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형제들과 마시는 발렌시아>



"모모. 이이거 정말 괜찮을까?"


"빠, 빡대가리야! 어어차피 우리들 수준으로 터털 수 있는 사무소보다는 낫겠지!"


"그그래도 불안하잖아. 의의체들 수리비용도 마만만치 않다고." 


"차차라리 식당이 나나을것 같은데...."


"미미친 빠빡대가리야! 아아까 먹는 거 입는 거 아껴서 도돈벌려고 이렇게 했다고 말했잖아!"


"미미안해 모...."


"코콘스타는 유난히 인간이었을 때의 기기억이 많으니까. 아아직 존나 싼 의체라 그그런 걸테니 이해해 줘."


"아알겠으니까 식당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머먹고 싶어지니까. 아아놀드, 무기는 전부 챙겼어?"


"무문제없어 모."


"나나도 정비 끝냈어 모."


"조좋아. 기기억해! 오오지게 버티고 오오지게 때려서 오오지게 돈을 버는 거야!"


"오오지게!"


"오오지게!"




*




"이이거 기만이지? 조존나 놀리는 거잖아."


"자리에 앉으세요, 손님."


"지지랄하는 거 같은데."


"모든 주류는 무료로 제공되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모모, 아아놀드! 저전부 무료래!"


당장이라도 열악한 성능의 감정 제어 장치에 몸을 맡기고 이곳을 때려부술까 진심으로 고민하던 모와 아놀드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킨 건, 바텐더로 보이는 청년의 친절하고 호감이 가는 목소리와 공짜라는 말을 듣고 흥분한 콘스타 덕분이었다. 모와 아놀드가 이 영문모를 공간에 조금이나마 의심하는 사이 콘스타는 진작에 그들을 앞질러가서 카운터석에 걸터앉았다.


"두 분도 우선 앉으세요.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이일단 따르자, 모."


"조좋아. 이일단 이야기를 드들어보자."


기분이 좋은 듯 들썩들썩 하는 콘스타와 다르게 주춤하는 모와 아놀드는 그제서야 무기에서 손을 떼고 터덜터덜 걸어가 카운터석에 앉았다. 기계 의체가 나무 의자와 부딪히며 금속음이 바에 조용히 울렸다.


본래라면 우선 손님들께 물을 제공하지만, 철의 형제들이라 자칭하는 이들처럼 몸을 의체로 바꾼 이들의 대부분은 미각이 없다. 미각이나 후각을 느낄 수 있는 의체는 웬만한 고급 주택을 살 수 있는 돈이고, 그런 의체를 만드는 공방에 접촉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욕구를 느끼는 의체는 제작비용도 만만찮고 정기적으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점검을 해야 했기에, 공방에서는 의체를 사는 것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점검을 위해 공방에 거금을 줄 수 있는 자금을 가진 이들에게만 의체를 만들어주는 풍조가 만연했다.


각설하고, 이들이 화난 이유는 당연하다. 음식이든 술이든 맛을 못느끼는 몸으로 술을 즐기고 오라니 대놓고 놀리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의체는 취할 수도 없기에 약간 취기가 돌 정도로만 마시라는 앤젤라의 말에 분노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앤젤라가 굳이 이들에게도 술을 마시고 오라 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취하게 해서 전투 중 감정을 더욱 고조시킨다' 라는 목적으로 운영되는 도서관 내의 바에 이들을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술 낭비이니, 효율을 중시하는 앤젤라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다.


"여러분이 의체이시고, 아직 값싼 의체이기에 미각이나 후각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그러면 왜 여기로 보보낸거지? 노놀리는 거 아냐?"


"오오지게 놀리는 거 같은데."


"설마요. 방법이 있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바방법?"


"우선, 칵테일을 주문해 보시겠어요? 만약 칵테일을 드신 후에도 저희가 여러분을 기만하는 것 같으시면, 그 때는 분노를 마음껏 푸셔도 상관 없습니다."


"....아알겠어. 아아놀드, 뭐 아는 카칵테일 있어?"


"이있을리가. 카칵테일이란 말도 몇 번 들은 것 뿐이라고."


"내내가 알아!"


"어엉?"


"으응?"


자신 있는 듯한 콘스타의 말에 아놀드와 모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콘스타를 향한 둘의 시선에서 불신이 한껏 느껴졌지만 콘스타는 전혀 거리낌 없이 바텐더에게 손을 들었다.


"바발렌시아로!"


"주문 받았습니다."


미소를 지은 바텐더가 뒤의 찬장에서 브랜디 1병을 잡아 카운터에 올려 놓고, 곧바로 소형 냉장고 쪽으로 움직여 노란색 오렌지 주스가 들은 병 하나를 꺼내 브랜디의 옆에 놓았다. 물 흐르듯 막힘없이 깨끗하게 닦힌 유리잔 3잔을 준비하고, 은빛 막대를 늘어놓는다.


퍽 화려한 움직임에 다소 굳어있던 모와 아놀드도 주의 깊게 바텐더를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는지 콘스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그런데 콘스타. 바발렌시아라는 칵테일 어어떻게 안 거야?"


"그그러게."


"내내가 살았던 14구 뒷골목에서 가장 유명한 게 저저거였어. 조조직들이 바발렌시아를 엄청 찾았거든."


"조조직들이? 그그러니까 14구면 N사 둥지네."


"나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금기 사냥꾼인 베스파라는 해결사가 바발렌시아를 상당히 좋아한데. 뒤뒷골목의 여러 조직들이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바발렌시아를 엄청 찾았다나 봐. 그그탓에 뒷골목에서도 바발렌시아가 유행하게 됬어."


"며명색이 골목의 규칙을 어긴 놈을 죽이는 해해결사이니까. 조조직들이 아부하는 금기 사냥꾼이라, 그그정도면 1급 해결사는 되겠어."


발렌시아를 만드는 건 간단하다. 오직 두 가지의 주류만 섞으면 끝인 간단한 칵테일이다. 하지만 진 토닉을 위시한 간단한 칵테일들이 으레 그렇듯이, 제조법이 단순한 칵테일일 수록 바텐더의 실력이 확연히 들어나는 법이다.


브랜디(Brandy)는 살구씨를 이용해서 만드는 애프리콧 브랜디(Apricot Brandy). 간단히 살구 리큐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살구의 새콤함 향과 맛을 생각하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주 재료는 살구씨이기에 새콤한 과일향보다는 견과류의 고소한 향이 강하게 나고, 단 맛과 동시에 견과류의 씁쓸함 또한 느껴지기에 약간 호불호가 갈리는 브랜디이다.


애프리콧 브랜디의 마개를 따고, 대략 40ml 정도만 잔에 채운다. 용량이 맞지 않을 경우 특정 맛이 강하게 두드러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조심스레 신경써야 한다. 약간 노란 빛이 도는 투명한 브랜디가 잔의 벽면을 따라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부부럽네. 우우리는 언제 제대로 도돈을 만져보려나."


"거걱정마 아놀드. 지지금 몸이 불편하긴 해도 오오지게 튼튼하잖아. 이일단 괴물 놈들을 죽이고 채책들을 몽땅 챙기고 나서 정보 전문인 세븐 협회에 파팔아넘기면 짭짤할 거야."


"비비교적으로 온건한 협회니까, 가값도 상당히 치뤄줄 거야!"


"조좋아. 의욕이 새생기고 있어."


애프리콧 브랜디를 전부 따랐다면, 다음은 오렌지 주스다. 용량은 애프리콧 브랜디의 절반인 20ml면 충분하다. 샛노란 빛의 투명한 브랜디와 노랑색 주스가 서로 섞이며 요동치고, 두 색이 서로 엮이며 옅은 노란색으로 변해간다.


마지막으로 막대로 두 주류를 스터(젓는 것)해주면 완성이다.


"주문하신 발렌시아 3잔 나왔습니다."


"그그래! 내내가 봤던 바발렌시아랑 똑같아!"


"예예쁘긴 하네."


"뭐뭔가 부자가 된 것 같은 기기분이야."


"드시기 전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어어?"


아름다운 발렌시아의 색에 자신이 의체라는 것도 잊고 맛을 즐기려고 했던 모는 그제야 바텐더 쪽으로 고개를 올렸다. 그러고보니, 분명 바텐더는 의체도 술을 즐기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었다.


혹시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는 건가?


의체가 된 뒤로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인간으로써의 즐거움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인간이 즐기는 원초적인 즐거움인 '맛'에 대한 희망이 조금씩 부풀었다.


하지만 모의 생각과는 달리, 바텐더는 카운터에서 나가 조명을 조절하고, 바 한 쪽에 비치된 앰프에 다가가 음악을 틀 뿐이었다. 감미로운 재즈 음악이 바에 조용히 퍼져나갔다.


"이이게 뭐야?"


"정말 죄송하지만, 제 능력이 미천하여 여러분께 맛을 전해드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술을 즐기는 분위기는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부분위기?"


"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연히 술의 맛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분위기입니다. 똑같은 술을 마셔도 시끄럽고 난잡한 공간에서 마시는 것과 고독하게 마시는 건 전혀 다릅니다."


"그그럼?"


"이건 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 도서관에 왔을 때도 어떤 기계이신 분께 맛있는 술과 함께 훌륭한 분위기를 만들어 드려서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였다면 저도 책이 되었겠죠."


분위기라.


".....모모. 어어떻게 할 거야?"


"모모?"

"......."


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직 카운터석을 비추는 희미한 조명, 주변에 들리는 훌륭한 재즈 음악, 조용하고 고요한 분위기, 마실 것. 그리고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면, 후드 때문에 입만 보일 뿐이지만 미소 짓는 바텐더가 보인다.


분했지만, 뒷골목에서의 삶에서 절대 느낄 일 없었던 안심되는 공간이다. 편안히 쉴 수 있는, 이런 몸만 아니였다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아놀드."


"왜왜그래 모?"


"코콘스타."


"으응? 무무슨 일 있어 모? 가갑자기 조용해지고."


싸울 때도 있고, 부딪힐 때도 있고, 힘들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 철의 형제들이란 이름 하에 같이 지내는 이들.


실없이 행동하지만 동료를 위해 몸을 던지는 콘스타, 무뚝뚝한 것 같지만 배려 깊은 아놀드.


이들과 함께 있기에, 지금이 정말 좋았다.


"...부분위기에 취할 수도 있는 거야."


"으음, 부부정할 수는 없네. 묘묘하게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


"마마셔도 아무 맛도 안 나지만....그그래도, 웬지 진짜 술을 즐기는 것 같아. 취취기가 도는 것 같은데?"


"코콘스타. 우리는 못 취하잖아."


"아아냐 아놀드! 조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기울이고, 기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마마셔봐."


".....그그러네. 아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저정말 술을 즐기는 것 같아."


"모모도 한 번 마셔봐!"


"그그럴게. 코콘스타."


콘스타와 아놀드를 따라, 모도 발렌시아를 입가에 가져갔다. 무언가 액체가 자신의 안에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유리잔의 차가움도, 칵테일의 향도, 그 맛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오직 뭔가를 마신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이게 뭐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콘스타의 말 대로 음악을 들으며, 조명에 몸을 맡기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멋진 동료들인 콘스타와 아놀드를 한 번 씩 바라본 후 다시 한 번 마신 발렌시아는.


"...마맛있네."


정말, 맛있었다.




*




"샴페인입니다, 앤젤라 님."


"고마워, 오늘 분위기는 특히 훌륭한걸? 오늘 찾아온 손님들은 다들 형편없었지만, 이렇게 샴페인을 마시니 마음이 풀어지네."


"...앤젤라 님은 샴페인의 맛이 느껴지시나요?"


"....그건 아니야. 그런 면에서는 오늘 왔던 싸구려 의체들과 같지. 그렇지만 난 그들과는 명확히 달라." 


".....그렇네요. 그분들과 앤젤라 님은 다르죠."


"물론이지. 한 잔 더 줘."


"....네."



<갈고리 사무소와 마시는 헌터>



"일단 대표 명령이니 가긴 해야겠지만....태인, 네 장비 슬슬 교체할 때가 되지 않았어?"


"제아무리 유니온 공방의 생체 장비가 국밥급 효율이라지만, 저번에 쥐 몇 놈 찢어버릴 때 좀 삐걱거렸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지금 예비품이 없어. 맥컬린 너야말로 근육통이 남아있잖아? 어제 누구누구가 미쳐 날뛴 탓에 말이야."


"윽, 그러니까 미안하다니까...."


"태인, 나오키를 너무 나무라지는 마. 어차피 살인조직에 있을 때보다는 나으니 됬어."


"뭐 아무튼, 슬슬 나오키랑 맥컬린, 너희들 장비도 바꿀 때도 됬으니 이번 의뢰는 짭짤하네. 도서관이랬나? 대충 찢어주고 책 좀 가져오면 되겠지."


"그래도 참 희한해. 이런 책 몇 권이 그만한 돈이 된다니."


"사실 책 내용이라기보다는, 책에 적용된 기술에 집중하는 거지. 사람을 책으로 만들고 읽는다니, 별천지 같은 기술들이 많은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기술이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별 쓸데없는 기술이지만, 샌님들이나 협회가 보기에 특허가 없는 새로운 기술은 탐날 테지."


"얘들아, 슬슬 출발할 때 됬어."


"그래? 나오키, 칼날이 좀 많이 삐걱거리냐?"


"음....뭐,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다들 준비 됬지?"


"오케이, 가자."


"그래그래."




*




딸랑.


"휘유~ 그 도서관장이란 여자도 몸에 돈 좀 부은 것 같았는데, 이런 고급스러운 술집이라니 얼마나 될 지 상상조차 안 가는데?"


"태인, 아까 그 여자는 인간이 아니였잖아."


"아니아니 그래도, 이 원목 탁자 봐봐. 둥지에 있는 고급 가구점에서나 볼 만한 물건이라고. 이거 가져가면 돈 좀 되겠지?"


"죄송합니다만 손님, 바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시는 건 추천드리지-----"


콰직.


"어라? 뭐야."


"----않습니다. 자리에 앉아주시겠어요?"


얼굴에서 고작해야 한 뼘 정도만 떨어진 곳에 칼날이 박혔음에도, 후드를 뒤집어 쓴 바텐더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소를 띄우며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칼날을 던진 장본인, 나오키였다. 투척에는 상당히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그녀이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분명 인중을 노리고 정확히 날렸는데도 마법이라도 부린 듯 궤도가 휘어져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황급히 반격을 예상하며 두 번째 단도에 손을 뻗은 그녀가 뒤로 빠지고, 맥컬린이 바텐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를 여럿 머금어 날이 살짝 붉게 물든 도끼가 바의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그가 쓴 흰색 웃는 가면의 뒤에서, 살인에 대한 희열로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바텐더를 노려보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청년에게 거구의 맥컬린이 쇄도했다.


상황을 정리한 건 생체 무기를 접어든 태인이었다.


"맥컬린, 나오키. 멈춰."


"....뭐야, 태인 너 왜 그래?"


"그러게. 설마 뭔지도 모를 상대에게 시간을 줄 셈?"


"설마, 하지만 그냥 덤벼드는 것도 악수(惡手)야. 저 녀석, 아마 나처럼 생체 무기를 가지고 있을 걸."


"....쳇, 뒤질 뻔했군."


생체 무기는 몸에 부착하는 형태의 공방 무기를 뜻한다. 태인이 부착한 유니온 사의 생체 무기처럼, 직접 들고다니는 것과 달리 또 다른 손이나 발의 형태로 다루는 것이 생체 무기이다.


이러한 생체 무기의 장점이라면 무기를 놓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팔이 잘려도 등에 낫을 부착해두었다면 무리없이 싸울 수 있으니까. 또한 생체 무기 소지자는 부착한 무기를 기존의 팔과 다리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므로, 그 공격 반경과 패턴을 예측할 수 없었다.


당장 태인을 보아도, 그의 등에 달린 칼날과 낫들은 3m가 훌쩍 넘는 범위까지 자유자재로 늘어나고 줄어들며 적을 찢어발길 수 있다. 급이 높은 해결사들이야 맨몸으로도 그 이상의 반경을 가지겠지만, 갈고리 사무소처럼 낮은 급의 해결사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거리였다. 그렇기에 생체 무기를 가진 적과의 싸움이라 하면, 우선 반경과 사용 패턴을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다.


"그럼 어떻게 할래? 태인이 돌격하고, 나오키와 내가 보조하는 형태로 갈까?"


"아니, 애초에 이런 술집이라는 공간 전체가 공격 반경일 가능성이 높아. 너무 생각 없이 들어왔나...?"


"....우선 말에 따르자."


"태인? 진심이야?"


"어차피 영문모를 공간에 온 것부터가 마이너스잖아. 도서관장이란 존재도 그렇고,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적의를 보이지 않았으니 일단 말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좋아, 태인 말에 찬성. 그리고 저 바텐더 말대로 카운터석에 앉는다면 태인의 공격 반경이야. 우리도 가능성이 있어."


".....그래, 가자."


잠깐의 상의를 끝낸 후, 날붙이를 집어 넣은 태인과 나오키, 맥컬린이 천천히 다가와 조심스레 카운터석에 앉았다. 끊임없이 바텐더와 주변을 경계하는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바텐더는 얼음물 세 잔을 나누어 주면서도 미소를 풀지 않았다.


"주문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손님?"


"....설마 적진에서 적이 주는 걸 그대로 마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합당한 의심이시지만, 도서관의 접대....그러니까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피 튀기는 전투는 바에서 나간 이후이십니다. 지금은 도서관이 주는 잠깐의 휴식과 같은 것이니 마음 편히 즐겨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쎄, 초면에 존댓말을 쓰는 놈들 중에서 정상인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떤 순진한 놈이 아니고서야 이런 상황에서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것도 그렇군요."


이들이 의심이 많은 게 아니라, 도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영문모를 초대장을 받고 영문모를 장소로 전송되고 영문모를 도서관이란 장소에서 또 다시 영문모를 술집으로 전이되어 왔는데, 갑자기 칵테일을 준다고하고 그걸 또 넙죽 마시는 게 이상한 일일 테지.


바텐더의 전의 손님들을 떠올렸다. 쥐들은 칵테일이라는 사치품에 의심을 풀었고, 윤이라는 자는 의심했으나 에리라는 여자는 아직 경험이 없었다. 철의 형제들이야 의체이니 마실 것에 독을 넣든 뭘 넣든 문제 없다. 결국 이 손님들이 특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의 손님들이 이상했던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정상적인 해결사라면 당연히 의심하고, 나오키가 그랬듯 선빵을 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바텐더는 이런 손님들에게의 대응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어떻습니까?"


"뭘 말이지?"


"여러분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여러분은 이미 무색무취의 독가스에 노출되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독법은 제가 만드는 칵테일 뿐입니다....란 건 어떨까요?"


"........"


"......"


"....구라 까지마."


"글쎄요? 오히려 여러분께서 드시지 않으시겠다면 중독되어 비참하게 죽으실 겁니다. 시체 3구를 치우는 일이 되니, 제가 조금 피곤할 뿐이군요."


"들어오자마자 중독시키고, 주는 칵테일이 해독제라고? 그런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있죠? 이곳은 도시니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 아닙니까?"


".....태인, 어떻게 하지?"


"젠장...."


의심은 꼬리를 문다. 이름모를 적진의 안에서, 아무 정보 없는 그들로써는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여전히 미소를 띄는 바텐더를 향해 태인이 항복의 표시로 한숨을 내쉴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좋아. 칵테일 한 잔 줘."


"알겠습니다. 여러분께 잘 어울리는 칵테일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절도있게 인사한 바텐더가 뒤를 돌았다. 조금 전의 이들이라면 바로 칼날을 찔러 넣었겠지만, 이미 독이라는 의심암귀에 사로잡힌 그들은 바텐더에게 손대지 못한다. 결국 이들은 살아가기 위해 해결사 일을 하는 것이니까.


바텐더가 찬장에서 두 종류의 술병을 꺼내 카운터에 놓을 때까지, 칼날을 향해 손을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자포자기한 듯한 태인이 바텐더가 꺼내온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위스키?"


"네. 위스키 중에서도 캐나디언 클럽(Canadian Club), 통칭 CC 브랜드의 상품입니다. 위스키 중에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유명하죠. 블렌디드(Blended)이며, 12년산입니다."


"블렌디드란 건 뭐야?"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ey)는 몰트 위스키(Malt Whiskey)와 그레인 위스키(Grain Whiskey)를 섞어 만든 위스키입니다. 몰트 위스키는 보리(맥아)를 주재료로 하여 만든 위스키이며, 그레인 위스키는 옥수수, 밀 등 보리 외의 곡물을 사용해 담근 위스키입니다."


"...왜 굳이 둘을 섞은 거야?"


물 흐르듯 쏟아져 나오는 전문 지식에 태인과 나오키가 조금씩 관심을 보이며 바텐더와 위스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맥컬린만은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는지 가면 뒤의 눈동자가 드문드문 움직였다.


"과거, 잉글랜드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라는 다른 나라를 점령한 후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주생산품이던 위스키의 원재료인 보리의 세금을 대폭 인상해버리고, 위스키 제조를 불법으로 만들었죠."


"켁, 세금에도 모자라 법까지?"


"그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양조업자들은 큰 곤궁에 빠졌습니다. 보리에 붙은 하늘과도 같이 높은 세금 탓에 양조업자들은 위스키를 몰래 만들었는데, 동시에 보리를 최대한 적게 쓰기 위해 점차 보리가 아닌 다른 곡물로 위스키를 만들게 되었죠. 그리하여 그레인 위스키가 탄생했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위스키 제조가 합법화된 이후, 자연스럽게 강하고 묵직한 몰트 위스키에 가볍고 달콤한 그레인 위스키를 섞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그레인 위스키가 몰트 위스키의 도수를 유지하면서도 맛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둘을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가 유명해졌죠."


"...생각보다 재밌는 이야기네."


이야기에 무심코 감탄한 태인과 나오키 뒤로, 중간부터 빠져들었던 맥컬린도 결국 경계를 풀었다. 바텐더의 미소와 호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리고 흥미로운 술에 대한 이야기는 갈고리 사무소의 의심을 풀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미리 준비해둔 유리잔에 마개를 딴 캐나디언 클럽을 40ml 가량 붓는다. 호박빛의 아름다운 위스키가 잔을 채워가며 파도쳤다.


"다음은 체리 브랜디입니다. 본래 의미대로라면 체리로 만든 브랜디이지만...."


"응? 아니야?"


"네, 여러 브랜드에서 체리 리큐르를 체리 브랜드라는 상표로 내놓은 탓에 이제와서는 체리 리큐르를 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만 체리 브랜디이지 실제로는 체리 리큐르라고 보시면 됩니다."


"...브랜디는 뭐고 리큐르는 뭐야?"


"브랜디는 과일주 혹은 포도주를 증류시켜 숙성시킨 술이며, 리큐르는 증류주에 과일이나 꽃, 캬라멜 등의 여러 재료를 이용해 만든 술입니다. 둘 다 이미 완성된 술에 추가 공정을 넣는다면 면에서 같지만, 그 외의 맛이나 도수, 용도의 면에서 거의 다릅니다."


"술들도 꽤 복잡하네. 이런 걸 하나하나 따져가면 마시는 건 둥지의 샌님들인 줄 알았는데...."


"뭐, 대표도 맨날 위스키만 찾잖아. 솔직히 뭔 차이냐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들으니 다르긴 다른 것 같아."


호박색 위스키가 담긴 잔에 체리 브랜디를 기울인다. 넣는 양은 위스키의 절반인 20ml 정도. 위스키에 붉은 빛의 액체가 섞여 들어가며 소용돌이치고, 호박색과 밝은 빨간색이 섞고 섞이며 서서히 진홍빛으로 변해갔다.


체리 브랜디를 모두 따랐다면, 이제 막대를 잡고 스터한다. 막대가 잔에 부딪히지 않게 하면서 일정한 속도로, 두 술이 골고루 섞일 정도로만 절묘하게 스터한다. 모든 게 끝났다면, 마지막으로 체리 하나를 잔에 올린다.


"헌터(Hunter), 완성입니다."


"....사냥꾼이라."


"불길한 이름이네."


"그러게 말이야."


꽤나 적의를 풀어냈지만, 막상 칵테일을 받아드니 다시 의심이 샘솟는지 망설이던 태인과 나오키, 맥컬린은 두 눈을 꽉 감고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헌터를 입 안에 털어넣었다. 만약 독의 맛이 느껴질 때를 대비하여 생체 무기와 날붙이를 미리 준비-----


"......와."


"....어, 어?"


".......대단해, 대단하네."


처음 느껴지는 건, 위스키의 강한 알코올이다. 캐나디언 클럽은 입 안에 들어가 혀에 닿자마자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주며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직후 체리 브랜디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몰려온다. 결코 과하지 않으며, 위스키의 강렬함을 덮어주는 정도로만 느껴지는 단맛과 달콤한 향은 이 둘이 섞인 칵테일인 헌터를 입에 머금으며 천천히 맛볼 수 있게 해주었다.


위스키의 묵직함을 맛보고 난 후 다가오는 단맛을 참을 수가 없어서, 차마 목 너머로 넘기지 못한 채 계속해서 헌터를 혀로 굴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천히 헌터를 삼키면, 블렌디드 위스키의 훌륭한 뒷맛이 잠깐이나마 여운에 잠기게 만들어 준다.


모든 의심과 적의, 살의가 한 번에 풀려나가는 최고의 맛이었다.


"와 씨, 이거 안 마셨으면 그 때의 나를 미친듯이 저주했겠어."


"그, 그러게. 고작해야 한 잔의 술일 뿐인데...."


"순간이지만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진짜 끝내주는군."


"손님분들께서 만족하셨다면 그것이 제 기쁨입니다."


".....이제와서는 독이니 뭐니 다 상관없어졌네. 슬슬 시간이겠지? 태인, 먼저 나가 있을게."


"그러게. 나오키, 같이 가자. 태인, 먼저 몸 풀고 있을 테니 빨리 나오라고."


"그래."


딸랑. 딸랑.


나오키와 맥컬린이 바에서 나간 후, 바텐더와 태인 사이에서 적막만이 감돌았다. 눈을 감은 채 헌터를 머금으며 그 맛을 즐기던 태인은, 이윽고 한 잔을 전부 비우자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텐더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잘 마셨어."


"....손님, 무례할 수도 있지만 하나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뭔데?"


"그 때 왜 다른 손님분들을 말리셨습니까? 저에게 생체 무기가 있다는 거짓말까지 하시면서요."


"...후드를 써서 확신이 서는 건 아니지만."


"손님?"


바텐더의 말에 한숨을 내쉰 태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으로 미소가 아닌, 당황이 담긴 바텐더의 입 부분을 본 태인이 바텐더가 뒤집어쓴 두꺼운 후드를 노려보았다.


"유니온 공방에서 널 본 적 있어. 그게 다야."


"......"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너의 그 소름돋는 미소는 잊을 수가 없더라고."


"......"


"그럼."


"아, 손님...!"


딸랑.


바텐더가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이미 태인은 문 너머로 사라진 이후였다. 바텐더는 이 바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단지 손을 뻗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뻗은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미소가 사라진 바텐더가 고개를 떨궜다. 




*




"음....오늘 수확은 평범하네.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아. 그래도 이 태인이라는 남자의 책은 볼 만 하네."


"....앤젤라 님."


"왜 그래?"


"그 태인이라는 자의 책......저도 볼 수 있을까요?"


"안 돼."


"........"


"너에게 허락된 건 이 바와 술을 다루는 권한 뿐이야. 넌 이 책들을 읽는 것도, 만지는 것도, 다가가는 것 전부 안 돼. 함부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


"...그 이상은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난 네가 매우 쓸모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부디 내 생각을 바꿀 일이 없길 바래."


".....네,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됬어. 샴페인이나 한 잔 더 줘."



".......네."




<피에르의 고기파이와 마시는 뉴 데이>




"어때 피에르, 가볼 마음이 들어?"


"흐~음. 초대장에 있는 요리책들도 그렇고, 특히 이 갈고리 사무소의 책은 탐나네.  안 그래도 이번에 '브레멘 음악대'와 '꿀꿀이네'에서 납품이 끊겼으니 더더욱."


"갈고리 사무소는 살인조직 출신이 많으니 인육을 다루는 이들과도 접점이 있겠지. 잘하면 새로운 유통 경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잭, 남은 고기 재고는 얼마 정도야?"


"잘 해봐야 열흘....아니, 최근 고기파이 주문이 여럿 들어왔으니 일주일 정도 일거야. 오늘도 주문 받은 파이를 만들어야 하니 오래 시간을 쓸 수 없어."


"거기에 내일 재료 준비에 마감까지 해야 하고....자영업이 힘들긴 하네."


"그래도 8인의 셰프들도 다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잖아."


"뭐 그렇긴 해. 월세랑 보호비를 내고도 저축은 쌓이고 있으니까 내일도 힘낼 수 있는 거지."


"...피에르, 슬슬 갈까?"


"좋아. 최고의 맛을 위해 가자!"




*




이 도시에서 멀쩡한 곳을 뽑으라고 지나가는 도시인에게 묻는다면, 열이면 열 코웃음치며 무시할 것이다. 이 도시의 모든 구는 하나같이 미쳐있거나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은 곳들 뿐이다. 그나마 둥지가 뒷골목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할 뿐, 그 유명한 P사의 방공호 쯤은 되야 어느 정도 '안전하다' 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미쳐돌아가는 곳을 꼽으라면, 대부분은 23구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곳은 흔히 맛의 골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도시의 모든 구에서 실종률이 가장 높은 곳이였으니까.


"설마 도서관에서 요리인을 볼 줄은 몰랐어. 그것도 바텐더라니! 싸구려 술집에서 스스로를 바텐더라고 사기치는 저질들이 대부분인, 힘든 업계인데 말이야."


"그나마 8인의 셰프 중에서 1명이 바텐더라 그와 그 제자들이 바텐더 업계를 독점하다시피 했다고 들었는데, 너도 그쪽이야?"


"아뇨, 독학입니다."


"어머어머! 그것 참 대단하네!"


"천만입니다. 피에르 씨와 잭 씨야말로 둘이서 가게를 운영하시다니, 저로써는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그래도, 이런 번듯한 바가 있잖아?"


"이 바는 관장님께서 베풀어주신 호의니까요. 술도 도서관에서 만들어지고, 월세도 낼 필요 없는 데다 뒷정리에 마감, 재료 준비들도 필요 없으니 제가 운영한다는 건 아닌 말입니다."


"뒷골목의 자영업자들이 들으면 눈물을 흘리면 그랜절을 할 조건이네..."


순간 권리금과 월세, 각종 공과금 내역서가 뇌리에 스친 피에르가 카운터에 드러누웠다. 잭도 고된 일과가 떠올랐는지 이마를 부여잡고 얼음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바텐더가 그것에 아주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둘에게 얼음물을 다시금 채워주었다.


"궁극의 맛을 추구하려면 우선 장사가 되어야 하니까...."


"돈이 있어야 재료를 사고, 돈이 있어야 연습을 하고, 돈이 있어야 도전해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부디 피에르 씨와 잭 씨가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갈 수 있기를 빕니다."


"그래도 넌 도서관 편 아닌가?"


"제가 원해서 도서관에서 바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요리사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군요."


아, 방금 말은 관장님께 비밀로 해주세요. 그렇게 덧붙이며 부드럽게 미소짓는 바텐더에게, 피에르도 잭도 똑같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초면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의 관계를 그들은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듯, 23구는 맛의 골목이자 도시에서 실종률 1위를 자랑하는 구역이다. 당연히 하나, 츠바이를 비롯한 여러 협회에서 23구를 대대적으로 수색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23구에서 공공연하게 사람이 실종되고 인육을 사용하는 요리가 오고가는 것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요리사들의 끈끈한 유대 덕분이다.


도시의 직종 중에서도 상당히 힘들고 고된 직종인 요리사는, 그들의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그들끼리 통하는 것들이 있다. 설령 그들이 요리하는 것이 사람이든, 정체모를 무언가이든, 채소이든, 물고기이든, 술이든 간에 힘들게 '맛'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 유대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요리사들은 조직적으로 뭉쳐 협회나 뒷골목에 대항하며 그들만의 입지, 맛의 골목이라는 23구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풍조는 도시 전체로 퍼져, 공방이나 재단사들과 같이 요리사 길드가 설립되어 도시 곳곳에 존재하는 판국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며 8인의 셰프를 필두로 공통의 목적인 '맛'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요리사들은 설령 처음 보는 사이일지라도 서로에게 호의와 친분을 가질 수 있었다.


언제든 요리 재료가 될 수 있는 도시의 다른 이들과 달리, 요리사들은 궁극의 맛을 추구하는 동지니까.


"음, 시간이 꽤 지났네요. 슬슬 주문하시겠어요?"


"어머, 바텐더쪽은 오랜만에 보다 보니 들떴나봐. 그러네....잭, 혹시 칵테일 아는 거 있어?"


"....잘 모르는데. 바텐더, 추천해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미소와 함께 돌아선 바텐더는 말끔히 정리된 찬장에서 보드카, 브랜디 등 여러 술병을 둘러보더니 한 병씩 꺼내 들었다. 병의 라벨과 상태를 확인하고, 카운터 안쪽의 냉장고에서 주스까지 손에 든다.


같은 요리사라 해도 취급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기에 피에르와 잭이 바텐더가 늘어놓는 술병들은 신기해하며 쳐다보았다.


"이걸 섞어서 칵테일을 만드는 거지?"


"네. 왼쪽부터 스미노프 레드 No. 21(Sminoff Red No. 21), 칼바도스(Calvados), 애프리콧 브랜디(Apricot Brandy), 오렌지 주스(Orange Juice)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스미노프는 우리도 알아. 고기파이와 같이 잘 팔리거든."


"어라? 그런데 이 스미노프는 조금 다르네?"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깨끗히 닦은 유리잔 둘을 피에르와 잭에게 나누어준 바텐더가 가장 먼저 스미노프 레드를 집었다. 조그만 실수 없이 스미노프 레드의 마개를 따고, 수려한 자세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스미노프 레드를 잔에 따랐다.


"보통 보드카(Vodka)라 하면 스미노프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가격이 저렴하며 대중적이기도 하고, 부담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에 적절한 보드카이니까요. 아마 피에르 씨와 잭 씨의 가게에서 사용하는 스미노프는 스미노프 아이스(Sminoff Ice)나 스미노프 오렌지(Sminoff Orange)일 겁니다. 이들은 스트레이트로 즐기기에 훌륭한 스미노프죠."


"이건 다른가?"


"잭 씨의 말대로, 이건 스미노프 레드 No. 21, 통상의 스미노프와는 조금 다릅니다. 보통 스미노프가 스트레이트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이놈은 칵테일의 기주(基酒)로 사용하는 게 보통이니까요."


"기주(基酒)?"


"칵테일의 중심이자 가장 기본이 되는 술을 말합니다. 기주의 종류에 따라 브랜디 베이스 칵테일, 샴페인 베이스 칵테일, 진 베이스 칵테일 등 종류가 나뉘죠. 이때 사용되는 기주들은 다른 술들과 달리, 스스로의 맛이나 향이 약한 편이 만들기 쉽습니다. 특히 보드카는 무미, 무취, 무색을 자랑하니 다른 재료들을 바춰주는 기주로는 완벽하죠."


"여러 스미노프 중에서도 기주로 활용하는 용도로 나온 게 이 스미노프 레드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스트레이트로 즐길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기주로 사용하는 게 가장 맛있을 뿐이죠."


"재밌네."


유리잔에 스미노프 레드를 3분의 1인지 따르자 바텐더는 다시 스미노프의 마개를 닫았다. 아직 물결치는 투명한 보드카에 피에르와 잭이 무심코 군침을 삼켰다.


그런 그들을 보며 웃음 짓던 바텐더는 스미노프 옆의 병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칼바도스(Calvados)입니다. 칼바도스는 애플 브랜디로, 칼바도스 지역에서 자라난 사과로 만든 증류주를 총칭하는 말이죠."


"칼바도스 지역? 거기가 어딘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도시가 이런 모습을 띄기 전에 존재했던 곳이라 합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외곽을 한참 넘어 가야 있을 테지만.....아무튼, 이제는 칼바도스 특유의 제조공정을 거치기만 하면 칼바도스라 부릅니다."


"그렇군. 그런데 저번에 뒷골목 손님에게 애플 브랜디는 대부분 저질이라 들었는데, 이 칼바도스도 그런 건가?"


"그건 맛 때문입니다. 칼바도스...그러니까 애플 브랜디 중에서 하급품의 경우, 사과에 포함된 에스테르라는 성분 때문에 역한 향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맛도 이상하고요. 그렇기에 고급 애플 브랜디들은 흔히 '에어링'이라 불리는 공기와 접촉시키는 특수 공정을 몇 주간 거쳐 이러한 향을 완전히 빼냅니다."


"뒷골목에 돌아다니는 대부분의 애플 브랜디는 하급품일 테니까, 그런 인식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네."


"그렇죠. 애플 브랜디를 좋아하는 저로써는 조금 씁쓸하네요."


칼바도스의 마개를 열고 병을 기울이자, 짙은 황갈색의 액체가 흐르며 유리잔 안으로 떨어졌다. 마치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 투명했던 보드카가 짙은 색으로 물들며 소용돌이쳤다. 스미노프와 비슷한 용량만큼 칼바도스를 부으면 충분하다. 적절히 들어간 칼바도스가 스미노프와 섞이며 격렬히 회전했다.


"이 다음도 브랜디네?"


"애프리콧 브랜디(Apricot Brandy), 직역하면 살구 브랜디입니다."


"아까 애플 브랜디는 사과 증류주였으니, 이건 살구 증류주인가?"


"보통이라면 그렇겠지만, 이번에는 아닙니다."


"음?"


쓴웃음을 지으며 애프리콧 브랜디의 마개를 딴 바텐더가 조그만 잔에 브랜디를 살짝 따르고, 그대로 피에르와 잭 쪽으로 내밀었다. 영문을 모른 채 잔을 받아든 피에르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향기를 맡아 보세요."


"음......어라?"


"이건....고소한 향인데."


"맞습니다. 애프리콧 브랜디에 주로 사용되는 건 '살구'가 아니라, '살구씨'이니까요. 견과류의 향이 납니다."


"그럼 살구 증류주가 아니라 살구씨 증류주인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살구가 들어가기는 합니다. 다만 그 향이나 맛에서 살구씨가 더욱 돋보일 뿐이지요."


"이거 꽤 특이하네. 맛도......음, 살구맛에 견과류의 씁쓸함이 쫙 퍼지는게, 맛있네."


"아 잭! 혼자 전부 마시지 마!"


"피, 피에르, 이거 양도 적은데 굳이 나눠야 해?"


"궁극의 맛을 위해서는 뭐든 먹어봐야 한다고! 그거 이리 내!"


"으, 으앗!"


애프리콧 브랜디가 담긴 조그만 잔을 두고 아웅다웅하는 피에르와 잭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던 바텐더는 이내 애프리콧 브랜디를 유리잔을 향해 기울였다. 애플 브랜디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황갈색을 띄는 브랜디가 잔에 떨어지며 또다시 스미노프와 칼바도스를 격렬히 섞어나간다.


들어가는 건 스미노프의 반 정도. 잭이 마침내 항복을 외치며 피에르에게 브랜디를 나누어주는 틈을 타, 마지막 재료인 오렌지 주스를 애프리콧 브랜디만큼 유리잔에 따른다. 그리고 은빛 막대로 스터해주면 완성이다.


"어머, 완성됬어? 으으, 잭! 알겠으니까 이제 칵테일을 마시자고!"


"아, 알았어 피에르....결국 한 모금 밖에 못 마셨네."


승자의 미소를 띈 피에르와 축 쳐진 잭에게 바텐더가 완성된 칵테일을 건냈다. 이제 시음, 즉 완성된 요리(칵테일)를 맛본다는 중요한 일에 피에르와 잭이 심호흡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칵테일이 담긴 잔을 쳐다보았다.


"뉴 데이(New Day)입니다."


"고마워, 바텐더."


"고마워, 바텐더."


요리사의 요리를 먹어보는 것은, 음식을 만든 요리사나 그것을 먹는 손님이나 서로 진심을 담아야 하는 과정이다. 어떨 때는 극찬으로써 요리사는 자신감과 기쁨을 얻고, 어떨 때는 비난으로써 요리사는 반성과 더욱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된다. 요리사에게 요리란 자식과도 같기에, 그것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농담이나 장난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이는 23구를 넘어 도시의 모든 요리사가 기억해야 하는 원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텐더와 칵테일 또한 다르지 않기에, 피에르와 잭은 칵테일에 대해 무지할 지언정 최선을 다한 평가를 위해 뉴 데이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뉴 데이를 한 모금 머금고 삼킨 순간.


".....세상에."


"......."


"어떠신가요?"


".....완벽해. 내 어휘가 이걸 설명하지 못한다는 게 통탄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입에 머금은 순간, 보드카를 기반으로 한 브랜디와 주스의 부드러운 맛이 입 안을 감싼다. 칼바도스와 애프리콧 브랜디, 오렌지 주스가 주는 단맛에 취해있을 때 쯤, 조금씩 느껴지는 중후한 씁쓸함이 마치 중독되듯 다가온다.


그리고 마침내 목구멍으로 넘기면, 단맛에 가려져 있던 보드카와 칼바도스, 애프리콧 브랜디의 강한 도수가 순식간에 밀려오며 묵직하고도 짜릿한 알코올의 느낌을 선사한다. 뒷맛이 답답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 모든 과정에서 느껴지는 사과와 살구, 오렌지의 과일 향과 맛 덕에 알코올은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넘어간다.


잭은 보드카라면 몰라도 칵테일을 마셔본 적은 없다. 칵테일에 대해 한없이 아마추어에 가까움에도, 이것이 절품(絶品)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로 대단해. 지금까지 나와 피에르가 만든 모든 요리가 헛되게 보일 정도로.....우리가 추구하는 '맛'이 그대로 나타난 듯한 느낌이야."


"과찬이십니다."


"아냐, 이건 정말.....피에르, 넌 어때?......피에르?"


"........"


"피에르?"


"....하, 하하. 하하하! 뭐야 이게! 엄청나잖아! 굉장하잖아! 내가 맛봤던 가장 훌륭한 요리도 이 정도는 아니였어!"


격하게 흥분한 듯 붉게 물든 눈동자를 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피에르가 뉴 데이의 잔에 키스하고 다시 한 번 입으로 가져갔다. 뉴 데이를 입에 머금으며, 피에르는 황홀한 표정으로 칵테일의 맛을 맛보고맛보고맛보고 또 맛보았다. 광기와 욕정에 가득 찬 채로 피에르가 뉴 데이를 전부 비워버리고서 바텐더에게 달려들었다. 바텐더의 어깨와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대며 숨소리가 닿는 곳까지 가까워졌다.


"이걸,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래, 이거야말로 궁극이야! 모든 요리사가, 23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토록 찾아 해매던 궁극의 맛 그 자체라고!"


"피에르 씨."


"바, 바, 바텐더! 넌 도대체 누구야!? 8인의 셰프 중 한 사람이야? 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맛을-----"


"피에르 씨, 그건 최고의 칵테일이 아닙니다."


"---뭐?"


"원래 뉴 데이는 '셰이크' 기법으로 만드는 칵테일입니다. 본래 셰이커에 재료를 넣고 섞는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완성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잔에 따르는 '빌드' 기법을 사용했고, 원래 뉴 데이가 가지는 최고의 맛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


"그렇기에 이 미완성품인 뉴 데이를 궁극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건, 과분한 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눈을 감고, 다시금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피에르가 바텐더에게서 떨어졌다. 이제는 텅 빈 잔에 조금만 남아 있는 뉴 데이를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던 피에르는 허리춤에서 애용하는 식칼을 꺼낸 채 바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잭, 먼저 나가 있을게. 지금 이 느낌....혼자서 즐기고 싶어."


"알았어, 피에르."


딸랑.


조그만 종소리가 울리고, 피에르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지켜보던 잭은 미소를 띈 채 마시던 뉴 데이를 마저 들이켰다.


"...바텐더, 하나만 물어볼게."


"무엇이든지요."


"왜 처음부터 셰이크 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거야? 굳이 빌드 기법을 사용한 이유가 뭐지?"


"여러분과 같습니다."


"...음?"


무슨 말이냐는 듯 뉴데이에게서 고개를 들어 바텐더를 바라본 잭에게, 바텐더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피에르 씨와 잭 씨가 궁극의 맛을 추구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는 것처럼, 저 또한 가장 맛있는 뉴 데이를 위해 여러 방법을 실험하는 것입니다. 이미 수많은 바텐더가 셰이크 기법이 가장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전 그 이상으로 좋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 어떤 손님께서 드셔도 최고라고 자랑할 수 있는 칵테일을 만들 때까지 정진할 뿐입니다."


"...멋지네, 바텐더."


마침내 잔을 전부 비운 잭도, 바텐더를 향해 미소지었다.




*




"오늘도 그럭저럭이네. 저번의 도통 좋은 정보가 없어."


"....그러신가요?"


"그래. 이건 또 뭐야.....'궁극의 맛을 향한 피에르와 잭의 노력'? 뭐 이런 쓰잘데기없는......하, 이런 걸 줄 바에야 흔한 도시의 상식을 읽는 게 훨씬 낫겠어."


"........."


"하아, 오늘도 머리가 아프네. 샴페인 더 줘. 아예 보틀로."


"....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혹시 이 피에르랑 잭이라는 손님에게 대해 생각한 거야?"


"......."


"명심해. 같은 요리사라고 해도, 이 자들과 너는 격이 달라. 넌 감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거든. 요즘 말쿠트나 호드를 보면 스트레스가 샘솟는데, 너의 칵테일이면 그런 기분이 확 사라져."


"......네."


".....옆에 누군가 있는 게 좋긴 하네."


"네?"


"잊어버려."


".........."




<가로등 사무소와 마시는 카타르시스>




"......"


"......"


"루루, 마스. 케이크 때문에 어색한 건 알겠지만 이제 일하러 갈 시간이야."


"...네, 산 선배."


"..네."


"하아....마스, 파일 좀 줄래?"


"네."


"음, 도서관. 아직 도시괴담에 불과하지만 소수의 사무소와 사람들이 들어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곳이야."


"...대신 빠져나온 몇몇에 의하면, 자신이 원하는 지식이 담긴 책을 가지고 나올 수 있다고 하죠. 도시에서는 꽤 보기 드문 장소네요."


"도시에서는 뭔가를 빼앗기만 하지 뭔가를 주는 곳은 많지 않으니까. 거기다 그게 정보라는 면에서 협회가 주목한 것 같아."


"선배, 그런데 이 '바'는 뭐죠? 아무리 봐도 도서관이라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데요?"


"나도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책을 얻기 전에 칵테일을 제공해준다는 모양이야. 의도는 불명이지만, 빠져나온 이들에 의하면 바텐더라는 존재가 제공한 칵테일은 맛도 정말 훌륭하고, 독과 같은 이상한 효과는 일절 없었다고 해."


"...도시에서 이상한 일에 대해 굳이 이유와 의도를 찾는 것만큼 헛수고도 없겠죠."


"그건 그렇지. 취기는 신체 강화 수술을 받은 해결사라면 무시가 가능하고, 독이나 이상한 약품도 들어가있지 않으니...정말 순수한 호의라고 밖에 보이지 않아."


"뭐, 직접 가보면 알겠죠."


"정답이야. 마스, 루루. 준비됬어?"


"네!"


"넵!"


"좋아, 가자!"




*




딸랑.


"어서오세요, 손님."


"....과연, 들은 대로네."


"산 선배, 어떻게 할까요?"


"선배가 가져온 파일에는, 도서관 내 '바'에서 손님에게 위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했어. 도서관의 초대장에도 적힌 사실이고, 협회의 공인을 받은 정보이니 믿어도 되겠지."


"좋아, 가자."


"....다행이네요. 최근에는 다짜고짜 무기를 휘두르시는 손님분들이 많아서 곤란했거든요."


어느 정도의 경계를 유지한 채 천천히 카운터석에 앉는 산과 마스, 루루를 본 바텐더가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근 도서관이 점점 여러 사무소에서 주목받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해결사들이 도서관의 초대장을 받고 들어왔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바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부수거나 바텐더를 공격하는 등 앤젤라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실 바텐더 본인은 죽어도 부활하니 앤젤라가 정말로 화낸 건 아끼던 최고급 샴페인이 깨진 것 때문이었다는 걸 안 바텐더는 조금 눈물을 보였었다.


아무튼, 해결사 뿐만 아니라 여러 조직들 또한 그들의 경험에 의거하여 흔히 말하는 '선빵'을 수없이 날리자 앤젤라는 아예 초대장에 주의사항 한 줄을 덧붙여 버렸다.


'도서관 내 바에서 무력행위를 포함한 거친 행동을 보일 경우 강제 퇴거됩니다.'


거기다 이 법칙을 만들어내는데 사적으로 도서관의 창대한 힘을 꽤 많이 사용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말쿠트를 비롯한 여러 지정사서들과 앤젤라가 크게 싸웠었다. 결국 바텐더가 혼신의 힘을 다해 칵테일을 만들며 접대한 결과 겨우 무마되었지만, 일주일이 넘게 선빵 때문에 제대로 손님에게 칵테일을 만들어드리지 못한 것에 상심하던 바텐더에게는 앤젤라가 정말 천사로 보였다.


다만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산과 루루, 마스는 정말 감동받은 듯한 바텐더를 왜 저러냐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주문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음...솔직히 말하자면, 저희는 그다지 칵테일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전부 무료이며 훌륭한 맛을 자랑한다고 하니 끌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후의 전투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준다면 거절하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관장님께서 정하신 규칙에 따르면, 최소한 한 분의 손님이 칵테일을 드셔야 합니다."


".....어떻게 하죠, 산 선배?"


"방금 건 파일에서도 보지 못한 정보야. 자연스레 칵테일을 거부한 건 우리가 처음이라는 결론이 나오네....괜히 반항했다가 퇴거당하면 곤란하니, 한 사람이 마시긴 해야겠는데."


산이 얼굴을 찡그렸다. 협회에서 준 정보에도 없던 상황이니 다소 초조함이 느껴져도 어쩔 수 없었다. 산은 팔뚝만한 단검을, 루루는 화염을 방출할 수 있는 둔기로 싸우는데 전투에 세심한 조절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약간의 취기도 크게 작용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것을 제외해도, 도서관에서 갑자기 칵테일을 제공하겠다는데 의구심이 들지 않으면 이상할 터다.


침묵하던 마스가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루루와 산을 바라보았다.


"제가 마시죠. 전 신체 강화 수술도 받았으니 가벼운 정도의 취기는 무마시켜버릴 수 있습니다."


"....괜찮겠어, 마스?"


"걱정 마. 혹시 저 바텐더라는 존재가 선배와 루루까지 칵테일을 마시게 할 수 있으니 두 분은 먼저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야! 우리가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파일에 의하면 8급 해결사 셋이 먼저 달려들어 저 바텐더를 죽인 적 있다고 나와있었어. 비록 나 혼자지만, 그들보다 급수는 높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텐더의 제압은 무난히 가능할 거야."


"그래도!"


"오히려 이곳에 머물렀다가 바텐더의 강요로 마신 칵테일에 무언가 있어서 산 선배와 너까지 마셨다가 무력화되는 게 최악의 상황이야.....부탁할게."


"....마스."


"루루, 여기는 마스에게 맡기자."


"...알겠어요."


"결정하셨습니까?"


마스의 단호한 말에 산과 루루가 천천히 카운터석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루루가 미련이 남은 듯 여러 차례 뒤를 돌아보았지만, 마스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미소를 띈 바텐더를 노려볼 뿐이었다. 불안감에 떠는 루루를 잘 달랜 산이 나가는 문을 열었다.


딸랑.


"손님분 혼자이시군요. 일행분 들께 무언가 폐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시길."


"만약 그랬다면 널 죽여버렸을 거야."


"괜한 걱정이십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어떤 칵테일이든 가능한 건가?"


"제 역량 안에서 가능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말에 마스가 바텐더를 눈으로 훝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얼굴은 두꺼운 후드로 가려 겨우 입 만 보이는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바텐더가 영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잠깐 침묵을 고수하던 마스는 이내 한숨을 쉬며 읊조렸다.


"....카타르시스. 만들 줄 아나?"


"카타르시스, 주문 받았습니다."


의혹에 잠긴 마스의 물음에 미소로 답한 바텐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찬장의 문을 열어 술병 2개와 냉장고에서 주스 1병을 꺼내들었다. 바카디 151(Bacardi 151), 술병 중 하나에 수려하게 쓰인 상표를 본 마스가 놀란 듯 움찔거렸다. 냉정을 가장하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난 무능하단 말이야.




".....내가 알기로 저 바카디 151은 23구를 제외하면 물량을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고 들었는데."


"저도 잘 모르지만, 관장님께서 도서관의 힘이라고 말씀하시니 그대로 믿는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물질 창조라고? 정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면, 웬만한 특이점을 말아먹을 수준인데...?"


선배, 대체 무슨 일은 가져온 거예요? 불안감에 머리를 붙잡은 마스를 두고, 바텐더가 유리잔 하나를 꺼내어 바카디 151을 따라넣었다. 옅은 황색의 술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액체가 잔 속에서 파도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찰랑이는 바카디를 보는 마스의 눈이 강하게 떨렸다.




-----내가 어머니처럼 될 수 있단 꿈은, 어릴 적 꾸던 망상일 뿐이라고.




'일단은' 럼(Rum)인 바카디 151은, 75.5도 라는 괴악하고도 치명적인 도수를 자랑한다. 농담 없이 손소독제로도 사용 가능하고, 간단히 불을 붙일 수 있는 가연성 물질이니 말을 다한 셈이다. 이 미쳐버린 도수 탓에 스트레이트를 마시는 건 도시에서도 꺼려하며, 보통 다른 술과 섞어 마시거나 불쇼용으로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다.


그런 바카디가 잔을 절반 정도 채울 때까지 들어갔으니, 지금 만드는 칵테일이 어떤 물건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다음은 아마레또(Amaretto), 대표적인 아몬드 리큐르이며 호불호 강한 맛으로 유명한 술입니다."


".....디사론노 사(社)에서 처음 만들었으며, 먼 옛날 벽화를 그리던 루이니라는 자를 사랑한 어떤 미망인이 브랜디에 살구씨를 넣은 달콤한 술로 구애했던 것이 최초의 아마레또로 알려져 '사랑의 리큐르'라고 불리기도 하지."




-----손에 피가 나도록 단련해도, 밤을 새가며 공부해도 난 그대로야.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어머니와 나의 격차만을 느낄 뿐이야.




"대단하시군요. 상당히 술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알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


바텐더가 감탄하며 칭찬의 말을 건냈건만, 마스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카운터에 머리를 박았다. 스스로를 질책하는 듯한 마스의 행동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바텐더는 이윽고 아마레또를 유리잔에 붓고 마지막 병에 손을 뻗었다.


"마지막은---"


"라임 주스(Lime Juice)....."




-----나 스스로의 무능함은 빌어먹게도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그렇습니다."


자신을 쥐어짜듯 내뱉은 그 말에 화답한 바텐더가 라임 주스를 잔으로 기울였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서 바카디 151과 아마레또, 라임 주스가 서로 섞이며 춤추며 소용돌이쳤다. 상당한 볼거리였건만, 마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보려 하지도 않았다.


막대로 스터를 끝마친 바텐더가 유리잔에 담긴 칵테일을 마스에게 내밀었다.


"카타르시스(Catharsis)입니다."


".....고맙군."


완성된 카타르시스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후에야 괴로움에 사무친 얼굴을 든 마스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잔을 잡았다.


"....."


잔을 들어, 강한 알코올 향을 풍기는 카타르시스를 입가로 가져간다.


망설일 것 없이, 단숨에 들이킨다.


.............................


.........................


...................


................


............


........


......


...


..



"손님, 제가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


"제가 듣기로 손님께서 받으신 강화 수술로는 가벼운 취기만 해소하실 수 있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카타르시스는 칵테일 중에서도 가장 높은 도수로 유명합니다. 어째서...."


"내가 어릴 적에."


"......손님?"


"내가 어릴 때, 어머니를 찾아가면 언제나 카타르시스를 드시고 계셨어."


"......"


"그 때의 나는 무작정 어머니처럼 되고 싶어서.....어머니 몰래 술을 훔쳐서 그걸 만들어 마셨어."


"......"


"미친 짓이었지. 한 모금에 쓰러진 나는, 다급히 치료한 어머니한테 정말 많이 혼났어."


"......그러셨군요."


"그런데.....난 그래도 카타르시스가 좋았어."


".....어째서였나요."


"나는 바보같고 한심할 정도로 무능해서.....높은 등급의 해결사로 모두의 선망을 받았던 어머니의 발끝조차도 따라갈 수 없었어."


"......."


"주변의 기대는 실망으로....호의는 비웃음으로.....칭찬이 질타로 바뀌었어. 스스로 자괴감이 젖어있을 때면, 항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마셨어."


".......전부, 잊을 수 있으니까요?"


"한 잔을 전부 들이키고 나면,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어. 한심한 나를 잊고 행복할 수 있었어."


"........"


"그런데, 어느 순간에 집에 있던 바카디가 동났더라고."


"......."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었어. 울며 밤을 지샐 때마다 카타르시스가 미친 듯이 생각났어."


"......."


"어머니는....이런 나에게 항상 웃어 주셨어. 누가 보기에도 한심하고 무능한 아들에게, 넌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셨어."


"......."


"그런데, 난....이런 꼴이네요."


"......."


"선배와 루루를 걱정한 게 아냐.....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추한 나를 보이기 싫었어."


"........손님."


"결국 카타르시스를 마시고 싶다는 더러운 욕망일 뿐이었다고."


"......."


"어머니....."


"......"


"엄마......"


"......"


"미안해요....."


"......"




*




바에는 아무도 없다. 난 하루의 대부분을 바 안에서 혼자 고독히 지낸다. 몇 분 안 되는 손님과 매일 저녁에 오시는 앤젤라 님을 제외하면, 바에서 나갈 수 없는 나는 혼자일 때가 많았다. 


원래 손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난 찬장을 열고 술병을 꺼냈다.


바카디 151, 아마레또, 라임 주스.


한 잔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 난 그대로 칵테일을 들이켰다.


독하다. 처음 혀에 닿을 때부터,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까지 독하디 독한 알코올이 사정없이 입 안을 유린했다. 중간중간 라임 주스와 아마레또의 단맛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곧 밀려오는 독한 향과 맛에 삼켜져 사라진다. 도저히 오래 머금을 수 없는, 당장이라도 뱉어버리고 싶은 독함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카타르시스를 충분히 맛보며 삼켰다.


난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마스의 책'이라고 적힌 무늬 없는 황량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쓸만한 책이라고 앤젤라 님이 좋아했던 바로 그 책이며, 진짜가 아닌 단순한 사본이다.


앤젤라 님께 간곡히 부탁하여 비록 사본이라도 가져오는 것까지는 허락받았지만, 이것을 펼치는 건 엄격히 금지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책의 표지를 아련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 손님은 어떤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까.


난 이 손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꿈꾸는지, 왜 살아가는지.


그래도.


그가 한 잔의 카타르시스를, 한 잔의 해방감을 원했다는 것만은 안다.


답답한 자신을 벗어던지고, 아주 잠깐의 행복을 위해 이 독한 칵테일을 미친 듯이 바랬다는 것은 안다.


그가 결국 마지막까지, 어머니에 대한 자책감을 버리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 안다.


무심코 올라오는 죄악감에 몸부림쳤다. 내가 그를 죽였다. 내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았다면. 카타르시스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그가 제대로 검조차 휘두르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쾅!



".....마스를 돌려받으러 왔다. 개자식들아."


"...어서오세요, 손님."


아직 반 정도 남은 카타르시스를 책 옆에 두었다.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나에게 불타는 둔기를 내려찍는, 마스라는 손님을 걱정하던 또 다른 손님의 모습이었다.


난 조용히 눈을 감고.


나의 죽음으로 그녀의 슬픔이 조금은 가시기를 빌며.


다가오는 죽음에 몸을 맡겼다.




<츠바이 6과와 마시는 체리 럼 콕>




"뒤틀림의 책이라....."


"월터 부장님, 6과 직속 해결사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고맙네.....이사도라, 눈빛이 따갑군."


"죄,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줄리아와 산...이라고 했었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는데, 그들이 도서관에서 모두 죽었으니 어서 도서관에 가고 싶은 마음 뿐이겠지."


"........."


"하지만 기억해야 해. 이번 도서관으로의 출정은 어디까지나 뒤틀림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최우선이다. 네 친구들의 책을 찾는 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 치곤 뭐라도 씹은 듯한 표정이로군?"


"......"


 "잘 들어, 이사도라. 자네는 젊은 나이에 6과 정보담당까지 올랐지. 이 나이 쳐먹고 아직도 말단 6과의 부장이나 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


"이건 기회일세, 절호의 기회. 검은 침묵이 해결한 피아니스트 이후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뒤틀림 때문에 협회는 무슨 탐정까지 고용하면서 혈안이 되어 있어. 이런 와중에 우리가 뒤틀림의 책을 가져오기만 하면, 5과.....아니, 4과까지의 특진은 확실해. 무언가를 더 얻어 나온다면 3과나 2과, 그 콧대 높은 1과도 꿈이 아니란 말일세."


"......."


"이사도라, 대답은 하지 않는 겐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나도 준비가 끝났다네. 그럼 어디 확인하러 가보세나."


"네."


"그 잘난 도서관이란 곳을 말이야."





*





딸랑.


"어서오십시오, 손님."


"나도 반갑군."


"...저도요."


여기가 그 칵테일 바인가. 나지막히 중얼거리던 월터는 웃고 있는 입만 보이는 기묘한 바텐더를 한 번 노려보더니 이내 별다른 행동 없이 카운터석에 앉았다. 뒤를 따르는 이사도라는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월터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도서관 안의 칵테일 바에 대한 정보는 이미 널리 퍼진 지 오래였다. 등가교환도 매우 양심적인 편인 이 도시에서 무언가를 공짜로 건내준다는 것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바에 대해 알려졌을 때는 많은 이들이 뻔한 함정이라 생각했으나, 도서관에 오는 손님이 늘고 바를 경험하는 이들도 늘면서 칵테일 바는 '위해를 가하지 않고 무료로 칵테일을 제공하는 곳' 이라고 아예 협회에서 인증하게 되었다. 아예 책은 덤이고 칵테일을 목적으로 초대장을 여는 이들도 있을 만큼 어느 의미에서 이 바는 도서관보다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따라서 월터와 이사도라 또한 이 바에서 딱히 츠바이핸더를 뽑을 필요는 없단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함부로 난동을 피웠다가는 뒤틀림의 책은 고사하고 바로 쫓겨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편이 맞았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왕이면 럼(Rum)이 들어간 걸로 부탁하네. 술을 즐기는 편이지만 칵테일을 잘 몰라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쪽의 손님 분은요?"


"....도수가 낮은 편으로 부탁드립니다."


"허허, 이사도라는 술에 약해서 탈이라니까. 바텐더, 아예 논 알콜 칵테일로----"


"아니요, 두 분 손님의 니즈에 부합하는 칵테일이 있습니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부탁하네."


허허거리며 호감 있게 웃는 월터를 뒤로 하고, 여전히 미소를 띈 바텐더가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뒤를 돌아본 것을 확인한 월터가 이사도라에게 눈빛을 보냈다. 신호를 확인한 이사도라가 손목에 찬 은빛 팔찌를 이러저리 돌렸다. 이윽고, 팔찌가 조금씩 빛나더니 이내 중심 부분에서 날카로운 바늘 하나가 튀어나왔다.


마비독이 발린 바늘이었다.


초대장에 추가된 사항에서 '바 내부의 거친 행동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바텐더 개인에게 끼치는 위해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틈을 파고든 것이다. 도서관과 뒤틀림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시된 이상, 도서관에서 창백한 도서관장과 함께 의문의 존재인 바텐더가 어떤 형태로든 뒤틀림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은 높다. 그렇기에 월터는 바텐더를 마비독을 이용해 구속한 후 협회로 끌고 가 조사를 계획했다.


이사도라에게도 반대는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산과 줄리아의 책을 찾기만 한다면 그 외는 상관 없었으니까. 


바늘을 쥔 이사도라가 타이밍을 가늠하고 있을 때, 월터가 카운터 아래에서 손짓하며 이사도라를 제지했다. 그와 동시에 여러 종류의 병을 든 바텐더가 몸을 돌렸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기꺼이."


"...네."


시커먼 속내를 품고 있음에도 월터는 사람 좋아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실력은 둘째치고 사내 정치와 언변만으로 6과 부장에 올랐다고 쉬쉬당하는 만큼 월터의 거짓 섞인 웃음은 그 실체를 아는 이사도라도 순간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바텐더의 월터의 거짓 웃음에 미소로 마주보고는, 첫번째 병을 집어들었다.


처음은 화이트 럼(White Rum)이다. 럼 중에서도 가장 클래식한 럼으로, 그 이름에 맞게 무색이며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맛으로 많은 술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한 보드카처럼 투명하기에 칵테일 기주로도 꼭 들어맞는 럼이다. 럼의 마개를 열자, 화이트 럼 특유의 달콤한 내음이 월터와 이사도라의 코를 간질였다.


바늘을 어루만지며 빈틈을 보고 있던 이사도라에게, 럼을 모두 따른 바텐더가 말을 건냈다.


"이사도라님,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줄리아 님과 산 님을 아십니까? 며칠 전 도서관에 온 손님이십니다."


".....!"


이사도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경악과 분노, 그리고 증오가 섞이며 이사도라가 바텐더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어떻게 알았지?"


"두 분은 모히토(Mojito)를 드셨죠. 맛있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이사도라님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때의 두 분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


"....슬프시겠죠. 저 또한, 손님의 죽음은 슬픕니다. 제 칵테일이 그 손님의 마지막라고 생각할 때마다, 제가 그분을 죽이는 것만 같아 죄악감이 듭니다."


"......."


"하지만, 도서관은 거래를 제시했고, 손님분들은 그에 직접 응하셨죠.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미소를 띄던 바텐더의 입가가 허물어졌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하나하나가 말로써 내뱉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가 감히 말씀드립니다."


"........"


"......"


"부디.....여러분이 원하는 책을 찾길 빌겠습니다."


그건, 월터와 이사도라가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 창백한 도서관장에게서 들었던 말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바텐더가 한 말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부디 살아나가 주세요, 라고.


이사도라는 주먹을 쥐며 몸을 떨고는, 줄리아와 산의 이름을 나지막히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월터는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이내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바텐더는 차갑게 식혀져 물방울이 맺힌 체리 브랜디(Cherry Brandy)를 잡았다.


본래 체리 브랜디는 말 그대로 체리로 만든 브랜디가 되어야 하나, 여러 유명 브랜드에서 체리 브랜디를 리큐르의 상표명으로 채택해버린 탓에 시간이 상당히 지난 지금에 와서는 체리 리큐르를 체리 브랜디라고 칭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즉 바텐더가 체리 브랜디라고 꺼내든 적갈색의 액체가 담긴 이 병도, 실상은 체리 리큐르였다.


병의 뚜껑을 열고 기울이자, 짙은 적갈색의 체리 리큐르가 투명한 럼과 파도이고 섞이며 잔 전체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갔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을 빛을 받아 유리잔 안의 적색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체리 브랜디를 적당량 넣고, 바텐더가 마지막 병을 집어들 때까지 월터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사이 고개를 든 이사도라가, 아직 오른손에 잡혀 있는 바늘과 월터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눈앞의 바텐더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월터....부장님."


"......."


바텐더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전음(傳音)으로 월터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반응이 없었다. 계속해서 망설이던 이사도라는 결국, 바늘을 든 손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타오르던 분노와 증오는, 갈 곳을 잃고 헤메고 있었다.


마지막 병은 콜라(Coke)였다. 서랍에서 은빛 병따개를 꺼낸 바텐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콜라병의 뚜껑을 따자, 치익 하는 시원한 탄산 소리가 조용한 바에 울렸다. 새하얀 기포가 끓어오르는 차가운 콜라가 화룡점정으로 유리잔에 부어졌다.


아무리 체리 브랜디가 강렬한 적갈색을 자랑한다 하나, 콜라의 검은색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럼과 체리 브랜디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분량으로 들어간 콜라가 잔 전체를 검게 물들이고, 그 특유의 청량감을 여지없이 방출했다. 대략 유리잔이 꽉 찰 때까지 콜라를 부은 바텐더가 이내 막대를 꺼내고 두 잔을 스터했다. 탄산이 거품치며 날뛰는 그 모습은 이사도라도 한 순간 모든 걸 잊고 칵테일만을 쳐다보고 싶을 만큼 보석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완성입니다. 체리 럼 콕(Cherry Rum Coke)입니다."


"...고마워요."


".....고맙군."


자신들의 앞으로 내밀어진 체리 럼 콕에, 드디어 눈을 뜬 월터와 이사도라가 잔을 잡았다. 칵테일의 차가움이 여지없이 손으로 전해지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머금는다.


꿀꺽.


"...맛, 있어."


"감사합니다."


첫맛은 단순히 콜라라고 말해도 될 만큼 콜라의 맛 그 자체다. 하지만 콜라의 탄산과 즐거운 단맛을 즐기고 있노라면 서서히 체리 브랜디의 알코올 섞인 기품 있는 단맛이 혀를 적시고, 럼이 가진 콜라와 체리 브랜디와는 전혀 다른 달콤함에 취하며 누구나 미소짓게 만든다.


그저 단맛이라고 표현했지만, 럼과 체리 브랜디, 콜라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3가지 단맛은 풍겨오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단맛이 섞이고 섞여 폭발할 것만 같아도, 체리 브랜디가 가진 여타 리큐르보다도 높은 도수와 럼의 알코올이 가져오는 쓴맛이 적절히 단맛을 제지시킨다. 그 뿐만 아니라, 체리 럼 콕을 마시면서 느껴지는 달콤하디 달콤한 향은 네번째 단맛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맛에 풍미를 더한다.


분노도, 슬픔도, 아픔도 모두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은 한 잔이었다.


"아, 손님. 조금 흘리셨군요. 잠시만요, 냅킨이 어디 있더라...."


".....!"


그 넘쳐흐르는 맛에 취해 무심코 체리 럼 콕을 조금 흘린 이사도라를 보고, 바텐더가 냅킨을 찾기 위해 뒤를 돌았다. 또 다른 찬장을 뒤적거리는 그의 모습에 이사도라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한 번 더 월터를 보았다. 이번에는 눈을 뜨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이사도라는 월터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바텐더를 찌르지 않자니 줄리아와 산의 복수가 어른거리고, 그를 찌르자니 바텐더의 진심 어린 그 말이 생각났다. 월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이사도라에게 손을 뻗었다.


탁.


"이사도라."


"월터 부장님...."


바늘은, 찔러지는 일 없이 월터의 손에 들어갔다.


"부장님."


"나가 있게, 이사도라."


".......네."


이사도라는 마지막까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이사도라는 몇 차례나 뒤를 돌아보며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딸랑.


그리고 마침내 문이 닫힌 후에야 월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텐더, 내 하나 묻지."


"무엇이든지요."


"자네는 뒤틀림인가?"


"...아마 아닐 겁니다."


월터가 체리 럼 콕을 한 모금 들이켰다.


"정말로 그런가?"


"...네."


"....미안하군. 계속 물음표를 붙이는 건 내 나쁜 버릇이야."


다시 한 번 체리 럼 콕을 들이킨다.


"....난 어린 나이에 츠바이 협회에 들어갔네. 아버지가 싫어 가출했었거든. 아버지는 언제나 나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일삼았지. 돈이 없다는 둥, 시간이 없다는 둥, 우리를 사랑한다는 둥....수많은 거짓말로 나와 어머니를 상처입힐 때마다, 난 아버지에게 분노했었네. 그리고 집을 나와 피를 깎는 노력으로 츠바이 협회에 들어갔지."


체리 럼 콕을 마신다.


"하지만 내 동기들이 계속해서 승진해나갈 때, 난 계속해서 6과였어. 이렇게나 나이를 먹고.....점점 은퇴할 때가 다가옴에도, 수십 년 동안 츠바이에 있었음에도 난 겨우 6과 부장일 뿐이었다네."


체리 럼 콕을 삼킨다.


"언제부턴가 계속해서 거짓을 달고 살았지. 나도 무엇이 내 마음인지 모를 정도로, 6과 부장 자리를 지키고 더욱 위로 올라가지 위해 아득바득 아부하고, 거짓말을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네."


체리 럼 콕을 바라본다.


"어느센가, 난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처럼 되어 있었어."


체리 럼 콕을.


".....그리고 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 내 진심을 내보이는 일 없이, 거짓과 기만으로 살아갈 거야."


한 손으로.


"...도시는, 자네에게 매우 힘든 곳이겠지. 그곳에서 자신의 진심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모두가 모두를 속이며, 서로 기만하며, 상대를 짖밟으며 살아가는 곳이 도시니까."


내려놓는다.


"그래도 난 자네가 부럽군. 그렇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네가....."


"......"


".....부디, 자네가 그 마음을 유지하길 빌겠네."




진심으로, 말이야.






*






"앤젤라 님."


"왜 그래?"


"앤젤라 님은, 진심을 내보이신 적이 있으신가요?"


"....무슨 뜻이야?"


"일체의 거짓이나 꾸밈없이,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신 적 있으신가요."


"........."


"앤젤라 님?"


"....불쾌하네. 이만 일어날게....다시는 그런 말 지껄이지 마. 그땐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네."




<버림받은 개와 마시는 블루 먼데이>





"디노, 대충 조사해 봤어?"


"물론이지. 줄루쪽 애들이랑 알아봤는데, 최근 도시전설이 된 그 도서관의 초대장이 확실한 것 같아. 경미, 이건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약속의 소중함을 모르는 이 개새끼들을 만나기 직전인데, 어느세인가 주머니에 들어와 있더라고."


"하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월터의 책이 탐나긴 우리가 정말 필요한 건 L사 둥지의 설계도일 뿐이야. 거기에 츠바이 6과를 전멸시킨 도시전설이면 사실상 도시질병과 동급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줄루, 넌 너무 신중해서 탈이야. 뭐, 톱니교단과 싸우느라 조직원들 절반은 갈려나갔지만 총력을 투입하면 도시질병 하나쯤이야 어떻게든 해결 가능해. 그리고 월터가 비열한 꼰대이긴 해도 츠바이 6과 부장이야. L사 둥지의 설계도야 그 책에 적혀있을 테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도 없이 도시질병 급에 뛰어드는 건 자칫하면----"


"그만. 줄루, 디노. 내가 왜 초대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라고 부탁했겠어? 초대장이 진짜라면 바로 들어가려고 물어본 거라고."


"...정말? 경미, 너의 말이라면 따르겠지만 이유가 알고 싶은데."


"자세히 봐, 월터의 책 말고도 문신에 대한 책들도 초대장에 실려 있어. 제아무리 특허가 풀려 개나소나 쓰는 특이점이 문신 시술이라 해도, 제대로 된 문신 시술법이 담긴 책은 가치가 매우 크지. 문신 시술자들에게 팔아도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거고, 그게 아니라도 우리 조직원들한테 문신을 싹다 돌리면 손가락 직속까지 넘볼 수 있을 거란 말이지."


"......우리가 엄지에게 받는 취급은 부하가 아니라 많고 많은 사냥개일 뿐이니까."


"이건 기회야. 우리 버림받은 개를 단번에 끌어올려줄 복덩이라고."


"제대로 풀린다면 L사 둥지 설계도도 월터의 책으로 구하고, 문신 시술 책까지 얻어 대박칠 수 있겠군."


"조직의 사활을 건 도박이라면, 도시질병 급 도시전설이야 가벼운 수준이지. 바로 준비할게."


"우리도....그 망할 흑운회처럼 엄지 직속이 되는 거다...!"





*





딸랑.


"휘유. 칵테일 바라, 이거 생각치 못한 수확인데?"


"경미, 초대장의 주의사항 봤지? 또 빡돌아서 부쉈다가는 바로 쫓겨날 테니 조심하라고."


"그런데 상당히 괜찮은 바로군. 22구에 이런 곳이 하나만 있어도 여한이 없겠어."


"어서오십시오, 손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바 내부에 휘파람을 불던 경미는 카운터의 바텐더를 발견하고는 사나운 미소를 띄우며 카운터석에 걸터앉았다. 디노는 한숨을 쉬면서도 경미를 따라 앉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던 줄루는 조금 늦게 자리를 잡았다.


전신에 거친 문신을 한 근육질의 남자들이 셋이나 있으니 조금은 위축될 만도 하건만, 바텐더는 그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정중한 자세로 버림받은 개들을 맞이했다. 바텐더의 수려한 태도에 경미가 즐겁게 웃고는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지는 얼음물을 잡아 한 모금 들이켰다.


"바텐더라고 하면 되나? 이곳의 주류는 전부 공짜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다만 많은 양은 제공할 수 없는 관계로 손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드시는 건 무리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아, 그건 괜찮아. 어차피 취할 때까지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하지만...."


턱! 얼음물이 담긴 컵을 한 손으로 주무르던 경미가 컵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근육이 다부진 팔에 새겨진 검은색 문신이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내가 원하는 칵테일이 하나 있어서 말야. 그걸로 줬음 좋겠는데."


"제 능력 안이라면 무엇이든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디노, 경미의 나쁜 버릇이 나온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만약 저 바텐더가 경미가 원하는 칵테일 내주지 못하면......쫓겨나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니, 필사적으로 말려야지."


디노와 줄루가 얼음물을 마시면서 이마를 부여잡았다. 처음 보는 술집에만 가면 나오는 경미의 버릇 때문에 골치를 썩힌 적이 대체 몇 번인지 이제는 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경미가 원하는 술을 내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경미는 고약하게도 술의 이름을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로 다섯 가지의 질문만 허용했다. 그리고 다섯 번의 질문 안에 경미가 원하는 술을 내준다면 문제 없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손님과의! 약속의! 소중함을!' 이라면서 바텐더를 죽이기 일쑤였다. 더욱이 도시의 바텐더는 대부분이 아마추어조차 되지 못하는 저급이기에 디노와 줄루가 기억하기에 경미가 만족하며 지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금 심하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미가 주장하길 손님이 원하는 술을 내주는 건 바텐더와 손님의 약속이라나 뭐라나. 거기에 평소에는 믿음직한 리더이기에 뭐라 건드리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과 같이 특수한 몇몇 경우에만 디노와 줄루가 죽기살기로 경미를 말릴 뿐이었다.


"제게 허락된 건 다섯 번의 질문 뿐이라는 거죠?"


"그래. 그 안에 원하는 술을 내준다면야,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제대로 된 프로 바텐더라는 거지. 물론, 그 안에 내지 못한다면...."


"괜찮습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요."


"하하하하! 굉장한 자존심인데, 어디까지 가나 볼까."


경미의 으름장에도 바텐더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도서관의 방호를 믿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버림 받은 개들이 바텐더에게 덤벼든다면 바텐더는 당연히 죽는다. 설령 그 난동으로 인해 버림 받은 개들이 도서관에서 쫓겨난다 해도, 그것은 바텐더가 처참하게 맞아 죽은 후일 것이다. 결국 바텐더도 도서관의 일부이면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에 앤젤라는 고급 샴페인들만 무사하다면 바텐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별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얼마 전 츠바이 협회에게 바텐더가 납치당할 뻔 했음에도, 앤젤라는 바텐더에게 끼치는 위해를 금지한다는 주의사항을 초대장에 써넣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텐더지만, 그는 여전히 웃는 채로 뒤 편의 찬장을 활짝 열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칵테일의 색은 어떠했습니까?"


"파란색이었어."


"두번째로 질문드리겠습니다. 칵테일의 맛은 어떠했습니까?"


"강렬했지. 그러면서도 달콤한 감이 있었고."


"세번째로 질문드리겠습니다. 향기는 어떠했습니까?"


"꽤 강한 과일 향이 났지. 무슨 과일인지는 네번째로 질문해보라고."


"...아니요. 충분합니다."


"뭐?"


금방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바텐더는 경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찬장에서 여러 종류의 술병들을 꺼내 들었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역으로 한 방 먹은 경미는 그답지 않은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사납게 웃으며 바텐더를 노려보았다.


희열과 경악, 기대와 즐거움이 섞인 거칠고도 강렬한 눈빛이었다.


"질문이 더 필요없다고?"


"이미 전 충분한 정보를 얻었고, 답을 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질문하여 손님의 시간을 빼앗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오오, 경미. 이런 건 처음인데? 그냥 술이라면 몰라도 여러 술과 음료들을 섞어내는 칵테일을, 그것도 세 질문만으로 알아냈다고?"


"그러게. 이봐 바텐더, 혹시 설명하면서 만들 수 있어?"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결론을 내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디노의 요청에 승낙의 뜻을 보인 바텐더가 어디선가 꺼낸 은빛 셰이커를 물로 한 번 씻으면서 입을 열었다.


"우선, 저는 칵테일의 색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칵테일에서 색이란 손님의 눈을 즐겁게 해드리는 요소이며, 동시에 여러 칵테일들을 구분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손님분께서는 칵테일이 파란색이라 말씀하셨죠. 보통 칵테일에서 파란색은 잘 나오지 않는 색입니다. 푸른색을 띄는 술이 적을 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다른 색에 섞여 검은빛을 띄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명확히 파란색이라 말씀해주신 이상, 제대로 된 바텐더라면 이것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블루 큐라소(Blue Curacao)?"


"오렌지 리큐르 중 하나로써, 도수를 낮춘 트리플 섹(Triple Sec)에 푸른색을 추가한 술입니다. 보통 칵테일에서 푸른 색을 낼 때 쓰이며, 파란색을 띄는 칵테일은 전부 블루 큐라소가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텐더가 블루 큐라소가 든 병을 버림 받은 개들에게 보여주고는, 마개를 따고 셰이커에 따라 넣었다. 아름다운 파란색을 띄는 오렌지 향의 리큐르가 카운터에 유일한 조명빛을 받으며 은빛 셰이커 안쪽에서 소용돌이쳤다.


"다음은 맛이었습니다. 파란색을 띄는 칵테일은 어디까지나 전체 칵테일 중에서 적은 수일 뿐, 하나하나를 따지자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기에 전 칵테일의 맛을 질문드렸습니다. 손님께서는 강하면서도 단맛이 느껴졌다고 하셨죠. 맛에 대한 평가에서 '강하다'가 가장 먼저으로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그 칵테일의 도수가 높았음을 의미합니다. 독하지 않은 파란색 칵테일이었다면 강하다는 표현보다도 달다, 새콤하다 등의 말이 먼저 나왔을 겁니다."


"그건 그렇군."


"그렇다면 전 파란색 칵테일 중에서도 강한 도수를 가진 물건을 찾으면 됩니다. 보통 파란색 칵테일이라 한다면 블루 라군(Blue Lagoon), 블루 사파이어(Blue Sapphire), 블루 코랄 리프(Blue Coral Reaf), 블루 하와이(Blue Hawaii) 등 다수 있습니다만, 이들 대부분은 달콤한 맛이 주류이지, 높은 도수를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후보군이 한정되었죠."


"........."


"거기서 또 하나, 손님께서 '강하다' 다음에 '달콤하다'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들어간다면 후보가 더더욱 좁혀집니다. 예를 들어 블루 스카이(Blue Sky)는 보드카가 들어가 상당한 도수를 자랑하지만, 라임 주스가 들어가는 만큼 달콤하다 보다는 새콤하다는 인식이 먼저 나옵니다. 로켓 퓨엘(Rocket Fuel)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블루 큐라소가 들어가 파란색을 띄지만, 블루 큐라소, 보드카, 바카디로 만드는 만큼 달콤하다는 맛이 나올 껀덕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달콤한 맛이 결여되거나 부족한 칵테일들까지 제외했습니다."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전문지식에 디노와 줄루, 심지어 경미까지 감탄했는지 어느세인가 그들은 집중하여 바텐더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겉보기에는 어려보이지만, 그 외관과 맞지 않는 경험과 여유, 그리고 지식은 술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도 빠져들게 할 정도였다.


줄루는 바텐더의 말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 있었고, 디노는 침묵하면서도 지식들을 새겨듣고 있었으며, 경미에 이르러서는 감탄과 추임새까지 넣으면서 몰입하고 있었다.


"저는 두번째 질문 후에, 답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확신이 들지는 않았으므로 세번째 질문을 드렸습니다."


"향이었지?"


"그렇습니다. 색과 맛, 그리고 향. 칵테일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이자, 최소한으로 알아야 할 것들입니다. 제가 향에 대해 질문드렸을 때, 손님께서는 과일 향이 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과일인지는 물어보라는 말을 덧붙이셨는데, 이걸 잘 생각해본다면 손님께서 기억하시는 과일 향은 여러가지 과일이 섞인 게 아니라, 한 가지 과일의 향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


"제가 조금 전 블루 큐라소를 말씀드렸지요? 그 때 이야기했듯 블루 큐라소는 오렌지 리큐르입니다. 제가 방금 블루 큐라소를 셰이커에 따를 때도 오렌지 향을 맡을 수 있었는데, 블루 큐라소는 그만큼 강한 오렌지 향을 내는 리큐르입니다. 그런 리큐르가 들어간 칵테일에서 한 가지 과일 향이라면 그건 오렌지 향 뿐이지요."


".....대단한데."


"그리고 '꽤 강한' 과일 향이라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보통 블루 큐라소가 강한 오렌지 향을 낸다 한들, 보통 다른 술들과 섞인다면 자연스레 향은 죽기 마련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로켓 퓨엘이 그 예시입니다. 블루 큐라소가 들어갔지만 같이 들어간 바카디로 인해 그리 강한 오렌지 향을 내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강한 향, 그것도 기억에 확실히 남을 만한 오렌지 향을 풍겼다는 건, 블루 큐라소 말고도 오렌지 향을 내는 술이 더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바텐더가 술병 하나를 집어올렸다. 선명히 'Tripple Sec'이라 적힌 상표가 조명을 받아 또렷히 보였다.


"블루 큐라소와 가장 어울리는 술 중 하나이며, 블루 큐라소를 만드는 주 재료인 트리플 섹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렌지 리큐르이며, 40도에 가까운 높은 도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맛으로나 단맛으로나 오렌지 향으로나 가장 어울리는 술이죠."


".....와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칵테일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주(基酒)입니다. 이 부분은 제 경험에서 의거한 답입니다만, 저는 보드카(Vodka)를 생각했습니다. 칵테일의 기주들 중 무색, 무취, 무미라는 완벽에 가까운 3박자를 자랑하며, 섞이는 술들의 특징을 가장 잘 띄워주는 술이기에 보드카를 떠올렸습니다."


블루 큐라소가 담긴 셰이커에 물과 같이 투명한 트리플 섹과 보드카를 부어 넣는다. 굳이 용량을 말하자면 보드카는 45ml, 트리플 섹은 15ml, 블루 큐라소도 트리플 섹과 같은 15ml 가 적당량이다. 세 가지 술들을 셰이커에 부은 후, 셰이커를 서로 맞물리며 고정시킨다. 그리고 눈높이까지 들어올려 정확한 박자와 움직임으로 셰이크(흔들어 섞는 것)한다.


눈을 감은 채 경건히 술들을 셰이크하는 바텐더의 모습은 버림 받은 개들까지도 집중하게 할 만큼 진중하고도 무게감이 있었다. 디노와 줄루, 경미는 조용히 바텐더의 셰이크를 바라보며 칵테일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바텐더가 눈을 뜨고, 셰이커를 내려놓은 후 유리잔을 준비했다.


"보드카와 블루 큐라소, 그리고 트리플 섹. 물론 또 다른 재료가 더 들어갈지도 모르고, 강하면서도 달고, 그러면서도 오렌지 향을 가진 전혀 다른 칵테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짧은 지식으로는 오로지 이 칵테일만 생각났습니다."


꿀꺽. 경미가 무심코 군침을 삼켰다.


"블루 먼데이(Blue Monday)입니다."


"....흐흐, 흐하하, 흐하하하하하!!"


"겨, 경미?"


"왜 그래?"


"크하하하하! 뭐야, 대단하잖아! 어이 바텐더, 겉보기에는 퍽 어려서 믿음이 안 갔는데 이거이거 물건이야!"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정답이라고! 지금까지 스스로를 바텐더라고 칭하는 쓰레기들을 셀 수 없이 만나봤지만, 너 같은 놈은 없었어. 그것도 딱 세 가지만 질문하고서!"


"이봐 경미, 웃는 것도 좋은데 우선 맛보는 게 어때?"


"맞아, 내가 맛이 궁금해 미칠 지경인걸."


"맛, 그래. 맛을 봐야지."


경미는 아직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블루 먼데이를 거칠게 잡아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약속의 소중함을 아는 바텐더를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경미는 이 젊은 진짜 바텐더가 만든 블루 먼데이의 맛을 기대하면서 단숨에 칵테일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건------


"..........."


"경미?"


"경미."


".......이봐 바텐더. 블루 먼데이의 뜻이 뭔지도 아나?"


"제가 알기로 블루 먼데이는 직역하자면 '푸른 월요일', 동시에 '우울한 월요일'을 의미합니다. 짧은 주말이 지나고 다시금 일을 시작해야 하는 우울한 월요일에 마시는 칵테일, 즉 그 우울함을 단숨에 날려줄 수 있는 강렬한 맛을 가진 칵테일입니다."


"......역시 잘 알고 있구만."


"경미, 네가 좋아하는 칵테일이야? 그런 것 치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야 당연하지. 이건 내가 옛날에 마시던 거니까."


"옛날에?"


"그래. 내가 버림 받은 개를, 너희를 만나기 이전에는 뒷골목의 흔하디 흔한 건달에 불과했지. 약한 주제에 성격만 급한, 죽기에 딱 좋은 녀석이었어."


"........"


"난 월요일이 제일 싫었어. 꼴도 보기 싫은 놈들에게 상납금을 내는 날이었거든. 가끔 돈이 부족하면 죽기 직전까지 맞았지. 그런 때는 뒷골목 어딘가에 피투성이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날 도와준 게 어떤 술집이었어."


"....술집?"


"늙다리 아저씨가 혼자서 운영하는 꼴통 술집이었지. 쓰러져 있던 나를 데려와 숨겨주고, 술까지 공짜로 주던....멍청한 아저씨였어."


"......."


"가게도 허름했고, 손님도 거의 없었지만....칵테일 만드는 솜씨만은 훌륭했지. 그 아저씨는 항상 말했어. '손님이 원하는 칵테일을 주는 것이 바텐더와 손님 간의 제일 중요한 약속이다' 라고. 난 헛소리라며 웃어넘겼지만, 그 아저씨가 칵테일을 만들 때는 정말 진지했지. 마치 바텐더, 너처럼 말이야."


"........."


"다른 놈들에게 맞을 때마다, 아저씨는 블루 먼데이를 주셨지. 이걸 먹고 전부 털어버리라고. 그 때 마신 블루 먼데이는 정말 맛있었어. 난 그걸 마실 때마다 더욱 독하게 마음 먹고 돈을 모았지. 모으고, 또 모으고......한동안 아저씨의 술집에 가지 않으면서까지 돈을 모아서, 마침내 제대로 된 문신 시술을 하고 당당하게 아저씨 술집으로 찾아갔지."


"경미,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 앞으로 버림 받은 개의 회식은 그 술집으로----"


"그런데, 전부 부서져 있더군."


"........"


".........경미."


"간판도, 탁자도, 카운터도. 아예 건물 자체가 가루가 되어 있었어. 난 급히 잔해를 뒤졌지만, 유일하게 찾은 건......내가 항상 탐내던, 그 술집에서 가장 고급 술이었어. 조그맣게 '경미,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라고 쓰여 있더군."


"......."


"그리고 필사적으로 정보 사무소를 전전한 끝에, 난 술집을 부순 놈들이 누군지 알게 됬지. 술집을 부순 이유는 어처구니 없었어. 원래 보호비를 받고 술집을 보호해주던 놈들이, 고급 술이 탐나서 몰래 습격했다더군. 아저씨의 저항이 거세니 아예 부숴버렸다고."


"........."


"아저씨는 끝까지 약속을 지켰지. 나라는 손님이 항상 원하던 술을 주었으니까......난 술집을 부순 놈들을 전부 찾아내서 죽여버렸지. 그놈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보호비를 줬음에도 보호해주지 않았고, 약속의 소중함을 몰랐어."


"...경미."


"경미...."


"약속의 소중함을 모르는 놈들은 전부 개새끼들이야. 그건 손님이 원하는 술을 주지 않는, 손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바텐더들도 마찬가지고."


경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거칠게 웃었지만, 지금만은 어딘가 슬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텅 빈 유리잔은 바텐더에게 내민 경미가, 고개를 돌렸다.


"받아."


".....또 오시길 빌겠습니다, 손님."


"그래그래."


"경미."


"디노, 줄루. 먼저 나가있는다. 너희도 한 잔만 마시고 따라 나와."


".....알겠어."


"기다리고 있어, 경미."


딸랑.


대답은 없었다. 그저 출입문의 종소리만이 울렸을 뿐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바에 맴돌았다. 경미에게서 받아든 유리잔은 깨끗히 씻은 바텐더가, 남은 두 손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주문은...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맞아."


디노와 줄루는 바텐더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경미가 나간 출입문을 바라보며, 그 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상상하고는 살짝 미소지었다.


"저 문 너머에 있는."


"방금 저 문으로 나간."


""소중한 친구와 같은 한 잔으로.""


"....네. 주문 받았습니다."


바텐더 또한, 그들에게 환하게 미소지었다.





*





"앤젤라 님."


"왜 그래?"


"친구란 건 뭘까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롤랑님께 도시에서 친구같은 건 허울뿐인 소리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알 필요 없어."


".......네?"


"알 필요 없다고. 친구니 뭐니.....그런 걸 몰라도 아무런 지장 없어. 그러니 더 묻지 마."


"....네." 





앤젤라님과 저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걸까요.





바텐더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