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 불렀겠다, 소년은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샌드위치 바구니와 유리잔도 소년의 손에 들리어 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파랑새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소년의 길을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소년이 가도에서 마법 폭죽 쇼를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멈추고

주변을 순찰하는 기사단에 시선을 뺏겨 다른 길로 새어도

파랑새는 어느 새 소년의 앞에 나타나 다시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이윽고 아침에서 해가 중천에 뜰 때 즈음에야

소년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레기오로스의 수염이라고!”

“우와, 자네가 직접 잡은거야?”

 

“우릴 데려가지 않으면 후회할거요.”

“준비된 모험가가 여기 있다! 우릴 데려가라고!”

 

소년을 맞이한 것은 아주 넓은 광장이었습니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석상이 있었고,

석상 뒤편 좌우로 각각 [가디언 토벌], [도전/시련 가디언 토벌] 이라고 쓰인

목재 게시판이, 그 앞에 또 수많은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습니다.

 

게시판 바로 뒤의 건물은 원형 건축물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바닥이 밤하늘처럼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은색 부조가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파랑새는 이제 작별을 고하듯 소년의 몸을 한 바퀴 두르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소년이 작게 손을 흔들어주자, 파랑새는 푸른 빛으로 화해 어디론가로 날아갔습니다.

 

석상을 지나쳐 원형 건축물 내부로 들어서보니

내부에는 위험해보이면서도 신기한 포탈 구조물들이 있었고,

좌우 주변으로 기사단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습니다.

 

소년은 쪼그려 앉아 바닥을 콕콕 찔러보기도 하고 

포탈 구조물을 한 바퀴 휭 둘러보기도 해보고

은빛 부조를 따라 걷는 발장난도 쳐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소년은 포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투명하고 커다란 구슬 수정과 그것을 오묘하게 둘러싼 금속제 골조.

무엇에라도 홀린 듯 소년은 수정에 슬쩍 손을 뻗어 봅니다.

 

“어머, 우리 꼬마 기사님은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신 걸까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부드럽게 그의 뒤를 잡아 끄는 손길.

소년은 마치 친구들의 손아귀에 붙잡힌 토끼처럼 그대로 들어 올려지고 말았습니다.

 

반달처럼 휘어진 커다란 눈매와 오똑한 코. 갸름한 턱선과 비단결 같은 백금발의 생머리.

그녀의 등 뒤에는 소년만큼 커다란 하프가 매여 있었습니다.


아까 보았던 첫 눈 같던 여인과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인상의 아름다운 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슬쩍 소년을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흐응, 모코코구나.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신 건가요?”

 

모코코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년은 사실상 이제 막 베른에 온 참이었습니다.

끄덕끄덕


“누구 같이 온 사람은? 혼자 온 건가요?”

 

끄덕끄덕

 

“어디 묵을 곳은 있구요?”

 

절레절레

 

호오... 

소년은 여인의 눈빛이 어딘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마치... 산중에서 밤을 맞이했을 때 호랑이에게 노려지는 것 같은

 

오싹..!

 

소년의 모골이 송연해지고 그녀를 재차 바라본 순간, 

그런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자신을 보고 방긋 웃는 미녀의 얼굴만이 소년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습니다.

 

“음...귀여운 꼬마 기사님. 혹시 갈 곳 없으시면 저와 함께 가시겠어요? 마침 저도-”

“아, 바드 양. 여기 계셨군요.”

 

그 때, 커다란 대검을 맨 전사가 여인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하누마탄 예약팟 파티원들이 기다리고 있-”

“아니요.”

“예?”

 

여인이 소년을 내려놓고 등 뒤로 숨긴 후 전사를 향해 돌아보았습니다.

 

“아니요.”

 

대검을 멘 기사의 얼굴이 해쓱해집니다.

아버지와 형들 못지않게 터질 것 같은 근육질 팔뚝의 소유자인 그가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가...제가..죄송합니다...파티원들에겐 제가 잘...”

“고마워요. 그럼 수고해주시겠어요?”

“물론입죠. 암요. 다,다음에 봅지요, 바드 양.”

 

아, 전사가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돌아간다기보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느낌이지만 소년은 알 리 없었습니다.

 

여인이 다시 소년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침 저도 혼자여서요. 어떠세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거절하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좋아요. 혹시 우리 귀여운 꼬마 기사님은 나이가 몇 살인가요?”

 

소년은 아주 당당하고 자신있게 열 여섯! 이라고 외쳤습니다.

슈샤이어에서 열여섯은 어엿한 성인 취급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여인의 말 중 ‘꼬마’가 마음에 들지 않은 소년은 더더욱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아, 그럼 제가 ‘한 살’ 더 많네요!”

 

'...'

‘저 사람 내가 알기로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순간 여인의 얼굴이 저 편 기사단 쪽으로 휙 돌아갔습니다.

 

- 쿵

 

도열해있던 기사단원 중 두어 명이 갑작스레 쓰러지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르르르륵’

‘뭐야, 이 친구 갑자기 왜 이래? 거품을 왜 물어’

‘아무나 빨리 의무관이나 신관을 불러와라!’

 

 

“흐음, 여긴 좀 시끄럽네요. 자리를 좀 옮겨볼까요?”

 

끄덕끄덕

 

“좋아요. 사람이 많아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제 손을 잡아주세요.”

 

소년이 보기에도 이 곳은 꽤나 사람이 많았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소년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스윽

 

자연스레 소년의 손을 감싸 쥐는 여인의 손은

보드라우면서도 어딘가 따뜻했습니다.

 

“아 참, 저희 아직 서로 이름조차 모르네요? 저는 음....아!”

 

여인은 조금 고민하는 듯 하다가 방긋 웃으며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냥 바드 누나라고 불러주세요. 한번 불러보시겠어요?”

 

“...바드...누나?”

 

여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걸음을 멈추고 소년의 앞에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눈높이를 맞추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달뜬 한숨을 뱉는 그녀의 마음을 소년이 알 길 따윈 없었습니다.

 

 “잘..했어요. 그치만 처음이라 어색할 테니 몇 번 더 연습하고 가죠.”

 

“..바드 누나.”

 

“잘 했어요. 한 번만 더요.”

“바드 누나.”

“옳지, 옳지. 한 번만 더요.”

“바드 누나!”

“너무 잘하네요! 한 번만 더요.”

“바드 눈나!”

“하아아...”

 

아아, 성인 취급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제 고작 열댓 넘어가는 어린아이에게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이란 너무나도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칭찬의 달콤함과 스스로의 뿌듯함에 자랑스럽게 요구 조건을 이행한 소년이

그 ‘달콤함’을 누린 게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길 따윈 역시 없었습니다.

 

“아아, 이제 좀 회복이 되었네요. 갈 까요, 기사님?”

 

끄덕끄덕

 

신이 난 듯 어린아이마냥 잡은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소년과

그런 그를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인.

 

고향에서는 나무도 너끈히 베어오고 장작도 잘 패는 야무진 성년이었지만

어째선지 이 곳에서 소년은 마냥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소년이 염원하던 꿈을 이루어 신이 난 것인지

혹은 자신을 어린애처럼 대하는 ‘누나’ 덕에 정말 어린아이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소년은 모험이 생각보다 나쁘게 흘러가진 않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혹은 어쩌면,

아마 소년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을 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