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쐐기 사무소와 마시는 드라이 마티니>



"실례하지."


딸랑. 고풍스러운 문 한켠에 달린 작은 방울이 청명하게 울렸다.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감상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였지만, 손님이 들어올 때 눈을 감은 채 있는 건 큰 결례이다. 잠시 닦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놓은 바텐더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 즉 손님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어깨까지 살짝 숙이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듣기 좋은 인사로군. 감사히 받겠네."


바텐더의 인사에 중후하고도 여운있는 목소리가 답했다. 검은색의 삼각챙 모자를 쓰고, 마찬가지로 검은 연미복을 입었으며 한 쪽 눈을 안대로 가린 백전연마의 중년이 미소 지으며 문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중년은 그 모습과 목소리만큼이나 행동거지도 기품있었다. 등에 맨 장창(長槍)을 잠시 벽에 기대어놓고서, 삼각 모자까지 벗어 근처 옷걸이에 올려놓은 중년의 손님은 바텐더가 서있는 카운터의 정중앙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님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중년 손님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고 있던 바텐더는 얼음물이 담긴 잔을 조용히 내밀었다.


"고맙네, 마침 목이 좀 타던 참이었거든."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한 중년의 손님--- 쐐기 사무소의 오스카는 조금 답답했는지 연미복의 가장 윗 단추를 풀어버리고 얼음물을 들이켰다. 짤랑. 이윽고 얼음조각들만 남은 잔을 내려놓은 후, 오스카는 그제서야 바의 내부에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색의 벽지와 바닥. 탁자와 의자는 적은 수로나마 존재하지만 사용된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조명은 카운터의 것이 유일하지만 그조차 그리 밝은 조명은 아니다. 다만 바 자체가 그리 넓지 않은 탓에 약한 조명으로도 내부의 모습은 전부 볼 수 있었다.


바 한 쪽에는 오래된 엠프가 있었으며, 몇 번 사용하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바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과시하는 카운터는 척 봐도 고급스러웠으며, 그 뒤에는 한 쪽 벽 전체를 덮는 투명한 유리 찬장 안에 수백 가지의 술병들이 조명의 빛을 받아 제각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서 오스카는 훑어보기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이곳은 그가 가본 바 중에서도 가장 멋지고 훌륭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도서관의 칵테일 바.


어떤 의미로는 도서관 자체보다도 유명한, 도시 전체에서 소문이 자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손님은 혼자 오셨나요?"


"음? 아니, 3명의 동료와 같이 왔지만, 도서관장이란 존재의 허락으로 나 혼자만 이곳에 왔다네."


"그러시군요."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을 얻기 전 들려야 하는 이 칵테일 바는, 들어온 손님들은 최소한 한 잔의 칵테일은 마시고 가야 한다. 일단은 그게 철칙이지만, 도서관장인 앤젤라의 기분이나 협상 여하에 따라 특정 인원만 칵테일을 마셔도 문제없다.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써는 최대한 많은 손님께 칵테일을 드리고 싶지만, 앤젤라와 바텐더의 관계는 명백한 갑과 을이다. 앤젤라가 오로지 한 명만 들여보낸 이상, 그 한 명이라도 최대한 만족시키는 수 밖에.


오스카가 내려놓은 유리잔을 회수한 바텐더가 미소와 함께 손님을 바라보았다.


"손님,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티니(Martini), 가능한가?"


"어떤 스타일 원하시나요?"


".....보기에는 새파랗게 젊은 바텐더인데, 꽤나 잘 알고 있군 그래."


마티니(Martini). 흔히 '칵테일의 왕'이라 불리며,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칵테일 중 하나. 진(Gin)과 베르무트(Vermouth)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이며, 간단한 레시피만큼이나 바리에이션이 정말 많은 칵테일이기도 하다.


마티니의 유명세 탓에 처음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이 바에 가서 다짜고짜 마티니를 달라고 요청한다면, 바텐더로써는 꽤나 곤란할 수 밖에 없다. 당장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마티니 레시피만 4가지이며, 여기에 흔히들 사용되는 여러 레시피들까지 모은다면 10개가 가뿐히 넘어간다. 그렇기에 마티니는 주문하기 전 어떤 마티니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지 알아둘 필요가 존재한다.


때문에 손님이 무작정 마티니만을 주문한다면, 바텐더는 자연스레 손님에게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되묻는 게 응당 당연한 대답이다. 개중에는 가장 표준적인 레시피인 진 3 : 베르무트 1의 레시피로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준일 뿐 손님마다 원하는 건 천차만별이니 그리 좋은 대응은 아니다.


바텐더의 겉모습이 워낙 젊은 청년으로 보이는 탓에 잠깐 실력을 의심했지만, 오스카는 이내 마음을 놓고 미소지었다.


"드라이 마티니(Dry Martini)로 부탁하네. 비율은 바텐더에게 맡기지."


"주문 받았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바텐더가 뒤편의 찬장을 활짝 열어젖히더니, 일말의 고민도 없이 찬장에서 술병들을 골라내었다. 상당한 경험과 자신이 느껴지는 태도에 오스카는 만족스럽게 끄덕거렸다. 전체적으로 바텐더의 질이 상당히 열악한 도시에서 제대로 된 바텐더는 정말 찾기 어려운 존재다. 책이 목적이 아니라, 칵테일을 목적으로 도서관의 초대장에 서명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도서관의 바텐더는 도시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이윽고 마티니의 필수품인 진과 베르무트를 품에 안은 바텐더가 깨끗하게 씻은 유리잔과 은빛 투명 막대를 준비했다. 칵테일 바에서 즐길 거리는 맛좋은 칵테일과 그것을 조제하는 바텐더의 모습이기에, 오스카는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우선은 드라이 진(Dry Gin)의 마개를 딴다. 증류주의 대표격인 진은 마티니에서 주로 쓴맛을 담당한다. 특히 '드라이(Dry)'는 더욱 쓰다는 뜻으로, 진 중에서도 상당한 쓴맛을 자랑하는 진들을 드라이 진이라 부른다.


오스카가 주문한 드라이 마티니는 오로지 쓴맛만 존재하므로, 호기롭게 마티니에 도전했다가 쓴맛에 참패한 이들은 베르무트를 스위트 베르무트(Sweet Vermouth)로 바꾼 스위트 마티니(Sweet Martini)를 즐기는 편이다.


"바텐더, 술을 즐기는 편인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손님께서는 마티니를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지는 않는다네. 다만 자주 마시는 편이지."


"....전 손님께서 주문하신 드라이보다는 퍼펙트 마티니(Perfect Martini)쪽이 더 잘 맞더군요."


"음.....분명 진, 베르무트, 스위트 베르무트를 2oz(60ml), 1/2oz(15ml), 1/2oz(15ml) 만큼 넣고 섞는 마티니던가?"


"상당히 해박하시군요."


"오래 전부터 친구가 마티니라면 전부 좋아했거든. 이미 없는 사람이지만."


".........."


진을 유리잔에 2oz(60ml) 가량 부어넣었다면 다음은 드라이 베르무트(Dry Vermouth)다. 마찬가지로 와인의 일종인 베르무트 중에서도 쓴맛이 강한 드라이 베르무트는 직접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보다 칵테일에 이용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투명한 진이 찰랑거리는 잔에 베르무트를 1/3oz(10ml) 만큼 넣는다. 진이 완벽한 무색 투명인 것과 다르게, 베르무트는 투명하지만 초록빛이 도는 노란색이 얕게 보인다. 진과 베르무트가 만나 출렁거리며 서로 소용돌이친다. 두 술을 용량만큼 잘 부었다면 이제 사실상 완성된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면....."


"도시에서 흔한 이야기야. 같이 나아가자고 약속했던 오랜 친구가, 금세 재능의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진부하고도 재미없는 싸구려 드라마지. 그 친구, 해결사에 재능이 없어 8급 해결사 자격 시험에서도 수없이 떨어졌다네. 그 때마다 난 친구에게 술을 사주었지."


"..........."


"나보고 칵테일 좀 사라고 보채면서 마티니를 물처럼 마셔댔으니, 그야 레시피도 외워버릴 수 밖에. 자기는 언제나 실패하지만, 언젠가 완벽한 해결사가 될 거라면서 마티니 중에서도 퍼펙트 마티니를 정말 좋아했지. 모두가 그를 실패하는 낙오자라 놀렸지만, 난 감히 그럴 수가 없었네. 그런 이야기일 뿐이야."


".....마티니(Martini), 완성되었습니다."


"고맙군, 바텐더."


유리잔의 진과 베르무트를 스터(막대로 젓는 것)하는 것으로, 마티니가 완성된다. 오스카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바텐더가 오스카에게 잔을 내밀었다. 어딘가 서글픈 미소와 함께 마티니를 받아든 오스카는 거릴 것 없다는 듯 곧바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쓰다. 참 썼다. 마티니를 입 안에 머금어도, 혀에 굴려도, 조금만 맛보아도, 마침내 삼킬 때까지, 마티니는 정말 쓰고도 씁쓸했다. 이 강렬한 마티니를 마시고 있노라면, 오스카는 이 마티니를 정말 좋아했던 옛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렇기에, 오스카는 마티니를 마신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


"언제까지나 그와 술을 마실 줄 알았지만, 꿈이 깨지는 건 한 순간이더군."


"............"


"내가 뒤늦게 알아낸 건, 그가 그의 평소 행실을 고까워하던 누군가에게 죽고 도시의 밤에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것 뿐이었다네. 청소부가 쓸어가는 도시의 밤....하, 그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그보다 좋은 때가 없었겠지."


"............"


"도시 사람들은 참 매몰차다고 지껄이던 친구였어. 너무 서로 정이 없다고. 서로 알고 살아야한다며 맨션의 이웃들에게 떡을 선물하던 그런 놈이었는데."


오스카가 헛웃음을 흘렸다. 옛 친구는 정말 자유로웠다. 그 자유로움이 그의 매력이었고, 오스카가 그와 친구 사이였던 이유였으며, 그리고 자유로움이 그를 죽였다.


그가 죽은 걸 알았을 때, 오스카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오스카는 어느 순간 자신이 그를 잊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억에 결손이 생겼던 것도 아니였다.


그냥, 바쁜 일상 속에서 그를 잊고 살았다.


오스카는 친구가 그토록 싫어하던 도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타인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기억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훌륭한 도시 사람이었다.


"....난 마티니가 참 싫다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자식은 이런 게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마셔댔는지, 이 쓰디쓴 칵테일을 마실 수록 친구의 얼굴이 어른거려.....그런데, 그거 아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그토록 어른거리던 그 얼굴도,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다네."


"..........."


"결코 잊지 않겠다고 울며 다짐했고, 마티니를 매일같이 마셔가며 그를 기억하려 애쓰는데도, 난 점점 그를 잊고 있어.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도시에서 흔한 일일 뿐이었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


파멜리와 파멜라가 싸우다가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깼던 걸 기억한다. 그날부터, 그의 얼굴을 매일 일하는 책상에서 볼 수 없게된 이후로 오스카를 친구의 얼굴을 잊어가고 있었다.


잊지 않겠다는 결심은 잠깐이었다. 매일매일이 톱니바퀴와도 같은, 바쁜 매일 속에서 오스카의 결심은 흐려져만 갔다.


그를 어떻게든 기억하려 그와 비슷하게 도시 사람들을 싫어하던 필립을 쐐기 사무소에 받아들였건만, 기억은 셀 수 없이 흩어졌다. 뿌연 연기에 갇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오스카가 아직 반 이상 남은 마티니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의 목소리를 잊었고, 그리고 그의 얼굴을 잊었으며, 이제는 그가 좋아했던 마티니만이 남았다.


".....바텐더."


"네, 말씀하십시오."


"자네에게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그 친구를 기억하길 바라기 때문이라네. 지루한 이야기에 어울려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설령 내가 여기서 책이 된다고 한들, 그렇게 후회되지는 않겠군."


"........."


"그 친구를 기억해주는 자가 있으니까. 정말 고맙네, 바텐더."


"......."




*




쪼르륵. 잔에 진과 베르무트, 스위트 베르무트를 붓는다. 비율은 2oz, 1/2oz, 1/2oz. 간단히 완성된 퍼펙트 마티니 한 잔을 아무도 없는 카운터석에 둔다.


그리고 또 하나, 진과 베르무트를 2oz, 1/3oz 만큼 따라 드라이 마티니를 만든다. 새롭게 만들어진 한 잔을 퍼펙트 마티니 옆에 두었다.


이제 마지막. 또 다른 퍼펙트 마티니 한 잔을 빠르게 조제해낸 바텐더가 잔을 카운터 위에 놓인 퍼펙트 마티니와 드라이 마티니에 건배하듯 살짝 부딪혔다.


그리고 마신다. 바텐더의 마티니는 줄어들지만, 다른 두 마티니는 그대로다.


바텐더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친구를 기억하려 애쓰던 중년의 손님을 기억했다.


그리고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손님의 친구를 떠올렸다.


바텐더의 상상 속에서 중년의 손님과 손님의 친구는 서로 잔을 부딪혔다. 퍼펙트 마티니와 드라이 마티니를 마시면서 둘을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들은 바텐더에게 같이 마시자며 잔을 들어올렸다. 세 명이 건배를 외치며 잔을 맞대었다.


바텐더가 눈을 떴다.


잔은, 그대로였다.




<토머리와 마시는 선라이즈>




딸랑.


청아한 소리에 바텐더는 정리하던 술병들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 작은 바에서 종소리가 울린다면, 그야 문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하니까. 그리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건 손님들 뿐이기에, 바텐더는 잠시 자신의 몸가짐을 정돈한 뒤 미소를 띄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 후 들어오는 손님이 누구든 최고의 칵테일을 대접할 뿐이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님을 대접했지만,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만은 정말 설레고 긴장된다.


하지만.


"......?"


문은 아주 살짝 열렸을 뿐, 그 이상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조금 열린 문 틈새 사이로 바가 위치한 문학의 층의 조명이 빛났지만, 그 작은 틈으로는 밖의 모습도, 손님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짜흐 님이신가? 예술의 층 지정사서인 네짜흐가 가끔 바에 올 때면, 이미 만취해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문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도 문은 전부 열리긴 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바텐더가 유례적으로 카운터에서 나가 상황을 보려고 할 때.


"어, 실례합니다!"


"....!"


살짝 열린 문틈 너머, 어린 남성과 여성이 섞인 것만 같은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들림과 동시에, 문틈 사이로 들어오던 조명 빛을 무언가가 막아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소리는, 명백하게 문보다도 훨씬 위쪽--- 거의 천장에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생각해도 평범한 인간의 크기가 아니였으며, 아예 몸 전체를 개조했던 사육제들도 저 정도의 높이는 아니였다. 누구라도 이질감을 느끼고 무심코 뒷걸음칠 만한 상황이었건만.


"죄송합니다! 우리가 들어가려는데, 문이 작아서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튼 문 밖에 서 있는, 아이 같은 목소리의 누군가도 바의 손님임에 틀림없었기에 바텐더는 쓰게 웃으면서도 도끼를 찾아 바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




"감사합니다!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어요."


"아니요, 오히려 손님의 신장을 고려하지 못한 저의 잘못입니다."


"아니예요! 우리가 더 감사한 걸요!"


바텐더가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들고 있던 도끼를 내려놓았다. 손님이 들어오실 수 있게 장장 10분에 걸쳐 전력을 다해 부숴놓은 문 옆의 뻥 뚫린 공간이 영 신경쓰였지만, 어차피 도서관의 모든 것들은 부서져도 다시 복구된다. 겨우 뚫어놓았던 구멍에 빛이 모여들면서 서서히 복구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바텐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필요하면 쓰라고 앤젤라가 도끼를 건내주었을 때는 웬 물건인가 싶었지만 모든 물건에는 용도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튼 도끼와 구멍에서 신경을 끈 바텐더가 자신의 정면에 선, 문제의 손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토머리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바텐더라고 호칭하십시오."


토머리라고 칭한 손님은, 까놓고 말해서 인간의 상궤를 벗어난 괴물 그 자체였다.


처음에 바텐더가 생각한대로, 토머리는 아무리 작게 잡아도 보통 인간의 두배가 넘는 크기였다. 단순히 키만 큰 것도 아니고 그 신장만큼이나 몸뚱아리도 거대해서 카운터의 조명이 거체에 가려질 정도였다.


몸 전체가 황토색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진흙과도 같은 피부로 덮여 있었으며, 곳곳에서 고름과 선혈이 조금씩 흘러나와 안 그래도 역겨운 모양새를 더욱 끔찍하게 더했다. 일단은 인간의 형태이긴 하나, 그나마 좀 정상적인 오른 팔에 비해 육중하기 그지 없는 왼 팔은 매우 두껍고 단단하여 인간 하나 둘 쯤은 가볍게 움켜쥐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고 상체에 비해 좀 부실한 하체 때문에 걷는 것도 뒤뚱뒤뚱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에 뭔 괴악한 패션인지 배와 가슴에 'LOVE TOWN'이라 수놓아진 핑크색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으며, 작은 팔들이 어깨, 가슴, 왼팔에서 각각 뻗어나와 있어 한층 구토감과 역겨움을 더했다. 거기에 몸 여기저기에서 꿈뻑거리는 눈동자들은 하나하나가 다른 곳들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개중 몇 개는 바텐더를 향해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려대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저것이 절대 정상적인 생명체가 아닌, 도시의 아집과 광기의 산물이란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의자에 앉으시는 건 불가능하시겠군요. 죄송하지만 바닥에 앉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 몸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동시에 말을 하고 있는 두 개의 '머리'였다.


두 머리는 서로 좀 떨어져 붙어있었는데, 갈색 긴 머리의 여성으로 보이는 머리가 더 위쪽에, 청색 짧은 머리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머리가 아래에 위치했다. 당연하지만 그 머리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였고, 얼굴이 몸 전체와 같이 진흙처럼 보이는 끔찍한 피부에 덮여 있었으며 눈과 입만 겨우 있을 뿐, 귀나 코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끔찍한 형태의 두 머리에서 동시에 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청소년들의 그것이라 토머리의 거체와 더더욱 비교되며 추악함을 더했다.


숙련된 도시의 해결사라도 무심코 얼굴을 찌뿌릴만한 형상이었지만, 바텐더는 특이하게도 미소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저기, 우리가 여기서 뭘 하면 되나요?"


"이곳은 바(Bar)입니다. 자유롭게 주류를 즐기시는 곳이기 때문에, 마시고 싶으신 걸 주문하시면 됩니다."


"마신...다? 마신다는 게 뭐죠?"


".....네?"


바텐더가 순간 당황하여 무심코 되묻자, 토머리가 어깨 부분에서 뻗어나온 작은 팔로 여성의 머리를 긁으면서 중얼거렸다. 


"'마신다' 라는 뜻이 뭔가요?"


"...'음식을 먹거나 마신다' 라는 표현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음식? 먹어? 마셔? 죄송해요. 우리는 모르는 말이에요...."


"손님께서는 무언가를 드신....그러니까 입에 넣어 씹어 삼킨 적이 없으신가요?"


"없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입은 안이 막혀있는? 그런 형태라서 말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호기심에 피를 입에 넣어본 적이 있는데, 그건 몸에 빨려 들어갔어요!"


"...그러시군요."


무릇 인간이라면, 아니 인간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것은 여러 의미로 미쳐버린 도시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몸을 의체를 대체한 이들도 기름이나 연료를 마시기는 하고, 인간에서 다른 무언가로 완전히 변미해버린 자들도 먹고 마시는 행위는 당연히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언가를 마신다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상대에게 칵테일을 대접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바에 손님으로 들어온 이상, 바텐더는 손님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의무이며, 책임이며,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순간 칵테일에 만족하지 못했던 알록이 떠올랐다. 칵테일을 바닥에 버렸던 필립이 떠올랐다.


입 안에 비릿한 피맛이 감돌 정도로 이를 뿌드득거리던 바텐더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호흡했다. 그 와중에도 미소는 잃지 않았다. 바텐더를 내려다보는 토머리에게 변함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바텐더는 고개를 들었다.


"손님, 행복이란 말을 아시나요?"


"알아요! 사랑마을에서는 모두가 행복해요.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고 진심으로 사랑해요! 우린 행복해요!"


"손님께서 느끼시는 행복은, 마신다는 것으로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신다는 건 그 형태를, 향을, 그리고 그 맛을 느끼고 누린다는 것. 원하는 것을 마시고 원했던 것을 누렸을 때, 모두는 행복을 느낍니다."


"말이 어려워요...."


"...직접 해보시는 게 빠르시겠군요. 이쪽을 봐주십시오."


그 역겨운 거체를 꼼지락거리며 끙끙 앓던 토머리가 바텐더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자, 뒤편의 찬장을 크게 열어젖힌 바텐더가 미소지었다. 토머리가 반 정도를 가리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카운터를 비추는 조명이 수십 병을 가볍게 넘는 술병들에 비추어지며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반짝였다. 그 광경에, 토머리가 아이처럼 웃으며 입을 벌렸다.


"이 중에서 원하시는 병을 골라주세요. 그걸로 드리겠습니다."


언뜻보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추천이나 아무것도 없이 손님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무책임이 다소 포함된 말이었지만 바텐더로써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손님은 오늘 피를 제외한 액체라는 걸 처음 마시기에 선호하거나 원하는 주류가 없고, 코가 없으니 향도 아마 맡지 못할 것이며 말할 때 입 안을 살펴보건데 혀로 추정되는 것도 없다. 혀 없이 어떻게 말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귀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대화가 통하고 있으니 포기하기는 게 옳다. 그렇다면 맛도, 향도, 기호도 모를 때 어떤 것을 주어야 할까.


답은 색과 모양이다. 신기해하며 찬장 이곳 저곳을 돌아보는 머리와 몸의 눈들은 버젓이 존재하니, 술병들을 보고 색과 병의 모양 등을 직접 고르며 원하는 병을 건내는 것이 그나마 상책인 것이다. 물론 토머리가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 만큼, 코나 혀 없이도 맛과 향을 정상적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무지한 바텐더로는 이 방법이 한계였다.


무엇을 선택하든 최고의 칵테일을 만들어내는 수 밖에. 바텐더가 잠시 눈을 감고 찬장에 존재하는 모든 술들의 종류와 그것들로 만들 수 있는 수백 가지 이상의 칵테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가고 있을 때, 찬장을 계속 둘러보던 토머리가 갑자기 그 거대한 왼팔을 들어올렸다.


그 손끝이 가리킨 건, 알코올이 전혀 없는 주황색 액체가 담긴 플라스틱 병 하나.


간단히 말해 오렌지 주스다.


"저거요!"


"...고르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그러니까...."




-----토미, 내가 직접 만든 오렌지 주스야. 받아줄래...?


-----당연하지 메어리!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메어리의 수제 오렌지 주스인걸!


-----고마워. 사랑해 토미. 




"음....모르겠어요. 그런데 마음에 들어요. 아무튼 저걸로요!"


"알겠습니다."


바텐더가 오렌지 주스가 담긴 병을 카운터에 놓자, 토머리가 거대한 왼팔을 천천히 거동시키며 병을 낚아채듯 가져가려 움직였다. 그 행동에는 별 의미가 없다. 아이가 자신의 물건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재빨리 가져가기에, 토머리도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고 토머리가 병을 잡기 직전, 그것을 멈추듯 바텐더가 유리잔을 탕 소리가 나게 카운터에 강하게 올려놓았다. 토머리가 그 소리에 잠시 움찔한 사이, 병을 잽싸게 가로챈 바텐더가 오렌지 주스의 마개를 따고 유리잔에 붓는다.


"어....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드리겠습니다."


유리잔의 바닥에는 이미 그레나딘 시럽이 소량 들어가 있다. 그냥 간단히 오렌지 주스만 내어줘도 괜찮지만, 그래도 칵테일을 만들어 내어주고 싶다는 바텐더의 마지막 자존심의 표출이었다. 거기에 잠깐 생각에 잠기면 이 칵테일을 누군가에게 알려주었던 희미한 기억이 남아있기에 갑자기 생각난 칵테일이었다.


그레나딘 시럽과 오렌지 주스. 두 재료를 넣고 스터해서 만드는 칵테일이란 하나뿐이다.


"선라이즈(Sunrise).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선라이즈(Sunrise). 유명한 칵테일인 데킬라 선라이즈(Tequila Sunrise)에서 데킬라를 뺀 논 알코올 칵테일이다. 본래는 데킬라를 데킬라의 색과 비슷한 또 다른 오렌지 주스로 대체하여 두 종류의 오렌지 주스와 그레나딘 시럽을 넣어 만드는 칵테일이지만, 아쉽게도 바에는 한 종류의 오렌지 주스 뿐이다.


선라이즈가 담긴 잔을 두 머리와 몸뚱아리에 달린 눈들로 요리조리 훝어보던 토머리는 왼 팔에 비해 작은 오른 팔로 선라이즈를 잡고 들어올렸다.


"이걸 어떻게 하나요?"


"입에 넣으시면 됩니다. 보통은 삼키시지만, 손님의 경우는 몸에 빨아들인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네!"


토머리가 순진하게 웃으면서 여성의 얼굴에 달린 입에 선라이즈를 그대로 쏟아버렸다. 그러고 나서 입을 닫았다가 열자, 그 잠깐 사이에 선라이즈는 전부 토머리에게 흡수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선라이즈를 전부 마셨다. 그렇다면 행복한가? 토머리는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토미, 이건.....


-----저번에 네가 준 오렌지 주스로 만들어본 거야. 메어리, 계속 나중에 어른이 되면 술 한 번 마셔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이름이 뭐야?


-----어, 어. 선라이즈라고 했었어. 아는 바텐더께 배워왔는데, 알코올은 없는 술이지만 그래도...


-----토미....


-----빠, 빨리 마시자 메어리!


-----응!




비어버린 잔을 보고, 입을 열었다 떼면서 허공을 쳐다보던 토머리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바텐더를 향해 눈을 돌렸다.


"행복하지 않은데요?


"......"


"거짓말은 나빠요. 나쁜 거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괜찮아요! 세모로 만들면 거짓말 안해요! 네모도 거짓말 안해요!"


"...걱정 마십시오."


사람보다 몇 배는 큰 추악한 거체가 바텐더를 위협하듯 꿈틀거리며 일어섰음에도, 바텐더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바텐더의 당당한 태도에 토머리가 다시금 작은 팔로 머리를 긁으면서도 오른 팔로 옆의 의자를 부수고 육중한 왼 팔로 아예 카운터를 움켜쥐었다.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악력에 카운터에서 불길한 소리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미소지은 바텐더가 또 다른 유리잔을 하나 꺼냈다.


잔에는 토머리가 마셨던 것과 같은 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조금 전에 만들어둔 선라이즈였다.


"드셔 보십시오."


"아까랑 똑같은데요?"


"다른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네?"


토머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주민들이 들어왔나 바의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이 작은 공간에는 바텐더와 토머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또 거짓말이에요? 해맑은 미소를 지은 토머리가 거짓말하는 나쁜 바텐더를 구겨버리기 위해 손바닥 모양으로 구겨진 카운터를 놓고 왼 팔을 크게 들어올렸다.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카운터의 한 켠이 박살나고, 위협하듯 휘두른 왼 팔로 찬장의 술병 몇몇이 부서지고 깨져나갔다.


세모로 할까? 네모로 할까?


여자 얼굴의 머리가 중얼거렸다. 흥겹고 웃으며 말하는 것이 천진난만한 아이를 떠올리게 했지만,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명백한 희열과 재미가 깃들어 있었다.


역시 세모가 좋을 것 같아!


토머리의 중얼거림에 남자 얼굴의 머리가 대답했다. 꺄르르 웃으며 대화하던 두 머리는 문득, 서로를 쳐다보고서 아직 미동도 없는 바텐더를 내려다보았다. 바텐더는 그제서야 카운터가 그토록 흔들렸음에도 넘치거나 쓰러지지 않은 선라이즈를 한 손으로 들고 토머리에게 내밀었다.


방금 선라이즈를 마신 여자 얼굴이 아니라.


어리둥절해 하는 남자 얼굴을 향해. 


"아직 드시지 않은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린 하나예요. 각자 다른 게 아닌데요?"


"바에 들어오신 순간부터, 스스로를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두 머리가 갸우뚱거렸다. 정곡을 찌렸다는 느낌보다는, 그러고보니 왜 그랬지? 라는 느낌에 가깝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뜨며 고민하던 토머리는 왼 팔과 오른 팔을 내리고서 다시금 반쯤 박살난 카운터 앞에 앉았다.


"그러네요! 우리는 우리예요!"


"마셔보시겠습니까?"


"주세요! 그래도 행복하지 않으면 세모로 만들 거예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바텐더를 두고서 토머리는 오른 팔로 잔을 받아들었다. 딱히 향이나 색을 즐기거나 할 것 없이 토머리는 남자 머리의 입을 벌리고 그대로 선라이즈를 털어넣었다.


머리가 다르다 한들 바뀌는 건 없다. 남자 머리의 입 안도 무언가 먹을 수 없게 막혀있으며, 그대로 몸에 흡수될 뿐이다. 수백 년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낸 토머리에게 그러한 기능은 필요 없으니까.


이내 선라이즈를 전부 흡수한 토머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바텐더의 말대로 선라이즈를 마셨건만 행복하지 않았다. 역시 거짓말이구나! 토머리는 다시금 웃으면서 왼 팔을 들어올렸다.


뚝.


"어?"


바텐더를 세모로 만들기 위해 내려치기 직전, 물방울 하나가 토머리의 몸을 따라 흘러내렸다. 묘한 감각에 자신의 몸을 두리번거리던 토머리는 이윽고 어깨에 난 작은 팔로 머리를 헝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대체 어디서 물이 흐르는 거지?


답답함에 입을 헤 벌린 채 작은 팔들로 몸을 더듬던 토머리는, 어느 순간에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오는 물방울을 깨달았다. 더듬더듬 물이 흘렀던 경로를 따라가니 어디서 흘렀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여성 얼굴의 머리와 남성 얼굴의 머리 둘 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 어?"


"....."


"왜 우리가 울고 있죠? 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거예요?"


"......손님, 이제 시간입니다."


"왜 그런 거예요? 대체 왜?"


"...안녕히 가십시오."


"말해 줘요. 제발요!"


바의 문이 열렸다. 도서관에서 손님이 바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보통 손님들은 적당한 시간에 바에서 나가지만, 아예 나가지 않으려는 이들은 강제로 퇴거된다. 그리고 그것에 바텐더의 의사따위는 전혀 상관없다.


토머리의 몸이 조금씩 점멸해갔다. 바텐더도 이러한 이동이 초대장의 워프 기능을 이용한 것이라는 말만 앤젤라에게 들었을 뿐이다. 순식간에 절반쯤 점멸된 토머리가 왼 팔을 깊이 허리를 숙인 바텐더에게 뻗었다.


눈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멈출 수 없으며,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채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왜----"


"......."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바텐더가 허리를 들었을 땐, 토머리는 없고 바의 문은 닫혔으며 부숴졌던 카운터도 어느 세인가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별로 당황할 일은 아니였다. 죽었던 바텐더도 아무렇지도 않게 부활시키는 곳이 도서관이니까.


이곳은 도서관이니까.


내가 손님에게 할 수 있는 건, 취하게 해서 감정을 더 격하게 만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칵테일을 내어줄 뿐이야.


그런데 그것조차 못한다면.


난 왜 존재하지?


.............




*




"사랑마을 주민은 전부 죽였습니다!"


"개체명 토머리를 거의 다 몰아붙였----"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말쿠트님! 토머리의 상태가 급변! 격한 감정이 확인되었습니다!"


"두 개의 머리 중 하나가 터져나갔습니다! 등 부분에 거대한 팔이 돋아났어요!"


"섣불리 다가가지 말고 산개해! 철저하게 말려 죽이는 거야!"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토미? 나 무서워. 어디에 있어?


-----토미, 나 아파. 몸 전체가 아파.


-----왜 답하지 않는거야? 토미, 어디에 있는 거야?


-----또 오렌지 주스를 만들어 줄게.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너도 또 그 칵테일을 만들어 줘. 또 마셔보고 싶어.


-----토미, 제발......


-----도와줘......




<예소드와 마시는 맨해튼>




피곤하다.


까만 글자가 빽빽히 들어찬 과학서의 페이지를 넘기던 예소드는 잠시 보던 페이지에 파란색 책갈피를 끼워놓고 눈을 감았다. 이 도서관의 창대한 힘은 죽은 자마저 되살려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예소드의 피로를 풀어주지는 않는다. 자살하고 되살아나면 피로가 사라질 거라고 지껄이던 앤젤라가 생각나 살짝 눈매를 부라리던 예소드는 이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의 기술과학의 층 지정사서로 존재하는 예소드는 이 층에 존재하고 들어오는 모든 기술과학의 책들을 읽고 정리해야할 의무가 있다. 다시말해 하루 일과의 절반 이상이 독서라는 소리인데, 제아무리 애독가라도 건조하게 기술에 대한 내용만 적혀 있는 두꺼운 책들을 매일 읽으라 한다면 신물이 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예소드가 책에 질린 건 아니다. 그저 몇 시간이나 작은 글씨들을 탐독하다 보면 눈이 피로할 뿐, 철두철미한 성격상 독서가 천성에 맞는 그는 지정사서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일을 끝내기 일쑤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예소드는 기술과학의 층을 한바퀴 돌아보며 잘못 꽂히거나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책들이 없는지 둘러보았다. 철저한 성격의 그이니 만약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을 리는 없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꽤나 넓은 층을 확실하게 둘러본 예소드가 다시금 책상에 앉아 책갈피가 반짝이는 과학서를 내려다보았다.


피곤하다.


오늘 들어온 책은 모두 102권이며 눈앞의 이 책이 마지막이다. 그것도 거의 다 읽어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건만,도저히 예소드는 책에 손이 가질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 자꾸만 깜빡거리고, 페이지를 넘겨야 할 오른 손이 조금씩 떨렸다. 이유모를 두통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고, 자꾸만 짜증과 신경질이 올라와 읽던 책을 난폭하게 던져버렸다.


잠시 후 조금이나마 진정한 예소드는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번째 인생이었던 기계 몸뚱아리는 피로라는 걸 몰랐다. 그 때 생긴 무리하는 습관은 지금도 고쳐지질 않았다. 말쿠트나 호드, 심지어 네짜흐까지 좀 쉬라고 진지하게 조언할 정도로 지금 예소드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리고 예소드는 쉬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역으로 짜증을 성토하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 그 탓에 호드가 눈물을 보여 말쿠트와 부딪힐 뻔했으나, 네짜흐가 어떻게든 잘 중재한 덕분에 서로 감정의 골이 남은 채로 헤어졌다.


피곤하다.


휴식이라, 얼토당치도 않은 소리다. 해야할 일, 앞으로 할 일이 산더미인데 쉬면서 시간을 보내다니 어불성설이다.


예소드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니라 피로를 풀 방법 뿐이었다. 허나 네짜흐의 조언대로 잠을 자려 해도 피로감에 불면증이 생겼는지 잠을 잘 수 없었으며, 호드처럼 다른 사서들과의 교류는 예소드의 피로감이 낳는 까칠함 때문에 더욱 스트레스를 줄 뿐이었고, 그렇다고 말쿠트처럼 일을 하며 잊을 수 있는 정도는 진작에 넘었다.


네짜흐는 편하겠군. 힘들면 술이나 마시고 자면 되니까.


아니 잠깐.


술?


예소드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술, 술이라. 첫번째 삶이던 가브리엘에서도, 두번째 삶의 기계 몸뚱아리에서도,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술과 같은 주류는 마실 생각도 없었으며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던 그였건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술은 분명 정신을 흐리게 하며 스스로를 깎아먹는 액체지만, 역으로 그 탓에 스트레스나 피로를 풀기에는 제격이다. 애초에 술의 용도는 의료와 피로 해결의 분야였으니, 그저 좋지 않기만 한 액체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술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네짜흐에게 부탁하는 건 논외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네짜흐는 술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전부 마셔버리니 나눠받을 수가 없다. 앤젤라에게 부탁하면 주겠지만, 그 여자와 말을 섞을 바에야 차라리 이 피로를 영원히 느끼는 편이 낫다.


"....그곳 밖에는 없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예소드는 이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장소라면 도서관의 안밖에서 유명하다. 그가 물리적으로 접대하는 손님 중 상당수가 그곳의 이야기를 해대니 관심이 전혀 없어도 알 수 밖에 없었다.


앤젤라가 독단으로 만들었으며, 말쿠트와 네짜흐가 애용하고, 호드가 가끔 찾아갔으며 티페리트는 출입이 금지되고 게부라와 헤세드가 자주 찾는 곳.


그리고 그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었으며, 갈 생각도 없었던 곳.


그 작은 공간을 향해 예소드는 발길을 돌렸다.




*




딸랑.


"어서오십시오, 손......이거, 상당히 의외인 손님이시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와인의 향이 피어나오는 고급스런 나무 문을 열고 들어온 예소드는 다소 삐딱한 표정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사이 내부를 살짝 둘러보지만, 보면 볼 수록 작고 협소한 공간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벽과 바닥의 고풍스런 장식이나 잔잔한 재즈 음악, 밝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두운 건 또 아닌 미묘한 조명까지. 누군가는 훌륭한 분위기라 생각하겠지만, 예소드에게는 별 의미없는 것들 뿐이었다.


예소드는 남겨두고 온 일을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피로를 풀고 남은 일과 책의 정리, 손님의 접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의식적으로 빨라졌다.


유일한 조명이 켜진 곳, 카운터까지 걸어간 예소드는 의자 하나에 걸터앉았다. 잠시 그러고 있자니 차가운 얼음물 하나가 그의 앞에 놓인다. 얼음물을 건낸 손을 따라가보면, 유일하게 입만이 보여 웃음짓고 있는 존재가 있다.


예소드는 그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바텐더."


"말씀하십시오."


그래, 이곳은 바(Bar)다. 도서관에 웬 바? 라고 물어도 황당한 건 예소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앤젤라가 강하게 밀어붙여 멋대로 만들었고, 별로 예소드에게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기에 무관심했었다.


아무튼, 그런 바의 카운터에 서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바텐더 뿐이다. 비록 세련된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흰색 후드가 얼굴의 대부분을 가려 입만이 겨우 보이는 이상한 존재이지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예의가 스며든 몸가짐은 상대가 누구라도 호감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듣기로는 바텐더는 원래 초대장을 받고 온 손님이라고 했다. 그런 그의 기억의 대부분을 빼앗고 바텐더로써 일하게 한 건 앤젤라였다. 그 여자에게 휘둘리는 불쌍한 처지에 정돈된 옷매무새, 그리고 예의바른 태도는 예소드에게 긍정적으로 보일 테지만, 이미 피로감이 한계에 가까운 예소드는 바텐더가 친절하게 건낸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다소 난폭하게 내려놓았다.


깡. 살짝 금이 간 유리잔을 변함없는 미소로 가져간 바텐더가 예소드를 바라보았다. 예소드는 그답지 않게 표정을 찡그리면서 피로감과 그에서 비롯된 짜증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었다.


"...긴 말은 않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예소드님."


"스트레스와 피로 해소를 위한 술을 주십시오. 맛이나 외형은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칵테일이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냥 달라고 하면 빨리 주시기나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예소드의 짜증 섞인 말투에 조용히 허리를 숙인 바텐더가 그의 뒤편에 수백 가지 술병들이 진열된 찬장을 열어젖혔다. 바텐더가 술병들을 둘러보며 병들을 꺼내는 사이, 예소드는 더욱 심해지는 두통에 고개를 숙였다.


원래 예소드가 말 붙이기 힘든 성격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 탓이다. 예소드는 예소드대로 완벽하게 일을 해내는 사서나 가끔 말상대가 되어주는 롤랑에게 그 나름의 호의를 보일 정도로 마냥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조금 전 바텐더에게 다소 말을 심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려 했으나, 그 직후 몰려오는 이유 없는 짜증과 두통은 예소드를 더욱 한계로 몰아갔다. 상대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짜증나고 거슬리며 격해진다. 사과하려는 생각은 어느세 사라지고, 빨리 술을 내오지 않는 바텐더에게의 짜증이 솟구쳤다.


"......."


예소드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사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바텐더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윽고 찬장에서 3종류의 술병을 꺼내들었다.


버번 위스키(Bourbon Whiskey), 스위트 베르무트(Sweet Vermouth), 앙고스투라 비터스(Angostura Bitters).


그리고 얼음이 들어간 또 다른 유리잔을 준비한 바텐더가 가장 먼저 버번 위스키의 마개를 땄다.


"아직도 멀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빨리 좀 하십시오."


투명한 유리잔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버번 위스키를 부어넣는다. 보리를 증류시켜 만드는 위스키(Whiskey) 중에서도 특이하게 옥수수를 이용해 만드는 위스키가 버번 위스키다. 원래 위스키는 보리를 이용해 만드는 몰트 위스키(Malt Whiskey)와 그 외의 곡물을 이용해 만드는 그레인 위스키(Grain Whiskey)로 나뉘는데, 옥수수로 만드는 버번 위스키는 당연히 그레인 위스키에 속한다.


과거에 있었던 버번(Bourbon)이란 동네에서 수확한 옥수수를 팔 방법이 없어 위스키를 만들었던 것에서 유래하였으나, 정작 버번은 그 후 금주령이 시행되어 술을 만들 수 없었기에 버번 위스키의 제조법을 이어받은 다른 곳에서 주로 생산된다고 한다.


가장 낮은 도수여도 40도에 달하는 강렬한 위스키가 알코올 향을 풍기며 잔을 채워나갔다. 버번 위스키가 기주(칵테일의 주 재료가 되는 술)인 칵테일이기에 45ml 가량 따라넣는 게 베스트이다. 정량대로 위스키가 들어간 후에, 바텐더는 버번 위스키의 마개를 닫고 이번에는 스위트 베르무트를 집어들었다.


"그냥 대충 만드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으니 말할 시간에 빨리 만들기나 하시길 추천드립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란 말입니다."


"...네."


스위트 베르무트(Sweet Vermouth). 와인에 다른 술이나 당분, 향료 등을 섞어 증류시키는 강화 포도주이다. 본래 단맛을 내는 포도주이지만 씁쓸하게 만든다면 입이 쪼그라들 정도로 쓰게 만들 수도 있는 술이기에 보통 베르무트를 마신다 하면 적절히 달콤한 스위트 베르무트를 즐기는 이가 많다. 물론 그와 반대로 씁쓸함이 강조된 드라이 베르무트(Dry Vermouth)를 즐기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살짝 뿌옇지만 투명하긴 투명한 베르무트를 기울이면, 황금빛의 버번 위스키와 만나 격렬히 소용돌이친다. 바텐더에게 중요한 도구인 셰이커를 사용하지 않는 칵테일이니만큼 다소 격하게 부어넣어도 큰 문제는 없다.


재빨리 스위트 베르무트를 따라낸 바텐더는 예소드가 눈치를 주기 전에 마지막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멋들어진 글씨로 '앙고스투라 비터스(Angostura Bitters)'라 적힌 술병이 흔들렸다.


"이제 거의 다 되었습니다, 예소드님."


"........"


칵테일의 마지막 재료는 앙고스투라 비터스, 의료용으로 쓰이던 술인 비터스(Bitters)의 일종이다. 이름이 이름이기에 쓴맛이 날 것이라 생각한 이들도 많으나, 어디까지나 대명사일 뿐 실제로 모든 비터스가 쓴맛이 나는 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앙고스투라 비터스는 원래 약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주정에 용담 뿌리와 여러 약초들을 넣어 만들어졌다. 딸꾹질과 복통에 실제로 효과가 있으며, 농축액이기에 물에 희석하거나 칵테일에 향을 내는 정도로 쓰인다.


다소 찐득한 느낌의 앙고스투라 비터스를 1 대시(Dash)만큼 넣는다. 대시란 몇 방울만 넣는 양을 뜻하며, 보통 비터스 병에는 특이하게 작은 튜브가 존재하는데, 비터스를 한 번 가볍게 흔들고 나서 기울이면 비터스가 튜브를 따라 몇 방울 정도만 흘러나오게 된다. 대략적으로 티스푼의 5분의 1 정도의 양이다.


버번 위스키와 스위트 베르무트, 앙고스투라 비터스가 한 잔에 모여 격렬히 섞이고 회전한다. 마치 흰 도화지에 물감을 뿌리듯 앙고스투라 비터스는 느리고도 부드럽게 잔 전체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비터스가 버번 위스키와 스위트 베르무트의 색을 해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양만 들어간 비터스는 금새 칵테일에 녹아들어 찾을 수 없게 된다.


모든 재료를 넣었다면 마지막 공정만 남았다. 카운터 안쪽에서 은빛의 투명한 막대를 꺼낸 바텐더는 세 종류의 술이 들어간 잔을 그대로 휘저었다. 스터(Stir)라 불리는 이 기법으로 문자 그대로 칵테일을 만들어내기 위해 섞는 과정을 뜻한다. 단순히 마구 섞는 게 아니라, 너무 격하게 섞여 향이 날아가거나 제대로 섞이지 않는 일이 없게 섬세하고도 부드럽게 젓는 것이다.


얼음이 살짝 녹을 정도로 저었다면 그걸로 끝이다. 바텐더가 완성된 칵테일을 예소드에게 건내자, 그제서야 고개를 든 예소드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다소 거칠게 잔을 받아들었다.


"맨해튼(Manhattan)입니다."


"알겠습니다."


바텐더의 말을 들은 채 만 채한 예소드가 맨해튼을 한 손에 쥐고서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그대로 입에 머금었다. 그의 생각은 어서 피로를 해소하고 나서 빨리 바를 나가 남은 일을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칵테일의 맛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짜증내려던 예소드는.


".......예소드님?"


"이건."


"예?"


"이건, 뭡니까."


흔들리는 눈동자로 맨해튼을 노려보던 예소드는 칵테일과 바텐더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맨해튼을 한 모금 삼켰다.


처음 칵테일이 혀에 닿으면, 버번 위스키의 강렬한 알코올이 그대로 덮쳐온다. 헛기침이 나올 정도로 강한 도수에 헤매이고 있자면 군데군데 스위트 베르무트의 달콤함과 앙고스투라 비터스의 톡 쏘는 향이 조금씩 느껴진다. 마치 사막에서 물 한모금을 찾듯이 알코올의 씁쓸함에서 느낀 달콤함과 톡 쏘는 향을 중독된 것처럼 계속 찾게 된다.


입에 머금고 있자면 알코올 특유의 맛과 쓴맛이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쓴 맛은 아무리 혀를 굴리고 단맛과 향으로 무마시켜해도 끊임없이 파도치며 혀를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맛을 뽐낸다.


그리고 마침내 못참을 것 같아 삼키면, 놀랍도록 깔끔하게 모든 맛이 사라져간다. 그토록 날뛰던 쓴맛도, 알코올도, 달콤함도 모두 입에서 없어지고 비터스의 톡 쏘는 향만이 조금 남아 여운과 함께 어서 다음 잔을 부추긴다.


그래, 이건.


"...맛있어."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으며, 칵테일에도 완전히 문외한이며 네짜흐가 풍기는 술냄새마저 질색하던 예소드였지만.


이 한 잔의 칵테일은 도저히 거부하거나 짜증낼 수 없는 맛이었다. 이렇게나 스트레이트로 맛있으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떠십니까?"


".....어떠냐니요."


"이제 좀 진정하셨습니까?"


"......!"


이 맨해튼으로 예소드의 피로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눈은 충혈되어 있으며, 손을 바들바들 떨리고, 몸이 피로에 쩔어 두통이 이어졌으며 전신이 삐걱거렸다. 오히려 강한 알코올 때문에 피로가 늘었으면 늘었지, 피로를 풀려는 예소드의 목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렇군요."


이유 없이 무한히 솟아오르던 짜증이 사라졌다.


무언가를 볼 때마다 생기던 신경질이 없어졌다.


자꾸만 충동적으로 일어나던 격한 감정이 가라앉았다.


단순히 '맛있다' 라는 생각이 예소드를 집어삼킨고서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짜증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와도 맨해튼을 다시 머금으면 그 모든 것이 날아갔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피로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지만, 예소드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피로는 여전하지만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반쯤 마신 맨해튼을 내려보던 예소드는 이윽고 복잡한 표정으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피로를 풀어주는 칵테일이 아닌, 다른 칵테일을 주었는지 말입니다."


"......"


"설마 저의 상태를 고려해서 우선 진정시키는 칵테일을 낸 건-----"


"예소드님, 하나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예소드가 바텐더를 마주보았다. 여전히 입 만이 보여 미소짓고 있었다.


처음과 다를 바 없는 미소였지만, 예소드는 그것이 다른 웃음이라고 느꼈다.


"전 심리상담가나 치료사가 아닙니다. 전 그저 미력하지만 칵테일을 만드는 재주가 있는 바텐더에 불과할 뿐입니다."


"........"


"저는 예소드님께서 어째서 짜증나셨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짜증을 풀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사람이라면 짜증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앤젤라 님도 자주 그러시니까요."


"........"


"다만."


"...다만?"


"전 바텐더로써 칵테일을 만들어 드릴 뿐입니다. 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만족하실 때까지요."


"......."


버번 위스키, 스위트 베르무트, 앙고스투라 비터스.


다시금 멋들어진 맨해튼을 만들어낸 바텐더가 새로운 한 잔을 예소드에게 내밀었다. 예소드는 망설였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가 바텐더에게 내뱉은 험한 말과 태도가 생각나 죄책감처럼 그를 옭아매었기 때문이었다.


바텐더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예소드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한때 독사라 불렸을 만큼 냉철하고 철저하지만, 그만큼 스스로에게도 엄격했기에 예소드는 자신이 행한 잘못이 기억날 때마다 짓눌렸다.


차마 새로운 맨해튼을 받지 못하고, 고개를 점점 내리까고 있는 그에게 바텐더가 오히려 더욱 다가왔다.


"....그래요, 굳이 첨언하자면."


".....?"


"이곳은 바(Bar)입니다. 술을 즐기고, 술을 마시는 곳. 이곳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하루의 고된 일을 끝내고, 한 잔의 술과 칵테일로 하루를 끝마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자는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손님께서 칵테일에 만족하고 최고의 맛을 내드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건 예소드님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죠."


"......."


"맨해튼을 내어드린 건, 그것이 제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칵테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소드님께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칵테일을 원하셨죠. 그건 다르게 말하면, 휴식을 원하신다는 말씀이시지 않습니까."


"......."


"사람은 쉬면서 한숨을 돌려야 사람이니까요. 더 여쭈어 보실 것이 있으십니까?"


휴식이라. 예소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이내 조금씩 떴다. 피로는 여전했고, 죄책감도 그대로였으며, 그를 걱정했던 지정사서들에게 내뱉었던 말 또한 전부 기억났다. 그리고 눈앞의 바텐더에게 했던 말도, 결례도 모두 그의 고개를 떨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소드는 고개를 들었다.


"하나 있군요."


피로도, 죄책감도, 스스로의 잘못도 해결되지 않았다. 예소드는 말쿠트와 호드, 네짜흐와 바텐더에게 사과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그 이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히는 습관을 고치려 노력해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고집스런 성격도 굽혀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았다. 그 모두를 해결하다가 오히려 더 피로해질 가능성도 높았다.


거기에 그 모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예소드는 잘 알고 있었다. 맨해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 지체할 틈 없이, 예소드는 잔에 꽉 찬 맨해튼을 단숨에 전부 들이켰다.


그러니까.


이건 필요한 휴식이다.


"바텐더."


"네."


"바텐더, 제가 했던 모든 말에 대해 사과하겠습니다. 무리한 주문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다음 날이면 예소드는 피로를 풀 방법을 찾아야 하며, 동료들과 바텐더에게 사과해야 하고, 남은 일을 끝내야 한다. 그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미루려 들지 않았다. 그것의 그의 의무였으니까.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 염치없지만.....다음 잔은 무엇입니까?"


".....!"


"처음 해보는 휴식입니다. 바텐더, 다음 칵테일을 기대하겠습니다."


"....걱정 마시길."




*




"네짜흐, 언제나 말하지 않습니까? 술병은 제대로 정리하십시오."


"하하....예소드, 어때? 너도 한 잔 할래?"


"네, 네짜흐! 난 예소드의 독설은 사양이라고."


"뭐 어때요 롤랑, 어차피----"


"----그것도 나쁘진 않겠죠."


".....어?"


".....엥?"


"다만 지금은 맡은 일을 해야할 시간입니다. 휴식은 그 후로 하죠. 여러 칵테일을 마셔봤어도 맨해튼이 가장 좋았지만, 맥주도 나쁘지 않을 테죠."


"예, 예소드?"


"롤랑도 오십시오. 최근 격무이지 않으셨습니까. 휴식은 필요한 법입니다."


"........"


"......."


"먼저 가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일이 끝나면 오십시오."


"......."


".....세상에서 가장 휴식이랑 관련 없을 사람에게 들은 말이라 더욱 충격적이네. 그래도 사람이라면 쉬긴 해야지."


"......."


"네짜흐?"


"......"


"누운 채로 기절했어...."




<청소부와 마시는 TNT>




"239183718."


"291839? 763902. 374!"


"9437304.....4827..."


"6251. 837204, 48918273."


"349......09213......652193...."


"8172539. 192837!"


"1273629....."




*




바텐더는 귀를 기울이다가, 어떻게든 생각해보다가, 천천히 해석해보려다가, 마침내 포기하고서 두 손을 들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바텐더는 고개를 푹 숙였다.


"50192817. 28101826, 182716."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도저히 말을 알아들을 수 없군요."


앤젤라에게 대부분의 기억을 빼앗긴 탓에 도시에서의 기억은 없지만, 바텐더는 나름 손님을 대접하는 데 도가 텄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아무렴 그는 도서관에서 여러 해결사들을 맞이했으며, 뒷골목의 조직들도 만났고,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봐줄 수 없는 괴물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간군상을 보아왔다. 근거없는 자신감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번만은 바텐더도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칵테일을 모르는 손님이야 일상다반사고, 하다못해 '무언가를 마신다' 는 말 자체를 모르는 손님조차 어떻게든 접대한 그였지만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면 답이 없다.


"....일단, 이쪽의 말은 알아들으실 수 있으신지요?"


"1928. 172619."


".....고개를 끄덕이시니 긍정의 뜻이라 받아들이겠습니다."


"8761920."


바텐더의 말에 이번의 손님---- 남색 계통의 붕대로 전신을 꽁꽁 둘러매고, 등 뒤의 수상한 액체통과 연결된 방독면을 쓴 청소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으로 바에 들어온 청소부는 모두 셋이었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고개를 움직이거나 갈고리로 된 손을 움직이거나 하는 식으로 바텐더에게 답하고 있었다.


.....답하고 있는 거겠지?


청소부, 청소부라. 기억이 거의 사라진 바텐더지만 그 이름은 알고 있다.


이름 그대로 도시의 청소부이자, 밤의 시간을 주름잡는 존재들. 특정한 시간만 되면 어디선가 검은 물결처럼 엄청난 숫자가 나타나 건물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집 안에 있다면 안전하지만, 거리에 있다면 그것이 누구라도 청소부에게 청소당할 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시의 이야기. 이제는 도시악몽이 된 도서관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청소부는 자체적으로 곤란한 점이 하나 더 있다.


"291725, 29273!"


"902817."


"64827119. 3816381! 73462, 3918."


"....대충 이야기가 되신 것 같군요."


그건, 저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는 것.


청소부의 언어는 도시에서도 극소수만이 통역할 수 있다. 심지어 그렇게 통역된 말조차 단어 단위이기 때문에 사실상 청소부들과의 의사소통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에는 바텐더도 예외가 아니기에, 처음에는 어떻게든 억양이나 자주 나오는 발음 등으로 해석하려 애쓴 바텐더였지만 숫자로 말한다는 상식을 초월한 언어에 두 손 두 발 전부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게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청소부들도 알고 있는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등으로 바텐더에게 바디랭귀지를 하고 있지만, 갑자기 방독면을 움찔거리며 갈고리를 들어올려 허공에 휘두르는 건 널 찢어버리겠다는 뜻인지 여기 먼지가 많네요 ㅎㅎ 란 뜻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글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연필과 종이를 청소부들에게 보여주자 그들이 고개를 저으며 갈고리로 된 두 손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참히 실패했다.


"음...그럼....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33716."


"491888162."


"200....12341...."


"아....."


노답이네. 바텐더가 체념의 미소를 지었다. 토머리 때는 어떻게든 말로 기호를 알아낼 수라도 있었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청소부들이 지금 어떻게 바텐더를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나는가 토의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칵테일 주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바텐더의 고충을 이해했는지, 허탈하게 웃는 바텐더를 보던 청소부 중 한 명이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1877619862."


"...네?"


그러고선, 갑작스럽게 오른팔의 갈고리를 들어 바텐더 쪽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죽는 건가 생각했던 바텐더였지만, 청소부가 그 상태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자 낌새를 알아차린 바텐더가 청소부를 유심히 관찰했다.


무언가 전하려는 뜻이 있다.


....그래, 손님의 의욕이 있는데 바텐더가 포기할 수는 없다. 바텐더는 마음을 다잡고 청소부를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카운터에서 잠시 움직였다.


그러자, 청소부의 갈고리도 바텐더를 따라왔다.


"음?"


바텐더가 요리조리 움직이면, 갈고리도 그 움직임을 따라 요리조리 움직인다. 이쯤되면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하다. 손님에게는 보이지 않을 눈을 빛낸 바텐더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건....'바텐더'를 뜻하는 건가요?"


"99182!"


깡! 깡! 깡!


바텐더가 정답을 맞혔는지 청소부 세 명이서 폴짝폴짝 뛰면서 두 팔의 갈고리를 부딪히고 때었다를 반복했다. 아마 박수를 치는 것 같았으나, 듣기 싫은 소음이 한동안 바를 울렸다.


아무튼 '바텐더'까지는 알아냈다. 대체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이쯤되니 궁금증이 일은 바텐더가 청소부를 바라보자, 일어났던 청소부가 이번에도 전할 뜻이 있는지 바텐더를 마주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고 잠깐이 지나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청소부가 오른 팔의 갈고리를 천천히 들어올리고---- 그대로 아래쪽으로 그어내렸다.


"1181."


".....예?"


그게 끝이었다. 대체 뭐지 젠장.


바텐더가 영문을 모른 채 멍때리고 있자, 청소부가 다시 한 번 갈고리를 올리다니 강조하듯 빠르게 그어내린다. 그리고 그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바텐더는 청소부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1'? '일'인가요?"


"77612!"


어찌어찌 답을 말했으나, 이번에는 동작이 달랐다. 두 갈고리를 서로 가까이 한 채 회전시켰다. 다시금 갈고리를 한 번 그어내리고, 두 갈고리를 톱니처럼 회전시킨다.


"회전?"


"2736!"


"톱니바퀴 1개?"


"2736!"


"....체인지?"


"55! 7618!"


".....1을 체인지하라구요? 그럼....원(one)?"


"99182!"


'원'이 정답이었는지 청소부는 다시금 박수(?)를 치며 폴짝 폴짝 뛰어다녔다. 눈에 띄게 기뻐하는 그들을 보며, 바텐더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여기가 바가 아니라 가족오락관 같았지만, 이미 일련의 바디랭귀지를 거치며 바텐더는 청소부의 뜻을 어느 정도 파악한 후였다. '바텐더'에 '원'. 이대로면 손님이 원하는 주문을 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자, 다음은 무엇이냐!


자신감에 가득 찬 바텐더가 미소를 짓자, 처음 일어났던 청소부가 앉아있는 다른 청소부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29188771."


"6382....36819...?"


"01927, 172!"


"8271...."


그러자, 가장 거대한 몸집의 청소부가 무언가 의욕 없어 보이는 청소부를 일으키더니 먼저 서있던 청소부와 합류하여 일렬로 나란히 섰다. 갑자기 왜 일어났는가 바텐더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청소부들이 갑자기 바닥에 누웠다.


아예 드러누웠다.


".....!?"


가장 키가 작고 의욕없던 청소부가 가장 위쪽에서 가로 방향으로 누웠으며, 가장 큰 청소부가 바로 아래에서 작은 청소부와 마찬가지로 'ㅡ' 모양처럼 누웠고, 마지막 청소부는 자신의 몸을 말아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청소부들이기에 가능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협동이었다!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바텐더가 식은땀을 흘렸다. 제발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이 바닥에 누운 청소부들을 향해 고개를 내렸지만, 그들은 꼿꼿하게 누워 무언가 기대하는(?) 것만 같이 바텐더를 마주바라볼 뿐이었다.


처음으로 미소를 무너뜨린 바텐더는 크게 심호흡한 후, 다시 천천히 누워있는 청소부를 보았다.


"22...."


가로 방향으로 일자로 누운 작은 청소부가 하나.


"1872..."


작은 청소부와 수평 방향으로 누운 큰 청소부가 하나.


"98! 4172836."


마치 조용히 하라는 듯 소리치는 동그라미 모양을 한 청소부가 하나.


응, 전혀 모르겠다. 조졌네.


바텐더는 순간 차올랐던 자신감따위 전부 던져버린채, 허탈하게 웃으며 주저앉았다.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는 청소부 셋만이 바닥에 누운 채로 기다릴 뿐이었다.



...................................................................


........................................................


.............................................


...................................


......................


............


.......


....




"후, 그러니까 지금까지 했던 걸 전부 종합해보겠습니다."


"9182."


"09172566."


"3817....34..."


"바텐더, 원하는 칵테일로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보시다시피 맛을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탄산을 감지할 수는 있으니 탄산이 들어간 칵테일로 부탁드립니다....맞나요?"


"391826!"


"3482719! 482716!"


"391826...!"


"해, 해냈어! 드디어 해냈어...!"


바텐더는 눈물을 흘리며 세 명의 청소부와 격하게 끌어안았다. 붕대로 감긴 그들의 몸에서 역한 체취가 흘러나왔지만 그런 것 따위 기쁨에 가득 찬 바텐더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청소부들도 방독면의 눈 부분에서 물을 찔끔 흘리며 갈고리로 바텐더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청소부와 바텐더가 저 길다면 긴 문장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심대한 노력을 했는지는 감히 글로써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처음 청소부들이 했던 동작이 'ㅎ'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걸 겨우 알아차린 후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땀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만 서술할 수 있겠다.


마침내 이 길고 긴 싸움에서 승리한 거야...!


감격에 벅찬 바텐더가 진정한 건 그 후로 10분이나 지난 후였다. 본래라면 진작 접대를 위해 바에서 내보내졌을 시간이지만, 웬일인지 청소부들은 꽤 오랜 시간동안 바에 머물 수 있었다. 다만 감격과 기쁨에 삼켜진 바텐더는 그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려도 별반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서도.


"흠, 흠. 손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문 받았으니 금방 만들어드리겠습니다."


"333....1827."


"9172511!"


"098719."


맛이나 향은 크게 상관없고, 탄산이 있는 칵테일. 즉 토닉 워터나 라거 맥주 등이 들어간 칵테일을 우선 생각해내면 된다. 금새 수십 가지가 넘는 레시피를 떠올린 바텐더는 그 중에서 가장 자신있는 칵테일 하나를 골라냈다.


청소부들은 아직도 흥분에 겨웠는지 서로 갈고리를 부딪히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 사이 바텐더는 인고의 시간 후 드디어 찬장을 열고 데킬라(Tequlia)와 토닉 워터(Tonic Water), 마지막으로 냉장고에서 레몬(Lemon) 하나를 꺼냈다.


가장 먼저, 둥글게 깎은 얼음 몇 개를 집어넣은 유리잔에 데킬라를 붓는다. 데킬라는 흰색의 블랑코(Blanco)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이왕이면 호박색의 레포사도(Reposado)를 사용하는 게 좋다.


블랑코와 레포사도는 데킬라의 등급으로, 블랑코는 갓 정제한 데킬라를, 레포사도는 몇개월간 숙성되어 호박색을 띄는 데킬라를 뜻한다. 당연하게도 갓 만든 블랑코가 가장 독하며, 숙성될 수록 데킬라의 독함을 조금씩 사라지고 부드러운 맛이 생겨난다.


레포사도 등급의 데킬라를 대략 45ml 정도만 집어넣는다. 강한 맛은 탄산수인 토닉 워터가 해결해 줄 것이므로, 레포사도 등급의 데킬라가 이 칵테일에 잘 어울린다.


그 후에는 토닉 워터를 대략 자신이 원하는 정도로 넣는다. 많이 들어갈수록 양도 많아지지만, 데킬라의 맛이 옅어지므로 여러 번 마셔보면서 본인의 취향에 따라 넣는 게 가장 좋다. 굳이 평균적으로 적절한 맛을 내는 용량을 이야기한다 하면, 잔 하나가 찰 정도로 넣어도 별 문제없다.


마지막으로 레몬 하나를 착즙기로 짜서 즙을 넣어주면 완성이다. 실수로라도 씨가 들어가면 외관이 좀 안좋아지므로, 어디까지나 즙만 들어갈 수 있도록 신경써야 한다. 즙까지 전부 넣었다면 막대로 잘 섞어주자. 데킬라와 토닉 워터, 레몬즙 전부 무난히 섞여들어가는 것들이므로 초심자도 간단히 섞을 수 있다.


정말 간단한 칵테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정말 많이 오해받는 칵테일이기도 하다.


"주문하신 TNT 나왔습니다."


"281927."


"9910....8877."


"27152.....3711...."


TNT. 게임 등 여러 매체로 대중에게 흔히 알려진 이름이며, 저게 칵테일의 이름이라면 여러모로 기피하게 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폭발물'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니셜이기에, 칵테일 또한 그 이름에 걸맞는 강렬하고도 독한 맛을 낸다!


"......1918?"


"2718! 37192638! 881192611"


"....3810. 126391......2918."


----라고, 대부분의 칵테일 초심자들이 오해하는 칵테일이다.


사실 칵테일 이름의 TNT는 그 유명한 폭발물이 아니라, Tequlia and Tonic Water를 줄여 TNT라 부르는 것이다. 본래는 진 토닉과 비슷한 상쾌한 맛의 칵테일로써, 레몬만 아니였다면 데킬라 토닉이라고 불려도 손색없는 칵테일이다. 처음 이름을 지은 바텐더는 분명 여러모로 노리는 지은 이름이겠지만.


데킬라와 함께 토닉 워커가 아낌없이 들어가므로, 탄산을 즐기는 주당이라면 한 번쯤은 마셔볼 가치가 있는 칵테일이다. 만드는 법이 간단한 만큼, 진 토닉과 같이 맛에서 바텐더의 실력이 판가름나기에 더더욱.


아무튼간에 바텐더로써도 수없이 연습해본, 그에게 가장 자신있는 칵테일 중 하나이다. 이거라면 분명 만족할 것이다. 바텐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운 채 청소부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4333.....1928319."


"....2817?"


"2817."


"491028.....772615. 29102836, 381726. 4910208, 37152."


"2817....."


".....?"


이 분위기는 또 뭐여 시벌.


TNT를 반쯤 마신 청소부 셋 중 가장 작은 청소부가 무언가 아련한 눈빛으로 TNT를 쳐다보더니 곧 천장을 바라보면서 갈고리를 힘없이 들어올렸다. 다른 두 청소부는 굉장히 진지하게 그 청소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언가 심각한 분위기였다. 뉘앙스만 보면 TNT에 얽힌 추억?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작은 청소부는 이내 남은 TNT를 전부 마셔버리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서는 바텐더를 보더니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길래, 바텐더도 어영부영 같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2817!"


".....19271, 1826394. 0019273.....34."


"......예? 네?"


".....2817."


".......7716233. 454--- 18271."



----38172.


----1927319?


----29182, 38111.


----00191! 371.


----.....312.


----.....9812.



"333....1973."



그러고서는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 서더니 작별 인사를 하듯 오른 팔 갈고리만을 들어 흔들어 주면서 먼저 바의 문을 열고 나갔다. 남은 청소부는 아련한 분위기와 말투로 작은 청소부가 나간 문을 향해 갈고리를 뻗었지만, 매정하게도 문은 먼저 닫혀버렸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깡! 남은 두 청소부 중 가장 큰 청소부가 마치 분하다는 듯 카운터를 갈고리로 거칠게 내려치며 한 갈고리로 방독면을 감쌌다. 그러자 다른 청소부가 그 청소부의 등을 갈고리로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두 청소부는 그렇게 있더니, 곧 반만 남아있던 TNT를 마저 마시고서 먼저 나간 청소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1928! 49102! 38166122!"


"019263, 18261!"


".....어, 네. 예."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중간 사이즈의 청소부가 뒤를 돌아봐 바텐더를 바라보더니 갈고리를 들어올리고서 허공에 마구 휘저었다.


그리고 웃고서 나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청소부들은 행복했을까.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리고 바텐더는 이내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




"....바텐더."


"예, 앤젤라님."


"......원래는 내가 이런 말을 하진 않지만..."


"앤젤라님?"

"오늘은 잘 했어. 그 청소부도....이제 떨쳐버렸겠지."


"....예?"


"흔히 있는 싸구려 이야기라 해도, 가끔은 나쁘지 않네. 나도 점점 인간에 가까워진다는 증표일까."


"네? 앤젤라님?"


"롤랑도 살짝 감동해서 감상에 젖을 정도였는데, 도시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가 있구나."


"......어."


"....어때? 바텐더,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은 넌 어땠어?"


"........음, 네. 감동적인...이야기...였습니다."


"그렇구나....그래."


"......."




<시 협회와 마시는 핫 바터드 럼>




".......이제야 셀마에게 반격의 기회가 잡혔군."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니 피로도 조금은 가시는 듯 합니다. 유진 부장님, 도시악몽인 '도서관'에 돌입하여 브레멘 음악대의 책을 가지고 나오는 것. 이대로 2과의 남은 이들에게 전하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부장님, 발렌틴 말대로 전한다 하더라도 2과의 남은 인원은 정말 극소수입니다. 도시의 별도 잘 처리하던 2과가 이제는 도시악몽에 고전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남은 인원은 어떻게 되지?"


"...그나마 싸울 수 있는 인원는 저와 텐마, 유진 부장님이 유일합니다. 나머지는 이미 탈진 직전인 베테랑들과, 아직 도시악몽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신입들 뿐입니다."


"다른 사안이라면 몰라도, 나락회 조장 제거와 망각주괴 수거 때 너무 많은 이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신입들을 제외하고서 아직 칼을 쥘 수 있는 인원을 전부 부르도록."


"어째서입니까? 아무리 신입들이라지만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셀마가 처절하게 굴려서 죽이려 드는 건 나를 비롯한 2과의 수뇌부들이지, 2과 전체가 아니다. 제아무리 그놈이 남부 지부장이라도, 하다못해 6과도 아니고 2과가 통째로 증발해버린다면 협회 본부에서는 물론이고 하나 협회에서도 간섭할 수 있어. 아무튼 2과는 형식상으로라도 남아야 하니, 신입들을 데려가려 해도 셀마가 허가를 내주지 않을 거다."


"...비열한 놈. 쓸데없이 대가리는 잘 굴러가는군요."


"더 이상 뒷담을 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겠지. 15분 후 가능한 모든 인원을 부장실로 집합시키도록. 각오 단단히 해라, 아무리 도서관이 이제 막 도시악몽이 되었다 하더라도, 일체의 방심은 금한다."


"넵!"


"네!"




*




텐마는 무심코 졸음에 빠졌다가, 이내 자신의 뺨을 때리며 눈을 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충격으로는 이미 한계에 달한 지 오래인 몸뚱아리를 조금이나마 걷게 만드는 게 한계였다. 여기서 검을 휘두른다니, 자살행위에 가깝겠다고 자조하면서도 어떻게든 걷고 있자니 도서관의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융단이 눈에 들어왔다.


텐마는 순간적으로 일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리고서 저 융단에 몸을 맡겨 잠을 자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분명 편하겠지, 달콤할 거야. 어둠의 텐마가 그녀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점점 유혹에 빠져 그녀의 걸음이 멎어들 때 쯤, 어둠의 텐마에 대항하듯 빛의 텐마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래, 빛의 텐마 너라면 나에게 의지를 줄 거야! 앞서가는 유진 부장님과 동기인 발렌틴을 훔쳐보며, 텐마는 빛의 텐마에게 희망을 걸었다.


----융단에 눕는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맞아!


----당연히 이불이랑 배게로 써야지! 그래야 더 꿀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하하, 이게 빛이라고? 조졌따리 조졌네.


텐마가 자괴감에 빠져들것만 같을 때, 함께 걸어가면서 그녀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발렌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텐마를 일으켜세웠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빛과 어둠의 텐마는 역시 피곤이 만들어낸 그녀의 환상에 불과했는지 눈 녹은 듯 사라졌다.


얼마나 피곤하면 망상 속의 나에게 자괴감을 느낄까, 한숨을 내쉰 텐마는 자신만큼이나 피곤할 터인데도 늘름하게 서 있는 발렌틴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발렌틴."


"....정말 힘들었으면 차라리 이번 임무에는 쉬지 그랬어. 너 손이 떨리고 있어."


"어?......어, 그러네."


손만이 아니였다. 그녀의 팔, 다리, 그리고 눈동자에 이르기까지 몸 전체가 비명과도 같이 이미 한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당장 발렌틴과 짧게 말하는 도중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다시 생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도시악몽급 적과 전투가 가능할 리가 없다. 비틀거리는 텐마를 부축한 발렌틴은 전신에 힘이 빠져 탈진하기 직전인 그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브레멘 음악대의 책을 가지고 돌아가서, 그 망할 셀마 놈의 모가지를 따버리는 걸 부디 맡겨달라고 유진에게 간청할 생각이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서 있지만, 발렌틴도 텐마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 그녀와 다른 게 있었다면, 그에게는 아주 조금이나마 힘이 남아있었을 뿐이다.


"....발렌틴, 텐마는 어떻지?"


"도저히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좋으니 피로를 해소할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답은 하나인가."


"유진 부장님?"


"발렌틴, 이 도서관에는 그 무엇보다도 도시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공간이 있다. 어디인지 알겠지?"


"네, 물론입니다."


"원래라면 알코올을 경계하여 그나마 상태가 나은 녀석들에게 맡기려 했지만, 텐마의 정신을 일깨우는 게 먼저겠지."


"앞장서겠습니다."


"어서 가지."




*




딸랑.


유진이 말한 이질적인 공간--- 도서관의 바로 이어지는 나무 문을 열자, 그 안에서는 알코올과 나무의 향기가 쏟아지듯 흘러나와 발렌틴의 코를 자극했다. 다만 이제는 아예 정신을 잃기 직전이라 발렌틴에게 업힌 텐마는 조금 몸을 움찔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발렌틴이 유진을 업고 들어오는 사이, 먼저 발을 디딘 유진은 순수한 의미에서 감탄을 흘렸다.


방 안에 가득하지만 과하지는 않은 기분 좋은 알코올의 향, 한껏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벽지와 깨끗히 닦인 탁자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낮은 볼륨의 재즈 음악에 희미하지만 바 전체가 잘 보이는 조명까지.


술을 즐기는 애주가이기도 한 유진이 이 공간에 악감정을 품을 일은 절대 없다고 단언해도 좋았다. 유진이 바를 한 번 둘러보는 사이, 바의 카운터에 서 있던 말끔한 정장 차림의 누군가가 그들에게 깊은 겸손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어서오십시오."


"인사에 감사하지. 시 협회 2과 부장 유진이다."


"바텐더입니다. 우선 자리에 앉아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도서관의 바텐더라.


유진은 바텐더의 인사에 답하면서도 정장 차림에 얼굴 대부분을 가리는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쓴 저 정체불명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도서관이 협회가 처리할 만한 사안인 도시악몽까지 승격한 시점에서, 저 바텐더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시 협회가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도서관에 들어온 수많은 이들이 제각각의 태도로 저 바텐더를 만났다.


누군가는 바텐더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누군가는 바텐더가 보이자마자 바로 죽여버렸다.


누군가는 바텐더를 협박하려 했으며.


아예 츠바이에서는 바텐더를 납치하려 했던 시도까지 있었다 한다.


그리고.....아니, 그 놈에 대한 건 지금 생각하기 꺼려졌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바텐더는 지금 유진의 눈 앞에 입 만 보이는 미소와 함께 서 있다. 분명 몇 번이나 죽고, 공손히 대했을 손님에게 모욕당했을 저 존재는 그럼에도 미소와 겸손과 함께 절도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깊이 생각해봤자 쓸데없는 일이다. 도서관의 초대장에 '바텐더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추가된 후로는 바텐더를 죽일 수도 없었다. 무어보다도, 유진이 바텐더에게 흥미를 가진 건 다른 사실 때문이다.


먼저 자리에 앉은 유진이 바텐더에게 양해를 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보시다시피, 이 쪽 일행 중 한 명이 쓰러졌다. 치료는 바라지도 않으나, 잠시 탁자 위에서라도 누워도 되겠나?"


"그거야 문제없습니다. 다만 카운터에서 의자를 붙여 그 위에 눕게 해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탁자는 딱딱하지만 의자에는 쿠션이 달려있으니까요."


"호의에 감사를 표하지, 발렌틴."


"네!"


바텐더의 허락이 떨어지자 발렌틴은 바텐더의 말대로 카운터의 의자들을 붙여 간이 침대를 만든 후, 그 위에 텐마를 눕혔다. 상당히 불편할 테지만, 텐마는 죽은 듯 아무런 소리도 없이 의자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숨소리는 들려왔다. 벌써 몇번인지 모를 사과를 텐마에게 다시금 남기면서, 유진은 발렌틴을 자신의 옆에 앉게 하고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도서관의 책을 얻으려면 우선 이곳에서 칵테일 한 잔을 마시는 것, 맞겠지?"


"그렇습니다. 다만 이번에 손님분들은 그 외에도 일행이 있으신 모양이니, 대표격으로 오신 손님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군."


참으로 괴상한 소리라고 유진은 속으로 되내였다.


애초에 전투 전에 술을 먹이는 거야 이해할 수 있다. 적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거나, 아니면 무언가 종교적이거나 이상한 목적이 있겠지. 적의 약화를 위해 술을 대접한다니 웃길 정도였지만 정말 어떻게든 납득할 수야 있다.


그런데 들어온 이들이 많으면 특정 몇 명만 먹인다? 대체 유진은 도서관이 무슨 목적으로 손님에게 술을 제공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서관이 뜬소문이나 도시전설일 때야 술에 독이나 이상한 것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 동안 도서관에 들어온 수많은 이들이 증명하듯 이 바텐더가 내어주는 술에는 이상한 화학약품도, 독도, 약물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맛있는 칵테일 한 잔일 뿐이었다.


세상천지 어떤 멍청한 조직이 쳐들어오는 적에게 칵테일 한 잔을 대접하는가?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는 건 분명했으나, 대부분의 해결사와 조직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아무튼 칵테일보다야 도서관에서 얻는 책이 더 중요했고, 술을 마셔야 한다는 번거로운 과정을 몇 명만으로 끝낼 수 있으니 신경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당장 유진도 텐마가 거의 탈진하여 쉴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부하 몇명만을 바로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째서 도서관은 칵테일을 제공하는 것이지?"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관장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안심하고서 칵테일을 즐겨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창백한 도서관장......아무튼 상관없겠지."


그래, 아무튼 상관없다. 대체 왜 도서관이 술을 제공하냐는 괴상한 의문에 머리를 싸매는 건 도서관의 중요 정보로써 그 이유를 알아야 할 세븐 협회이지, 그녀가 아니다. 시 협회는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는게 편했다.


피로로 머리가 이상해지는 듯 했다. 평소라면 신경쓰지도 않을 정보에 과하게 생각하고 참견하다니, 유진은 새삼 자신도 맛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결국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서, 유진은 바텐더가 내민 얼음물 한 잔을 그대로 바텐더에게 밀어보냄과 동시에 얼굴을 찌뿌렸다. 잔을 밀어보낼 뿐이었는데도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피로로 몸이 한계 직전에 몰림이 분명했다. 발렌틴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떨리는 오른손 대신 그나마 힘이 들어가는 왼손으로 어떻게든 잔을 밀어내었다.


"미안하군. 호의에는 감사하지만, 지금 차가운 액체는 몸이 받질 않아. 이왕이면 칵테일도 따뜻한 것이 좋겠는데."


"....저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잔만 준비하면 될까요?"


"부탁하지."


바텐더는 유진과 발렌틴에게 내주었던 얼음물을 다시 가져오고서, 그의 뒤편에서 조명빛을 받아 오색으로 반짝이는 찬장을 열어젖혔다. 잠시 찬장에 나열된 술병들을 훝어보던 바텐더는 이내 미소와 함께 검은색 액체가 담긴 술병 하나만을 꺼내고 찬장을 닫아버렸다.


바텐더가 꺼낸 술병을 바라보던 유진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럼(Rum)?"


"말씀대로입니다. 정확히는 다크 럼(Dark Rum)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럼 중에서도 이름대로 검은색이 짙고 향이 특히나 강한 종류입니다."


두 개의 유리잔을 꺼낸 바텐더는, 이내 다크 럼의 마개를 따고서 0.5 온스(15g) 정도 잔에 부어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양이 적은 건 아닌가? 칵테일에 무지하지만 술은 즐겨 마시던 유진과 발렌틴이 서로 뭐라할 것 없이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 많지도 않은 다크 럼을 신중히 따라낸 바텐더는 카운터 안쪽에서 투명한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철제 주전자 하나를 들고 섰다. 유진과 발렌틴은 주전자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야 저렇게나 끓고 있는데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으니까.


뜨거운 물이었다.


그리고 바텐더가 유리잔에 다크 럼에 족히 8배는 될 뜨거운 물을 부어넣자,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이 마실 것이 칵테일인지, 아니면 그냥 뜨거운 물인지 진지하게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 그들의 불안이 실체화된 건, 바텐더가 이번에는 버터를 손에 들고 온 후였다.


".....아니겠지?"


설마, 아닐거야.


유진은 진지하게 바텐더가 무언가 착각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소와 함께 작게 자른 버터 1피스를 그대로 잔에 넣으려고 할 리가 없으니까. 아무튼간에 유진과 발렌틴은 저걸 마셔야 한다. 그리고 도시의 어떤 미친놈이 따뜻한 물에 버터를 넣은 액체를 마시려고 할까?


그런데 그 미친놈이 하필이면 눈앞에 있는 듯 했다!


"자, 잠깐!"


정말로 버터를 잔에 넣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황급히 발렌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이미 버터는 바텐더의 손을 떠난 뒤였다. 퐁당. 작은 소리와 함께 뜨거운 물과 다크 럼 안에 들어간 버터는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다크 럼의 검은색이 워낙 진한 탓에 버터의 누르스름한 색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맛을 상상하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이 순간만큼은 온 몸을 누르던 피로가 당황과 경악에 묻혀버릴 지경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바텐더, 이게 무슨 짓이지?"


"칵테일 제조 공정입니다."


"정말로 버터를 넣는 칵테일이 있단 말입니까? 농담이시겠지요?"


"공교롭게도 저는 진지합니다. 손님, 부디 자리에 앉아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발렌틴, 우선 자리에 앉아라."


"...네, 부장님."


이건 미친 짓이야. 발렌틴은 속으로 주억거렸다.


뭘 사람도 식재료로 사용하는 데 버터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 제육볶음으로 예를 들어 보자, 애초에 그것이 인육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23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 먹을 사람은 먹고 거부할 사람은 거부할 것이다. 인육을 이용한 음식은 누군가에게는 받여들여지거나, 혐오스럽거나 둘 중 하나니까. 굳이 인육을 좋아하는 이들을 이해해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였다.


그런데 제육볶음에 우유와 번데기를 넣고 토마토 주스로 볶아버렸다면? 그건 그저 음식물쓰레기이며 백이면 백 손사래치며 거부할 혐오식품일 뿐이다.


어떻게든 상식 선에서 이해받을 수 있는 것과, 도저히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의 차이였다.


그리고 당연히 버터를 물에 타 마시는 것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것에 속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물론입니다, 손님."


"....."


발렌틴의 우려와는 별개로, 바텐더는 설탕을 1 티스푼만큼 잔에 넣고서 이게 끝이라는 듯이 휘휘 젓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재료가 들어갔지만, 나오는 결과물은 블랙 커피와도 비슷한 칵테일(?)이었다.


유진과 발렌틴이 마음을 추스르기 전에, 바텐더는 완성된 칵테일을 그들에게 건넸다.


"핫 버터트 럼(Hot Buttered Rum)입니다."


".............고맙, 군."


"...........감사, 합니다."


왜 핫 버터드 럼일까, 그냥 핫 럼으로 해버리면 안 되나? 발렌틴은 칵테일을 받고서도 차마 입에 대지 못하고 있었다. 발렌틴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임에도 미소를 보일 뿐인 바텐더는 이 칵테일을 더욱 의뭉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잡은 잔이 조금씩 떨렸다. 이 괴상한 칵테일을 마셔야 한다는 거부감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렌틴의 피로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손발이 무심코 떨리며 심장이 쿵쾅대서 미치겠는데 이것까지 마셔야 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는지, 유진 또한 피로에 떨리는 손으로 손짓하여 한 번 냄새를 맡고서는 심각한 얼굴로 발렌틴에게 눈짓했다. 발렌틴은 금세 유진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녀의 행동은 시 협회에서 자주 사용하던 암호 중 하나였다.


'니가 먼저 마셔봐라.'


짬때리기다. 2과 부장과 2과 협회원의 넘을 수 없는 차이였다.


죽상이 된 발렌틴은 바텐더의 미소와 유진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심했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숨에 핫 버터드 럼을 입에 머금고 원샷했다. 조금이라도 그 맛을 보지 않고 빨리 삼키려던 발렌틴이었지만.


"......?"


입에 들어온 이상 혀는 어쩔 수 없이 그 맛을 보게 된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럼과 버터, 설탕을 넣어 만든다는 이 광기의 칵테일은.


맛있었다.


......?????


발렌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피로 탓에 미각이 마비됬나 싶었지만, 혀를 통해 느껴지는 맛의 파도는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외치고 있었다.


고소하다. 처음 생각난 표현이 그것이었다. 버터는 느끼함 없이 특유의 고소함이 은은히 느껴졌고, 버터의 느끼함은 다크 럼의 강한 알코올이 깔끔하게 덮어버린 후였다. 기분 좋은 알코올에 고소함이 더해지니 이 한 잔만으로 술과 안주를 동시에 먹는 느낌이었다.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 아주 조금이나마 들어간 설탕이 조금씩 단맛을 내면서 입맛을 돋구웠다. 설탕은 극소량임에도 다크 럼과 버터 사이를 훌륭히 조율해내고 있었다. 이 모든 맛들이 따뜻한 물과 함께라 몸이 뜨뜻해지고 후끈해지는 건 덤이었다.


푸하. 단번에 핫 버터드 럼을 전부 마셔버린 발렌틴이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텅 비어버린 잔에 바텐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따뜻한 것을 마셔 몸에 열기가 돌고, 덜덜 떨리던 손발도 어느세 떨림을 멎었다.


물론 피로는 여전하다. 이런 칵테일 하나로 풀릴 피로일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몸의 상태가 나아진 건 분명했다. 손발은 떨리지 않았고, 팔에 힘이 들어갔으며 눈도 조금이나마 또렷해졌다.


"부장님, 이건...."


".....정말 대단하군. 피로 회복은 덤으로 치더라도, 이렇게 순수하게 맛있는 칵테일은 처음이야."


"분에 넘은 칭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진지하게 특이점인지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칵테일을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특이점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미천한 실력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니 유진과 발렌틴은 다른 의미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핫 버터드 럼의 맛은 지금까지 그들이 마셨던 술들을 전부 비웃을 정도로 충격적이고도 환상적인 맛이었다. 이게 과연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맛인가는 뒤로 하고서, 이만한 실력을 가졌음에도 자만이나 무엇 하나 없이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바텐더는 사람인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실 바텐더는 인간이 아니라 칵테일을 만들어내는 뒤틀림이라 하는 게 납득갈 정도였다. 실제로 유진은 두꺼운 후드로 감춰진 바텐더의 얼굴을 향해 눈초리를 보냈으나, 어차피 그를 무력으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상 빠르게 단념했다.


칵테일이 정신이 많이 팔리긴 했지만, 결국 그들의 목표는 도서관에 있는 브레멘 음악대의 책이니까.


"......으......음.......발렌, 틴....?"


"텐마!? 정신이 들어? 아, 아니지. 바텐더, 여기 핫 버터드 럼 한 잔 더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여기는 리필을 부탁하지."


"아, 제 잔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




아무도 없는 바 안에서, 바텐더는 느릿하게 핫 버터드 럼 한 잔을 만들어 머금었다. 고소하고도 중후한 맛이 정말 흡족스러웠지만, 바텐더는 평소의 미소를 짓지 않았다.


이건 바텐더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칵테일이자,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주었던 칵테일이다.


다만 누구에게, 왜 이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는지는, 바텐더도 모른다. 아마 앤젤라가 가져간 바텐더의 기억 속에 있으리라. 궁금하지 않다면야 거짓말이지만, 그동안 바텐더는 기억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이 도서관에서 지냈다.


그렇지만.



'유니온 공방에서 본 적 있어, 그게 다야.........너의 그 소름돋는 미소는 잊을 수가 없더라고.'


갈고리 사무소의 태인이.



'똑똑히 잘 보세요? 청소부보다도 맛이 없을 것 같아요. 좋은 실을 뽑을 수 없어요.'


사육제가.



'...너에 대한 책이라면, 당연히 있어. 하지만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을거야.'


창백한 도서관장이.




'푸른 잔향이 너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더군......알아두어서 나쁠 건 없겠지.'


시 협회의 유진이.




".........."


'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서서히 올라오는 취기에 잊혀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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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니까 많이 쓰긴 했네


오늘 한 편 쓸 건데 아카에도 올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