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스포일러, 개그물, 뇌절심함


***


<아니, 그러니까...>

단테는 인간의 언어 대신 미세하게 떨림이 느껴지는 째깍 소리를 내었다.


눈이라고 부를 만한 기관이 없는 단테를 제외한 12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려 있었다. 각자의 눈에 담긴 감정은 충격, 놀라움, 공포... 등등. 일부는 그렇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긍정적인 감정은 아님이 분명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로쟈...?">

"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로쟈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사실, 꼬맹이랑... 했거든."

단테는 로쟈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싱클레어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살짝 놀란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 뭐... 니들이 얌전하게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안 했는데 말이야.>

단테는 째깍거리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릴 리가 없는 한숨을 쉬었다. 그 언젠가 베르길리우스가 비슷한 말을 했던걸 떠올리면서.

<그런데 그걸 꼭 지금 여기서 말해야겠어?>


째깍거리는 소리가 뚝. 하고 멈추자, 이번에는 로쟈를 포함한 12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다른 곳으로 향했다. 시체들이 쌓인 산 위로, 우리의 목표였어야 할 황금가지가 빛나고 있었다.

황금가지의 바로 아래에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웃어대던 크로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여유넘치던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 싱클레어랑... 뭘... 했다고...?"

그녀는 꽤 충격받은 듯 했지만 눈빛만은 살아서 로쟈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기는~"

로쟈는 되려 그녀를 놀리듯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자세히 뭘 했는지는... 비밀로 할게?"


"오오오오!!! 비밀이라니, 나도 알고 싶소!!"

돈키호테가 갑자기 달려들며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꼬맹이한테도, 비밀인데 어쩌나?"


<아니, 그니까 지금 그걸 쟤 앞에서 말해야겠냐고!!>

"단테도 참~ 왜 그렇게 심통이 났을까?"

<로쟈, 너 진짜...>


"조금, 심술이 나버렸거든."

로쟈는 평소대로 능청스럽지만 살짝 짜증이 섞인 몪소리로 말했다.

"자꾸 자기한테 오라느니, 자기가 쥐겠다느니, 별 같잖은 소리만 해대잖아."


<그래... 그건 그렇다 쳐. 도대체 언제 어디서 시간이 나서...>

"뭐, 꼬맹이도 잔뜩 기 죽어 있고, 나도 딱히 할 일이 없고, 겸사겸사?"

<아니, 남들 다 싸우는데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단테. 나랑 꼬맹이를 매번 후방에다 쳐박아 둔 게 누구였더라, 응?"


로쟈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이번에는 단테에게 짜증을 부리려는 모양이었다.

"이거는 별로다... 저거는 구리다...  쓸모가 없다... 라면서 말이야, 응?"


<그... 그건...>

"다 관리자님께서 생각이 있어 하신 판단이겠지, 이 졸개들아. 불만이 있다면 네놈들의 능력 부족을 탓하도록."

충성스러운 변견을 자처하듯 단테의 옆에 딱 붙어있던 오티스가 되려 로쟈를 핍박했다.


"개. 모. 태."

전투 대신 별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데 관심도 없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서 담배나 피고 있던 료슈도 한 마디 거들었다.


"개... 개보다 모자른놈들이 태반이라고요?"

싱클레어가 주눅 든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와 동시에 단테가 고르지 않았던, 그 태반에 포함된 로쟈와 싱클레어를 비롯한 수감자들 일부가 조금 매서운 눈빛으로 단테를 쳐다보았다.


<그... 미안...>

단테는 단체로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 때문에 차마 '아니, 상성이 더 중요하잖아.' 라거나 '일단 일 먼저 해야하는거 아니야?' 같은 말은 속으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관리자님. 저자들은 그저 자신들이 능력이 한참 부족한 애송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관리자님께서는 충분히 승률만을 고려한 훌륭한 전략을 짜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희가 패배한다면 그건 관리쟈님의 탓이 아니라..."

오티스는 충분히 칭찬처럼 보일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양심에 찔린 단테는 불안정하게 째깍이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무튼~ 이 일엔 단테 책임도 있는거다. 알겠지?"

화제를 돌리고 싶었거나, 이목이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로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로쟈. 그러니까, 하필 지금 그 얘기를 꼭 해야겠어?"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고르가 끼어들었다.

"그... 타이밍이라는게 있잖아.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썩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흥. 심리전은 오래 전부터 적군의 사기를 꺾는 전술로 사용되었다."

오티스가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육탄전만 벌이던 네놈은 이해 못하겠지만, 훌륭한 지휘관이라면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법. 이건 필시 관리자님께서 이번 전투의 승리를 위해..."


"심리전이라...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오티스가 전술이니 전략이니 지루한 이야기를 해서 그레고르에게 핀잔을 주려는 찰나, 홍루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라, 하지만 저분. 더 열받으신 것 같은데요?"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레고르가 투덜거렸다.

"얼굴이 붉어지고... 이도 갈고 있는거 보니 엄청 화나셨나 봐요~"

<그래. 그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단테는 크로머를 쳐다보았다. 홍루가 말한 대로 자신만만하고 기세 등등하던 그녀의 태도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황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정말 열을 받을 대로 열을 받은 건지. 그녀의 얼굴은 귀 끝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실 그녀의 반응이 로쟈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두고도 무의미한 수다 삼매경인 수감자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티스가 말한 심리전은 소용 없는게 분명했다.


"...먹혀들지 않았군."

 유일하게 표정 변화가 없었던 뫼르소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런 계획은 없었으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어찌 되었든 일을 해야 하니까... 전투 준비를 하는게 낫지 않을까.>


저 적은 몇 번이나 시계를 돌리면서 쓰러트려야 할 지 고민하기 전에, 개판 오분 전인 이 상황부터 바로 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단테도 그렇게 말해봐야 이미 모든 것이 엎질러진 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저 새끼는 왜 갑자기 빡돌은거야? 아까는 신나서 쳐 웃더니만."

아니나다를까. 단테의 말에 개의치도 않고 히스클리프가 눈치없이 입을 열었다.


"그건... 이상적이지 아니하여 그렇소."

그리고 역시 눈치 없는 이상이 그에 동조했다.


"넌 또 뭔 개소리야?"

"엔-티알이라는 것이오."

"너, 일부러 내가 못 알아듣게 말하는거냐?"

히스클리프는 적에게 향해야 할 방망이를 이상에게로 향했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골치아프니까, 제발 더 문제 만들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단테는 다급하게 째깍거렸지만, 어차피 그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확한 의미는 아니지만. 마음에 들어하던 상대를 빼앗긴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파우스트가 히스클리프의 쓸데 없는 분노에 답을 해 주었다. 단테의 말을 들은건지, 아니면 그냥 아는 척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 새끼가 이 꼬맹이랑 뭐 그렇고 그런 사이란 뜻이냐?"

"그... 그게 무슨 개소리에요, 히스클리프씨!"

싱클레어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방... 방금 다 보셨잖아요... 저 자식이랑... 저랑... 저랑... 무슨 사이인지..."


"그러게요. 지나가던 환상체도 당신보다는 더 배려심 넘칠 것 같네요."

이스마엘이 한심하다는 듯이 히스클리프를 노려보았다.


"넌 또 왜 시비냐? 

히스클리프의 방망이가 이번에는 이스마엘에게로 향했다.

단테는 더 이상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그는 눈 앞에 적을 두고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싸워대는 촌극에 슬슬 익숙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당신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잖아요. 적을 쓰러트리는게 우선 아닌가요? 적이 누굴 좋아했든 누구랑 사귀었든 그게 뭐가 중요한데요?"

"그러니까 이스마엘 씨, 저는 사귀었다던가 그런 게..."


"그리고 관리자님? 관리자면 저희들을 구석에 쳐 박아두고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잘 관리하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이 사달이 났는데 말리기는 커녕 구경만 하실건가요?"

<...윽.>

단테는 정신채찍을 맞은 것 마냥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는걸요?"

홍루는 즐겁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짝사랑이라거나, 뭐 그런 전개인가요?"

"끄...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파우스트는,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은 없답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요."

"그건 또 무슨 개소리에요!"

"싱클레어. 여자의 마음은 복잡하답니다."


"...역시 이상적이지 않소."

이상은 무어라 중얼거린 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다들 크로머는 안중에도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들으니 조금은 저 새끼가 이해 갈 것 같네."

갑자기 히스클리프가 평소처럼 분노 대신 약간의 동정이 담긴 투로 입을 열었다.

"뭐, 짝사랑은 원래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는 법이지."


"그니까 그런게 아니라..."

"미쳤어요? 아까 배려심이 없다고 뭐라고 했더니 갑자기 적한테 배려심을 보이는 건가요?"

이스마엘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혀를 찼다.


"뭐야? 니가 사랑을 알아? 맨날 배만 타서 안했어요. 오랜 뱃생활 때문에 잘 몰라요. 이따위 변명만 하는 주제에?"

"그... 그건 사실이거든요? 배에서 어떻게 연애를 해요? 비상식적이잖아요! 그러는 당신은요?"

이스마엘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나? 나야 물론... 아주 뜨거운 시절이 있었지..."

히스클리프는 아주 잠깐 우수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아, 캐시요?"

"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바보에요? 맨날 잠꼬대로 중얼거리는데 누가 모르겠어요? 아예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시지 그래요?"

잠깐 움츠러들었다 기세를 잡은 이스마엘이 신나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정신채찍을 들었다면 히스클리프는 분명 전투 전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야, 임마! 왜 남의 잠꼬대를..."

"혹시 그 가슴팍에 문신이라도 새긴 건 아니죠? 아, 보여주진 마세요. 생각만으로도 징그러워서 토할 것 같네요."

"이게 뒤지고 싶어 환장했나, 진짜...!"


"그...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것이오...!"

히스클리프가 이스마엘에게 방망이를 휘두르려는 찰나, 어째서인지 조용하던 돈키호테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을 였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짝사랑이라니... 마치 아득한 꿈과 같아서 아름답지만 너무나도 슬프지 않은가! 히스클리프 군의 짝사랑은 어떻게 된 것인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네!"


<저, 돈키호테. 지금 끼어드는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단테는 다급하게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한 번 들어간 돈키호테의 스위치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건 저도 궁금하네요!"

홍루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 제발 먼저 일부터 하고 얘기하면 안 될까?>

"관리자님의 말이 맞습니다. 규정에는 업무 중 수다를 허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뫼르소와 돈키호테는 로쟈와 싱클레어랑 같이 후방에 있던 거 아니었어? 아무것도 못 본거야?>

"소... 소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만! 꼭 봤어야 하는 일인것이오?"

"자기~ 그렇고 그런 짓을 대놓고 하는 또라이가 어디있겠어?"

"이 미친 여자가 대놓고 떠벌려놓고서는...!"

그레고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키호테야 못 봤다고 쳐도... 뫼르소는?>

단테는 자연스럽게 돈키호테를 무시하고 뫼르소에게 시선을 돌렸다.

"11번 수감자와 12번 수감자 사이에 있었던 신체 접촉에 관한 일이라면, 목격하였습니다."


<그럼 왜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던 건데?>

"그건 관리자께서 보고를 요청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지금 당장이라도 뫼르소를 해부해서 그의 머리 어딘가가 의체로 대체된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그럼 제발 지금이라도 보고해 줄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뫼르소는 잠깐 숨을 고르며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먼저 3시간 전 칼프 마을 입구의 숲 어귀에서 12번 수감자가 11번 수감자를 구석 한 곳으로 불러내었다. 그 뒤에 바로 근처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12번 수감자가 11번 수감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때 11번 수감자의 혈압과 심장박동수가 다소 상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2번 수감자가 무언가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대화는 듣지 못하고 입 모양으로만 내용을 파악하였다. 그와 동시에 12번 수감자가 11번 수감자의 코트를..."

<이... 일단 멈춰. 누가 보고를 그딴식으로...>


"쯧. 예술적이지 못하군."

료슈는 이전에 피우던 담배는 진작 다 태웠는지 어느새 새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말했다.

"그런 것은 정확한 행위만 설명하면 된다. 넣. 뺐. 흔. 싸."

단테는 더이상 그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료슈씨가 넣고 뺐다..."

<그... 그만해! 번역은 필요 없으니까...!!>

"아...네? 네..."

<그나저나 너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거야, 싱클레어?>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적어도 너라면 말해줄 수 있었잖아. 라는 말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네? 아. 전 그냥 로쟈 씨가..."

"그래서? 저 크로머 양은 결국 차여버린 것이오?"

"그런 사이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돈키호테 씨!!!"

갑자기 끼어든 돈키호테에게 싱클레어가 버럭 화를냈다.


"그리고 저는! 동갑한테는 관심 없어요! 오히려 엄마같은 사람이...!"

급발진 버튼이 눌린 싱클레어가 문장을 채 끝내기도 전에 홍루가 외쳤다.

"와~ 저거 보세요."


홍루가 손가락으로 크로머가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인간의 모습이었던 그녀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고, 왠 환상체와 비슷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개판을 벌이는 사이 이미 황금가지와 반응을 한 건지, 아니면 그냥 지 성질을 이기지 못해 저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저... 저거 왜 저래? 잔뜩 열이 받으면 뭐 괴물같은게 되는 건가?"

"그렉. 아까 말했듯이 이건 단테 탓도 있는거다?"

<이건 또 대체 뭔 지랄인데?>

괴물이 된 크로머는 우리의 의미 없는 대화를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날개 비슷한 기관을 휘두르며 당장이라도 우리를 날려버릴 기세였다.


"관리자 양반. 이제 진짜로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우린 평소대로 뒤에 박혀있을게~ 수고해~"

"앗, 로쟈 씨, 아직 제 말 안끝났는데..."

로쟈는 싱클레어의 어깨를 잡고 재빠르게 현장에서 달아났다. 그 뒤를 다른 수감자들도 따랐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요."

"저는 관리자님께서 승리를 위해 정확한 명령을 내리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저... 저도 후방에서 지원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

이스마엘마저 도망치듯이 서둘러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남은 건 이상, 뫼르소, 홍루, 히스클리프와 그레고르 정도였다.


"저... 저새끼들은 왜 튀는거냐? 야! 시계대가리! 이대로 싸워도 괜찮지?"

"이상한 생명체랑 싸우는 건 신기해서 좋네요~"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단테는 한숨을 쉬었다.


"...이보시오."

한참동안 아무 말 없던 이상이 갑자기 단테를 불렀다.

"여기, 받으시오."

단테가 돌아보자, 이상은 손바닥만한 상자를 단테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아달린이오."

<아달린? 그거 수면제잖아?>

"그렇소만."

이상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더 이상 아무말이 없었다.


<이걸 왜 지금 주는건데?>

저 녀석을 재우기라도 하라는 건가? 애초에 환상체에 일반적인 약물이 먹히긴 하나? 단테는 애써 파르르 떨리는 초침을 무시하며 이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되돌아온 이상의 답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였다.

"엔-티알에 효과가 좋소. 경험담이오."


"이 미친 또라이새끼들아!!!!"

크로머의 비명은 단테의 째깍이는 소리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단테는 발악하며 광역기를 날리는 크로머를 애써 외면하며 시계를 돌렸다. 이 시계를 돌리면 수감자들의 육신은 되돌아오겠지. 

하지만 수감자들의 개소리에 오염되어버린 정신은 영영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단테는 이 끔찍한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한 없이 째깍거릴 뿐이었다.


***


사건은 어찌저찌 마무리되고, 수감자들과 단테는 터덜터덜 버스로 돌아왔다.

베르길리우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개판이 벌어졌던 겁니까, 단테."

<그. 일단 버스에서의 세 번째 규칙으로 이성간의 성적인 접촉을 금지한다, 뭐 그런게 있었으면 하는데.>


"잠깐, 단테. 난 아무것도 안했다?"

로쟈가 태연하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네? 하지만 이 개판이 벌어진게 로쟈 씨가 싱클레어 씨랑 그걸 하셨다고..."

이스마엘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거 별 거 아닌데? 그냥 안마정도만 해 줬다고."

로쟈는 장난끼가 가득한 미소를 띄운 채 속삭였다.

"아니, 이 정신나간 여자야. 그걸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

그레고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어쩐지 싱클레어가 별 반응이 없더라...>

"네? 제가... 뭐... 잘못한거라도..."

"...하, 쫄. 보."

"쫄따구들이 보자보자하니까... 라시네요..."

싱클레어가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상황은 알겠군. 로지온, 그런 헛소리를 지껄일 거면 한동안 입만 살아서 움직이도록 해 주지."

"하하. 그럼, 도박을 못 하니까 손해일 것 같은데. 사양할게~"

"로쟈. 넌 당분간은 입 열지 않는게 좋겠다."

"왜 그래, 그렉? 자기가 상대가 아니라 삐졌어?"

로쟈가 그렉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아, 이 여자가! 들러붙지마!"


"...당신의 말대로 세 번째 규칙을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테."

베르길리우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당신 책임 먼저 물어야겠어."

베르길리우스는 붉은 눈으로 단테를 노려보았다.


단테는 힘 없는 째깍거림과 함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몸을 잔뜩 움츠릴 뿐이었다.


***


그 소동은 여차저차해서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베르길리우스는 그 때 단테의 말대로 세 번째 규칙을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건 그 소동으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있지, 나. 그렉이랑 정말로 해버렸어~"

로쟈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모두의 얼굴이 굳음과 동시에 잔뜩 붉어져진 얼굴의 그레고르가 항변하듯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의 일이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