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째깍


시계의 소리가 적막한 버스에 퍼진다. 검은 머리의 수감자는 목을 가다듬더니 우윳빛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기계를 가리킨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를 보다보니 단테는 자신이 관리자로서 이 버스에 탑승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도 각각 '1번 수감자'와 '2번 수감자'라는 명찰을 단 두 인물은 이 끝없이 짙은 안개를 앞에 두고 설명을 시작했었다.



* * *



'단테. '거울'을 이용하면 저희는 평행세계의 인격을 불러올 수 있답니다.'

'째깍째깍째깍 (이게 거울이라는 건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안개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건 스스로 뿐이오.'

'째깍째깍(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구나? 나한테 이걸 소개해주는 이유가 뭔데?)'

'직접 경험해보시는 편이 빠를 거예요.'


수감자 '이상'은 헛기침을 하고는 '다녀오겠소. 돌아올 곳이 있었으면 좋겠구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으며 '거울'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연기가 사라진 '거울'의 안에는 수많은 사슬이 감싼 구체가 나타났다. 마치 알과 같기도 한 그 구체를 감싸고 있는 사슬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었다. 어두운 숲에서 수감자들과 관리자가 처음 만났던 그날, 관리자와 수감자들은 연결했던 그 사슬. 


'저 사슬을 열어주시면 돼요.'

'째깍째깍(단단하게 엮인 것처럼 보이는데?)'

'딱 봐도 그렇게 생겼네요.'


8번 수감자의 말대로 사슬은 단단하게 엮여 있었다. 손끝이 시려올 때쯤 처음으로 사슬과 사슬 사이의 틈을 벌려낼 수 있었다. 관리자가 혼자 애쓰는 모습을 보던 수감자 '이스마엘'이 '나와보세요. 도와드리죠.'라고 말하며 가세했고, 두 사람이 작은 틈을 젖먹던 힘까지 짜내 위 아래로 벌리자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더니 검은 장갑이 틈새를 뚫고 나온다. 사슬로 된 알을 깨고 나온 건 펄럭이는 듯한 옷을 입은 수감자 '이상'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습과 다르게 팔에 근육이 붙어 있는 것과 그의 가녀린 팔로 들 수 있으리라 상상이 가지 않는 거대한 환도를 든 것이 이질적이었지만,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게 분명히 수감자 '이상'이었다.


'나는 유려하면서도 비범하게 심장을 베는 법을 알고 있소.'

'째깍째깍(이게 어떻게 된 거야?)'

'평행세계의 이상 씨의 인격을 빌려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네요.'



* * *



"단테. 듣고 계신 건가요?"

"째깍? 째깍째깍째깍?(아? 미안.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줄래?)"

"괜찮아요. 단테 씨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도 파우스트는 고려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지만, 아무말 하지 않는 편이 수감자 '파우스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리라 생각하며 단테는 수감자 '이상'을 바라봤다. 언제나 입고 있던 코트를 옆의 의자에 걸어두며 수감자 '이상'은 '거울'의 측면에서 기계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없겠구료."라고 말하며 그가 돌아오자 수감자 '파우스트'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방금도 설명했지만, 동기화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에요."

"째깍째깍?(그렇다고 했던 것 같네?)"

"말했듯 황금가지의 앞에서 자아심도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지만, 그보다 안전하다면 안전하고, 위험하다면 위험하지요."


제대로 듣지 않은 내용을 아는 척 하는 것에 살짝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단테가 두 수감자의 말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평행세계 인격의 힘을 빌리고 있는 수감자들이라지만, 그것의 전투 습관이나 진정한 잠재력을 이끌어내지 못하기에 동기화를 통해 조금 더 높은 농도의 덮어쓰기(?)를 진행하려는 모양이다. 문득 그러다가 다른 세계의 인격에게 본래 인격을 완전히 침식 당하면 어쩌냐는 우려를 표출하자 수감자 '이상'은 다시 한번 기계를 확인해보더니 안심하라는 듯 엷은 웃음을 지었다.


"조정은 거쳤으니 문제 없을 것이오."

"째깍째깍째깍, 째깍째깍?(네가 더 잘 알겠지. 그럼 어떤 인격을 강화하게?)"

"지금 이 인격에 대한 동기화를 진행해보고 싶소."

"째깍? 째깍째깍째깍째깍?(음? 자신에 대해선 이미 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메피스토펠레스에 탑승하면서 수감자들은 모두 약해졌어요. 단테 씨가 '기본 인격'이라 부르는 지금의 저희 상태에서 진행하는 동기화는 다른 인격의 동기화에 앞선 밑바탕이자, 조금 더 깊은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거예요."


이해가 될 법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지만, 단테는 언제나처럼 수감자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수감자 '이상'은 "그럼 들어가보겠소."라고 말하며 '거울'의 앞에 섰고, 수감자 '파우스트'는 단테와 함께 기계의 측면으로 갔다.


"조정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동기화란 쉽지 않은 작업이에요. 말했듯 자아심도나 EGO 발현과 유사한 기억을 다시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신이 무너질 수도 있지요."

"째깍째깍!(그럼 위험한 거잖아!)"

"단테. 이 버스에 오른 이상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한 사람은 없어요."


맞는 말이다. 그때 싱클레어와의 대화에서 그리하였듯 수감자들은 모종의 계약을 통해 많은 것을 감수하고 림버스 컴퍼니에 입사했고, 자신 또한 성흔이라는 말에 마법처럼 홀려 이곳에 입사하게 되었으니.....이 버스에는 동정이나 걱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해야할 뿐.


"째깍째깍?(나는 뭘해야 하지?)"

"저와 같이 이상 씨가 일어나는 걸 도와주시면 되요."



* * *



거울 앞에는 길이 놓여 있소. 나는 그중 하나를 따라 묵묵히 걸어야 하오. 

본인이 N사의 특이점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하였다지만, 그리고 N사의 특이점을 한 때 도시에 일어났던 괴현상에서 영감을 얻어 '거울'의 형식으로 가공하였다지만, 여전히 나는 감정의 실체화라고 부르는 이현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많소. 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를 도시 최고의 천재라고 부르기로 나와 파우스트 양은 동의하였소. 3m가 채되지 않는 '거울'이 이렇게 오솔길처럼 길어지는 것 또한 N사의 특이점과 그 이현상을 걷어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참으로 미스테리어스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소......잡담은 그만하겠소.

어느순간 정신을 잃었소. 평행세계의 인격을 불러올 때의 감각은 마치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은 이질감이 들지만, 아마 지금부터 내가 겪을 이야기는......지금의 나와 동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소. 그것이 참으로 두근거리는 한편으로, 나는 두려움을 느끼오.


"이상! 일어나!"


눈을 뜨오. 익숙한 풍경이오. 바닥에는 종이가 널부러져 있고, 어제 먹다가 흘린 듯한 가베의 얼룩이 그 위에 낭자하오. 익숙한 얼굴들이 차츰차츰 다가오오. 나의 벗 구보.....아세아.....김나이, 지룡, 기림 등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구료. 그리고 참으로 그리워했던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그대가 보이오.


"이상. 이런데서 자면 얼굴 돌아간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얼굴이 아니라 입 아니오?"

"입이나 얼굴이나. 이런 건 넘어가자고."

"그렇구료......지금이 언제오?"


그들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오. 그녀는 폭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친절하게도 날짜를 말해주었소. 구보가 안경을 올리며 "말투가 바뀌었군."이라 말하고, 아세아가 나를 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 기계를 건들다가 이렇게 된 거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무슨 이상한 논리를 말하더니 사람이 점점 미쳐가고 있어?"라고 핀잔을 주오. 아, 문득 이 시절의 나는 이러한 말투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소. 않았던 것 같습니까? 않았다? 그래, 이 편이 조금 가까울 것 같군.


"지금이 몇 시지?"

"시계를 봐, 이상. 퇴근할 시간이라고?"

"아무리 N사가 직원 착취를 좋아하는 날개라도 유능한 과학자가 과로사하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야."

"그런가. 그럼 퇴근할까."

"아, 뭐야? 오늘 바로 퇴근이야? 다방 안 가?"


그랬던가. 이 시절의 나는 나의 생각보다 조금 더 활발하였던 것 같소, 아니 같군.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집보다는 다방을,  다방보다는 연구실을 선호하였다. 아무래도 이 시절의 나였다면 이때쯤 퇴근해서 다방에 들어가 자료를 검토하다가 선잠을 조금 자고는 다시 이곳으로 회귀하였을 모양이다. 그때 그녀가 수줍게 얼굴을 붉힌다. 


"오늘 나랑 놀기로 한 거 안 까먹은 거야?"

"아, 아? 그렇지." 


그녀는 신이 난다는 듯 나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이끈다. 아세아는 "이거 누가 치우고!"라고 딴지를 걸고, 나이와 구보가 "자료는 적당히 정리해둘 테니 놀고 오라고."라고 말한다. 나는 그녀를 따라 어디론가로 달린다. 우리는 N사의 둥지를 달린다. 그녀가 가자는 클럽에 들어가 나는 노래를 부르고, 그녀와 춤을 춘다.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열광한다. 양주를 붓고, 노출이 많은 옷을 입은 상류층의 시민들. 뒷골목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러한 풍경일텐......뒷골목? 내가 뒷골목에 간 적이 있던가? 내가 태어나고....모의고사 뒤틀림이라 부르는 게 일어나던 학교를 졸업해 N사에 특채되었을 텐......

기억이 점점 동화되고 있는 모양이오. 바깥 세계서의 나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흐려져가고, 이 세계의 것으로 채워지고 있소. 아니, 바깥세계란 무엇이었을까? 애초에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하나? 둘은 같은 세계.....잠깐 이 세계는 무엇이고, 바깥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알 수 없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와 문득 춤추는 것을 멈추었다


"아야!"

"아, 아? 미안. 괜찮아?"

"자기가 내 발 밟았잖아. 흥 깨지게."

"미안. 괜찮은 거지?"

"자기 오늘 조금 이상해. 혹시 아픈 거야?"


그녀는 나를 걱정해주며 클럽의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 우리는 둥지를 걷는다. 순백의 도로를 보며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는 그녀의 말에 100%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며 느끼는 두근거림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영화관으로 간다. 위대한 심문관이 이단을 처리하는 영웅적인 서사. 작 중에서 심문관의 못은 추악한 이단의 죄를 정화한다. 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음에도, 왜인지 진부하게 느껴졌기에, 아니 어쩌면 진부하다 이상의 불쾌한 감정이 느껴졌기에 나는 영화 대신에 그녀를 본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조각한 것만 같은 옆모습을 보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 그때 그녀가 영화의 감상평을 묻는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던 영화라고 말한다. "네 얼굴을 보다가 영화는 못 본 것 같다"라는 나름 위트있는 대답으로 곤란한 질문을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진실된 감상평을 원하는 듯 했다. 나는 그저 그랬다고 대답을 하였고, 아쉽게도 이는 오답이었던 모양이다.

문득 영화관을 나오는데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나를 걱정한다는 듯이 부축해준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강조함에도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조심해야 한다고, 전에 과로로 쓰러진 이후로 자신은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자기, 집에 가자? 응? 의사 선생님한테 받은 약이라도 먹고, 응?"

"약?"


차에 올라 그녀가 '우리의 집'이라 부르는 곳으로 끌려가는 내내 묘한 기시감 같은, 아니 어쩌면 기시감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얀 가옥에 들어가는 동안 두려운 감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는다. 그녀는 물과 약을 건네주고 나를 정성스럽게 간호해준다. 따스한 손길 앞에 나는 자연스레 눈을 감고.....



* * *



"째깍째깍째깍?(저기, 이상은 동기화 과정에서 뭘 볼까?)"

"아마, N사에 있던 시절을 생각하지 않을까라고 파우스트는 생각해요."

"째깍?(N사?)"

"얘. 이상 씨는 N사의 수석 연구원이었거든요. 림버스 컴퍼니에서도 어쩌다 이런 거물이 스스로 이곳을 찾아왔는지 의아해 했었어요."

"째깍째깍(대단하네)"


수감자 '파우스트'는 '거울' 안에 만들어진 수감자 '이상'이 담긴 사슬의 알과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가 평생을 바쳐 만든 장비인 만큼 성능은 확실하다. 다만 문제라면 이번이 첫 번째 시도인 만큼 동기화율을 조금 과하게 높게 잡았을 수도 있다는 것. 수감자 '이상' 또한 그 사실을 알고 들어갔다. 

'갈무리해야 할 일이 있소.'

'그런가요. 다녀오세요.'

짧은 대화만으로 수감자 '파우스트'는 수감자 '이상'을 보내주었다. 어쩌면 그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생각이나 과거가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기에. 그녀가 무지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에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수감자 '파우스트'는 거울 안에 들어가 사슬을 조금씩 벌리고 있는 단테에게 다가갔다. 


"째깍(나 힘이 세지고 있는 걸지도)"

"반복 작업 속에서의 근력강화는 당연한 겁니다, 단테."

"째깍째깍째깍째깍(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은 아닌데)" 

"그런가요? 모처럼 열어주셨으니 이상 씨가 어떤 세계를 겪고 있는지나 봐볼까요?"

"째깍째깍? 째깍째깍(우리가 개입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럼 훨씬 쉬울텐데)"

"결국 이상 씨가 스스로 깨어나기로 결심을 하셔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저희는 마지막을 거들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답니다."

"째깍(그렇군)"


둘은 사슬의 틈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 * *



다음 날이 되자, 그녀는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는 출근을 하였다. N사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는 위로, 그녀는 왼쪽으로 향한다. 연구실에 도착하자 눈앞에 '거울'이 보인다. 나는 이것을 얼마나 연구하고 있었던가. 문득 몇 번이고 비슷한 작업을 해본 것 같다는, 마치 몸이 기억하는 듯한 신들린 움직임으로 나는 종이에 수식을 써내려 간다. 일부 내용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함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수식이 완성되었다. 

점심을 먹으며 나는 구보와 나이에게 이 사실에 대하여 넌지시 말했다. 나이는 흥미롭다는 듯 이를 들었으나 구보는 무언가가 걸리는 지 조금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안경을 밀어올린다.


"이상. N사는 개인의 경험을 중요시 하잖아."

"알고 있네. 다만....."

"너의 말은 경험이 아닌, 그저 환각이 가져다온 검증되지 않은, 즉 잘못된 정보일 뿐이야. N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야, 야. 이상한테 왜 그래?"

"아, 아니네. 이건 나의 잘못이 맞아."

"아니, 구보. 봐봐. 자신감 넘치던 알파메일이 갑자기 하남자가 되어버렸는데, 이런 상황에서 왜 애를 갈구냐고."

"확실히 이건 좀 이상하군.....이상, 혹시 잘못된 기억통조림이라도 먹은 건가?"

"아니네. 그런 게 아니야. 그저......조금 피곤한 것 같군."

"약이라도 좀 먹어보겠나? 나도 종종 복용하는 데 괜찮더군."


 구보는 알약을 건넸다. 문득 꺼림칙하여 "고맙네."라고 말하면서도 "더 피로해지면 복용하지."라고 말하며 종이에 싸 주머니 깊은 곳에 찔러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거울'의 앞에 선다. 점점 퍼즐이 짜맞춰져 간다. 묘한 쾌감이 밀려온다. 한 번의 고민마다 진행도가 쭉쭉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어째서 일까? 어쩌면 이것의 완성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으매, 나는 궁극적인 결말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는 상태여서일지도 모른다. 마치 거북이와 경주하는 아킬레스처럼 나는 그것을 향해 50%를 다가가고, 다시 그 50%의 50%를 다가가고, 그 50%의 50%의 50%를 다가간다. 이러한 무한한 급수에 빠지는 동안 나는 n번째 항의 50%만큼 전진하는 동안 희열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필요함을 느낀다.

오늘도 퇴근할 시간이 되자, 그녀가 찾아왓다. 그녀는 나를 껴안는다. 그 품은 포근하다.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는 차에 올라타 순백색의 도로를 달린다. 아주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엑셀을 밟고, 핸들을 돌려 가히 완벽하다 자부할 수 있는 운전을 한다. 바람이 귀밑의 구렛나루를 스치는 것이 아주 유쾌하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진 하얀 도로와 검은 도로 바깥쪽만 이어진, 그리고 종점 없이 빈 도로를 달리기만 하는 것이 퍽이나 심심하고, 무언가 유쾌하지 아니하고 가슴에 걸리어 주행을 중지하고 돌아오기로 하였다. 차를 끌고 돌아오는 동안 밤하늘이 담긴다. 오늘도 별 하나 없는 외로운 밤이다. 아니, 나는 별이라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집에 돌아온 그녀는 피곤해보이는데 괜히 고생을 시켰다며 나에게 약을 먹였다. 오늘 네알이다. 그녀는 피로를 풀어주는 약이라고 말했음에도 배로 피곤했던 탓일까? 어제보다도 늦게 잠드는 것이었다.


삼 일 째의 아침이 되었다. 오늘도 출근하여 가베를 마신다. 조금 밋밋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였기에 나는 가배보다는 은은한 향이 나는 다방의 차를 좋아하였다. 문득 이 가베에 독특한 향이 나는 무언가를 첨가하여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민트향이었던가? 그것이 맛있을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N사가 항상 말하던 '경험'과 어긋난 망상을 하고 있음에 스스로를 반성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민트향 가베를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나는 '거울'을 만지었다. 오늘도 큰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완결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떠나면 누군가가 내가 조여놓은 나사들을 모조리 풀어놓는 것만 같다. 당연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거울'은 날이 갈수록 이상적으로 변하고 있으니.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그 궁극의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어째서 일까?

오늘은 나이가 출장을 가였기에 구보와 아세아와 점심을 먹는다. 구보는 나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기를 독려하지만, 아세아는 영 못 미덥다는 반응이다. 뭐,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둘을 본사 안으로 들여보낸 후 시내를 산책했다. 피부를 태우는 것 같은, 그럼에도 시리다는 기분이 드는 해가 중천에 떠있고, 마치 산봉오리처럼 높게 솟은 검은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의 그림자들이 내린 시내. 그 위를 사람들이 걷는다. 갑자기 N사의 둥지는 싸늘하도록 무섭고, 그만큼 하얗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높다는 것을 느낀다. 그제까지 흥겨운 소리가 울려퍼지던 클럽의 음악도 시내에서는 1데시벨로조차 들리지 않는다. 문득 아래로 내려가 그 틈을 본다. 놀랍게도 이곳은 아침부터 영업 중이다. 하지만 살을 부대끼는 그 현장에서도,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에프터에서도 그 근본적인 공허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달콤한 말을 속상이고, 형형색색의 빛들이 눈을 멀게 하는 공간에서 암묵적으로 서로의 몸을 더듬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곳의 사람들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채우려함에도 텅 비어 보이는 것일까? 

그러한 근본적인 감정에 빠져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앞에서 반추하고 있던 탓일까? 사람들은 걷는다. 앞을 보며 걷는다. 종종 의례적인 인사와 악수, 짧은 대화를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고립되어져 있다. 문득 이곳이 외로운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검은 하늘에 달이 떠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외로운 밤이다. 다시 한번 나는 별을 어디에서 보았던가 라는 생각 속에 빠져든다. 


"자기! 여기서 뭐해!"

"음?"


어느새 차를 끌고 온 그녀가 나를 차에 태운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그녀는 다시 나를 방에 밀어넣는다. 이제는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도 하지 않고 피로해보이니 약을 먹으라고만 말한다. 그 순간, 두통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기분 나쁨이 아니다. 마치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그렇소. 마치 각성하는 것처럼 말이오.

나는 무언가의 홀리듯 그녀를 옆으로 밀고 방을 둘러보았소. 그녀와 나는 동거하였음에도 나는 본디 집을 잘 찾는 사람이 아니었던 지라 이 집의 구조를 잘 모르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방문을 열려고 하오.


"자기, 왜 그래? 빨리 누워."

"문을 열고 싶소."

"뭐?"


다른 세계의 인격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더듬어 나는 문에 어깨를 부딪힌다. "흠! 흡! 하!" 3번째 부딪힘과 숨소리에 문이 부딪혀 열리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소. 아마 기억에서 본따 채워넣을 사물을 찾지 못한 탓이겠지. 이 거짓된 세계를 깨트리기 위해 나는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오, 그녀는 다급하게 나를 막으려 하지만 나는 조금은 매정하게 그 팔을 뿌리쳤소. 그리고, 화장실의 문을 부수오.

피가 가득한 욕조. 바닥에 넘치는 피. 

아, 누가 지혜는 머리를 깨는 듯한 고통에서 나온다고 하였던가. 그 부숨으로서 이 세계에서 나는 각성하오. 다급하게 나에게 다가와 약을 건네며 한숨 자면 모든 게 괜찮아지리라 말하는 그녀가 있소. 어느샌가 구보와 나이, 지룡, 아세아 등이 찾아와 나의 거실에서 나를 말리고 있소. 그리고 그 뒤편에는 또 하나의 내가 있소. 눈그늘이 없고, 웃는 얼굴 주름이 지어진. 퍽으로 이상적으로 보이는 나. 하지만 나는 이 거짓된 거울 속의 스스로가 부럽지 않소.


"그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금홍."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자기? 약은 많아. 응? 푹 먹고 자. 구보 씨가 미리 허락은 받아놨다고......"

"그대는 죽었잖소."


그 말과 동시에 집이 무너져 내리고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오, 나의 벗의 형상을 한 것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칠 때 나는 팔을 휘둘러 그들을 물리치오. 각오가 다져진 탓일까 거짓된 거울의 환상들은 맥없이 무너지오. 그리고 이제는 떨리는 표정을 한 그녀에게 다가가 나는 각성자로서의 면모를 여김없이 드러내었소.


"나는 그대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소.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나 역시 그대가 나를 보기를 바랐건만.....그대는 나를 보지 않았소."


"그대가 다른 이를 안으며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우면서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말을 거부하지 못하는 내가 참으로 한심하였기에 나는 그대를 떠나려 하였고, 그대는 나를 붙잡았소. 감기약이라 말하고 며칠 동안 수면제를 먹였지."


"진실을 알고 나는 그대를 떠났고, 며칠 뒤에 그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는 소식이 들렸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대가 나를 사랑하였다면, 어찌하여 내가 아닌 다른 이를 껴안았던 것이고,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매 어찌하여 나의 이별로 죽음을 택하였던 것인지."


"나는 고독에 가라앉았소. 며칠 간의 방황이 있었소. 한때는 그대가 이 근원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대를 쫓으려 하였으나, 벗들이, 그리고 '거울'이 나를 말리었소. 나 또한 시작한 일은 갈무리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 생각하던 바였기에, 거울을 완성하리라 하였지."


"그리고 거울이 완성되던 그날 무수한 가능성의 파편이 나를 덮치었소.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 나는 참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보았고, 그 순간 나는 잠시나마 비상하고 있었소. 또한 이 세계의 현상들에 대한 경위들을 조금씩 깨달으며, 결국 스스로의 날갯짓만이 저 달빛에 닿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았소."


"달빛이 반사되는 동안 왜곡되었다고들 말하지......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하지만 왜곡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틀렸다는 생각이 이제 들지는 않소. 그래, 저주받은 햇빛이 모두의 눈을 부시게 할 때 은은한 달무리는 누구의 눈도 가리지 않으니."


"그리고 어찌하여 이 둥지의, 아니 도시의 사람들은 외로운 것인가. 라는 생각에 나는 길을 비춰주는 '거울'을 들고 이 둥지를 떠났소. 그것이 진실이오."


그리고 한바탕 말을 쏟아냄과 동시에 무언가 깊은 것이 나의 안쪽에서부터 차오르다 이제는 흘러 넘치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를 안아줄, 누군가의 진실된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었다는 그 의지가 흘러넘치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날개죽지를 간지럽히오. 그리고 솟아나오. 모두를 포용하는 듯한 검은 날개. 그 날개를 하나 뽑자, 그것은 어느샌가 단검이 되오. 그것으로 나는 거짓된 나를 찌르오. 이 세계를 부수오. 

우리가 외로운 이유라 함은, 우리가 진실될 수 없어서였고, 그 진실될 수 없음이라 함은 그것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내가 이 사인검을 물들인 잉크로 나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다면, 한없이 진실된 참된 스스로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누군가를 포용할 준비가 된 것이고, 그 근원적인 외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오. 

거짓된 나에게 찌른 사인검을 뽑아내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고, 금홍이 뒤틀리오. 나는 나래를 펄럭이며 날아 올랐소. 순백의 하늘이 있고, 그 위에 구멍이 보이오. 밤하늘. 그것이 내가 나아가야할 길이고, 그 길이 보여주는 진실됨을 써내려갈 수 있는 세상이리라.

그리고 그것을 향해 손을 뻗치는 마지막 순간, 무수한 백색 손아귀가 나의 나래를 붙잡소.


"이상. 당신은 비상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스스로 깃털을 뽑고 있던 날개를 움직이겠다고요?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닌가요?"


그 말 한 마디에 나의 날개는 앙상한 나무막대기가 되고, 나는 십자가에 걸린 예수처럼 두 나래를 붙잡힌 채로 허공에 걸리었다. 뒤틀린 그녀의 얼굴이 나의 앞으로 와서 말한다.


"자기는 나랑 있으면 되는 거야. 응? 영원히 내거 하자고. 내 말만 들으면 되는 거야. 내가 놀자고할 때 놀고, 내가 친구랑 놀 때는 조용히 빠져주고, 내가 자자고 할 때는 자고. 그러면 행복하잖아."

"인간은 거짓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느니 진실된 세계에서 몸부림치기를 원하는 법이오. 나는 그 작은 날갯짓이 거대한 바람을 불어오리라 믿소. 그러지 못하더라도, 새로 태어났으면 한 번쯤은 비상해봐야 후련하지 않겠소?"

"이미 늦었어.....자기는 이제 내거거든."


세계가 고요해지고 하늘의 구멍은 조금씩 좁아지고 있소. 길이 눈앞에 있는데.....단 한 발자국을 앞두고 이곳에서 모든 건 끝날 운명인 것 같구려. 그 순간 하늘이 깨지오. 그리고 익숙한 팔 두 개가 내려와 나의 팔을 붙잡소.


"인간은 깨달음에 도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끝없이 방황하는 법이지요."

"째깍째깍(젠장, 안 위험하다매!)"


뒤에서 금홍의 다급한 비명이 들리는 동시에 나는 날개를 다시 그리오, 깃털은 흰색 손아귀를 뿌리치고, 나는 힘차게 날개죽지를 움직이며 그 구멍의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빠져나오오. 이것이 비상한다는 감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 나는 참으로 유쾌하오.



* * *



수감자 '이상'은 어깨를 털며 메피스토펠레스에 발을 디뎠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째깍?(괜찮은 거야?)"

"다행히도. 마지막 도움에 대해서는 큰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피곤해 보이시는데 약이라도 드릴까요?"

"느, 느허?"


수감자 '이상'은 깜짝 놀란 듯 뒤로 물러서고 수감자 '파우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입니다."라고 답한다. 수감자 '이상'은 아직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지 "파우스트 양의 동기화 때는 기대하기를 바라겠소."라고 말하고는 가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거울'의 바깥으로 나온다. 관리자는 버스에서 내려 달무리를 바라보는 1번 수감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졌으며, 말투는 특이하고, 몸은 가녀리다. 이상은, 그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공감하기 어려운 인간이다.  


"째깍째깍?(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대. 그대에게 이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째깍째깍(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네. 너는 계속 파우스트랑 놀아라.)"

"파우스트도 동의하는 부분이에요. 이상 씨의 언어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인간의 말로 번역된 환상체어와 유사한 느낌이라, 평범한 인간은 해석하기 어려우니까요."

"허허. 너무하구료......"


그를 놀렸을 때도 돌아오는 반응은 이전과 똑같다. 어쩌면 그는 그 시련을 겪으면서도 바뀐 게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달밤을 바라보는 수감자의 눈은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길을 더욱 선명하게 찾은 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