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명일방주 팬픽이야. 


명일방주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관련 설정을 아예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있을까 봐 좀 올리기가 저어되긴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맘 먹고 한 번 올려본다.  


재밌게 읽어줘. 


참고로 링이라는 캐릭터는 요렇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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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7일 23:00. 



지난 가을, 지상함선 로도스의 갑판에 누군가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이미 함내에 작지만 훌륭한 온실이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짓을 했을까. 


고속으로 항해하는 함선의 갑판에서 식물이 정상적으로 자랄 리가 없는데. 


쓸데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런 내 혹평을 부드럽게 불식시키듯, 그 누군가는 정원에 한 그루의 꽃나무를 심었다. 


손수 만든 바람막이를 두르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물을 주며, 겨우내 성긴 가지를 상냥하게 잘라내었다. 


그렇게 봄이 왔을 때는, 맑은 오후의 하늘처럼 파란 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예쁘다.” 


“그러네. 갑판에서 꽃놀이를 할 수 있다니, 꽤나 신선한 기분인걸.” 



무심코 튀어나온 내 중얼거림에 링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청량하게 울릴 때마다 손 안의 술잔에서 작은 물결이 일어난다. 


약 1년 전 로도스 아일랜드에 입사한 오퍼레이터 링. 


그녀는 옛날 옛적 염국에 살았던 거대 괴수, 쉐이의 파편이다. 


천 년와 하룻밤을 구별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 온 존재이자, 온갖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로도스에서도 맞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 


하지만 정작 그녀의 성격은 그런 수식어가 무색해질 만큼 소탈했다. 


농담과 시 쓰기를 좋아하고, 술을 사랑해 마지않는 그 나이대의 여성. 


그녀는 입사하자마자 여기에는 자기가 할 일이 없어 보인다며 내 비서를 자처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매일 밤 야근 후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게 일상이 되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그대여, 아직도 저 정원이 쓸데없다고 생각해?” 


“응.” 


“어머.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너무 비효율적이야.” 



술을 털어 넣은 뒤, 다시금 꽃나무를 일별했다. 


밤바람을 맞아 온화하게 손짓하는 난월량. 


아름다운 건 맞지만, 굳이 꽃나무를 이곳에서 키워야 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식물을 기르고 싶었던 거라면 온실을 빌리면 될 테고.


꽃을 보고 싶었던 거라면 다른 도시로 나가면 된다. 


환경미화원을 잔뜩 고용하는 수고를 감수하면서도 꽃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둔 용문은 말할 것도 없고. 


극동이나 단국, 혹은 라이타니엔의 꽃도 꽤나 볼 만 하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합리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갑판에 꽃을 기른 이유는 도대체 뭘까.  


그것도 굳이 철이 지나면 질 꽃 몇 송이를 보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그대로 털어놓자, 링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는 생각이 너무 많아.”  



살랑살랑, 꽃의 색깔을 꼭 닮은 그녀의 꼬리가 장난스럽게 흔들렸다. 



“그대의 방식대로 논하자면, 애초에 아름다움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주린 자의 배를 채워 주지도, 추위에 떠는 이에게 한 줄기 온기를 전해 주지도 못하거늘. 또 세상 만물의 효율을 따진다면, 눈을 떴을 때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겠지.” 


“그렇지? 하루 세 끼의 식사도, 포근한 밤의 단잠도. 누군가에게 품는 감정도. 내 손 안의 이 술잔조차도. 결국 언젠가 스러질 생명의 덧없는 발버둥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의미는 없을 거야. 때로는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이 대지의 흐름을 즐길 필요도 있다는 거지. 이런, 잔이 비었네.” 



링이 능청스럽게 술잔을 내밀었다. 

 

운을 뗄 때는 세상의 진리를 깨우친 현자 같다가도, 말꼬리를 자아낼 때는 평범한 또래 여성 같은.  


너무나도 그녀다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도 난 내가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 


“맞아. 그대는 지휘관이니까. 무릇 장수라 함은 헤아림의 흐름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 다만 그대가 이 세상을 하나의 장기판으로만 바라보다가, 판 틈새에 숨은 아름다움을 놓치는 건 좀 아쉬울지도 모르겠네.”   


“......” 


“적어도 나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 줘.”    



환한 보름달 빛 아래, 그녀의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공기 중에 아련히 스민 꽃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갑판 너머 저 멀리에서 보이는 도시의 작은 불빛들이 따스하게 반짝였다.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 탓일까. 


아니면 나에 대한 순수한 걱정이 담긴 그녀의 상냥한 말 때문이었을까. 


또,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이래서 링이 좋다고. 


로도스에 나와 친한 사람이라면 널리고 널렸다. 


사업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정말 친구처럼 터놓고 지내는 이들도 없잖아 있지. 


하지만 링은 좀 달랐다.  


연장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딱딱하게 굴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너무 철없이 까불지도 않는다. 


그저 한 송이 꽃처럼 자유로이 바람을 타고 햇살을 즐기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정성껏 가꾼 향기와 용모를 내어줄 뿐. 


그런 그녀의 포용력이, 부드러운 여유가. 


다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보다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링이 꼬리로 내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그대여, 언제까지 내 잔을 비워 둘 생각이지? 나를 애태우려는 걸까?” 


“이런. 실례.” 


“실례랄 것도 없어. 대작 중에 도망가는 무례한 이들도 많은걸.”  


“시처럼?” 


“그래, 그래. 말 잘했어. 그 애는 참 신기하지. 취해서 잠들면 악몽을 꿀까 봐 술을 싫어한다니. 나이가 몇인데, 참.” 


“글쎄. 난 네가 더 신기해.” 


“어머? 그대여,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들려줄 수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 


나는 피식 웃었다. 


술기운이 올라온 탓일까. 


얼굴이 뜨끈해지고, 과로와 스트레스에 지친 탓에 닫혔던 말문이 자연스레 열렸다. 


술잔을 한 번 나눌 때마다 서른 번의 웃음소리가 오가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새로운 추억이 되어 쌓여 가며. 


천천히 항해하는 로도스의 갑판 위에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다. 



“링, 난 네 친구지?” 



그 탓이었을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그대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던 옛 적에도, 자신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지금도. 그대는 변함없이 내 친구야.” 

 

“그럼 친구로서 하나만 물어볼게.”


“두 개도 괜찮아. 아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끝없는 문답만큼 흥미로운 건 없으니까.” 


“저 정원을 가꾼 거, 너지?” 



조금 눈치 없는 질문을 해 버리고 말았다.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갑판에 시를 쓰던 링이 뻣뻣하게 굳었다.


붓이 되어 문장을 써내려가던 그녀의 꼬리에서 먹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음, 소거법이야. 갑판에 자주 나오는 사람, 그리고 이런 곳에서 꽃나무를 기를 만한 사람. 전자야 드문드문 있지만, 후자는 흔하지 않지.” 



갑판을 애용하는 오퍼레이터는 의외로 꽤 많다. 


거의 매일 밤 여기서 대작을 하는 우리를 제외하고서라도, 함선이 정박했을 때 담배 피우러 나오는 텍사스라거나.  


드론 날리기 연습을 하는 엑시아, 혹은 술에 취하면 함선 꼭대기 안테나에 매달려 자는 총웨도 있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꽃을 키울 사람은 괴짜 천지인 로도스에서도 드물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환경이 식물 키우기에는 최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이기에, 온실에서 키울 거고. 


그 반대라면 고려할 여지도 없다. 


이런 조건에 오퍼레이터들을 하나하나 끼워맞춰 보면, 들어맞는 건 링을 비롯한 몇 명 밖에 안 남지. 


링이 약간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그대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맞았어?” 


“응. 정답이야.” 



어라, 잠시만. 


그럼 난 링 면전에서 너 쓸데없는 짓 했다고 깐 셈이 되는 건가?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을 때. 


링이 부드럽게 웃었다. 



“박사, 사과는 안 해도 돼. 나는 그대를 이해하니까.” 


“...미안.” 


“하지만 즐거웠지? 꽃 덕분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조금 전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굳이 이곳에 정원을 만드는 수고를 한 이유는, 순수하게 나를 생각해서라는 걸. 


금방이라도 작은 로도스를 집어삼킬 듯 이빨을 드러내는 강대국들의 압박으로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업무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잠시나마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이 순간을 즐기게 해 주고 싶다는 그녀의 배려였겠지. 


나는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꽃은 어디까지나 덤이었어.” 


“응?”  


“내가 오늘 정말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던 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너였기 때문이거든.”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걸까, 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내가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인 것도 아니거니와, 아무한테나 이러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켈시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건 때려죽여도 싫어. 


그냥 술기운도 좀 돌았고. 


마침 상대도 링이고. 


스스로에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사이, 링이 활짝 웃었다. 



“아하하, 그건 정말 기쁜데. 고생한 보람이 있다 싶네.”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꼬리가 힘차게 파닥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음? 


고생이라고? 


잠시만, 그러고 보니….



“링…진짜 고마워.” 


“응? 갑자기 뭐가?” 


“나를 위해서 손수 정원을 가꿔 준 거.” 



링을 비롯한 쉐이 남매들은 특별한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니엔은 무언가를 만드는 능력을, 그리고 시는 그림 속 세계를 만드는 능력을. 


링의 경우에는 ‘꿈 속을 거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이렇게 말하면 좀 모호한데,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타인의 꿈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꿈을 만들고 그 꿈에 상대를 초대하는 식이다. 


캐스터들이 쓰는 오리지늄 아츠와는 다르고, 구체적인 원리도 모르는 신비한 힘이지. 


그 힘을 썼다면, 힘 들이지 않고 내게 좀 더 근사한 정원을 보여 주는 것도 가능했을 터.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꿈처럼 흩어지지 않고, 눈을 떠도 내 곁에 남아 있는 그런 추억을 주고 싶었던 거지?”   



링은 오랜 시간을 살아 왔다. 


천 년과 하룻밤을 구분하지 못하고, 꿈과 현실의 차이를 잊어버릴 만큼 아득한 시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원했던 거겠지.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한. 


아니, 나나 링 둘 중에 하나가 죽어 차가운 땅 속에 묻히더라도.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의미 없이 스러질 봄꿈이 아니라, 이 자리에 실재했던 그리운 추억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무언가를.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우리는 몇 번이고 이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 터.  


짝짝짝, 그녀가 손뼉을 쳤다. 



“정답이야. 정말, 그대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일 년 동안 같이 지냈으니까. 서로 무슨 생각 하는지는 대충 알잖아.”     


“한 해는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지. 그 시간 동안 함께한다고 해도 상대의 생각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 우리는 내 생각보다 훨씬 잘 통하는 걸지도 모르겠는걸.” 


“응, 맞아. 분명히 그럴 거야.” 


“좋아, 기분이다. 우리가 이렇게 되기까지 내 곁에 있어 준 그대에게, 감사의 의미로 아름다운 꿈을 보여줄게.” 



링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꼬리가 힘차게 떨쳐지고. 


아직까지 꼬리에 물들어 있던 먹물 몇 방울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가을이로다.” 



똑, 청아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색색깔의 물감이 백지를 물들여나가듯, 풍경이 그녀의 색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달이 지워지고, 무수한 별들이 세상을 비추었으며. 


어두컴컴한 평야는 순식간에 텅 빈 구름의 바다로. 


우리가 앉아 있던 로도스의 갑판은, 봉우리 위의 정자로 바뀌어간다. 


모든 것이 변하는 가운데, 그대로인 것은 오로지 나와 링. 


그리고 정자 옆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나무 뿐이었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내 귓가를, 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간질였다. 



“내 꿈은 쉽고, 또한 아름다워. 몸을 누일 산봉우리가 지천이며, 발길 닿는 데마다 시상이 있지. 둘러보고 둘러보아도 끝이 없어. 현실이 꿈보다 추악하다면, 내가 눈을 떠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고민을 했던 적도 있고.” 



나는 살짝 웃고는 술잔을 털어 넣었다. 



“꿈에는 미래가 없지. 꿈 속에서 아름다운 과거를 회상할 수도, 현재를 살아간다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허상에 불과한 바. 링 너는 그 차이를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을 거야.” 


“응, 맞아. 결국 꿈은 꿈일 뿐이니. 나비의 꿈을 꾼 뒤, 내가 나비인지 아니면 나비가 나인지 수천 년을 들여 고민해 봤자 의미는 없고. 결국 나는 이 테라의 대지에 뿌리를 둔 채 노니는 한 마리 용일 뿐. 결국 내 미래는, 내 삶의 귀착점은 이 땅 어딘가에 있지. 지금은, 꿈도 나도 전부 마음에 들어.” 



링이 술을 병째로 비우고는 머리 위에서 흔들며 넉살 좋게 웃었다.    



“그저 즐거울 뿐인 꿈과는 다르게, 현실에는 고난과 역경이 있지. 하지만 그런 봉우리를 넘어서야만 볼 수 있는 풍경도 있어. 전장에서 몸을 불태웠기에 전우들과의 유대를 알았고, 우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했기에 소중한 형제자매들을 얻었지. 그리고…그대도.” 


“나?” 


“그래. 옛날에는 의심했지만…이제는 알겠어. 그대의 곁이 내 귀착점이야.” 



링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홍조는 어쩐 연유일까. 


술이 떨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일지, 혹은 들이킨 술의 잔재인지. 


그도 아니면, 그녀가 흉중에 품은 작고 반짝이는 감정일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링, 이거 꿈이지?” 


“그래, 그대여. 팔천 년의 봄과 팔천 년의 겨울, 그 사이의 아주 짧은 가을 같은 꿈이지.” 



혀가 꼬이네, 부끄럽다. 


응, 사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높은 가을 하늘에서 아스라이 봄의 향기가 나는 것은 어째서인고?  


아니, 그런 거야말로 호접지몽의 논쟁에 불과하지. 



“하지만 동시에 현실이기도 하고.” 


“맞아. 가을일진대 꽃이 피어나고, 다 마신 술병이 바닥에 나뒹굴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여기에 있는걸.” 

 


링이 천천히 네 발로 기어 다가온다. 


그녀의 예쁜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염국 황제가 가진 그 어떤 옥보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그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천천히, 눈을 감고 링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댄다. 


아, 안 되겠다. 


꿈이라기에는 그녀의 체온이 너무나 따스한데, 현실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다워. 


얼굴에 와 닿는 그녀의 온기를 음미하며, 조용히 입을 연다. 



“이 순간이 천 년일 수 있을까?” 


“그대가 바란다면.”  

   

“하지만 찰나일지라도 상관은 없겠지?” 


“그대와 내가 살아 있는 한.” 



쪽,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입술을 스친다. 


놀라 눈을 뜨니, 링이 짓궂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선문답은 역시 즐거운걸. 하지만 오늘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만으론 부족해. 확실한 답을 원해. 그대여, 부탁이니 오늘은 끝까지 어울려 줘.” 



‘끝까지’ 가 무슨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나 짧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이 이런 때 그러듯이 내가 책임지겠다, 나만 믿어라 같은 말을 지껄이기엔 우리 둘 다 너무 멀리 왔고. 


여기서 그녀가 원하는 ‘답’의 의미를 꼬치꼬치 따져 묻는다면, 그만큼 흥을 깨는 행동도 없겠지. 


그녀를 살며시 끌어당겨 안고, 싱긋 웃는다. 



“소장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다. 


내가 먼저 어느 전장에서 객사할지. 


아니면 링이 먼저 그녀의 형제자매들과 하나가 되어, 원래 있었던 모습으로 돌아갈지. 


어느 쪽이든, 둘이었던 우리는 혼자가 되어 서로를 가슴 속에 묻고 외로이 살아가게 될 터. 


하지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아무래도 좋아. 


지금 이 순간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듯한 꽃향기를 가슴 속에 가득 새기기에도 부족한 우리니까. 



쉐이 합체까지, D-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