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사무소와 마시는 레드 아이>



"딸꾹, 야 레인! 빨리 여기에 서명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으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좀 가만히 있으라고요.....그런데 재수도 없네요. 하필 R사에서 받은 의뢰 중에 열차 사고라니."


"솔직히 아직도 안 믿긴다고요. 그 R사에서 의뢰라니, 머리 말고는 두려울 게 없다는 곳에서 우리 같은 사무소한테....."


"야! 내가 말했잖아. 묘는 믿어도 된다고. 어차피 도서관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으니,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거야. 결국 R사의 의뢰는 무사히 수행할 수 있는 거라고. 딸꾹."


".....제가 들은 바로는 츠바이 6과가 당했다고 해요. 그 정도면 곧 도시질병으로 지정될 테니, 제대로 안하면 모가지 날아가겠네요."


"모가지만 날아가겠어? 진짜 삐끗하면 죽을 걸...."


"미카! 레인! 아 재수없는 소리 좀 그만해! 그냥 이 누님만 딱 믿으라고! 딸꾹!"


"네네."


"네엡."


"야 이것들아!"


".....그런데 올가 누님, 왜 아까부터 딸꾹질하세요?"


"윽."


".....이거 술냄새 아닌가?"


"자 빨리 들어가자!"


"자, 잠깐 누님! 설마 술 마신 거예요!? 내가 미쳐 진짜!"


"레인! 빨리 잡아!"





*





"....매우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런 손님분은 또 처음이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누님이 좀...."


"레, 레인! 올가 언니 꽉 잡아! 자칫하면 또 토할 거라고!"


"누가 토한다 그래.....욱."


"누님, 제발 비닐봉지에 하세요!"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이 허리를 굽힌 채 헉구역질을 하는 주황색 머리의 여성, 올가와 그런 여성의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는 주근깨 여성, 미카. 그리고 급히 올가에게 달려가 익숙하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비닐봉투를 꺼내 올가의 입에 밀착시키는 남성, 레인.


언제나처럼 바에 손님이 들어오자 상냥하게 맞이했던 바텐더는 왠 수라장에 한숨쉴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앤젤라에게 비밀 연락으로, '저 빌어먹을 여자가 또 바닥에 토하면 바로 연락해. 최대한 빨리 퇴거시킬 테니!' 란 협박성 말이 온 탓에 더더욱. 듣자하니 올가라는 손님분은 이미 앤젤라님이 보는 앞에서 한 번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허둥지둥하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은 바텐더는 카운터 한편에 있는 휴지를 한 움큼 뽑아 비닐봉투를 계속 꺼내고 있는 레인에게 건넸다. 레인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후에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는 토사물을 급히 닦았다.


대체 이 손님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바텐더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


...................


............


.......


....



"정말 죄송합니다. 게다가 도움까지 주시고,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예전부터 숙취로 곤란해하시는 손님분은 꽤 보았으니까요. 마음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언니, 말해야죠."


"음....좀 미안하긴 하네."


올가가 멋쩍게 웃었다. 그 애매한 대답에 레인과 미카가 날카롭게 쏘아본 뒤에야 올가는 '죄송합니다...' 하고 바텐더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바텐더가 손사래치자 곧바로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드는데, 세상이 떠나가리라 한숨을 쉬는 레인과 미카를 보니 바텐더는 고생이 많겠구나 동정하며 둘의 앞에 얼음물을 내밀었다.


고마워하며 마시는 레인과 미카를 두고, 계속 웃던 올가가 여전히 취기가 감도는 얼굴로 바텐더를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후드와 카운터 위의 조명이 만드는 그늘로 바텐더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괜히 호기심이 돌았지만, 이내 간단히 떨쳐내고서 히죽거리는 눈길을 보낸다.


"그런데 말이야, 초대장에서는 여기서 난동부리면 퇴거된다고 나와있던데. 그러면 어디로 가는 거야?"


"제가 알기로 초대장에 서명하신 그 장소로 되돌아가시게 됩니다."


"....쳇, 그러면 작전은 실패네."


"설마 일부러 술에 취해서 들어오신 게, 퇴거되서 열차에서 탈출한다는....그런 작전이었어요?"


"그야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거야?"


"....골칫덩이 술주정 언니요."


"야!"


아예 서로 쥐어박으며 투닥거리기 시작한 올가와 미카를 두고, 레인은 연신 바텐더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최근은 잠잠해졌지만 지금까지 봤던 해결사들과는 많이 다른, 서로 친근한 모습에 바텐더가 미소를 지었다.


이곳의 단골인 롤랑은 언제나 도시의 냉혹함에 대해 말하지만, 그런 그도 한 잔의 칵테일에 쉽게 웃는다. 바텐더가 도시에 있었을 때의 기억은 거의 빼앗긴 상태이기에, 도시에서 바텐더가 무엇을 했었는지는 잘 모른다. 솔직히 도시에 대해 지식만 알 뿐, 기억은 거의 없는 바텐더 입장에서 도시에서 살았던 과거의 자신은 전혀 다른 타인으로만 느껴졌다.


그래도 바텐더는 그 때의 자신과 지금 자신이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과거의 그도, 칵테일 한 잔에 웃는 손님들을 보며 같이 웃는 그런 사람이었으리라고, 그냥 짐작해볼 뿐이다.


서로 웃고 떠드는 손님들을 보며, 문득 바텐더는 자신에게도 저런 관계가 있을까 생각했다. 설령 도시에서 저러한 관계를 쌓아올렸다 해도, 그건 '기억을 가진 자신'의 것이다. 지금의 바텐더는 완전한 타인 수준이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도서관 안은 어떨까.


"........."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바텐더는, 처음으로 잠깐이나마 미소를 지운 채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럼,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제가 알아보기로 최소한 칵테일 한 잔은 마셔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게 맞나요?"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그건 저쪽의 손님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미리 한 잔 드셨다고 하셔도, 이곳에서 칵테일을 드셔야 합니다."


"....미카, 어떻게 되겠어?"


"대충 몇 번 토하니 나아지긴 했지만, 언니 여전히 취해있어. 진짜 앞이 깜깜하다...."


"야! 뭘 그리 고민하냐?"


절망에 빠진 레인과 미카와 달리, 술에 취해 얼굴과 눈동자가 붉게 물든 올가가 카운터를 쾅! 하고 치며 일어났다. 명백한 술주정에 미카와 레인이 다시금 달려들었지만, 올가는 완력으로 그것을 떨쳐내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바텐더를 힘차게 가리켰다.


갑자기 삿대질을 받은 바텐더는 영문 모를 뿐이었으나, 그 다음의 말은 가관이었다.


"너 그 칵테일 만든다며? 그럼 술이 깨는 칵테일을 만들어주면 되잖아!"


"미카, 누님이 진짜 미친 것 같아. 쎄게 한 번 후려칠 테니 꽉 잡아."


"맡겨줘."


"어? 야, 야! 레인, 너 진짜 휘두룰 기세다? 왜 그러냐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요? 칵테일을 술로 만드는데, 술로 술을 어떻게 깨냐구요!"


"알겠습니다."


"거봐요 언니! 바텐더분도 곤란하다고.....네?"


"손님분의 요청대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뭐라고? 진심으로 한 대 후려치려 하던 레인과 미카가 굳어진 얼굴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술을 마셔서 취기에서 깬다고?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올가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대충 술김에 확 지른 말이었지만, 그게 된다고 하니 의기양양할 만 했다.


"거봐!"


".....도시에서 불가능한 건 없다고 하지만,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요."


"뭐, 도시에서 일어나는 별의별 일을 보자면 별 거 아니긴 한데.....그냥 상식적으로 이상한 게 된다고 하니, 이건 또 충격이네요."


어금니 사무소를 뒤로 하고, 찬장을 열어재낀 바텐더가 술병 하나, 음료수 병 하나만을 빼어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차갑게 보관되어 한기가 풍기는 술을 보니 올가는 무심코 군침을 삼켰고, 레인과 미카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두 가지 병에 눈길을 주었다.


그 사이에 넉넉한 유리잔 하나를 꺼낸 바텐더가 먼저 술병을 잡았다.


"맥주(Beer)입니다. 브랜드는 하이네켄(Heineken). 라거(Lager)입니다."


"응? 맥주면 맥주지 라거는 또 뭐야?"


"보통 맥주는 두 가지 분류로 나뉩니다. 첫째가 상면 발효 맥주이고, 둘째가 하면 발효 맥주입니다. 말이 복잡한데, 그냥 간단하게 효모가 맥주 표면에서 발효되면 상면 발효, 맥주 바닥에서 발효되면 하면 발효입니다. 이 상면, 하면 발효에서 상면의 대표가 에일(Ale)이고, 하면의 대표가 라거(Lager)입니다."


"평소에는 그냥 마셨는데, 분류가 상당히 많은가 보네요."


"세세하게 따진다면 맥주의 종류는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다만 우리가 시중에서 주로 보는 게 몇 종류 안 될 뿐이죠. 시중에서 보는 대부분의 맥주는 라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라거는 평범한 맥주답게 투명한 황금빛과 가벼운 맛, 강한 탄산감을 가지죠."


"그럼 에일은 뭔가요?"


"에일은 라거와 달리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발효시켜 달콤하고 과일향이 도는 맥주입니다. 라거와는 거의 정반대의 특성을 가지는데, 색도 진하고 탄산도 적으며 맛 또한 라거보다 무겁고 진중합니다. 라거에 비해 적은 수이지만, 라거 못지 않은 인기를 가지죠."


"휘유. 바텐더라고 불릴 만하구만? 묘---- 읍."


묘가 기대해도 좋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네. 올가는 무심코 말할 뻔한 뒷말을 다급히 삼켰다. 레인과 미카가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의뢰를 받을 때 '바텐더의 앞에서 내 이야기는 하지 말 것' 이라는 조건이 붙은 이상 그 이상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왜 말하지 말라는 건지 의문도 들었지만, 그건 묘의 개인적인 일이겄거니 대충 넘겼다. 올가가 계속 입을 막으니 레인과 미카도 흥미를 잃고 다시 바텐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이네켄 캔맥주를 딴 바텐더가 유리잔의 절반 가량만큼 맥주를 부어넣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으면 거품이 크게 일어오르니, 유리잔을 기울여 벽면을 따라 흘러넣어 칵테일의 맛과 외관을 망치는 거품이 생겨나지 않게 조절한다. 황금빛 맥주가 탄산을 머금고 잔에 차오르자, 올가는 물론이요 술 생각이 없었던 미카와 레인도 맥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용량만큼 맥주를 따른 바텐더가 이제 두번째 병을 집어들었다.


"그건...."


"보시면 아시다시피, 토마토 주스입니다. 보통 이런 주스는 직접 만들지만, 토마토의 경우 잘 갈아도 건더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수두룩하기에 시중에서 판매하는 걸 쓰는 게 좋습니다."


"....그걸, 넣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와, 칵테일은 뭐 고급 술들을 막 섞는 줄로만 알았는데, 맥주니 토마토 주스니 되게 친근하네."


"원래 칵테일이란, 마시기 힘든 술을 마시기 쉽게 하거나 여러 술을 섞어 더 맛있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많은 손님분들이 칵테일이라 하면 굉장히 고급이라 생각하시지만, 실제로는 맥주나 콜라, 여러 주스 등 익숙한 주류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토마토 주스를 맥주가 담긴 잔에 붓는다. 진한 토마토의 색이 황금색과 섞이며 점차 잔 전체를 붉게 물들여갔다.


맥주에 토마토 주스. 상상해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어색한 조합에 레인과 미카가 무심코 얼굴을 찌뿌렸다. 올가만이 기대된다는 듯 흥미진진하게 적색으로 변해가는 유리잔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유리잔이 흘러넘칠 정도로 꽉 차자, 토마토 주스의 뚜껑을 닫은 바텐더가 은색 막대로 맥주와 토마토 주스를 스터했다. 보통이라면 스터는 몇 바퀴 돌리는 것으로 끝이지만, 토마토주스가 맥주에 비해 비중이 무겁기에 가만히 두면 토마토 주스가 가라앉는다. 두 액체가 제대로 섞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스터해줘야 한다. 곧 칵테일의 색을 유심히 보던 바텐더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맞추어, 올가가 환하게 웃음지었다.


"레드 아이(Red Eye)입니다."


"여, 고마워."


"여러분도요."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처음 만든 레드 아이는 올가에서 내밀고, 곧바로 만들어낸 두 잔의 레드 아이까지 전부 건넨 바텐더가 미소지었다. 여전히 의뭉스러운 눈길로 레드 아이를 보던 레인과 미카는, 맛있겠다며 히죽거리는 올가를 보고난 후에야 잔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꼭 감고 입으로 털어넣는다.


".....맛, 있네요?"


"....전혀 믿기지 않지만,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요."


의외로, 주스가 들어갔지만 단 맛은 거의 없다. 애초에 토마토 주스 자체가 단 맛보다는 토마토 자체의 신 맛으로 먹는 것이다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신기한 건 상큼하고 새콤한 토마토 주스와 라거 맥주가 아주 훌륭하게 어우러졌다는 점이다.


단순히 들었을 때는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했건만, 맥주의 탄산과 함께 토마토 주스의 새콤함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그만큼 맥주의 청량함을 부각시킨다. 맥주의 알코올은 적게, 한편으로 토마토 주스의 상큼함이 무진장 올라오면서 전혀 다른 술이라 믿을 만큼 새로운 맛이 만들어지는데, 이게 처음 혀에 닿았을 때부터 목넘김까지 전혀 막힘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칵테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작 음료수라고 하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맥주 자체가 도수가 높은 주류가 아니라지만, 이렇게 토마토 주스와 섞이니 맥주를 꺼려할 정도로 술에 약한 사람이라도 쉽게 마실 수 있을 만했다.


다 좋지만.


레인이 올가를 힐끔 쳐다보았다. 올가는 아예 원샷을 하려는지 아직도 레드 아이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레드 아이는 정말 훌륭한 맛이고, 그동안 레인이 마셨던 그 어떤 술에도 비할 바 없는 걸작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인이나 미카처럼 주량이 약한 사람의 입장이다. 이 칵테일이 사무소 영수증의 절반을 술값으로 채울 정도로 주당인 올가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물어본다면, 레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알코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도수 높은 술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냥 물이랑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니까.


"누님? 어때요?"


"......."


"누님?"


기어코 레드 아이를 원샷해버린 올가에게 레인이 말을 걸었으나, 올가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미카도 레인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올가에게 속삭였으나 반응 없는 올가에게 당황한 듯 했다. 당황은 의혹이 되고, 의혹이 점차 심해지며 혹시 무언가에 당한 게 아닌가 허리춤의 무기에 손을 뻗기 직전, 올가가 눈을 떴다.


그리고.


"맛있다아아아아아!!!"


"......누님."


"내 이럴 줄 알았어."


"와 미친! 야, 이거 존나 맛있지 않냐? 그냥 개쩔어! 와 씨 와, 그냥 막 와!!"


괜히 걱정했구나 하고 힘이 빠진 레인과 미카를 흔드는 올가는 정말 흥분한 것 같았다. 그 맛을 표현하기에는 어휘가 부족한지 같은 말은 반복하지만, 그것이 레드 아이에 대한 압도적인 찬사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한동안 레인과 미카의 어깨를 잡고 흔들던 올가는, 눈을 빛내며 바텐더를 향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까워졌다.


"바텐더! 도시에서 웬만한 술집을 가본 내가 보증할게, 진짜 너만한 바텐더 없어!"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얼어죽을! 내가 지금까지 마신 칵테일은 이거에 비하면 다 사기꾼이야! 듣기로는 8인의 셰프 중에 바텐더가 있다고 했는데, 진지하게 그 정도는 되야 너랑 비빌 수 있을 것 같다고!"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올가가 흥분하여 마구 외쳐되고 있는 와중에도 바텐더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올가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을 즈음에야, 레인이 남은 레드 아이를 마시며 올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누님, 솔직히 진짜 맛있는 칵테일이긴 하지만. 누님의 입맛에 맞지 않을 것 같았는데요."


"맞아요 언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짜 술꾼이라면 이런 술의 참맛도 아는 법이거든!"


"그런가요.....음? 누님. 눈이...."


"눈? 왜, 눈이 이상해?"


"아뇨, 아까까지만 해도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끝에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거의 사라졌어요. 얼굴색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고요."


미카의 말에 눈을 끔뻑거리던 올가는 미카가 꺼낸 거울을 유심히 보더니, 곧 놀라면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취기에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와 얼굴이, 점차 원래의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그러니까, 술이 깼다는 건가?"


"토마토에는 라이코펜이라는 물질이 있습니다. 이 물질을 알코올을 분해하는 걸 도와주죠. 마찬가지로 토마토의 신 맛에 포함된 구연산은 속쓰림을 완화시켜 줍니다. 원래는 천천히 효과가 나타나지만, 손님분께서 드신 술이 그리 독하지 않아 효력이 빨리 나타난 것 같습니다."


"진짜 해장용 칵테일이라는 거네? 와....신기하긴 해."


"보니까 만드는 것도 간단하던데, 사무소에 만들어 드셔도 되겠어요."


"쓸데없이 비싼 숙취음료보다 효과는 약하겠지만, 일이 없을 때는 괜찮겠네요."


미카가 피식 웃었다. 레인은 암만 그래도 술 마시고 또 술 마신 건 좀 아니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고, 올가는 미카를 꽉 껴안으며 격하게 기뻐했다.


"....뭐, 앞으로 사무소에 토마토 주스를 놔둘게요. 굳이 맥주는 안 섞어도 되잖아요?"


레인이 미소지었다. 미카는 명안이라며 손뼉을 쳤고, 올가는 다급히 레인에게 굽실거렸다.


"레인, 제발! 앞으로 술 줄일게!"


올가가 히죽거렸다. 레인은 어차피 맥주 마실 거면 똑같아잖아요? 라며 미카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텐더는.


".........."


웃고, 떠들며,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는 그들을 보며.




그저, 혼자 카운터에 서 있을 뿐이었다.





*





바텐더가 술잔을 기울였다. 이름모를 칵테일을 머금으며, 그 혼자만 있는 바에서 외로이 있었다.


도서관을 찾는 손님과 앤젤라, 여러 지정사서들과 롤랑이 이 바에 있는 시간은 다 합쳐도 2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하루종일 바에 있는 탓에 시간개념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바텐더는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이 작은 바에서 혼자 보냈다.


같이 있는 건 카운터의 조명과, 찬장을 가득 채운 술들 뿐이다.


그렇기에 바텐더는 항상 문을 보고 있었다. 저 문에서 누군가가 들어올 때가, 바텐더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무엇보다도 짧다.


오늘은 몇 명이나 왔더라.


손가락을 접으며 오늘 바에 방문한 이들을 세던 바텐더는, 열 손가락조차 전부 접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온 이도 있었다. 돈을 노리고 온 이들도 있었다. 단순히 탈출하기 위해 온 이들도 있었다. 우연찮게 온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바텐더의 칵테일을 웃으며 마셨다. 개중에는 맛있다며 또 오겠다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바텐더는, 같은 손님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터벅.


문득 문에 다가가, 문고리를 돌린다. 손님들과 롤랑, 앤젤라가 열 때는 너무나도 가볍게 열리던 문이지만, 바텐더는 그 문을 절대 열 수 없다. 아무리 당기고 밀어도,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문 앞에 주저앉았다. 창문조차 없는 이 바에 유일한 빛은 저 조명 뿐이다. 바텐더가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저 조명 말고는 어떤 빛도 보지 못했다. 손님들이 문을 열고 나갈 때, 바의 밖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만이 바텐더의 희망이었다.


먼지 하나 없는 바닥에 앉은 채로, 바텐더는 자신의 처지를 상기했다.


자유.


롤랑은 언제나 도시인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뒷골목에 사는 쥐들조차, 햇빛을 보며 광활한 도시를 걸어다닐 자격은 있다.


신뢰.


오늘 온 어금니 사무소, 츠바이 6과의 이사도라, 버림 받은 개, 가로등 사무소, 피에르의 고기파이, 갈고리 사무소, 철의 형제들, 윤 사무소, 쥐들까지. 그들은 각각 나름의 신뢰와 우정으로 엮어져 있었다. 바텐더는 분명 도서관에서 일함에도, 롤랑과 지정사서들 모두에게서 벽을 느꼈다. 앤젤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관계.


정말 잠깐만 볼 뿐인 손님들에게 더 깊은 관계를 느낄 만큼, 바텐더의 관계란 미약했다. 그나마 자주 오던 지정사서들과 롤랑도, 앤젤라가 함부로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후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몰래 방문한 호드에게 듣자하니 바 근처에 가기만 해도 앤젤라가 나타나 왜 왔느냐고 쏘아 붙인다고 한다. 


....................


바텐더는 책을 집어들었다. 이곳이 도서관이지만, 이 책이 바텐더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아마 바텐더가 도서관의 초대장에 응한 이유였을, 세상 모든 칵테일의 조리법이 담긴 책이었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은 전부 훝어봐 책의 표면을 닳았고, 종이는 너덜거렸다. 하지만 잘 보면 별로 읽히지 않은 부분이 있다. 누군지 모를 이 책의 저자가 쓴, 바텐더로써의 마음가짐을 적은 책의 첫 장.


그리고 첫 구절.


---칵테일은 누군가와 같이 마셔야 맛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바텐더가 카운터로 다가가 마시다 남긴 이름모를 칵테일을 홀로 외로이 마저 들이켰다. 


맛은.


정말, 책대로였다.




<사육제와 마시는 불타는 B-52>




"지령에 문제는 없어요? 도서관에 가야 해요."


"알고 있어요? 검지의 지령이니까요. 우리는 재단사니까요?"


"협회장에게 이야기는 끝냈어요? 우리는 재단사 협회에 가입되어 있으니까요. 누오보 원단 말고도 여러 원단을 만들어야 해요?"


"도서관에서는 멋진 실이 나오나요?"


"저도 몰라요? 가야 해요. 그것이 지령이니까요."


"그것이 지령이니까요?"


"그것이 지령이니까요."




*




"좁은 공간이에요? 실을 짤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좋은 냄새가 나요. 하지만 사람의 냄새는 아니예요?"


"아무런 상관없어요? 실을 뽑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에요."


"어서오세요, 손님."


지금까지의 손님들과는 완전히 다른, 애초에 인간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의 이형(異形)을 띈 셋이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에는 무표정한 흰 가면을 썼으며, 몸은 검고 칙칙한 한벌옷으로 감쌌고, 벌어진 옷의 틈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칼날들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기계 의체를 가진 손님이나 문신 시술을 한 손님들은, 그래도 결국 인간의 형태를 했던 반면 이번의 손님들은 전체적인 형태만 인간과 비슷할 뿐이지, 그 안에 담긴 건 전혀 달랐다.


하지만 바텐더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미소를 띈 채 사육제들을 맞이했다.


"손님이에요? 도서관의 바에요. 초대장에 적혀 있었어요?"


"지령에는 나와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인간이에요. 실을 짜도 될까요?


"똑똑히 잘 보세요? 청소부보다도 맛이 없을 것 같아요. 좋은 실을 뽑을 수 없어요."


"우선 자리에 앉아주세요. 혹 실례되는 말씀일 수도 있지만, 액체는 무리없이 섭취하실 수 있나요?"


"문제없어요? 뭐든 가능해요."


"알겠습니다."


사육제. 과거 날개의 특이점 중 하나였으나 이미 꺾여 추락해버린 기술을 사용하는 재단사들이다. 그들은 사람을 먹고, 채내에서 그것들을 소화시키며 알 수 없는 기술로 실을 뽑아낸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실들은 재단사들 사이에서도 고평가라, 검지가 일찍이 이들을 포섭하고 상당히 중요히 여길 정도이다.


사람을 먹고 실을 짜내는 건 그들에게 생업이자, 일상과도 같기에 바 내부의 유일한 '사람'인 바텐더를 보고 잠깐이나마 입을 벌린 베타를, 알파가 멈춰 세우고서는 바텐더의 말에 따라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베타와 감마도 이윽고 무언가 깨달았는지 조용히 알파를 따라 앉았다.


간단하게 얼음물을 건낸 바텐더가 여전한 미소를 지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주문해야 해요? 이건 지령에 없었어요."


"굳이 할 필요는 없어요? 쓸데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칵테일을 마셔야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초대장에 나와 있었어요."


"칵테일로는 실을 짤 수 없어요? 불필요해요."


일단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사육제에게 칵테일이란 전혀 무쓸모한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취할 수도 없고, 사람으로만 실을 짜낼 수 있기에 백날 칵테일을 마셔봐야 실을 뽑아낼 수는 없으며, 검지의 지령과 실을 뽑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순위인 그들로써는 불평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순순히 따르는 건 칵테일을 마셔야 도서관의 안쪽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지 그 외는 딱히 없었다.


바텐더가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손님분들께서 생각하시는 바는 잘 알겠지만, 그래도 도서관의 규칙이니 맛있는 칵테일 한 잔만 드시고 들어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맛있는 칵테일이에요? 맛있나요?"


"네. 부족한 실력이지만 감히 맛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맛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요? 우리는 맛대가리 없는 청소부만 너무 먹었어요."


"한없이 역겨운 맛이었어요? 입을 씻어내고 싶어요."


"끔찍한 나날이었어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요."


사육제들이 칼날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웃었다. 얼굴은 무표정인 그대로인데 웃는다고 칭해야 하나 고민되지만, 온 몸이 부들부들 떨고 호의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칼날들이 이러저리 흥분하듯 움직이고 있으니 감히 웃는다고 말해도 문제는 없을 테지.


아무튼간에, 이들도 결국 욕구가 존재한다. 물론 실을 뽑아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맛있는 걸 먹고 실을 뽑아내고 싶은 게 당연하다.


특히 이번처럼 맛없는 것들만 주구장창 먹은 후에는, 설령 실을 뽑아낼 수 없더라도 맛있는 것으로 입가심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지 않는 것이 이상할 터다. 사육제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걸 본 바텐더가 유리잔을 세 잔 꺼내들었다.


"분명 맛있을 겁니다. 혹시 선호하시는 맛이 있으신가요?"


"청소부는 너무 역겨웠어요?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씻어버릴 만큼 강렬한 걸 원해요?"


"강렬한 칵테일이에요? 청소부의 맛을 씻어낼 수 있어요."


"그걸로 주세요? 부탁드려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허리를 꾸벅 숙인 바텐더가, 뒤를 돌아 찬장을 열어젖히고 별다른 고민 없이 술병들을 집었다. 강렬한 칵테일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고르라 하면 바텐더는 곧바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간단히 그 칵테일의 레시피를 떠올린 바텐더가 마지막으로 술병을 확인하고서 이들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우선은 가장 왼쪽의 술병인 깔루아(Kahlua)로 시작한다. 커피 리큐르의 대표격이자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깔루아는 그 비중(比重)이 높아 가장 먼저 따른다. 이번에 만드는 칵테일 용법이 슈터(플로팅처럼 술을 섞지 않고 쌓아 올리는 것)이기에 어떤 술을 먼저 따라 넣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비중이 높을수록 무겁기에, 설령 깔루아가 아니더라도 가장 무거운 것부터 넣는 것이 기본이다.


"꽤 기대되요? 칵테일은 마셔본 적 없어요."


"23구에서 본 적은 있어요? 칵테일보다 바텐더가 맛있어 보였어요."


"멋진 실을 짜낼 수 없어요? 그래도 들떠요. 빨리 청소부의 맛을 없애고 싶어요?"


"동감이에요? 아직도 역겨워요."


그 다음은 베일리스(Bailey's). 세계 최초의 크림 리큐르이다. 흔히들 리큐르라 하면 약초나 과일 종류를 떠올리는데, 베일리스는 위스키에 크림, 벨기에 초콜릿을 넣어 만드는 특이한 리큐르이다. 들어가는 재료가 재료이니만큼 단맛이 진하고 깊어 달달한 술이나 칵테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훌륭한 일품이지만, 반대로 단맛보다 드라이(쓰거나 담백한 맛)한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입도 대지 않는다.


연한 갈색의 베일리스를 짙은 검은색의 깔루아 위에 조심스레 기울인다. 술끼리 층을 쌓기 위해 바텐더마다 사용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지만, 도서관의 바텐더는 잔 위에 스푼을 뒤집어 올리고 그 위에 붓는 방법을 택했다. 스푼의 표면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지는 베일리스는 깔루아와 섞이는 일 없이 그대로의 색을 유지하며 층을 이루어갔다.


"그런데 소식을 들었어요? 푸른 잔향이 또 움직여요."


"완전 미친놈이에요? 저번에도 재단을 방해했어요."


"그 놈으로 실을 짜내고 싶어요? 원단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죽어요? 우리가 죽어요."


"실력 있어서 더 짜증나요. 그런 놈이 특색이에요? 하나 협회도 미친 것 같아요."


세번째는 그랑 마르니에(Grand Marnier). 수많은 바텐더들과 술꾼들이 감히 '최고의 오렌지 큐라소'라 부르짖는 절품이다. 여기서 큐라소(Curacao)는 리큐르의 일종으로, 리큐르 중에서도 라라하 오렌지의 껍질을 이용하여 만드는 리큐르를 의미한다. 큐라소 자체가 거대한 분류는 아닌 만큼 큐라소 계열 술들은 그 수도 적지만, 그 중에서라도 최고라 불리는 만큼 맛은 보장되어 있다. 그 강렬한 오렌지 맛 만큼이나 향도 강력해서, 마개를 열어둔 채 조금만 지나도 진한 오렌지 향으로 가득 찰 정도이다.


그랑 마르니에는 단순히 칵테일의 재료로도 많이 쓰이지만, 화이트 초콜릿과의 궁합이 좋아 제과제빵에 쓰이거나 오리고기 요리, 코냑과의 완벽한 어울림 등 여러모로 쓸 곳이 많은 술이다. 그만큼 값도 꽤 나가지만, 앤젤라가 무한한 도서관의 가능성을 이용해 그랑 마르니에를 간단히 찍어내는 것을 본 바텐더는 헛웃음을 흘렸었다.


아무튼 각설하고, 방금 전과 같이 스푼을 뒤집어놓고 그랑 마르니에를 따른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깔루아와 베일리스, 그랑 마르니에의 용량은 각각 3분의 1 씩만 넣으면 충분하다. 무색 무미의 보드카라면 몰라도, 세 종류의 리큐르 모두 자신의 맛과 향이 강하기에 특정 리큐르를 많이 넣었다가는 칵테일의 밸런스와 맛을 망치게 된다.


본래라면 이것으로 끝이지만.


"손가락 걸기도 곧 시작되요? 엄지가 날뛰고 있어요."


"L사 둥지를 노려요? 검지도 참여한다고 들었어요. 우리도 들어가요?"


"지령이 내려온다면 그렇게 해요? 아니면 실을 짜요. 그래도 약지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약지는 손속이 잔혹해요. 멀쩡한 사람을 먹어야 좋은 실이 나와요? 약지가 사냥감을 전부 난도질해요."


"손님,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 이쪽을 봐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에요?"


"칵테일이 완성됬어요? 좋은 향이에요."


"어서 마시고 싶어요? 기대되요."


간단히 사육제들의 관심을 모은 바텐더가, 마지막 병을 집었다. 바카디(Bacardi)라 쓰인 술병이 출렁이며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이 술은 바카디 151이라고 합니다. 도수는 75.5 도, 공업용이나 소독용 알코올로 사용해도 될 정도입니다."


"흥미로워요? 본 적 없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카디의 마개를 딴 바텐더가 아주 조심스레 병을 천천히 기울였다. 리큐르를 층층이 쌓은 유리잔들에 바카디를 아주 조금, 정말 얇은 막을 이룰 정도로만 흘려넣는다. 이윽고 작업이 끝나자, 바텐더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칵테일에 불을 붙인다.


"불타는 B-52(Flaming B-52) 완성입니다."


"불이 붙었어요? 불타고 있어요."


"바카디라고 말했어요? 75.5 도라면 불이 붙어요. 꽤나 아름다워요?"


"이대로 마셔요? 보기만 해도 강렬해요."


"원래라면 불을 끄고 빨대로 마시지만, 손님들이라면 괜찮으시겠죠. 이대로 마시면 됩니다."


"잘 먹어요? 고마워요."


끼릭. 사육제들의 가슴 부분이 천천히 열리더니 그 안에 사마귀의 앞발과도 같은 수십의 칼날들이 튀어나와 B-52가 담긴 잔을 잡았다. 잔이 천천히 올라가자, 얼굴의 흰 가면이 두쪽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마치 문어의 입과 같은 칼날이 달린 구멍이 꿈틀거리며 잔 안의 B-52를 탐했다.


불이 붙은 B-52가 그대로 사육제들의 입 안으로 쏟아지고, 가면을 원래대로 닫은 사육제들이 몸을 조금씩 떨면서 그 맛을 음미했다.


".........."


단번에 B-52를 마셔버린 후, 잠깐동안 그들은 침묵했다.


끼릭.


칼날이 뻗쳐 나온다.


끼릭 끼릭.


팔에서, 다리에서, 등에서 칼날들이 쏟아져 나온다.


끼릭 끼릭 끼릭 끼릭 끼릭.


마침내 조금 전과 같이 가면이 열리고, 그 안에서도 칼날이 꾸역꾸역 뻗어갔다.


끼릭끼릭끼릭끼릭끼릭끼릭끼릭!


몸 안의 모든 칼날들을 꺼낸 사육제들이, 지랄발광을 하듯 미친 듯이 몸과 칼날들을 떨며 날뛰었다. 칼날들이 허공을 자르고, 베고, 찌르며 발광했지만, 그럼에도 코앞의 바텐더에게는 약간의 자상조차 없었다. 바텐더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칼날들이 천천히 사육제들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처음 상태로 돌아온 사육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떠셨습니까?"


"정말 훌륭해요? 멋져요. 끝내줘요? 환상적이에요. 감탄했어요? 열광했어요."


"터져나갈 것 같이 강렬해요? 그래도 맛있어요. 커피맛이 나요? 크림 맛도 나요. 오렌지 맛도 나요? 전부 나요. 그런데 조화로워요? 최고의 맛이에요."


"온 몸이 불타는 것 같았어요? 황홀했어요. 역겨운 청소부의 맛이 전부 씻겨나갔어요? 정말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사과해야 해요. 당신의 칵테일을 깔봤어요? 정말 미안해요."


"우리도 장인이에요? 재단사의 긍지가 있어요. 당신의 노력이 느껴졌어요? 당신은 훌륭한 장인이에요."


"얼마나 노력했을지 감도 안 와요? 존경스러워요. 우리도 더 열심히 노력해요? 더욱 멋진 실을 짜내요."


사육제들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저 감사의 뜻이 아닌, 자신과 다른 분야일지라도 놀라운 성취를 이뤄낸 장인에게의 존경과 긍지, 감탄을 담은 인사였다. 짧게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지만, 그 안의 진심이 느껴지기는 충분했다.


바텐더가 미소지었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도 멋진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제 노력이 헛된 것 같지 않아 기쁩니다."


"정말 유익했어요? 멋진 장인을 만났어요. 도서관은 좋아요?"


"이곳에 온 건 지령이었어요? 지령에 감사해요. 맛이 없을 것 같은 장인이에요? 그럼에도 존경스러워요."


"영광이에요? 또 봐요. 그 때도 칵테일을 마셔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저도, 꼭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




"앤젤라 님, 제가 오늘 멋진 칭찬을-----"


"조용히 해. 오늘은 사육제니 뭐니 이상한 것들을 만나서 기분이 더러우니까."


".........."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 샴페인이나 마저 내와. 그 후에는 일 없으니 먼저 들어가보고."


".....네."




<마침표 사무소와 마시는 XYZ>




"여기가 도서관.....소문으로 들은 것과 비슷하군."


"이젠 다 틀렸어. 우린 다 죽을 거야....."


"스테판, 질질 짜지 좀 마."


"환영합니다, 손님."


"당신이 도서관장이란 존재인가?"


"그렇습니다만."


"협상할 것이 있다. 도서관 내부에 제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칵테일 바를 거쳐야 하지?"


"정확합니다."


"다른 해결사들이라면 몰라도, 우리처럼 총기류를 사용하는 해결사들은 약간의 알코올도 조준에 큰 영향을 끼치지. 우리는 칵테일을 마시지 않고 들어가도 되겠나?"


"리웨이?"


"우리도 죽으려고 도서관에 온 건 아냐. 최대한 살 방도를 찾아야지."


"딱히 이상한 말은 아니고, 제대로 싸우는 게 감정을 쌓기에도 좋으니....."


"도서관장?"


"좋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답니다."


"조건?"


"그건....."




*




딸랑.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왜 나만 마셔야 하냐고....."


"어서오십시오, 손님."


기운 빠지게 바의 문을 열어젖힌 손님, 스테판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빌빌되며 투덜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면, 바에 들어가지 않은 리웨이와 타마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스테판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앤젤라가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최소한 1명은 칵테일을 마실 것. 이러나저러나 집중력이 중요한 총기류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지만, 도서관에서 마침표 사무소들은 명백한 을이다. 원래 3명 모두 마셔야 하는 조건에서 1명으로 격하된 것으로도 기뻐해야 했다.


그리고 그 1명이 누가 될 것인지 격렬히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생 마지막 술일 텐데 맛있는 걸로 주세요오오...."


의욕이 팍팍 떨어지는 스테판이 당첨된 것이다.


스테판의 기운 빠지는 언사를 들었음에도, 바텐더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에게 얼음물을 주었다. 마침 목이 탔는지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스테판이,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주 잘 쳐줘야 작은 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공간. 몇 개 없는데 카운터석 말고는 그것마저 희미한 조명. 어두운 외관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닦인 의자와 탁자, 그리고 고급스러운 카운터.


".....당신이 바텐더인가요?"


"그렇습니다, 손님."


그리고 말끔한 정장에 두꺼운 후드라는, 참으로 언밸런스한 복장을 한 바텐더라는 존재. 그리고 그의 뒤에 펼쳐진, 척 봐도 고급임을 알 수 있는 각양각색의 술들이 담긴 거대한 찬장.


그게 이곳, 도서관의 칵테일 바였다. 투박하면서도 묘하게 호감이 가는 이런 장소가 도시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바로 습격당하고 망했겠지."


"손님?"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래, 이런 곳이 있었다면 온갖 이상한 조직이 쳐들어와서 비싼 술은 다 훔쳐가고 바텐더는 죽였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스테판이 다시금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운 좋은 놈.


도시에 있었다면 진작 죽어 나빠졌을 놈이, 도서관에서 희희낙락하게 웃으며 편하게 칵테일이나 쳐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짧은 순간이나마 스테판에게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이빨을 아득 물었고, 의욕 없던 눈동자는 이윽고 분노와 한탄이 담긴 것으로 변했다.


왜 너만.


한 번 생각한다면, 그것은 끝도 없이 퍼져나간다. 순식간에 스테판의 뇌리에서 그간의 기구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그의 불쌍한 생애를 비웃는 바텐더가 떠올랐다. 바텐더의 저 미소, 사람 좋은 미소를 가장한 비웃음이 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빌어먹을 푸른 잔향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됬는데, 속 편하게 웃는 바텐더가 미웠다.


흔히 말하는 피해망상이다. 하지만 이 정신병의 단점은, 본인은 자신이 피해망상인지 치명적일 정도로 모른다는 것이다.


스테판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총알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바텐더의 미간에 1발 먹여주는 것 정도는 여유가 넘친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 아. 그래, 주문 말이지...."


허리춤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지금 당장 죽여도 문제 없지만, 저 바텐더는 주문을 운운했다. 보나마나 실력도 형편없을 바텐더가 내주는 칵테일을 마시고, 맛없다면서 잔을 던져버린 다음 그를 쏘아죽이면 어떨까.


스테판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바텐더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우월감이 피어올랐다. 편하게 살아온 벌이다. 마음 속으로 소리친 스테판이 한껏 여유로운 자세를 했다.


"음, 그, 추천하는 걸로 줘."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바텐더에게의 말투가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뀌었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바텐더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찬장에서 여러 술병들을 꺼냈다. 미리 생각해둔 칵테일이 있었는지 일체의 고민 없이 손을 놀리는데, 스테판이 조금 미간을 찌뿌렸다.


실력이 형편없으니 맨날 만드는 것만 만들겠지. 그러니까 빨리 고를 수 있는 거야.


간단히 생각해도 억지논리이며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스테판은 그렇게 스스로 납득했다. 바텐더는 스테판보다 모든 면에서 열등하고 뒤떨어지지만, 그저 운만 좋았을 뿐인 약자여야 했다.


스테판이 망상에 빠져있는 사이, 몇 개의 술병과 은빛 셰이커를 꺼내든 바텐더가 카운터석에 그것들을 펼쳐놓더니, 우선 첫 번째 병을 집었다.


"이번 칵테일의 기주인 럼(Rum)은 화이트 럼(White Rum)입니다. 보통 럼은 맛이 단순한 데다, 씁쓸하고 강렬하기에 칵테일에 많이 사용되는 편이죠. 방금 말씀드린 화이트 럼은 럼 중에서도 색이 엷고 맛도 가장 원만한 편이기에 칵테일에 특히 잘 사용됩니다."


"어.....어?"


"칵테일에 사용되는 다른 럼으로는 오버프루프 럼(Overproof Rum), 플레이버드 럼(Playbird Rum) 등이 있습니다. 물론 화이트 럼이 가장 대중적으로 쓰입니다."


왜 형편없어야 할 바텐더가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스테판이 어버버하는 사이, 셰이커에 럼을 따라넣은 바텐더가 다음 병에 눈길을 돌렸다.


"다음은 트리플 섹(Triple Sec)입니다. 오렌지 리큐르의 일종으로, 이름의 'sec'은 프랑스어로 드라이하다는 뜻이죠. 그렇기에 트리플 섹은 '3배 드라이한', 즉 다른 오렌지 리큐르보다도 훨씬 드라이한 물건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40도 전후의 상당한 도수에다가 무색투명합니다. 조금 전의 럼과 다른 점이라면, 트리플 섹에서는 강한 오렌지 향이 난다는 것 정도겠지요."


"......."


바텐더의 말이 계속될 때마다, 스테판의 입가가 바싹 말라갔다. 저급한 여유는 점점 사라지고, 점점 추악한 질투와 분노가 끓어올랐다.


왜 뭘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 거야.


왜 칵테일을 만드는 데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는 거야.


난 이렇게나 힘든데, 곧 죽을 텐데 왜 넌 그렇게 웃는 거야.


난 미친 듯이 고생하고서 이딴 꼴인데, 왜 편하게 살아온 저 자식은 저렇게 잘 사는 거야.


왜.


왜.


왜?


"마지막은 레몬 주스입니다. 레몬의 향과 맛이 중요한 칵테일이니 만큼 신선한 레몬의 즙을 바로 짜서----"


그 후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고, 들으려 하지고 않았다. 바텐더가 유능하게 보일 때마다, 스테판의 망상은 금이 가고 부서지고 있었다. 감정이 몰리고, 뭉치고, 터지면서 점점 그 몸집을 불려갔다.


마치 겁에 질린 아이처럼 떨다가, 그러다가, 문득 허리춤에 손이 닿았다.


차가운 느낌이 났다. 스테판이 덜덜 떠는 눈동자를 돌리자, 검은색 총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장전은 되어 있었다. 총알도 들어있다. 이제 쏠 일만 남았다. 스테판이 추악하게 웃었다. 질투심과 열등감이 단번에 씻겨 내려갔다.


그래, 저 자식의 생사는 나에게 달려 있어.


저 놈은 약해.


난 강해.


스스로를 달래듯 그 3마디를 여러 번 반복한 후에, 스테판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바텐더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완성입니다, 손님."


"....그래?"


"네, XYZ입니다."


마침, 바텐더도 칵테일을 완성하여 스테판에게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 낚아채듯 거칠게 잔을 집어챈 스테판이 유리잔 속에서 찰랑이는 칵테일을 노려보았다.


맛없겠지.


"그렇겠지?"


그리고 곧바로 잔을 들이켰다. 스테판은 술을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다. XYZ가 상당한 도수를 자랑함에도, 스테판은 아랑곳없이 잔을 전부 비워버린 후 아무 곳으로 내던졌다. 쨍그랑! 산산히 부서진 유리잔과 바텐더를 겹쳐본 후에, 그제서야 스테판은 추악하게 웃으면서 장전된 총기를 들어올려 바텐더를 조준했다.


"하하하! 뭐야!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맛은-----"


맛은.


"맛, 은."


정말.


"......맛."


놀라울 정도로.


"..........있어?"


훌륭했다.


화이트 럼이 기초를 잡아주고, 그 위에서 트리플 섹의 오렌지 단맛과 레몬 주스의 신맛이 조화되어 어울러진다. 높은 도수의 술과 단순한 음료의 차이는 넓고 넓음에도, 바텐더가 훌륭한 솜씨로 조절해낸 용량은 두 맛이 멋지게 춤추며 입 안에서 섞여나오게 만들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도수는 높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마시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었다. 술을 잘 못하는 스테판이 원샷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도수가 높은 술은 오기로 마실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러 술을 섞으며 그 도수를 조절하고, 맛을 훌륭하게 바꾸어 마시게 하는 것이다.


스테판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그의 눈동자 뿐만 아니라, 다리도, 팔도, 몸도, 머리도, 그가 들고 있는 총기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망상으로 넘길 수 있던 것이, 맛있다는 그 느낌 하나로 전부 무너졌다.


"으, 으아, 으아아...."


전제가 틀려먹으면, 망상은 전부 틀려먹게 된다. 스테판이 겁에 질린 채 뒷걸음쳤다. 자신이 강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모든 게 여유롭고 완벽했지만, 그것이 틀렸음을 안 후에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뭔 생각으로 배짱을 부린 거지?


저 놈은 그 도서관의 일원이야!


츠바이도 저놈에게 당했다고!


죽을 거야!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손님."


"오, 오지마! 오지 말라고오!!!"


잔을 깨트리고, 갑자기 총구를 들이밀고, 계속해서 태도가 바뀜에도 여전히 미소를 짓던 바텐더는 스테판에게 손을 내밀었다. 별 행동이 아니였음에도, 스테판은 방아쇠에 손을 가져간 채로 더더욱 뒷걸음쳤다. 바텐더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고, 스테판은 더욱 심하게 떨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손님."


"으아아아아!"


탕.


그 발포음을 끝으로, 작은 바는 고요에 삼켜졌다.



............................................


.......................................


.................................


...........................


...................


...........


......



"정말 죄송합니다. 다친 곳은...."


"괜찮습니다, 손님. 스테판이란 손님분이야말로 괜찮으신가요?"


".....네. 총성을 듣자마자 제압했으니 기절한 것 뿐입니다."


"다행입니다."


"...저, 혹시."

"퇴거 문제는 걱정 마십시오. 이번 일은 앤젤라 님께 비밀로 하겠습니다. 바에서 난동을 부려 강제로 쫓겨나면 초대장을 받았던 그 장소로 돌아가는데, 그게 곤란하신 모양이지요."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타마키, 스테판 좀 밖으로 옮겨줘."


"알았어 리웨이. 이 멍청이 때문에 진짜 고생이 많아."


"...아니야."


"스테판 손님께서 깨어나시면 곧바로 도서관 내부로 가시면 됩니다. 저도 여유 시간을 드리면 좋겠지만, 앤젤라 님의 지시라서요."


".....바텐더, 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편하신대로 하시면 됩니다."


"스테판에 대해 다시 사죄드립니다. 사격 실력은 뛰어나지만, 정신이 나약한 녀석이라서.....안 그래도 요즘은 그게 더 심했습니다."


"신경쓰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


"누군가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는....그런 성격이 뒤틀린 누군가를, 저는 항상 보고 있으니까요."


"......."


"스테판 분께서도, 그 분에 비하면 낫습니다."




*




"앤젤라 님, 오늘은 기분이 언짢으시군요."


"쓸모 없는 지정사서들이 또 이상한 말들을 해서 말이야. 그냥 도서관이 완성되는 것을 위한 기계일 뿐인 주제에."


"........"


"정말 무능하네. 내가 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저놈들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해."


"...그러시군요."

"그러게 말이야. 그런 면에서는 네가 제일 나아."


"감사합니다."


"훗, 뭘."


스테판이란 손님분과 앤젤라 님은, 다를 게 없다.


계속해서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지만, 그것을 숨긴 채로 살아간다.


그렇기에 둘 다 나에게서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는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나약한 이를 더욱 찾는 법이니까.


다만, 난 바랄 뿐이다.


"....앤젤라 님."


"왜 그래?"


열등감은 계속 쌓일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앤젤라 님의 감정이 터져서, 넘쳐나올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는 건 내가 아니다. 정사서 분들과, 롤랑님께서 해결하실 일이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 됬어."


그저, 이렇게 아픔을 쌓아두는 이들에게.


내 칵테일이, 조금이나마 안식이 되기를 바란다.


XYZ는 끝이다. 바의 영업이 끝나는 때 나오는 칵테일이며, 마지막 잔을 의미한다. 스테판이란 손님분께서는 삶의 마지막 칵테일을 원했기에 그것을 드렸다.


앤젤라 님, 언젠가 당신에게 웃으며 XYZ를 내어 드리고, 당신이 그것을 웃으며 받는 때가 오길 빌겠습니다.


그 때가, 당신과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요.




<새벽 사무소와 마시는 얼그레이 마티니>




"스승님, 준비 끝났습니다."


"허허, 수고했네 필립 군. 점점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는군."


"그러게요. 필립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정말 성장했죠."


"유나 양, 부탁했던 정보는 어떻게 되었지?"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리우 협회의 공문으로 세븐 협회에서 도서관의 정보를 얻어내왔죠. 리우 협회라고 하니 바로 손사래치며 서류들을 안겨주던데요?"


"음, 아무래도 리우가 단순무식한 면이 없진 않으니....한 번이라도 저들의 전투를 보면 다들 학을 떼더군."


"흥분에 몸을 맡기고 싸우는 전투광들이니까요. 아, 스승님. 옷깃이 비뚤어지셨어요."


"음? 허허. 이거이거 유나 양 아니였으면 모르고 지나갈 뻔 했군. 고맙네."


"뭘요."


".........."


"필립 군? 왜 그렇게 쳐다보나? 내 얼굴에 무언가 묻었는가?"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슬슬 시간입니다."


"벌써 이렇게 됬네. 스승님이랑 필립은 우선 정보부터 읽어주세요. 전 초대장을 열게요."


"부탁하네 유나 양."


"..........."




*




딸랑.


"어서오십시오, 손님."


"음, 자료에 적힌 것보다 훌륭한 바로구먼."


"분위기도 좋은데요? 둥지에서도 이만한 바는 찾기 힘든데."


"....그러게요."


"자리에 앉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문은 그 이후에 받겠습니다."


"허허, 고맙네."


살바도르가 너털스럽게 웃으며 바텐더 바로 앞의 카운터석에 앉자, 주변을 둘러보던 유나와 쭈뼛거리던 필립도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새벽 사무소 전원이 착석한 후에, 후드를 눌러쓴 바텐더는 희미하게 미소짓더니 유리컵 세 잔에 얼음물을 따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물을 따르고 잔을 건내는 그 모습 하나하나에 품위와 격식이 묻어나 있어, 무심코 감탄한 유나가 들고 있던 커피 보틀을 내려놓고 얼음물을 들이켰다. 마침 목이 말랐기에 단숨에 얼음물을 원샷한 유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직 갈증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찝찝해하던 차에, 바텐더가 따뜻한 미소와 함께 새로운 잔을 건냈다. 꽤나 훌륭한 서비스에 유나 또한 미소지었다.


"고마워."


"별 말씀을."


"허허, 바텐더라는 이름값은 하는구만. 서비스가 훌륭해."


"과찬이십니다."


"........."


살바도르가 다시금 인자하게 웃고, 유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오직 필립만이 조금 떨떠름한, 그리고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바텐더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 좋지 않은 필립의 시선에 바텐더가 미소로 화답했다. 카운터 아래 필립이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특히나 유나와 바텐더가 마주보고 있을 때는 더했다. 점점 격해지는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바텐더가 절도있는 자세로 부드럽게 살바도르에게 말을 건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주게. 리우 협회의 의뢰로써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나?"


"얼마든지 가능하십니다. 다만 도서관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저도 모르기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허허, 도서관도 도서관이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자네라네. 바텐더."


"저에 대해 말씀이십니까?"


조금 의외였는지 바텐더의 미소가 살짝 풀렸다. 두꺼운 후드 탓에 보이는 건 입 뿐이었지만, 그래도 바텐더가 의문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명확했다. 그러한 태도를 확인한 살바도르가 말을 이었다.


"최근 도시질병으로 승격된 도서관도 도서관이지만, '도서관의 바'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하지. 츠바이와 세븐 협회에서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도서관'과 '바'는 원래 관련이 없는 다른 공간이었다고 추측하는 이도 많네. 두 공간의 이질감이나, 도서관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이곳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다는 게 그 증거지."


"....그렇다면, 저에게 도서관과 별개로 등급을 책정하는 겁니까?"


"설마, 결국 자네가 도서관에 속해 있는 건 분명하네. 굳이 이야기하자면, 굶주린 사자우리에 웬 친절한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 게 이상하다는 거지 결국 사자우리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럼?"


"그래도 이렇게나 이질적인 이상, 협회에서는 당신에 대해 따로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소리야. 어때, 협력해 줄 수 있어?"


"음...."


역시 고민하네. 예상된 반응에 유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간의 정보에 따르면, 도서관의 성정과는 달리 바의 바텐더는 도서관에 들어온 손님들에게 매우 친절하며, 심지어 책을 가지고 살아돌아가길 원한다는 언급을 한 적 있다. 한두 번이라면 이상한 함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도서관이 도시질병이 된 지금까지도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실제로 세븐 협회에서는 '바텐더'가 도서관에 모종의 이유로 조종당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 지 오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협회에서 도서관에 붙잡힌 불쌍한 도시인을 구하려 하는 건 아니다. 협회가 알아내려는 건 바텐더라는 존재가 왜 도서관에 있는지, 어떤 힘이 작용된 결과인지 알려고 할 뿐이지 그를 구하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저 정보수집의 일환이다. 도서관에 대해 알면 알수록 도서관을 해결할 수 있을 가능성 또한 커지니까.


물론 이렇게 내놓고 물어보는 건, 그간 판명된 바텐더의 성격 때문이다. 바텐더란 존재는 매우 친절하고 온화하며 손님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으니까.


"...말씀드리는 거야 문제없습니다. 다만, 우선 주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연관성이라도 있나?"


"그건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이 바에 계실 수 있는 시간이 상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문을 받고 만들어드리며 말씀드리죠."


"고맙군. 그럼....유나 양, 아는 칵테일이 있나?"


"제가 아는 건 아메리카노 뿐이에요."


"필립 군은 어떤가?"


"....네? 아, 옙. 죄송합니다, 저도 아는 건 그다지...."


"혹시 좋아하시는 음료가 있으십니까?"


"허허, 난 쌍화차를 좋아한다네. 특히 필립 군이 말아주는 쌍화차 맛이 그만이지."


"스승님, 그래도 쌍화차 칵테일 같은 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어? 있어요?"


황당하다는 듯 웃음짓던 유나가 그대로 삐끗했다. 살바도르는 흥미롭다는 듯 바텐더를 바라보았고, 필립에 있어서는 살의까지 보내고 있었다. 살바도르가 손짓하니 살의는 엷어졌지만, 그래도 바텐더를 향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명확했다.


그러한 세 가지 다른 반응과 시선에도 바텐더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쌍화차 칵테일이 아니지만, 차가 들어간 칵테일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쌍화차의 맛과 비슷하게 만들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아닐세. 굳이 쌍화차 맛이 나게 만들 필요는 없다네. 하지만 차(茶)가 들어간 칵테일에는 흥미가 샘솟는군. 그 중에서 가장 맛있는 걸로 부탁하네."


"주문 받았습니다."


수려하게 고개를 숙인 바텐더가 이윽고 뒷편의 찬장에서 술병 둘과 얼그레이(Earlgrey) 통을 꺼내들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바 한켠의 작은 냉장고를 열어 레몬즙, 설탕시럽, 달걀 하나도 꺼내 카운터에 늘어놓는다. 처음 얼음물을 부었던 잔들을 다시 깨끗히 씻고, 가장 먼저 진(Gin), 런던 드라이 진(London Dry Gin)의 마개를 딴다. 바텐더가 가장 좋아하는 진이면서도 이 바에서 가장 고급인 물건이다.


유리잔에 진을 50ml 정도 부어넣고, 훌륭한 향을 자랑하는 얼그레이를 티스푼 하나만큼만 퍼서 집어넣는다. 홍찻잎의 깊은 향에 무심코 마음이 풀어질 뻔 했던 살바도르가 유나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조금 물어도 되겠나? 바텐더, 자네는 어찌하여 도서관에 있지?"

"현재의 저는 기억의 9할 이상이 없어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칵테일에 대한 책을 탐내어 도서관의 초대장에 응한 기억은 있습니다. 그 후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관장님이 저의 칵테일을 마음에 들어하셔서 감사히 생을 허락받았습니다."


"....원래부터 도서관에 있던 건 아니라는 거네."


"그렇습니다. 아마 도시에서 살았을 겁니다. 대부분 잊었지만, 도시의 면면은 기억에 남아 있으니까요."


조금 시간이 지나 얼그레이가 진에 꽤나 우러났다면, 레몬즙 25ml와 설탕시럽 25ml를 집어넣는다. 그 상태로 막대로 스터하고, 달걀을 까 노른자만 껍질에 남긴 채로 흰자만 잔에 부어낸다. 꽤나 아슬아슬한 모습에 혹시나 달걀 껍질이나 노른자가 들어가지 않을까 유나와 살바도르가 염려했지만, 그런 걱정은 쓸데없다는 듯 바텐더는 완벽하게 흰자만을 걸러내었다.


다시금 막대로 스터한다. 그리 많이 저을 필요는 없으나, 재료들이 원활하게 섞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평소보다도 길게 저어주어야 한다.


"도시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는 건 없는가?"


"없다고 단언해도 될 정도입니다. 아마 지금처럼 바텐더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기억의 대부분을 잃은 지금은, 과거의 저는 거의 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전 그저 최선을 다해 칵테일을 만들어 대접해드릴 뿐입니다."


어느 정도 스터가 끝나자 바텐더는 은빛 셰이커를 꺼냈다. 상당히 섞인 진과 얼그레이, 여러 재료가 들어간 액체를 셰이커에 넣고, 혹시라도 새어나오지 않게 단단히 고정한 후 흔든다.


바텐더가 눈을 감은 채 셰이커를 흔드는 모습은 경건함 그 자체였다. 절도 있는 자세로 필요한 정도로만 흔들고, 팔만이 움직일 뿐 몸은 일체의 미동도 없다. 섞는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속도를 늘였다가 줄이기도 하면서 셰이커를 흔들고 또 흔들던 바텐더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띈 그가 셰이커의 뚜껑을 열고 둥글게 깍인 얼음 몇 개를 셰이커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뚜껑을 고정시키고 흔든다. 다만 이번에는 방금 전과는 다르게 여유롭고 부드럽게, 그리 오래 흔들지는 않았다.


바텐더에게 계속 물어보고 있던 살바도르가 재밌다는 듯 셰이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왜 두 번에 나눠서 흔드는 겐가? 처음부터 얼음을 넣어도 되지 않는가?"


"처음의 셰이크(셰이커를 흔들어 재료들을 섞는 것)는 진과 얼그레이, 레몬즙, 설탕시럽, 달걀 흰자가 완벽하게 섞이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얼음을 넣어 온도를 낮추어 시원하게 마시기 위함입니다. 얼음은 어디까지나 부재료이며, 처음부터 넣고 흔들었다가는 얼음이 많이 녹아 칵테일의 맛이 연해질 뿐만 아니라 셰이커 안에서 흔들어지면서 부서질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아하, 칵테일 맛에 방해되는 거구나? 그래서 두번째는 약하게 조금만 흔든 거고?"


"정확합니다."


그게 시작이었다.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그 과정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살바도르와 유나는 어느세부턴가 본래 목적에서 탈선하여 칵테일에 대해 바텐더에게 질문하였다. 술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알만한 물건인 만큼, 그에 대한 지식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거기에 바텐더에게서 일체의 망설임 없이 튀어나오는 수많은 전문지식은 그것을 한층 더했다.


"그럼 원래 만들려던 게 조엽수림(照葉樹林)이란 칵테일이라고?"


"그렇습니다. 녹차 리큐르에 우롱차를 타서 만드는데, 쌍화차와 같이 단맛과 쓴맛이 어느 정도 공존하는 칵테일입니다. 특히 첫맛이 달고, 뒤맛이 쓰다는 것이 더더욱이요."


"녹차면 녹차지 녹차 리큐르는 뭔가?"


"리큐르는 증류주에 꽃이나 열매, 여러 재료들과 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술입니다. 녹차 리큐르는 녹찻잎을 넣어 추가로 증류시킨 리큐르이죠. 그 외에도 초콜릿 리큐르, 크림 리큐르, 오렌지 리큐르, 약초 리큐르 등 수백 가지가 넘는 리큐르들이 존재합니다."


"허허, 그것 참 흥미롭군."


"그러게나 말이에요, 스승님. 안 그래 필립?"


".....네, 정말 그렇습니다."


재밌으면서도 유용한 정보에 살바도르와 유나가 웃는 것과 달리, 필립은 여전히 바텐더를 향해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점점 아무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질 정도였는데, 그건 유나가 재밌다면서 바텐더와 가까워질 때 더욱 심해졌다. 바텐더와 살바도르, 유나 셋이서 웃는 저곳이 필립에게는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찐득한 감정. 필립은 그것의 정체를 알면서도 외면했다. 받아들이기에는 필립 스스로가 인정할 수 없었다.


살바도르와 유나와 수많은 시간을 보낸 자신보다, 바텐더가 더욱 그들과 친근한 것 같아서.


존경하는 스승님이 바텐더를 더욱 인정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품은 선배가 바텐더에게 더욱 호감을 품은 것 같아서.


무엇하나 인정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바텐더를 향해 넌 뭔 놈이냐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제 칵테일이 완성되었다며 미소짓는 바텐더를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완성입니다. 얼그레이 마티니(Earlqrey Martini)입니다."


"고맙네, 바텐더."


"고마워."


".....고맙, 습니다."


필립이 자신 눈앞의 칵테일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옆을 보면, 스승님과 선배가 기막힌 맛이라면서 흥분하고 있다. 살바도르는 크게 웃었고, 유나는 멋지다면서 미소를 지은 채로 잔을 들고 들썩거리고 있었다. 칵테일 한 잔에 모든 행복을 가진 것 같이 둘은 기뻐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지 못한 웃음이다.


내가 짓게 하지 못한 미소다.


나로써는 불가능한 것이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틈만 나면 자신을 파먹으려 하는 이 감정을 털어내려 애썼지만, 살바도르와 유나의 웃음소리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마음이 점차 붉게 물들어가고, 두 눈동자에서 질투심이 흘러나왔다.


도서관에 오기 전, 사무소에서 그의 쌍화차에 웃음 지었던 살바도르가 떠올랐다. 그 때는 자부심과 기쁨이 터져나오는 것만 같았지만, 지금의 웃음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물론 그 때도 진심어린 웃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칵테일은, 살바도르 자신조차도 몰랐던 내면의 기쁨마저 끌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필립이 칵테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리잔에 담긴 얼그레이 마티니가 찰랑거리며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잔을 잡았다.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면, 그가 좋아하는 홍차의 그윽한 향이 난다. 홍차 말고도 여러 재료가 많이 들어갔는데, 이렇게나 홍차의 향만이 진하게 흘러나온다. 필립 본인도 쌍화차를 여러 번 타봤기에 안다. 여러 재료가 섞인 음료에서 특정 향만을 내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맛있겠지.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고개를 털며 지워버린다. 그는 인정하기 싫었다. 고작해야 이 칵테일 한 잔이, 그가 살바도르와 유나와 쌓아왔던 모든 인연을 뛰어넘는 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필립! 맛 끝내주지 않냐?"


"....네, 그러게요."


칵테일을 바닥에 부어버렸다.


살바도르도, 유나도 흥분해 있는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 필립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걸로 바텐더보다 자신이 우위에 섰다고, 필립은 스스로 굳게 믿었다. 바닥에 떨어져 마실 수 없게 된 칵테일이 나무 바닥 아래로 흘러갔다.


이딴 건 마실 필요도 없어. 필립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


"......어?"


바텐더가 그를 보고 있었다.


카운터석의 희미한 조명 아래, 두꺼운 후드를 써서 얼굴 중 입만 보이는 그 모습으로.


붉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




"....앤젤라 님, 오늘 손님 중 한 분이 도망쳤다 들었습니다."


"롤랑이 말한 거지? 아무튼, 그게 왜?"


"도서관에서 그렇게 도망치는 게 가능한 겁니까?"


"그것이 도서관의 의지니까."


"...그 말씀은?"


"그 손님이 도망침으로써, 장래적으로 도서관이 수많은 질 좋은 책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도망칠 수 있을 거란 의미야. 그, 루루라고 했었나? 그 여자도 도서관에서 도망친 후로 수많은 손님들을 끌고 도서관에 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나와 롤랑만 아는 거니 넌 모르겠네. 만약 루루와 마스, 산이라고 했었나? 그 손님들이 모두 도서관에서 전멸했다면 츠바이에서 도서관에 올 일은 없었을 거야. 하지만 루루와 산, 그 둘이 도망침으로써 산이 츠바이 6과에 도움을 청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츠바이 6과가 도서관에 오게 되었지."


"그렇습니까?"


"그냥 그렇게 이해해. 즉, 이번의 필립이라는 손님도 여기서 책이 되는 것보다 도망치게 해주는 게 더 많은 책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도서관의 판단한 거야. 그래서 도망칠 수 있던 거고."


"....그렇다면."


"음?"


"필립이라는 손님분께서는...다시 도서관으로 오신다는 거군요."


"뭐, 그렇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바텐더?"


"....충분합니다."




<시선 사무소와 마시는 밀리언 달러>




"달록, 지금은 어떻지?"


"그대로야. 어금니 사무소에 붙힌 발신기는 완전히 소실됬어. 범위를 더 넓혀도 마찬가지야."


"아....이거 불안한 낌새가 팍팍 나는데. 왜 하필이면 도서관이냐고."


"그래봤자 도시질병...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따르는군. 도서관에 대해 들리는 건 흉흉한 소문 뿐이야. 얼마 전에는 협회 직속의 4급 사무소가 전멸했다고도 하고."


"어디 협회인데?"


"리우."

"걔네 직속이면 실력이야 확실할 텐데. 만만히 볼 수는 없겠어."


"달록, 보노. 도서관 진입에 반대는 없겠지?"


"물론."


"....2억 안(도시의 화폐 단위)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지만, 세금에는 목숨을 걸어야지. 빌어먹을."


"2억 안이면 지금까지 체납된 세금도 청산할 수 있어. 보노, 도시에서 탈세자가 어떻게 되는 지 모르지 않잖아."


"달록 말이 그렇다는데? 어쩔 거야?"


"알겠어 알겠어. 계기판에 웃는 이모티콘 띄우지 말고 빨리 들어가자고."




*




"어서오세요, 손님."


"음, 안녕하신가."


"안녕."

"아, 안녕."


딸랑. 청량한 종소리와 함께 바의 문이 열리자 바텐더가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바텐더의 인사에 간단히 대답한 시선 사무소의 알록, 달록, 보노가 바의 내부를 잠깐 훝어보더니 이내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보통은 바텐더가 카운터석으로 안내하지만, 이미 도서관 만큼이나 잘 알려진 바텐더의 정보를 모를 리 없다. 당연히 시선 사무소의 이들도 바텐더가 손님들을 카운터석에 앉게 한다는 것쯤이야 잘 안다. 그렇기에 미리 앞질러서 앉았을 뿐이다.


자리를 잡은 손님들에게 바텐더가 일체의 당황 없이 세 사람에게 유리잔을 건냈다.


"주문 전에 미리 여쭙겠습니다. 음료 섭취는 무리없이 가능하신가요?"


"꽤 싸구려 의체를 봤나 보지? 걱정은 필요 없어. 나와 달록, 보노 모두 쓸만한 의체이니 미각 장치 쯤이야 구비되어 있지."


"뭐, 보노가 무리하게 이걸 사느라 저번에 세금을 못 냈던 거지만."


"야 달록! 너도 엄청 좋아했으면서 나만 그러기냐? 그리고 세금은 한 번 까지는 체납해도 된다고! 3번부터가 문제지."


"...동료들이 조금 소란스러워 미안하군. 그런데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무엇이든지요."


"혹시 이전에 어금니 사무소가 바에 들르지 않았나? 주황 머리를 한 다혈질 여자가 리더인 사무소이다만."


"예, 왔다 가셨습니다."


"언제였지?"


"저도 시간개념이 희박해서....그래도 얼마 안 되었을 겁니다."


"....감사하군."


예상대로다. 알록이 아직도 아웅다웅하는 달록과 보노에게 그들의 의체로 공유하는 채팅을 송신했다. 내용을 확인한 달록은 다행이라며 끄덕였고, 보노는 이렇게 편할 리 없다며 투덜거렸다.


어금니 사무소가 열차 안에서 소실하고, 도서관에 그들의 책이 올라오기까지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알록은 미리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 어금니 사무소가 발신기를 눈치채고 속였을 경우.


둘째, 도서관에서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경우.


첫째라면 상당히 곤란해지지만, 둘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W사의 워프열차는 출발 지점부터 목표 지점까지 오직 10초만 걸리기에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데 시간적으로 문제가 따르지만, 도서관 내부에서 시간이 다르게 흐를 경우 상황이 얼추 맞아 떨어진다.


아마 열차가 이동하는 도중 영문 모를 이유로 초대장을 사용한 어금니 사무소가 도서관에 들어오고, 도서관 내에서 시간이 가속하여 바깥 시간으로는 몇 초 만에 그들이 도서관 안에서 책이 되었던 것이겠지. 대충 추리를 정리한 알록이 달록과 보노를 돌아보았다.


순조롭다는 표시였다. 달록과 보노의 계기판에 알록의 채팅이 날아왔다.



----도서관 내의 시간 가속이 확실한 것 같다. 그렇다면 도서관은 T사와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어.



----목적이었던 W사의 특이점은 불명이지만, 도서관에 사용되었을 T사의 특이점도 충분한 수확이야. 이젠 무사히 나가기만 하면 끝이지.



----야 달록! 그런 말은 플래그라고! 함부로 채팅치지 마!



----보노, 내가 그런 바보같은 소리는 그만 하라고 했지.



----지랄하네. 저번에 네가 해치웠나? 라고 채팅 쳤다가 목표물이 안 죽어서 전멸할 뻔 했던 거 기억 안나냐?



----보노!



못 말리겠군. 알록이 달록과 보노의 유치한 논쟁으로 불타는 채팅을 시선 저편으로 치워버렸다. 겉으로는 달록과 보노가 서로 노려보고 있을 뿐이지만, 채팅창에서는 온갖 놀림과 조롱, 말다툼이 격해지고 있었다. 한 두번 있는 일도 아니였기에 알록은 안 읽은 채팅이 열렬한 기세로 쌓여가는 채팅창을 가볍게 무시하고 바텐더 쪽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음, 오래 기다렸나?"


"아니요. 그런데 저쪽 두 손님분은 괜찮으신가요?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시는데요."


"그냥 무시해도 괜찮아. 그나저나 주문을 해야겠지? 원하는 칵테일은 무엇이든 만들어주는 것, 확실한가?"


"미천하지만 제 실력 이내라면 무엇이든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군...."


알록이 아직까지도 불타는 채팅창을 여전히 무시하고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칵테일. 이놈의 의체를 사용하기 전까지 매우 즐겼던 음료이다. 이제는 미각 장치를 구입했기에 맛도 문제 없이 느낄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좋아하던 칵테일을 마셔도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어 꽤나 허무했었다. 감정 장치가 없는 싸구려 의체는 허무하다는 감정조차 느낄 수 없기에 그런 면에서는 좋다고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의체로는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금을 체납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서도 미각 장치의 구입을 강력히 주장한 보노에게는 몇 번이나 감사를 해도 모자라지 않다.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가격 때문에 반대했던 알록과 달록도, 실제로 맛을 체험하고 나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미각'이 주는 충격과 기쁨은 대단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알록은 이내 칙칙한 추억 속에서 그가 정말 좋아했던 칵테일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알록이 웃을 수 없는 몸으로, 한껏 기대감을 드러내면서 바텐더에게 말을 건냈다.


"밀리언 달러(Millon Dollar). 가능한가?"

"문제없습니다. 곧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달록, 보노. 채팅 그만 치고 이제 돌아와라. 아니 좀 그만 치라고."


"알록, 난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달록이 끈질기다고."


"미친 소리. 따박따박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게 누군데?"


"이젠 좀 그만 해라. 칵테일은 주문했어."


"....응? 알록, 너 칵테일 알아?"


"보노는 나중에 들어와서 모르나? 나랑 알록은 의체를 맞추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그 때 알록이 제일 좋아하던 게 칵테일이었어."


"호오, 꽤 안다는 소리네? 칵테일 이름이 뭔데?"


"밀리언 달러."


".....미친 이름이구만."


알록이 달록과 보노를 중재시키는 사이, 바텐더는 뒷편의 찬장에서 드라이 진(Dry Gin), 스위트 베르무트(Sweet Vermouth)와 반 한켠의 미니 냉장고에서 파인애플 주스(Pineapple Juice), 그레나딘 시럽(Grenadine Syrup), 계란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거기에 셰이커를 꺼내 잘 닦고, 가장 먼저 드라이 진부터 집어들었다.


가장 클래식하면서 무난한 맛을 자랑하는 고급 드라이 진의 마개를 따고, 셰이커에 1온스(대략 30그램) 가량 붓는다.


"그런데 알록, '달러'라면 옛날에 있었다는 화폐 단위 맞지? 지금이야 머리가 정한대로 '안'을 통화규격으로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전부 달랐다고 들었어."


"맞아. 밀리언 달러는 그 때 만들어진 칵테일이지."


"밀리언이면 100만...100만 안인가? 오우, 그렇게 불릴 정도면 꽤 맛있나 본데?"


"보노,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달러는 상당히 가치가 높은 화폐였다고 들었어. 100만 안보다도 비쌀 걸?"


"오호? 들으면 들을 수록 기대되는데?"


다음은 스위트 베르무트. 베르무트는 보통 쓴 맛이 강한 '드라이 베르무트(Dry Vermouth)'와 단 맛이 강한 '스위트 베르무트(Sweet Vermouth)'로 나뉘는데, 보통 칵테일의 대명사인 '마티니'에 쓰이는 드라이 베르무트가 더 인지도가 높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드라이 베르무트가 더 맛있다는 건 아니지만, 마티니에서 파생된 칵테일이 워낙 많은 탓에 스위트 베르무트가 칵테일의 재료로써 뭍히는 감이 없진 않다.


하지만 이번 칵테일의 경우, 과도한 쓴 맛은 파인애플 주스나 그레나딘 시럽의 단 맛과 강하게 충돌해 이상한 맛을 낼 여지가 있으므로 스위트 베르무트를 사용한다. 이번에는 2분의 1 온스, 15ml 정도만 셰이커에 따라 넣는다.


"그런데 왜 이름이 밀리언 달러지?"

"달록, 뭘 그리 생각하냐? 그냥 그만큼 맛있으니까 그렇겠지!"


"밀리언 달러라는 이름에 그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본래 의미로는 '영광을 되찾는다' 라고 들었어. 옛날에 번창했단 어떤 나라가 침체기에 접어들자 다시금 나라의 경제가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에는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하더군. 뭐, 나도 옛날에 어떤 바텐더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재밌네. 알록, 꽤 전문적인데?"


"나도 어떤 바텐더에게서 들은 것 뿐이라니까."


이제는 파인애플 주스다. 이것도 스위트 베르무트와 마찬가지로 2분의 1온스 정도만 붓고, 그레나딘 시럽(석류 시럽)은 티스푼으로 2스푼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셰이커에 주류들을 전부 넣었다면, 이제는 계란의 차례다.


셰이커 위에서 달걀을 깨트린다. 너무 강하게 힘을 주면 셰이커 안에 계란 껍질이 들어가 버리니 적당히 힘을 주어 깨트리고, 찐득한 계란 흰자만을 부어 넣으면서 노른자는 껍질 안쪽에 남긴다.


반으로 깨진 두 껍질에 노른자를 옮겨 가며 남아있는 흰자까지 셰이커에 넣어주었다면, 이제는 흔들 차례다.


"오오, 계란이 들어가네? 꽤 특이한 걸?"


"옛날 방식이라고 들었어. 요즘에는 저렇게 만드는 칵테일이 없다고도 했고."


"알록, 그 바텐더에게서 들은 게 상당한데? 자주 가던 바는 아직도 있어?"


"그러게, 알록. 다음에 거기 가보자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었는데, 갑자기 바가 문을 닫았어. 알아보니 그 바텐더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영감이 어디로 간 건지..."


".....유감이야."


"뭔가 좀, 미안."


"아니야. 안타깝지 않다고 한다면야 거짓말이지만, 뭐 도시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고....괜히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현명하겠지."


평범한 주류만 들어갔다면 몰라도, 점성이 높은 계란 흰자가 들어갔다면 상당히 흔들어 주어야 한다. 강하게 왕복 50여번 정도. 그 정도는 흔들어 줘야 계란 흰자가 칵테일에 충분히 섞이며 배여든다. 충분히 섞이지 않았다면 점성이 눈에 보일 테니 잘 모르겠다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흔들어도 무방하다.


셰이커를 차고 넘칠 정도로 흔들어 준 뒤에, 분홍빛으로 섞인 칵테일을 미리 준비해둔 유리잔에 따라낸다. 원래는 파인애플을 깎아서 가니쉬(곁들여 먹는 것)로 장식하는 게 정석이지만, 아쉽게도 파인애플이 없는 관계로 여기서 마무리한다.


"밀리언 달러(Millon Dollar), 완성입니다."


"....음, 고맙군."


"고마워."


"고마운데."


"저야말로요."

아름다운 분홍색의 밀리언 달러를 받아든 알록은 감회에 젖은 듯 잔과 칵테일을 이리저리 쳐다보았고, 달록은 색이 마음에 드는 지 그녀의 옷에 장식된 분홍색과 비교해보고 있었으며 보노는 뭐 생각할 게 있냐는 듯 곧바로 의체의 입 부분을 열어 밀리언 달러를 들이켰다.


단숨에 칵테일을 원샷하는 보노를 한심하게 쳐다본 달록이 적어도 건배라도 하라고 잔소리하려는 찰나----


"----맛있다!"


"....보노?"


"야 씨 이거, 야 씨 진짜 맛있다고! 달고 새콤하고 씁쓸해! 거기에 뒷맛까지 깔끔한 게 미각 장치가 오류를 일으킨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암튼 존나 맛있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개쩐다! 미쳤다! 등등의 감탄사를 외쳐대는 보노를 바라보던 달록은 오바하는 거 아닌가? 라는 합당한 의심을 하면서도 약간의 기대를 품고 눈앞의 밀리언 달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옆을 보면 알록은 아직도 칵테일을 감상만 하고 있다. 건배는 틀렸다고 판단한 달록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미각 장치가 달린 호스 하나로 밀리언 달러를 부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짜 개쩐--- 음? 달록, 너 왜 그래?"


"......."


"어? 잠깐.....음....뭐여, 미각 장치가 과부하를 일으킨 건가?  하긴, 기본적인 맛들만 느낄 수 있는 저급 장치이니 그럴 만도 한데.....내 미각 장치가 멀쩡한 건 천운이네. 대충 장치만 식혀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이거."


"달록? 이제 괜찮냐?"


".........이거, 진짜 맛있어. 정말로."


"그렇지? 아마 품질 더 좋은 미각 장치였다면 맛이 더 환상적이었을 걸?"


"....좋아. 2억 안으로 장치를 사자."


"어, 야? 우리 그걸로 세금 내야 되는데?"


"그게 뭔 상관이야. 어차피 3차 경고 후에 발톱이 오는 거지, 2차 경고까지는 세이프라고. 이번에는 미각 장치를 사고, 다른 곳에서 돈을 벌어서 세금을 내자."


"야 그건 아니지! 2차 체납되면 2억 안으로도 세금 다 못낸다고! 과징금이 얼마나 붙는데!"


"그래도 난 맛을 포기할 수 없어. 살 거야."


"안 된다니까!"


기어코 아웅다웅하기 시작한 달록과 보노를 두고, 계속해서 잔을 쳐다보기만 하던 알록은 소란스러운 옆쪽으로는 일체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입 부분으로 밀리언 달러를 들이켰다.


꿀꺽.


맛은---- 환상적이었다. 보노의 말대로, 미각 장치가 이 칵테일의 맛을 전부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만큼의 맛이다. 정말 밀리언 달러, 수많은 돈을 써도 후회되지 않을 맛이었다.


그저 행복하다고 표현할 뿐인 맛의 격류에서, 알록은 옛날에 마시던 밀리언 달러를 돌아보았다.


아직 의체를 사용하기 전, 달록과 만나기 전, 10년도 훨씬 넘은 그 때.


이제는 없는 추억의 바에서, 그 때 마신 밀리언 달러는......사실, 맛이 없었다. 그 바텐더가 말했다시피, 요즘 칵테일에서 계란을 쓰지 않는 이유가 있다. 뭔가 텁텁하면서 오묘한 게, 객관적으로 보자면 맛없는 칵테일이었다.


아니지. 밀리언 달러 말고도, 그 바텐더는 맛있게 잘 만드는 칵테일이 하나도 없었다. 전부 다 엉망진창에 용량조차 안 맞고, 맛의 조화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실력 없는 형편없는 바텐더였다.


바텐더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가 장사하는 방법은 가격이었다. 천 안이면 칵테일 한 잔을 마실 수 있었으니, 단순히 맛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취하고 싶은 이들이 그곳을 찾았다. 과거의 알록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바텐더가 내 준 것이 밀리언 달러였다.


그 이상한 맛의 칵테일을 마시고, 알록은 물었다.


----이런 걸 왜 주는 거야?


바텐더는 대답했다.


----나중에 밀리언 달러만큼 돈 좀 벌어서 술 좀 사란 뜻이야.


알록은 그 때 웃었다. 실력, 서비스, 무엇 하나 형편없는 바텐더였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 바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손님들은 맛에 불평하면서도, 누구나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렇기에 알록은 의체로 몸을 갈아탄 뒤에도 그곳을 찾았다. 어떤 의미로는 마음의 평화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밀리언 달러를 주문했다. 여전히 가난한 거냐며 장난스럽게 웃는 늙은 바텐더의 웃음과, 다른 손님들의 활기찬 웃음이 여전히 기억났다. 


그 모든 게 이제는, 한낱 추억이라니.


"......맛있군."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맛이 없는 게 더 좋았겠지만 말이야."


".........네?"


알록이 처음으로 미소를 멈춘 도서관의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실력, 서비스 전부 뛰어나며 무엇보다도 젊다. 기억 속의 그 늙고 형편없는 바텐더와는 완전 정 반대의 모습에 알록은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맛도 훌륭하고 공손한 최고의 바텐더였건만, 알록은 만족하지 못했다.


눈앞의 바텐더가 사람이 아니라, 그저 손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최고의 바텐더'란 걸 만들어낸 것만 같아 위화감이 들었다.


"이제 가자."


"알록! 네가 정해, 이번 2억 안은 어디에 쓸 거냐? 당연히 세금이지?"


"무슨 소리야. 당연히 미각 장치지, 안 그래?"


"...그래그래. 그건 나가서 생각하자고."

그리고 무엇보다.


"......잘 마셨습니다. 안녕히 계시길."


"............"


손님을 떠나보내는 바텐더의 눈이 너무나도 슬퍼서.


그 충혈된 눈을 다시 볼 자신이 없었기에, 알록은 바를 나섰다.




*




드라이 진, 스위트 베르무트, 파인애플 주스, 그레나딘 시럽, 계란 흰자.


고품질의 고급 주류이며, 정확한 용량이었고, 빈틈 없이 셰이크했다.


밀리언 달러를 마셨다. 맛있었다. 나는 웃었다.


반 쯤 남은 밀리언 달러를 내려놓았다.


어딜 봐도 완벽한 칵테일이다.


하지만 손님분은 만족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해 최상의 맛으로 만들었음에도, 손님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웃게 만들지 못했다. 기뻐하게 하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눈동자가 떨려왔다.


희미한 조명 아래,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바에서.


나는 소리 없이 그렇게 있었다.




<흑운회와 마시는 사케 토닉>




".....긴, 살아남은 조직원은 얼마나 되죠?"


"절반도 채 안 남았어. 사요, 어떻게 할 거야?"


"자의든 타의든 도서관에 들어가는 이상 살아나오는 건 필수 과제입니다. 누님, 도시질병이라고 얕보지 말고 조직원들 전부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양, 그건 좀 과도하지 않아? 끽해야 도시질병이라고. 4급 해결사 정도면 단독으로도 처리 가능한 수준이야. 차라리 절반 정도만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본거지에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만. 긴, 양? 조직원들을 전부 데려갈 거예요. 다들 준비시키세요."


"사요, 어째서?"


"어떻게 구르고 굴러서 겨우 엄지 직속이 되고, 이제야 팔자가 폈는데.....봐요. 아직도 우리를 깔아보는 저 늑대의 시간도, 소문보다 훨씬 강했어요. 도서관이 도시질병이라 해도, 신중하게 가서 나쁠 건 없겠죠."


"....알았어. 너의 의견을 존중하지."


"누님, 전부 준비시켰습니다."


"고마워요, 양. 늑대의 시간....님? 이제 들어갈 테니 그만 좀 쏘아봐...주세요."


"그래그래, 잘 다녀오라고."


"....들어가죠."




*




긴은 한숨을 내쉬었고, 양은 그저 마른 침만 삼켰다. 둘의 반응은 달랐지만, 차마 앞에서 걸어가는 사요의 뒷모습을 쳐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건 동일했다.


사요는 자신의 흑운도의 자루를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쥐고 있었다. 차마 삼키다 못해 넘친 감정이 그녀의 몸 전체에 흘러내리듯 사요는 전신을 분노에 떨고 있었다. 긴과 양은 저렇게 화난 사요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왜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흑운회는 사요가 스스로의 인생을 갈아넣어 키워낸 조직이다. 흑운회가 세를 불리는 것도, 엄지의 산하가 된 것도, 흑운도라는 상당한 공방 무기를 모든 조직원의 손에 쥐어준 것도 전부 사요가 일구어낸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리고 늑대의 시간은 흑운회 자체를 무너뜨렸다. 조직원의 반이 죽고, 나머지도 중경상이라는 지금의 현상을 복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자금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그 사이에도 엄지에의 상납금은 준비해야 하며, 흑운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검계를 비롯한 다른 조직들에게서 얼마나 방해가 들어올지 생각하면 할 수록 머리가 아팠다.


사요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흰 피부에 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사요."


"....후우, 이렇게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죠."


"그래요, 누님! 후딱 도서관을 처리하고 엄지에게 보고하면----"


"---해봤자 의미 없을 거예요. 곧 있으면 손가락 걸기가 시작되죠. 평소라면야 당연히 엄지의 힘을 빌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 다른 손가락들과의 협상에도 바쁠 엄지가 고작해야 산하 조직 하나가 무너진다 한들 신경쓸 것 같아요?"


"늑대의 시간은 거기까지 생각한 건가."


"....그럴 수가."


"후훗. 양, 그렇게 실망할 것 없어요. 본의치 않게 도서관에 왔지만....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해요."


"누님?"


"우선은 앞의 문으로.....그 소문의 바에 들어가죠."


도서관의 칵테일 바, 나름 기대하고 있었어요. 흑운도를 허리춤에 집어넣은 사요가 섬뜩한 미소와 함께 문고리를 돌렸다. 언제나 소름 돋지만 믿음직한 그 미소에 양과 긴도 살짝 웃었다. 언제까지나 침울하게만 생각한다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기에, 긴과 양은 그들 앞의 듬직한 여보스를 믿기로 마음먹었다.


딸랑.


고풍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문이 열리자, 문에 달려있던 방울이 그를 따라 청량하게 울려퍼졌다. 잠시 그 아름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니, 작은 바 안에서 작은 조명이 켜진 카운터와 그곳에 서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사요도 도서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었고, 흥미도 있었다. 다만 엄지가 시킨 일도 바빠서 신경쓰지 않았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아는 것이 이 도시에서 하루라도 더 살아가는 방법이기에 비싼 돈을 들여 세븐 협회에서 주기적으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이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둥지의 상류층이나 입을 법한 검은색의 고급 정장에, 순백의 흰 장갑.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만한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와 정장과는 정말 안 어울리는 두꺼운 후드, 그리고 후드로 가려져 입만 살짝 보이는 공손한 자세의 인간.


착각할 일은 없었다. 소문의 바텐더였다.


사요가 그제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이 바에서는 어떠한 전투 행위도 벌어질 필요가 없고, 도서관에서 용납하지도 않는다. 상시 의심병을 달고 사는 세븐의 정보 수집가들도 안전 구역이라는 평가를 내렸다면 정말 편하게 마음 놓고 있어도 되는 장소란 뜻이다.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어머, 생각보다 예의바르네요? 정보에서는 봤지만 이렇게 보니 좀 어색한데요."


"요즈음 L사 둥지를 정리하면서 저런 태도를 가진 놈은 본 적 없으니까. 다들 추하게 발버둥치거나 역으로 억지를 부렸으니."


"확실히, 최근 괘씸한 놈들만 보다 이런 태도를 보니 더욱 좋게 느껴지네요. 누님, 일단 앉죠."


"그래요."


사요가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서 바텐더의 바로 앞 중앙 자리에 걸터앉았다. 가까이 와서 보니 바텐더는 생각보다 장신이었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봄에도 후드 아래의 얼굴을 도통 보이지가 앉았다. 잠깐 흥미가 동했지만, 바텐더가 미소와 함께 얼음물을 건네오자 우선 잔을 집어들었다.


가뜩이나 분노와 짜증 때문에 목이 바싹 마른 차였다. 고마워요. 사요는 작게 감사를 표하고서 얼음물을 들이켰다. 긴과 양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마찬가지로 얼음물을 단숨에 마시고 있었다.


차가운 얼음물로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사요가 잔을 내려놓자 바텐더가 부드러우면서 보기에 절도있는 동작으로 잔을 다시 가져갔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요, 사케(Sake)는 어때? 최근 마시질 못했잖아."


"오, 누님 사케 좋은데요?"


"확실히, 사케도 당기지만? 이왕 칵테일 바에 왔으니, 칵테일을 마시는 게 도리겠지요. 바텐더?"


"네, 주문은 결정하셨습니까?"


"사케가 들어간 칵테일로 부탁드릴게요."


"사케 칵테일도 신경쓰이지만 난 그냥 사케가 마시고 싶어. 양, 어때?"


"물론 좋지."


"주문 받았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인 바텐더가 뒤편의 찬장을 열고서 여러 술병들을 둘러보고 꺼냈다. 사요와 긴, 양 모두 술을 즐길 줄 아는 애주가였기에 바텐더를 따라 찬장을 천천히 둘러보았으나, 긴과 양은 바텐더가 따뜻하게 데워서 가져다 준 사케를 보고서 눈을 빛내고서는 서로 잔을 부딪혔다. 투명한 사케를 보며 잠깐 침을 삼키는 사요와 긴이 눈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사요, 아까 말한 '기회'는 뭐야?"


"그러게요 누님.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얻어가시려고...?"


"후훗, 오늘의 책 목록을 잘 봐요. 사육제의 책이 있잖아요?"


"사육제? 그게 왜.....아하, 그렇군."


"사육제 놈들은 검지였죠. 하지만 지령에만 목숨을 거는 광신도들이잖습니까. 검지의 자세한 정보가 적혀있을 리는 없을 텐데요."


"평범한 검지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사육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재단사의 협회에도 가입되어 있고, 검지이면서 여러 손가락이나 날개에게까지 납품하는 그들의 책이라면, 엄지가 충분히 탐내고도 남을 정보예요."


이미 계산은 끝났다. 옆에서 감탄하는 양과 긴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본 사요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도서관은 어떤 책이든 내어주지 않는다. 손님이 접대에서 이겨도, 얻을 수 있는 책은 초대장에 적혀있던 책 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도서관에서 얻고 싶은 책이 있어도 그것이 초대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얻을 수 없다.


물론 도서관은 손님이 원하는 책으로 그들을 꼬드기지만, 결국 누구나 사육제의 책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희귀한 정보는.


---가치가 치솟죠.


사요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흑운회가 사육제의 책을 가져가는 첫번째 손님이라는 확신이. 사육제가 도서관에 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애초에 사육제가 도서관에 갔다는 정보를 아는 것 또한 검지의 그 전령 정도이다. 그리고 당연히 검지의 전령이 도서관에 들어갈 리는 없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육제의 책을 얻는 첫번째 손님이 흑운회라는 말이다.


도시에서 딱 하나 있을 사육제의 책.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을 사육제의 기술과 베일에 싸인 재단사 협회의 정보, 그리고 거래 상대였을 손가락과 날개에 관한 정보. 그것이 얼마 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그것이 흑운회에게 얼마나 큰 이득이 될 지는 세보지 않아도 뻔하다. 어떻게 보면 늑대의 시간에게 감사해야 할 정도이다.


---물론 그래도 그 개대가리는 용서할 수 없지만요.


어떻게 복수하는 게 가장 좋을까 고민하던 사요가 문득 바텐더를 보았다. 바텐더는 이미 여러 술병들을 꺼내 잔에 붓고 있었다. 옆을 보니 긴와 양이 웃으면서 서로 사케를 마시고 있었다. 화기애애하게 말을 나누는 둘 사이에 끼어들 필요도 딱히 없었기에 사요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텐더를 쳐다보았다.


바텐더에 대한 정보를 듣자면, 그 뛰어난 실력이 무엇보다 먼저다. 도서관에서 책을 얻어나온 이들은, 무엇보다 바텐더의 칵테일이 환상적이었노라고 말했다 한다. 맛에 대한 건 상대적이니 그런 정보는 어느 정도 흘려들어야 한다지만, 그것이 계속된다면 사람을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사요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바텐더? 제 일행은 둘이서 마시고 있으니, 잠깐 이야기라도 나눌까요?"


"상관없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바텐더의 실력이 환상적이라고 했는데.....그 정도면 기대해도 되겠죠?"


"미천한 실력이지만 다른 손님들께서는 좋아해 주셨습니다. 감히 손님께서도 만족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말투가 정말 마음에 드네요. 그런 공손한 거, 싫지 않아요."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바텐더는 사요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면서도 전혀 손을 늦추지 않았다. 뛰어난 기술과 숙련도를 엿볼 수 있음에 사요는 기대가 더욱 커지는 걸 느꼈다.


조금 전 긴과 양에게 건넸던 사케를 잔에 30cc 정도 붓는다. 잔에는 둥글게 깍인 얼음이 두 개 들어가 있었는데, 얼음이 투명한 사케를 만나 빠직거리며 맛있는 소리를 냈다.


사요가 흠잡을 곳 없는 솜씨로 완성되어가는 칵테일을 보고 있자니, 어느세 사케를 금세 비운 긴과 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요, 우리는 먼저 나가서 술기운 좀 깨고 있을게. 마시고 나와."


"누님, 먼저 나가있겠습니다."


"몸을 좀 움직이고 있어요. 곧 나갈 테니 다른 조직원들에게 말 좀 전하고요."


"분부대로 합죠."


미소지은 긴과 양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바를 나섰다. 중간중간 사요가 취하면 어쩌지? 술버릇이 나쁘잖아. 누님의 많은 단점 중 하나이긴 한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죠. 등등 여러 말이 군데군데 들려와, 사요는 무심코 미소를 일그려뜨렸다.


당장이라도 흑운도를 뽑아 저놈의 입 좀 다물게 하고 싶었지만, 이미 긴과 양은 바를 나선 뒤였다. 한숨을 내쉰 사요가 고개를 들어 다시금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단 둘이네. 바가 조용해지자 사요는 바텐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텐더는 사케가 담긴 잔에 토닉워터를 50cc 가량 넣고, 레몬을 하나 슬라이스해 잔에 퐁당 빠트린 후 은색 막대로 칵테일을 휘휘 젓고 있었다. 그 모든 동작이 절도있고 우아하여, 사요는 자신도 모르게 바텐더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냈다.


정말이지, 무심코 넋을 놓고 볼 정도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사요가 눈을 감고 작게 심호흡했다.


그리고서 눈을 뜨자, 그녀의 앞에는 레몬이 들어간 투명한 칵테일이 조명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주문하신 사케 토닉(Sake Tonic)입니다. 기본적인 진 토닉의 레시피를 응용했으며, 기호에 따라 레몬을 더 추가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우선 한 모금 마셔보죠."


바텐더의 미소에 미소로 화답한 사요가 사케 토닉을 집고서 요리조리 살폈다. 보기에는 그냥 사이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풍겨오는 향은 사요가 좋아하는 사케의 것이었다. 누가 봐도 맛이 없는 게 이상한 비쥬얼에 사요가 기대를 품고 사케 토닉을 머금었다.


"...........멋지네요. 정말로, 멋져요."


본래 사케라면 원료, 만드는 법, 어떤 재료를 넣었는가에 따라 그 종류가 각양각색인데, 그냥 가장 좋은 사케를 고르라면 열이면 아홉 다이긴조(大吟釀)를 말한다. 다이긴조는 저온에서 저속으로 발효하는 '긴조제법'으로 만드는 사케인 긴조(吟釀) 중에서도 가장 좋은 사케를 말한다. 동시에 사요가 가장 선호하는 사케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이긴조는 부드럽고 깔끔한 맛과 입에 닿았을 때의 감미로운 감촉, 그리고 차분한 향을 즐기는 사케이기에 무언가와 섞는 칵테일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에 사케 토닉에 사용된 사케는 후츠슈(普通酒),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인 맛의 사케다. 그리고 보편적인 맛이기에 다른 무언가와 섞여도 거부감이 크지 않은 사케다.


처음 입에 머금으면 토닉워터의 강한 탄산이 밀고 들어온다. 탄산에 혀가 마비될 것만 같다면, 레몬의 새콤상큼한 맛이 탄산을 한 번에 씻어내고서 후츠슈의 정말 익숙한, 자연스레 미소가 나는 그 정겨우면서 깔끔하고도 씁쓸한 맛이 느껴진다. 


단맛 같은 건 전혀 없다. 달콤한 것 없이, 이 알코올과 씁쓸함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사케이며 그것을 전혀 해치지 않고 탄산과 신맛으로 사케를 뒷받침해주는 이것이 사케 칵테일이다.


"다소 기대치가 높아진 감이 없지 않았는데, 가볍게 뛰어넘었네요. 도시에 있었다면 매일 워프 열차를 타고 찾아갈 정도의 맛이네요?"


"손님께서 만족하시니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정말로 훌륭하네요. 이런 곳에 있지만 않았으면....."


아, 그러고보니.


사요가 반쯤 마신 사케 토닉을 천천히 내려놓고 바텐더를 올려다보았다. 바텐더는 여전히 미소와 함께 사요를 바라보고 있다. 잠깐 잊어먹은 감이 있지만, 사요는 이곳이 어디인지 다시금 상기했다.


이곳은 도서관.


그리고 저 바텐더는 도서관의 바텐더.


본래 이런 성격은 아니지만----


"바텐더? 미리 사과해둘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아니 저희 흑운회는 오늘 사육제의 책을 가지고 갈 거예요. 그리고 그 때, 도서관의 사서들을 여럿 죽일 거예요."


"........."


"혹시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바에 들르던 이가 있었다면?...그러니 미안하다고 해둘게요."


"...그렇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사요는 이런 성격이 아니다. 타인을 죽인다고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성품의 소유자는 절대 아니다. 애초에 그녀의 성격이 그랬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저, 단순한 변덕이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인격적으로도, 실력으로도 정말 훌륭한 이 바텐더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렇게 착해빠진 자를 보자니, 저도 모르게 양심이란 것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


바텐더는 침묵했다. 의외의 반응에 사요가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의 공손함과 성품으로 보건데 같은 도서관의 이들을 소중히 여겨 화를 내거나, 아님 무언가 격한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기에 더더욱. 도시질병쯤 되면 그 일원끼리는 상당한 친분이나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당장 도시악몽인 나락회만 보아도, 일원끼리는 가족과도 같이 아끼는 성향이 컸다.


그렇기에 다소의 비난은 예감하고 있었는데.


".....손님, 손님께서는 그 조직이 소중하신가요?"


".......뭐라고요?"


"흑운회, 라고 하셨죠. 손님께선 흑운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생각하냐니? 다소 엉뚱한 질문에 사요의 눈매가 꿈틀거렸지만, 바텐더는 어느세인가 미소를 지우고서 묻고 있었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서 고민하던 사요는 잠시 후에 고개를 다시 들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고민이란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말을 골랐던 것 뿐이다.


"제 모든 것이네요?"


"......"


"전 흑운회의 처음이고? 뒷골목의 흔한 양아치에 불과했던 흑운회를 엄지의 직속까지 끌어올렸어요. 신뢰할 수 있는 동료를, 긴과 양을 만나고. 저를 믿어주는 조직원들을 만나고. 정말 많은 적과 싸워왔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게, 흑운회를 위해서예요."


"그렇기에 전 흑운회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누군가를 죽이는 건 기본이고, 다른 조직을 참살하는 건 당연하고, 강자에게 굴종하는 것도 자연스럽죠. 이 흑운회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커져나가서 수하 조직을 두고, 더 큰 조직이 되고, 더 넓게 퍼져나가는 것."

"그게 제 꿈이네요? 그리고 제 인생이에요."


"흑운회를 위해서 악착같이 살아가요. 흑운회를 위해서 동료를 모아요. 흑운회를 위해서 무릎을 꿇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흑운회를, 제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힘이 나요."


"처음에는 그저 나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 꾸린 조직이었지만, 어느세 흑운회는 제 가족이고, 친구고, 제 자신이었어요. 이 각박한 도시에서 내일을 바라볼 목표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저를 위한 것이라면."


"적어도 전,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하네요?"



어때요, 도서관의 바텐더.



----이만하면, 답이 되었나요?




*




최근에는 아무도 바에 오지 않는다. 가끔씩 오던 롤랑 님도, 몰래 오시던 말쿠트 님도, 가끔의 일탈이라며 오시던 예소드 님도, 술을 들고서 오시던 네짜흐 님도, 같은 문학의 층이라 이따금씩 오시던 호드 님도.


그리고, 처음에는 매일같이 오시던 앤젤라 님도. 이젠 오시지 않는다.


바에 빛이라고는 작은 조명 하나 뿐이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이곳에서, 바텐더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문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누군가 들어오기를 바란 것도 몇 시간 째다. 마지막 손님 분은 이미 가셨고, 먼지조차 쌓이지 않는 이 바에서는 청소조차 할 필요가 없다. 시계가 없어 시간조차 알 수 없는 이곳에서, 바텐더는 그저 시간을 보냈다.


바텐더.


도서관의 바텐더.


처음에는 그가 도서관의 일원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도서관이라고 해도 책은 전혀 보지 못했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찾아오는 도서관의 이들이 있었기에 바텐더도 도서관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가끔 이곳이 도서관인 것도 잊는다. 소름끼치게 조용하고, 가끔 공포에 떨 정도로 어둡다.


난 도서관의 일원이 맞을까.


바텐더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까지, 그 눈이 띄여질 일은 없을 것이다.




<브레멘 음악대와 마시는 어라운드 더 월드>




"........."


"오잉크? 왜 그래?"


"아, 무무. 그냥.....요즘 말이야, 제대로 음을 낼 수가 없어서. 전의 공연도 내가 망쳤고...."


"에이, 오잉크! 그리 신경쓰지 마. 노력하면 언젠가 그 피아니스트에 버금가는 연주를 할 수 있다니까!"


"그래도.....기분이 꿀꿀해. 뭘 해도 전부 안 될 것만 같아."


"오잉크...."


"....미야오, 이거면 되지 않을까?"


"음? 초대장? 하지만 도서관에 가는 건 다음 공연 후라고 했잖아."


"어차피 히호가 부탁한 일이잖아. 다소 빨리 처리해도 문제될 건 없겠지. 무엇보다, 오잉크는 지금 슬럼프에 빠진 것 같아."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도서관이 무슨 상관.....아."


"오잉크가 칵테일을 좋아하잖아?"


"....좋아. 소문이 자자한 곳이니까. 소중한 음악 동료를 위해서라면."




*




딸랑.


"나 참,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기계 새끼가 길도 막고.....참 안풀리는 것 같아."


"기운 내, 오잉크. 그래도 도착했다고."

"그래! 그렇게나 염원하던 그 도서관의 바야! 봐! 저기 바텐더도 있네."


"어서오십시오, 손님."


"칵테일....바...."


오잉크라고 불린 자, 보라색 돼지 가면을 쓰고 기타를 등에 맨 건장한 남성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옆에서 토끼 가면을 쓴 무무, 고양이 가면을 쓴 미야오가 그를 다독이며 먼저 앞서 나아갔다.


도서관의 바. 이젠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그 고명한 곳이다. 도시에서 내로라하는 주당들이 마지막 순간에 가고 싶은 곳에 꼽히며, 사람에 따라 책은 덤이고 칵테일이 진짜라고 일컬어지는 곳.


칵테일을 포함한 여러 술들을 정말 좋아하는 오잉크가 항상 노래를 부르던 곳이기도 하다. 히호가 처음 도서관의 초대장을 가져왔을 때는 너무 좋아서 나이도 잊고 방방 뛰어다녔던 기억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래도."


오잉크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희망과 활기를 전부 잃은,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는 그토록 바라던 곳에 드디어 왔음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음악조차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은 칵테일을 마실 자격도 없다고. 그는 스스로를 내리까내렸다.


오히려 이런 곳에 나 따위가 와도 되는지 뒷걸음치려고 했으므로, 당황한 무무와 미야오가 황급히 그를 부축하여 카운터 쪽으로 이끌었다.


"오잉크, 일단 앉아."

"그래! 너 도서관의 칵테일이 마시고 싶다고 매일 노래를 불렀잖아. 시원하게 마시고 웃자!"


"무무....미야오...."


"손님, 우선 자리에 앉아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미천한 실력이지만 손님분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축 쳐진 채 겨우 자리에 앉은 오잉크가 바텐더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세련된 정장에 후드로 얼굴을 가린, 그 몸가짐에서 공손함이 절로 느껴지는 바텐더가 오잉크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오잉크가 다급히 따라 인사한 후에, 바텐더가 얼음물 한 잔을 손님들에게 내밀었다.


미야오는 고마워! 라 말하며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켰고, 무무는 고개를 까딱 숙인 후 얼음물을 조금만 머금었다. 하지만 오잉크는 찰랑이는 물을 보고서도 몇 번인지 모를 한숨만 내쉴 뿐, 잔에는 손조차 뻗지 않았다.


그런 오잉크를 전전긍긍하면서 바라보던 미야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로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래, 바텐더! 여기 주문 받아줘!"

"네, 어떤 칵테일로 드리면 될까요?"


"...미야오, 호기롭게 말한 건 좋은데. 칵테일 아는 거 있어?"


"응?.......무무, 넌?"


"알 리가. 우린 오잉크 말고는 술도 잘 안 마시잖아."


"음, 오잉크?"


"........."


"...안 되겠는데."


"오잉크....."


오잉크의 슬럼프를 어떻게 하기 위해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장본인이 여전히 그대로라면 데려온 이들까지 힘이 빠지는 법이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않는 오잉크를 그저 바라보던 미야오와 무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에 대해 진정어린 걱정이 담긴 그것이었지만, 그것마저 오잉크에게는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무거운 분위기의 침묵에도 가만히 서있던 바텐더가, 가볍게 미소지으며 뒤쪽의 찬장을 열었다.


수백 종류의, 각양각색의 술병들이 카운터의 조명을 받아 형형색색으로 빛나자 미야오와 무무, 심지어 오잉크까지 무심코 바텐더쪽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고민이 있으신가 봅니다."


"......응."


필요한 주류는 세 종류.


"저는 심리상담가가 아니라 손님분의 고민을 알 수도 없고, 직접적으로 해소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제 능력 밖의 일이니까요."


"......."


"그러니까."


진(Gin), 볼스 페퍼민트 그린(Bols Peppermint Green), 파인애플 주스(Pineapple Juice).


간단하게 세 종류의 주류를 꺼내든 바텐더가 미소지으며 오잉크를 마주보았다. 그의 호감이 가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맞물려, 누구라도 다정하고 따뜻하게 여길 그 미소로.


"제가 드릴 수 있는 한 잔의 칵테일 뿐입니다."


".....칵테일."


"네. 다른 손님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이번 칵테일은 제 추천으로 만들어드려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미야오는?"


"당연히 문제없지!"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한 바텐더가 진과 페퍼민트 그린, 파인애플 주스를 카운터에 올려둔 채로 은빛으로 반짝이는 셰이커를 꺼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닦인 셰이커를 열고, 가장 먼저 칵테일의 베이스가 되는 드라이 진(Dry Gin)을 부어넣는다.


용량은 대략 30ml 정도. 어디까지나 기본이 되는 기주(基酒)이므로 너무 많이 넣었다가는 전체적인 맛을 해칠 염려가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오잉크, 힘 내."


"....무무."


"연주 좀 망치면 어때. 난 점점 성장하는 너를 잘 알고 있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주하면, 분명 지금을 극복해낼 수 있을 거야."


".....말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난 해낼 수 없을 거야.....내가 망친 공연만 벌써 세 번째야. 난 무무나 미야오처럼 아름다운 소리는 절대 낼 수 없을 거야...."


"오잉크....."


다음은 볼스 페퍼민트 그린. 간단히 말해 민트 리큐어다. 민트 리큐어에 걸맞게 진한 녹색을 띄는데, 민트 특유의 박하 향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는 한 편 싫어하는 이들은 입에 가까이 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술이다. 다만 박하 향 덕분에 뒷맛이 깔끔하게 잡혀 칵테일에서 종종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만드는 칵테일이 그 경우라 보면 된다.


칵테일의 핵심이 되는 리큐어인 만큼 그 용량이 매우 중요한데, 취향이나 지역에 따라 많게는 드라이 진의 두 배 가량 넣는 레시피도 있는 한 편 적게는 고작해야 5ml 정도만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가장 무난한 용량으로는 20~25ml 정도면 충분하지만, 최적의 답으로는 여러 번 마셔가면서 자신에게 좋은 용량을 맞추는 게 베스트다.


마지막은 파인애플 주스. 페퍼민트 그린은 어디까지나 향과 색이고, 칵테일의 맛은 이 파인애플 주스에서 나온다. 양은 진과 같이 30ml면 차고 넘친다. 모든 재료를 셰이커에 붓고 나면, 적당히 흔들어준다.


그리고 잔에 부어내면 끝이다.


"괜찮아 오잉크! 그런 작은 공연 정도야 무시해도 문제 없어. 나중에 오잉크가 좋아하는 마트에 가서 연주하자! 거기라면 재료도 많으니 분명 훌륭한 소리가 날 거야!"


"저번에 마트에서 한 공연도 내가 망쳤잖아.....난 너무나도 무능해. 스스로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오잉크."


미야오가 무무가 거듭하여 격려했음에도 오잉크는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동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오잉크에게 진심으로 와닿는 말은 없었다.


처음부터 무리였던 걸까. 오잉크가 눈을 감았다.



*



그는 협회 소속 해결사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협회에 소속된 잘 나가는 해결사, 누구나 동경하는 위치에 있던 그였지만 결코 해결사 일이 그의 마음을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해결사 일을 했고, 운 좋게 이런 위치까지 올라왔을 뿐. 그는 해결사 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많은 돈과 좋은 생활이 보장되기에 억지로 일했다. 매일이 공허한 나날이었으며, 그나마 저녁마다 마시는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 아니였다면 정신적으로 죽어버렸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해결사 일에 감사했던 건, 9구의 '피아니스트' 사건 때였다. 9구 골목에서 출현하여, 수십 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피아니스트는 그 이름답게 음악을 연주했다. 그가 그 음악을 들은 건 피아니스트에 대한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9구에 들어갔을 때였다.


음악이 뇌리를 관통했다. 리듬은 전신을 떨리게 했고, 박자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의 입에 희열이 번졌다. 매일매일 공허한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음표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음악을 1초라도 더 듣고 느끼고 싶었다.


음악에 다가가기 위해 무기를 내던졌다. 음악에 다가가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음악에 다가가기 위해 두 팔을 크게 벌려 피아니스트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이 음표가 되고, 건물이 박살내고, 수많은 사람들이 절규하며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환희했다.


하지만 음악은 금세 끝났다. 협회에서 파견된 특색 해결사 검은 침묵은 격전 끝에 피아니스트를 죽이고 피아노를 부숴버렸다.


피아니스트 사건으로 협회 전체가 시끄러웠던 날,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돌아갔다.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을 무시하고서 그는 동료의 책상에 놓여있는, 그 동료가 제일 아끼던 기타를 보았다. 동료는 이미 음표가 되어 사라졌기에, 주인 없는 기타를 그가 홀린 듯이 집어들었다.


현을 튕겼다. 생에 처음으로 기타를 연주해본 그이기에, 아마추어의 불협화음이 울렸다. 급히 뛰어나디던 동료들이 인상을 찌뿌리며 그에게서 멀어질 정도로 형편없는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그는 숨쉬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살아있었다.


한 때, 그는 날개의 임원이었던 어떤 자가 요리사가 되기 위하여 날개를 그만두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 때 그는 그 남자를 비웃었다. 매일 호의호식하는 도시의 최상류층이, 하루 먹고 살기에도 바쁘며 노동 강도도 심한 요리사가 되다니. 그 시절 그는 9급 해결사로 하루를 살아가기에도 힘들었기에 더더욱 그 남자가 한심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엉터리 연주를 끝낸 그가 화가 잔뜩 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사를 보았다. 상사가 그에게 뭐하냐면서 호통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었다.


그날. 그는 협회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피아노를 샀다. 그는 매일 매 시간, 정말 조금만 남은 비자금으로 묵은 모텔에서 언제나 피아노를 연주했다. 하지만 누군가 가르쳐주는 이도 없고, 그도 그저 마음가는 대로 피아노를 칠 뿐이다. 실력이 늘 리가 없었다. 며칠 후 그는 소음 문제로 모텔에서도 쫓겨났다.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계속 형편없는 연주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 그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누구나 귀를 막을 만한 연주를 계속하면서도, 이제 돈 한 푼 없이 빈털털이로 길거리로 쫓겨났음에도 계속 행복하게 웃으며 연주하는 그에게 고양이 가면의 여자와 토끼 가면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들은 그에게 가면을 주었다. 함께 피아니스트의 음악을 연주해내자고, 두 남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웃었다. 그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가 지어주었던 이름이. 하지만 그는 이름을 버렸다.


그는 돼지 가면을 썼다. 그는 미야오와 무무에게 음악을 배웠다. 그는 악기를 직접 만들었고, 그는 행복하게 연주했다.


그는 오잉크였다.



*



오잉크에게 마치 주마등처럼 브레멘 음악대에서 있었던 행복한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사람을 악기로 만들었을 때,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미야오와 무무에게도 인정받았을 때, 처음으로 공연을 선보였을 때.


오잉크는 도시의 적이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잉크는 너무나도 큰 벽에 부딪혔다. 애초에 그에게 음악적 재능이 없던 탓이었을까, 최근 들어 아무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도 만족할 만한 음악을, 연주를 할 수 없었다.


미야오와 무무의 환상적인 연주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졌다. 한심하고 또 한심해서,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잉크는 공연을 망쳐버렸다.


".......난 안 될 거야."


오잉크가 까내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슬픔과 우울의 깊이를 알아차렸는지, 미야오와 무무도 침묵했다.


"손님."


".........."


"손님, 주문 나왔습니다."


".........."


"......어라운드 더 월드(Around The World)입니다."


".......!"


오잉크가 고개를 들었다. 가면 안에서 경악에 물든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다급히 자신의 앞에 놓인 칵테일을 본 오잉크가, 그 녹색 칵테일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잔을 집어들었다.


그의 격렬한 반응에 쳐져 있던 미야오와 무무도 놀랐는지 잔과 바텐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바텐더는 그저 미소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라운드....더 월드...."


"직역하자면 세계 일주라는 거창한 이름이죠."


바텐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잉크가 어라운드 더 월드를 들이켰다. 숨도 쉬지 않고, 다소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물을 마시듯 칵테일을 거칠게 마셔넘겼다.


진의 알코올이 무겁게 올라오고, 파인애플의 단맛이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단지 쓴 맛과 단 맛의 대립이 아닌,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박하 맛이 스문스문 기어나온다. 페퍼민트 그린이 그 향으로, 그리고 작게 느껴지는 그 특이한 맛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입 안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충분히 즐기고 목으로 넘기면, 알코올과 파인애플은 전부 깔끔하게 사라지고 박하 향의 개운하고 상쾌한 뒷 맛 만이 남아 절로 미소지게 만든다. 그 상쾌함이 마치 세계 일주를 하는 듯 하여 이름붙여진 게 어라운드 더 월드라는 칵테일이다.


그 이름값으로, 오잉크는 자신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다. 마음의 짐이 뻥 뚫리고, 좌절감에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1


"푸하!"


"어떠십니까? 손님."


"......끝내주게 상쾌하고 개운하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의 맛 그대로야."


"오잉크...!"


"오잉크!"


"...바텐더, 어떻게 이 칵테일을---"


"--손님,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바에는 음악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안타깝게도 이번에 바의 레코더가 고장난 참이라서요."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주를 부탁드립니다."


오잉크가 눈을 끔뻑였다. 그는 자신의 눈을 한 번 비비고 나서 미소짓는 바텐더를 보고, 그에게 안도의 웃음을 보이는 미야오와 무무를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등에 맨 자신의 기타를 어루만졌다.


어느세 미야오는 작은 하프를, 무무는 바이올린을 꺼낸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잉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야오, 무무..."


오잉크가 기타를 꺼내 쥐었다. 하지만 그는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다. 두 손도 심하게 떨려서,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기타를 연주할 수도 없었다. 다시금 좌절과 한심함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오잉크가 두 눈을 질끔 감아버렸다.


난 어차피 안 될-----


"오잉크."


"오잉크!"


"미, 미야오? 무무?"


손발을 떨며 다시 좌절하려는 그를 미야오와 무무가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쓰러질 뻔 했지만, 미야오와 무무가 오잉크를 부축하며 웃음지었다.


"오잉크, 네가 몇 번 좌절하고 포기하려고 해도 말이야."


"우리는 너의 동료니까! 몇 번이고 일으켜줄께!"


"........."


"오잉크, 걱정하지 마. 관객이 있잖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기타를 쥐어, 현을 튕겨! 괜찮아, 할 수 있어!"


"........응."


오잉크가 소중한 동료를 위해 기타를 쥐었다.


오잉크가 연주를 기다리는 관객을 위해 현을 튕겼다.


오잉크가 좌절을 딛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연주가 어땠는지는 상관없다.


결국, 오잉크는 웃으며 바를 나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