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향해 발을 내딛기 전, 실린은 책을 펼쳐 자신의 운명의 길을 엿보았다.


첫번째로 실린은 서머너의 운명을 엿보았다.

로헨델의 마법사들이 보이는 소환수들과의 교감을 동경하였기 때문이다.


서머너의 운명 속 그녀는 비참했다. 그녀의 명령을 무시한 소환수는 힘을 집중하는 거대한 가디언을 자극하였고, 이에 분노한 가디언은 온 힘을 방출해 그녀와 동료들을 날려버렸다.

남들보다 떨어지는 힘의 차이를 메우고자 연구한 끝에 도출된 나름의 성과를 동료 모험가들에게 전파했지만, 돌아온 것은 자신의 모친이라 적힌 편지와 동봉된 퐁퐁가죽 꾸러미였다.

또 다른 시간선에서 그녀는 자신의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북적이는 경매장 속에서 전재산을 털어 구매한 진귀한 각인이 새겨진 목걸이였으나, 서머너들의 마법 술식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자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재빨리 페이지를 넘긴 실린은 두번째로 바드의 운명을 엿보았다.

전장의 음유시인이 되어 동료들에게 용기와 치유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드의 운명 속 그녀는 울상이었다. 치유를 위한 구원의 선율을 연주하여도 그녀의 동료들은 상처입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십상이었고, 강한 힘으로 제 때 적을 제압하지 못해 적은 더욱 강한 맹공을 가했다.

거대한 악마가 기절한 동료를 깔아뭉개려 온 몸을 날렸지만 그녀는 그의 전신이 으스러지지는 않도록 보호의 연주를 들려주는것이 최선이었다. 망신창이로 퇴각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더 좋은 지원가가 필요하다는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또다른 시간선에서 그녀는 다수의 적들을 상대로 홀로 맞서고 있었다. 하프를 연주하며 자신이 그나마 익힌 공격 마법을 시전해보지만 적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군이 없이는 너무나 무력한 자신에게 한탄할 틈도 없이, 그녀는 몬스터의 대군 아래 잠겼다.



실린은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리고 세번째로 아르카나의 운명을 엿보았다.

카드에 잠재된 마력을 이용해 스타일리쉬하게 적들을 섬멸하는 모습이 멋졌기 때문이다.


아르카나의 운명 속 그녀는 초조했다. 적에게 강력한 일격을 때려박기 위해 계속해서 카드를 뽑아댔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세 머리의 뱀, 유령, 별이 그려진 카드 투성이였다. 운 좋게 도태와 심판의 카드를 뽑아 해맑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면, 다른 동료들이 모두 전멸하여 눈물을 머금고 퇴각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곤 하였다.

또 다른 시간선에서 그녀는 무작위로 선출된 동료들과 가디언 토벌을 떠났다. 서로가 서로의 강점을 이끌어내는 조합임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맹신해 그들에게 호언장담하며 돌격했으나, 가디언의 공격에 가장 먼저 쓰러져 동료 모험가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며 페이지를 넘긴 실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지막 운명인 소서리스의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