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상남자들의 놀이인 석전

소망석 돈키가 나온 김에 석전에 대해 알아보자



석전(石戰)

돌 석()에 싸움 전(戰)으로

눈싸움에서 눈 대신 돌을 던지는 "놀이"다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최소 삼국시대 고구려 때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굉장히 오래된 놀이로

주로 마을 vs 마을 구도로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상대 마을까지 밀어붙이면 승리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전엔 석전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많이 없기도 하고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

놀이보다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라 추정된다고 한다

이런 의식이 시대를 거쳐가면서 놀이로 변한 것으로 본다고 한다




Q. 근데 석전은 돌 던지는게 끝 아닌가?

A. 그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체계적인 놀이였다


석전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선 마치 로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끼리 싸우는 것 처럼

프로 투석꾼끼리 겨루는 스포츠 형태의 석전이 따로 존재하였으며

이 때는 집들을 근거지로 삼아 방망이를 든 근딜, 방패를 든 탱커, 돌을 던지는 원딜로 역할이 나뉘기도 하였고

진을 치거나 전략을 세우기도 했고

조선 후기엔 적진에 몰래 침투해 사보타주를 벌이거나 체급별로 나눠서 석전을 하는 등

군사 전략과 비슷한 수준으로 놀았다고 한다


이렇게 미니 전쟁 같은 느낌이였다 보니 인기가 굉장히 좋았고

왕들도 나와서 구경할 정도 였다고 한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태종 이방원이 심한 병에 걸렸음에도 석전이 열린다하면 바로 일어나 구경 갈 정도 였다고 한다


특히 안동, 김해, 평양의 석전이 유명했으며

이 중에서 조선 전기엔 안동의 투석꾼이 유명했다

안동 투석꾼은 전쟁 무기이자 돈키가 들고 있는 투석구를 쓰기도 했는데

숙련자가 쓰는 투석구는 돌을 140km의 속도로 던져 중갑마저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구한말엔 평양의 석전꾼이 유명했는데

돌을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고

석전하다가 무서워서 도망치면 어머니가 꾸짖으며 다시 석전장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며

소년들에게도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석전을 권장했으며

석전에서 승리한 석전꾼은 환대 받았지만 패배하면 집에서 내 쫓아 노숙을 해야했다고 할 정도로

구한말 평양의 석전꾼은 무슨 스파르타 전사 마냥 싸웠었다




Q. 근데 석전 하다가 죽으면 어떡함?

A. 사람이 죽어도 딱히 신경 안 썼다고 한다


이게 진짜인가 싶긴 하지만 석전을 하다가 죽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놀이의 목적이 상대에게 돌을 맞춰 전진하는 것이다 보니 사람이 죽어나가도 처벌이나 보복도 없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1903년에 미국인 클레어 헤스는 재미삼아 석전에 한 번 참여했었는데

그가 던진 돌이 상대 편 석전꾼에 머리에 적중해 석전꾼이 그대로 즉사했다

클레어 헤스는 자기가 유가족에게 보복 당할 것이라 걱정했지만

이 정도 가지고 문제 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놀이 하다가 사람이 죽는게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Q. 그럼 다른 규칙은 없음?

A. 나름 놀이였다 보니 총 쓰면 반칙이였다고 한다


이 또한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미국의 한 기자가 석전의 사진을 찍기 위해 석전이 이뤄지는 장소 근처에 갔다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진다고 착각한 건지 굉장히 흥분하고 불안했고

결국 사람들을 향해 총을 한 발 쏴버려 한 사람의 다리를 스쳤다

그 순간, 양 측의 모든 사람들이 굉장히 분노한 채로 그 기자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자는 공포에 휩싸여 카메라든 외투든 내팽겨치며 도망갔고

격렬하게 분노한 사람들은 그 기자가 미국공사관에 도달할 때 까지 집요하게 추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자는 벌금을 물고 몇 주 간 투옥을 하다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Q. 이 정도면 걍 전쟁 아님?

A. 그래서 전쟁에 참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도 돌을 던지다 보니 정확성과 위력도 점점 강해졌고

투석구를 쓰는 사람들은 미니 대포를 쓰는 것과 비슷했기에

전시 상황에 석전꾼이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삼포왜란 때 안동 현지 주민 중 석전꾼들을 데려와 왜군의 방패를 박살냈다는 기록도 있으며

임진왜란 때 안동의 석전꾼들을 긴급소집해서 안동에 접근하던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사흘 이상의 시간을 벌었고

이에 겁을 먹은 가토 기요마사가 왜군의 진행 방향 바꿨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그 때도 사람 목숨 귀한건 마찬가지였으니 여러 번 석전을 금지했었지만

역사가 깊은 놀이이기도 하고 인기도 폭발적으로 좋았기 때문에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일제 시대에 사라지게 된다

금지한 명목은 치안 안정이지만, 실제론 독립운동을 우려했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석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지금은 하는 순간 바로 잡혀가니 따라하진 말자


참고로 1980년대 말에 북한에서 딱 한 번 석전을 재현했었는데

사상자가 너무 많이 나와서 바로 취소했다고 한다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