이 가보라는 거지 그냥 명령이었다.


그렇게 롤랑이 문학의 층에 온 지도 벌써 1시간이 넘었다. 분명 호드에게 안내를 들었는데도 전부 개성없이 똑같이 생겨먹은 책장들 때문에 길을 잃은 듯 했다.


"아.....일단 가긴 가야 하는데."


이대로 가지 않았다가 그냥 돌아가면 진짜 앤젤라에게 팝콘기계인간이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던 롤랑은 다급히 몸을 움직이며 책장 사이를 뛰어다녔다.


"근데 보면 알 거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냥 구석탱이라고 하길래 정확히 어디냐는 합리적인 질문을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호드에게 했건만, 호드도 어색하게 웃으며 보면 알 거라는 말만을 남겼다. 그나마 지정사서들 중에서 정상인 쪽이라 생각했던 호드마저 롤랑의 기대를 배신한 것 같아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턱. 한참을 뛰어다니다 지친 롤랑은 근처의 책장을 몸을 기대었다.


어쨌든 오늘 안에만 가면 되겠지. 체념한 롤랑이 고개를 떨궜다.


딸랑.


".....응?"


딸랑. 딸랑.


...종소리?


이 도서관에서 날 리 없고, 또한 들을 수 있을 리 없는 소리가 책장 사이에 울려퍼졌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짐작한 롤랑이 옆 책장에서 백과사전 하나를 빼들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 게, 모서리를 찍으면 충분한 살상력을 자랑할 것만 같았다.


그대로 백과사전을 두 손으로 꽉 쥔 롤랑이 침을 삼키며 종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딸랑.


묘하게 문학의 층과 어울리는, 청량하고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시원한 소리였다.


대략 3분 정도를 조심스럽게 걸은 끝에 마침내, 바로 앞의 책장 뒤쪽에서 종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그리고.


".....집?"


책장들 사이에 정말 눈에 띄게 위치한 집 하나를 보고, 롤랑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또 뭐냐고....




*




딸랑.


"어서오세요, 손님."


"....이건 또 뭔..."


호기심과 각오,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 집 안으로 뛰어든 롤랑을 맞아주는 건, 깊게 눌러쓴 후드 점퍼로 얼굴을 가린 채 롤랑과 같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백과사전을 움켜쥔 채 막 휘두르려는 자세를 취한 롤랑을 보고도 살짝 보이는 입으로 미소지은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여긴 뭐야?"


"보시는대로, 평범한 바(Bar)랍니다."


"아니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그래, 여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명백한 술집, 바(Bar)였다. 그야 여러번 바에 가본 롤랑이기에 당연히 안다.


가게는 그리 크지 않았다. 테이블은 고작해야 2개 뿐이었고, 카운터석에도 4명이 겨우 앉을 법한 작은 술집이었다.


하지만 천장에 달린 조명은 은은한 빛을 내며 가게의 분위기를 띄웠고, 나무로 된 마룻바닥과 벽돌로 인테리어된 벽, 그리고 카운터 뒤에 위치한 수많은 술들이 진열된 찬장이 이 바가 평범한 바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만약 도시에 이런 바가 있었다면, 술 맛이 좀 별로라도 바로 단골이 되었을 만한 훌륭한 바였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대체 왜 도서관 안에 바가 있냐고. 너무 뜬금없잖아."


"글쎄요? 저도 초대장을 받았을 뿐이랍니다."


"....뭐?"


초대장을 받아 들어왔다고? 그럼 책이 되야지 왜 술집을 하고 있냐.


"전 싸우는 법은 모릅니다. 잊혀진 칵테일 제조법들이 담겨진 책이 있다길래 혹해서 초대장을 받았는데....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죽을 뻔 했었죠. 다행히 도서관장님과 지정사서 분들께서 제가 만들어드린 칵테일을 마음에 들어하셔서 이곳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헐."


그러니까 칵테일이 마음에 들어서 살려줬다고? 이렇게 가게까지 만들어주면서? 그나저나 앤젤라는 기계인데 술 맛은 아는 건가?


수많은 의문들이 섞여 뇌가 과부하된 롤랑은, 곧 그래 나도 모르겠다 라며 중얼거리고는 카운터 쪽으로 와 앉았다.


"그냥 모르겠다. 납득해야지 뭐."


"도시에서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그 말도 맞긴 한데...."


확실히, 하루에도 수많은 개짓거리와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수백 번은 우습게 일어나는 도시에선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도서관 생활 때문에 머리가 평화에 찌들었나? 불평하던 롤랑은 곧 후드를 쓴 남자,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보기에는 자신보다 어려보이지만, 그 깐깐함의 극치인 앤젤라가 마음에 들어할 만한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다. 분명 실력은 믿을 수 있겠지.


"뭐, 아무튼 잘 됬네. 여기서도 술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도서관에 속하신 분께 모든 주류는 공짜입니다. 원하시는 칵테일이 있으신가요?"


"역시 처음 오는 바에는 진 토닉(Gin Tonic)이지."


"바로 만들어드리죠."


바텐더는 입가에 미소를 띈 채로 찬장을 뒤지더니, 이내 푸른색의 술병 한 병을 꺼내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스타 오브 봄베이(Star of Bombay), 술병의 상표를 읽은 롤랑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봄베이 사파이어(Bombay Sapphire) 브랜드네? 꽤나 프리미엄 진으로 골랐는걸?"


"전 진 토닉에 무조건 봄베이 사파이어 브랜드를 사용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가장 맛이 훌륭했기에."


진 토닉은 진에 토닉워터를 섞으면 끝인, 아주 간단하고 일반인들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칵테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애주가들 사이에서 '바 판별기'라 불리는 칵테일이기도 하다.


진 토닉은 간단한 만큼 만드는 바텐더의 실력이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인데, 어떤 진을 사용하는가, 진과 토닉워터의 비율을 어떻게 맞추는가, 각각의 용량은 어떠한가, 만드는 시간은 어떠한가 등등으로 바텐더의 솜씨를 바로 알 수 있는 칵테일이다.


특히 기주(칵테일에 기본이 되는 술)가 증류주인 진(Gin)인 만큼, 평범한 하우스 진을 사용한 진 토닉과 프리미엄 진을 사용한 진 토닉은 맛이 차원이 다를 정도다.


믿어도 되겠어. 첫 수에 봄베이 사파이어를 고른 젊은 바텐더의 안목에 감탄하며 롤랑이 미소지었다.


"스타 오브 봄베이는 봄베이 사파이어 브랜드 중에서도 상위 라인업이죠. 기존의 봄베이 사파이어에 베르가못(허브의 일종)과 암브렛 씨앗(아욱과의 식물)을 추가로 넣어 숙성시킨 프리미엄 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진이기도 합니다."


카운터의 안쪽에서 유리잔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둥글게 깎인 얼음을 하나 꺼내 잔에 채운다.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얼음은 손수 깎아낸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기에 롤랑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각 얼음보다 둥근 얼음이 칵테일에 더욱 어울린다. 사각 얼음은 스터(칵테일을 섞는 것)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얼음이 녹을 때 칵테일에 일정하게 섞이지 않아 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반면에 둥근 얼음은 스터하기 쉽고 골고루 녹아 칵테일의 맛을 침범하지도 않으니, 프로임을 자랑하는 바텐더라면 손수 둥글게 깎은 얼음을 쓰는 게 보통이다.


얼음이 채워진 유리잔에 스타 오브 봄베이를 1 온즈(30ml 정도) 가량 넣은 후, 토닉워터를 1.5 온즈 정도 붓는다. 바텐더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진은 25~50% 정도 넣는 게 일반적인 진 토닉이다.


은빛 막대 하나를 꺼내 진과 토닉워터를 스터하고, 마지막으로 레몬 한 조각을 꺼내 즙을 짜 부은 뒤 한 번 더 스터한다.


가니쉬(곁들여 올리는 재료)로는 라임이나 레몬 1택인데, 이번에는 레몬인 듯 했다.


"주문하신 진 토닉(Gin Tonic), 완성입니다."


"고마워."


짤랑. 얼음이 가볍게 잔에 부딪힘과 동시에 롤랑이 바텐더에게서 진 토닉을 넘겨받았다. 마치 평범한 물과도 같이 투명하나, 탄산이 제대로 올라오는 진 토닉이 보고 있자니 롤랑이 무심코 군침을 삼켰다.


도서관에 들어온 지 2주, 2주동안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던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고작 2주라 할 수도 있겠다만 애주가임을 자부하는 롤랑에게 14일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진 토닉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이거 놀라운데."


진 토닉의 가장 중요한 점은 상쾌함이다. 탄산이 있는 토닉워터와 증류주인 진을 사용하는 만큼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이 한 잔은 여럿 진 토닉을 마셔봤던 롤랑에게도 충격적일 정도로 색다른 맛을 선사했다.


입에 넣고 조금 굴리면, 모든 스트레스가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은 상쾌함이 입 안을 감싼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토닉워터의 씁쓸함과 진의 알코올을 즐기고 있자면, 레몬즙의 상큼함이 꿈에서 깨듯 롤랑을 깨어나게 하며, 자칫하면 뒷마무리가 찝찝할 수 있는 탄산수를 시원하게 마무리지어 준다.


한 모금을 삼키고 나서, 가니쉬인 레몬 한 조각을 약간 배어 물면, 레몬 특유의 신맛과 그 안의 달콤함이 입을 깨끗하게 씻겨 준다. 조금 전 여운으로 남던 맛은 사라지고, 다시금 진 토닉을 온전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지금껏 롤랑이 마셨던 최고의 진 토닉은 맛의 거리라는 23구에서 8인의 셰프 중 한 명의 제자에게서 마셨던 것이었지만, 이 젊은 바텐더의 진 토닉은 그것마저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평생 이 진 토닉만을 마시라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한 잔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에 롤랑이 쓰게 웃었다.


"역시 도시야, 이만한 실력자의 이름조차 모르다니 말이야. 나름 바텐더들에 대해서는 꽤 안다고 자부했는데 말이지."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이걸 마실 수 있는 내가 영광이지. 그나저나 통성명도 아직 안했네, 난 롤랑. 앤젤라에게 나에 대해 들었어?"


"네, 관장님께 롤랑님에 대한 말은 들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오시길 염원하겠습니다."


"이름은?"


"글쎄요, 그냥 바텐더라고 부르셔도 무방합니다. 이곳에서 가게를 내는 대가로, 제 기억의 9할은 책이 되었거든요. 그 중에 이름도 포함되서.....아, 물론 칵테일 지식은 그대로랍니다."


"....내가 사디스트 관장 대신 사과할게."


그럼 그렇지. 칵테일이 마음에 들었다고 멀쩡하게 놔줬을 리가 없지.


수틀리면 폭력이 동반되는 강한 여자, 사디스트 도서관장을 생각하던 롤랑은 남은 진 토닉을 입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찾아오는 데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런 바에서 매일 마실 수 있다면, 도서관이 갑자기 화이트 직장으로 보이는걸? 고마웠어."


"안녕히 가십시오."


딸랑.


가져왔던 백과사전을 다시 들고, 롤랑이 문을 나섰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크기에 어울리지 않은 꽤 큰 소리를 냈는데, 롤랑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그 종소리는 이 문에서 나는 거였구만.


"....잠깐, 그럼 내가 찾아오기 직전에 누군가가 왔었다는 건가?"


그가 기억하기로, 종소리는 최소한 3번 울렸었다. 즉 누군가가 나갔다 들어오거나, 아님 여럿이 들어왔다는 소리다. 하지만 바에는 롤랑 혼자였다. 숨을 장소도 없었고.


"몰라, 기분 탓이겠지."


아무튼, 즐거움이 생겼네.


다음 방문을 기대하며, 롤랑이 콧노래를 부르며 책장들 사이를 걸어나갔다.




*




"...누가 사디스트 관장이라고?"


"앤젤라 님, 노여움을 푸시고...."


"샴페인, 빨리."


"곧바로 대령하겠습니다!"


롤랑은 모르겠지만, 바텐더의 눈부신 접대와 노력으로 오늘 롤랑의 생명은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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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을 아예 이렇게 글로 통째로 옮겨야 함? 아님 그냥 링크만 남겨놔도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