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3장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지손가락 끝에 맺힌 것은 작은 핏방울이었다. 새끼손톱보다도 작고, 나무열매만큼 둥근, 붉은색의 알갱이. 파고들어진 살은 그 핏방울의 크기만큼이나 아팠다. 그럼에도 나는 울고 있었다. 이 작은 아픔이 두려워서 나 자신을 더 미워할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을 미워하는, 끔찍한 나 자신을 미워할 수 없어 내뱉지 못한 비명만이 속을 헤집어 놓았다.
“너 말이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 비명을 들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내뱉지 못했던 비명을 들은 이, 나 스스로를 내던져 버릴 것만 같았던 혐오감을 들여다본 이.
“더럽다고.”
더럽다, 라는 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쿵, 하고 울렸다. 몸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에 순간 나는 멍해지는 기분을, 그리고 목구멍과 입을 비집어 나오려는 토기를 느꼈다. 한없이 가벼운 그녀의 말투였지만 나는 그 실타래에 짓눌려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그 가벼운 말은 나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것에 얽매인 나는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디로 끌어당기는 거야? 알 수 없었다. 저 아래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말했다.
“풉…… 왜냐하면……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거든.”
‘무엇이 같은 생각이냐’는 바보 같은 질문이다,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단번에 그녀가 말하는 바를 알아챘다. 아직까지 핏방울이 맺힌 손을 붙잡은 그녀, 나의 책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그녀의 눈, 얼굴, 몸과 다시금 나와 연결된 그 손을 보고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금속이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로 이루어져있었다.
“통하는 사람끼리는 많은 게 보이는 법이지.”
손가락 끝의 붉은 과실이 팡, 하고 터지더니 그녀와 나의 손 사이에서 짓이겨졌다. 새빨간 과즙이 살결 사이의 협곡을 타고 흘러가자, 그가 남긴 작은 흔적은 곧 그녀와 나를 잇는 자그마한 샛길로 변했다.
“반가워. 난 크로머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웃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나와 크로머는 종종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크게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올라서 있는 듯 한 감각, 티 한 점 없이 그저 맑은 그곳에서 내 스스로가 따뜻함을 느꼈다.
“싱클레어, 의체 시술받는 거…… 사실 마음에 안 들지?”
응, 이라고 대답했다. 고개는 부드럽게 끄덕였다. 이는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부모님한테 솔직하게 말했다간 그들이 속상해하실 테고.”
고개를 끄덕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마저 눈치 챈 것처럼, 아니, 눈치 챈 크로머는 키득거렸다.
“내가 도와줄까? 그런 것 따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순간적으로 싹 비워져버린 머릿속에 깜짝 놀란 질문이 맴돌았다. 어떻게?
“그건 다음에 알려줄 게. 그 대신…….”
크로머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날처럼 나를 향해 몸을 기울여 그림자를 드리우고, 손을 맞잡았다. 그 날의 빨간 흔적은 이미 지워져 감각조차 남지 않았지만, 나는 그 샛길을 통해 그녀와 내가 얼굴을 마주함을 알았다. 그 날처럼, 나와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냉기 한 올 없이 더없이 따뜻한 웃음이었다.
“내가 너의 원망을 해소해 주듯이, 너도 나의 원망을 이루어 줘야 할 거야.”
…
그 날의 약속이 있었던 뒤로 시간이 흘렀다. 그 웃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있은 적도 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불안해지는 것은 나였다.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손톱을 뜯고 있다가, 손톱이 단풍으로 물들기 직전에 그녀에게 물었다. 물으려 했다.
“걱정하지 마, 싱클레어.”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알고도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불안할 뿐이었다. 그녀에게 재차 확인하고 싶었지만 언제나와 똑같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내가 어떻게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잊지 않았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안도감을 주었던 그녀의 웃음은 점점 좁아지기만 해, 결국 내가 겨우 서있을 수 있을 만한 작은 대리석 조각만이 남았다.
나는 그 위에 주저앉아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거기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더러움’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최대한 몸을 말고 말아 계속 파고들며 결국에는 귀와 입마저 파묻히고 말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시간만이 그저 느리게 흘러갔다. 그리고,
“싱클레어, 너희 집에 있는 지하실 말이야, 구경시켜줄 수 있어?”
아마, 아주 긴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질문을 듣고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 뒤에 겨우 꺼낸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우, 우리 집 지하실은 왜?”
“내가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맞다면, 그곳은 엄청난 곳과 연결되어 있거든. 꼭 확인해봐야 할 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 그리고 약간의 키득거림이 섞인 목소리였다. 이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그 오랫동안의 시간이 기억이 났다. 아주 깊은 곳까지 파고든 눈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고, 귀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입은 곧바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내가 확인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싱클레어. 저번에 했던 약속, 확실하게 지킬 수 있다고 보증할게.”
나의 반응에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아주 작고 옅었지만 다른 반응이 나왔다. 내가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은, 그녀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안함. 짓궂은 일이었지만, 나의 말은 멈출 새도 없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한 번, 생각을 좀 해볼게…….”
생각. 나는 생각을 했다. 어떤 생각이었냐고 하면 여러 가지였다. 말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고 너무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꼽아보자면, 지하실 열쇠에 대한 것이었다.
놋쇠로 만들어진 별 특징 없는 열쇠는 손가락으로는 샐 수 없는 열쇠 꾸러미에 달려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게 부딪히는 쇳소리라던가, 손에 닿는 감촉이던가는 이상하리만치 이질적이었다. 마치 심장이 맥동치는 것 같은, 살아있는 무언가를 손에 쥔 감각.
하지만 이질적임이라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히려…… 나는 이를, 원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끌리듯 그를 손에 쥐어, 지하실의 문에 꽂았다. 찰칵, 짧고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열쇠가 돌아갔다. 아래로 쭉 이어진 지하실의 계단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확 밀려와 얼굴을 덥혔다. 따뜻하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조심조심 내려가던 발걸음이 이윽고 뚜벅거리는 경쾌한 발소리로 바뀌고, 서서히 빛이 사라져 어두워져 갔지만 오히려 밝게 빛나는 두 눈이 똑바르게 정면을 응시했다. 무언가, 목이 마르다던가 하는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지도 몰랐던 환풍구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아, 그 광경은 정말이지 눈을 땔 수가 없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눈앞의 괴물들이 환풍구 저 너머에서 아른 거리고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지성이 있는 듯 보였고,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뒤틀린 듯이 보이는 것들이었다.
기묘한 감정에 몸부림치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발을 들였다. 뒤돌아서게 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기회를 걷어차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뇌리를 파고들어왔다. 기회가 무엇인지, 저 앞의 괴물이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그것이 아주 황홀한, 일생에서 이보다 대단한 무언가는 마주할 수 없다고 여기며 그 풍경에 취해있었다.
아니, 아니었다. 나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곧 그 괴물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마치 거울처럼 투명한 그 괴물의 눈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웃고 있는 나의 얼굴이었다. 차가운 금속도, 이질적인 고체도,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나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악의 세계가 나에게서 시작되었다.
…
그 뒤로 다시 시간이 지났다. 학교에 등교했고, 집으로 하교했다. 그 과정에서 크로머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선뜻 그녀에게 지하실 열쇠를 건넸다. 기억에 남았던 크로머의 불안감이 그 순간에 밀려나는가 싶더니, 크로머의 얼굴에 새로운 감정이 그려졌다.
놀람, 안도, 무엇에?
“크로머?”
크로머는 갸웃하는 나를 향해 몇 번인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열쇠를 쥔 내 손을 나에게 밀어냈다.
“아니, 괜찮아. 싱클레어, 열쇠는 이제 우리한테 필요 없거든.”
필요 없다는 말에 나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당황해서였다. 그도 그럴게, 지하실을 보고 싶다는 것은 거래였다. 내가 너의, 너가 나의 원망을 이루어주는 것. 그녀가 밀쳐낸 열쇠는 거래의 끝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네 원망은 틀림없이 이뤄질 거야, 싱클레어.”
크로머가 나의 생각을 알고 있듯, 나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서로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아 참, 싱클레어.”
몸을 돌려 멀어져가던 크로머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을 걸었다.
“이제 손톱을 물어뜯지는 않는구나?”
…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성야의 가호 아래 온 마을에 종소리와 기쁨에 가득 차 있을 때였다. 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나는 희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나를 맞이할 낙원에, 내가 기다려왔던 낙원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아아,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 나에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