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노예엘프-소년 주종순애

"도와주세요! 전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조용히 못 해!"

"크르르르르..."


채찍 소리, 비명과 으르렁거리는 소리...

딱히 듣기에 좋지 못한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오물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 첫방문 했다면 분명 토했으리라.


"이리 오십쇼! 여기 질 좋은 상품이 있습니다!

팔 다리도 건강하고 얼굴도 반반한 놈입죠!"

"이전 주인이 조교해놔서 말은 잘 듣는 놈입니다!

이놈은 어떠십니까? 이번이라면 특별히! 20퍼센트 싸게 드립니다!"


그리고 그 소음에 질 세라 울리는 수많은 호객 소리.

나는 이곳을 잘 알고 있다.

익숙해져선 안 될 곳이건만,

내가 잘 아는 이유는...내가 상품인 신세가 되어

이미 이곳을 여러번 방문해서이다.


"쳇...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선...

니년 때문에 헛수고만 잔뜩 들였잖아!"

"크..."


한 달 만에 반품되어 돌아온 나를

째려보는 애꾸눈의 노예상은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채찍을 휘둘렀다.


일부러 빚맞춘 것이지만, 채찍은 채찍.

피와 살점이 찢어지는 상처와 함께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처음에는 눈물과 함께 비명을 질렀지만,

익숙해져버린 지금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저 죽일듯이 노예상을 째려볼 뿐이었다.


"흥...그래도 엘프는 엘프란 말이지.

흉도 안 졌고...뭐, 엘프에게 흉터를 남기려면

어지간히 끔찍하게 괴롭혀야 하겠지만."


그의 말대로, 방금 전 난 상처는 벌써 아물고 있었다.

엘프는 자연적으로 치유가 빨라 잔상처는 금방 아물곤 했다.

마법적으로도 적성이 높으면서 저항력도 높아서...

그 때문에 잔인한 취향의 사람들이

엘프를 노예로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대체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는 경우가 많고

프라이드도 높은 경우가 많아서

노예로서는 매우 고가에 거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증오스러운 그 손길로 내 몸을 더듬으며

다른 상처나 마법으로 인한 흔적은 없는지 확인했다.


"어이쿠, 아직도 기가 센 건 여전하구만.

이런 걸 굴복시키는 게 취향인 사람도 있으니까.

갓 잡아온 걸로 사기치고 너 때문에 손해 본 몫까지 두둑히 받아야겠어."


손발이 결박 당해 있어 그의 손을 물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는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피하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그를 공격한 순간, 내 몸에 새겨진 노예문이 작동해

내 몸에는 끔찍한 고통이 가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를 공격한 것은

그의 더러운 손길이 내 몸에 닿는 게 끔찍히도 싫었고,

그런 고통에 꺾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그가 노예문을 발동하지 않은 것은

그저 나를 비웃고 싶기 때문이었다.

바보같이 속아 상품으로 전락해 버린 엘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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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마을을 뛰쳐 나온 게 화근이었다.

뛰쳐 나왔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계획된 가출이었다.

폐쇄성이 강한 엘프 사회는

바깥 소식이 잘 닿지 않았고,

바깥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다.


최근 조금씩 바뀌어가는 중이라 하지만,

엘프는 장생종.

1000세가 넘게 사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 말은 세대교체가 잘 안된다는 뜻이고,

나이먹은 어르신들이 수없이 계신다는 얘기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어르신, 젊은이의 입장에선

꼰대가 드글드글하다는 점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변화가 없는 삶을 천 년이나 지속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엘프의 영역 안에서 썩는 건 사양이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조금은 변해 조금씩 유입되어 오는

바깥 세상의 소식에, 나는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매번 어른들의 얘기로만 들은, 바깥 세상의 소식은

하나같이 신기했다.

어느 왕국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는데, 스캔들 파문이 났다는 얘기...

요즘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디자인의 옷이 유행하더라는 얘기...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바깥 세상의 책들.

대부분은 소설들이었다.


읽을 때마다 천 년씩이나 살면서도 왜 인간들보다 글을 못 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글들이었다.

여러 분야를 좋아했지만,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이 곳에서는 꿈꾸기 힘든 상황이 잔뜩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오래 살기 때문에 딱히 후손에 대한 걱정이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인지,

성욕이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무게감같은 건 없었다.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


결혼했어? 그럼 니넨 부부야.

부부면 뭐 다르냐고? 

따로 살던 거그냥 한 집에 같이 사는 거 뿐이지 뭐.

애? 뭐 같이 살다 보면 한 명쯤은 낳겠지.

안 낳으면 뭐 어쩔 수 없고.


...이런 느낌이었다. 

사는 시간이 길다 보니, 감정 표현에도 무덤덤해져서

잉꼬부부처럼 사이 좋고 애정표현 풍부한 부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사랑을 해보겠다고 밖으로 뛰쳐나온 건 아니지만,

여기서는 가슴 뛰는 연애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계획을 세우고 미리 가출 준비를 했다.


이 결정에는 전령 언니들의 연애담도 한 몫 했다.

외부로 나가는 엘프는 단 두 부류뿐이었다.

외교관과 전령.

그리고 소식과 물건 등을 가져오는 건 전령이었다.

나는 전령들을 좋아했다.

격식을 별로 안 차리기도 하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기도 했으니.


그리고 올 때마다 얼마나 남친 자랑을 하는 지 원...

그녀들의 남친 또는 배우자는 전부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이었다.

나이든 어르신들은 말세라며 혀를 차며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녀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매우 행복해 보였다.

아무튼 나는 그녀들의 조언도 얻어가면서 가출을 준비했다.


그러던 와중, 엘프의 명절이 찾아왔다.

딱히, 명절이래봐야 특별한 거 없고 그냥 가족이 모여서 식사하고

잡담하고 헤어지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명절에 모이는 의미는 사실 크게 없었다.

그나마 새 아이가 태어났다면, 한 30년 동안은 특별해지지만.


하지만 명절에 모이면 나이드신 분들은 모여서 이런 푸념 저런 푸념

요즘 젊은이들은 어쩌구 저쩌구...자신들의 불만을 늘어놓곤 하셨다.

제일 듣기 싫은 푸념이 '늙으면 죽어야지' 였다.

웃기시네. 죽으려면 아직 200년 넘게 남은 사람들이.

정작 죽으라고 하면 아등바등 살려 할 것이다.

그건 누구든 그럴 테니. 

다만 저렇게 말해놓고 그럴 걸 생각하니 추해보였다.


아무튼, 그 불만을 받는 상대가 나만 아니면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의 타겟은 나였다.

전령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왠 요상한 머리모양을 하고 다닌다는 둥,

이상한 걸 읽는다는 둥 트집을 잡길래,

참지 못한 나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들이나 나이만 먹고 변하는 게 없으니까 그렇게 머리가 빠지는 거에요!

진짜 지루한 데다 고지식하기만 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네.

이딴 마을, 그냥 나가버려야지."


엄청 화난 체를 했지만, 

문을 박차고 나가기까지 실실 웃음이 배어나오려는 것을 참고 표정관리하느라 혼났다.

한 마디 제대로 해서 속도 시원하고,

드디어 구실이 생겨 꿈만 꾸던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에 기대에 찬 발걸음을 옮겼다.

미리 준비해둔 짐들을 챙기고, 나는 그렇게 바깥세상으로 떠났다.

후에 전령 언니의 전서구용 독수리로 전해들은 소식으로는,

다른 것보다 머리카락 얘기 때문에 충격 받아서 눈물 흘린 장로님도 있었다고.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바깥 세상은 모든 게 신비로웠다.

지역마다 건축 양식, 먹는 것, 입는 옷...

비슷해 보일지라도 모든 게 조금씩은 달랐고.

수인, 인간, 용족 심지어는 마족까지 볼 수 있었다.


고생스러운 일이 있기는 해도,

매일이 새로웠고, 즐거웠다.

내일은 더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건 악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내 착각이었다.


다음 날은 최근 새로 발견된 미궁의 최초 탐사를 위한 파티에 가입했다.

전원 남성도 아니었고, 여성 파티원도 있어 딱히 의심을 하지 않았다.

처음 발견된 곳 치고는 지나치게 잘 아는 것 같았지만,

비슷한 경험이 많겠거니 하고 스스로 넘겨 버렸다.

그리고 중간 기착지에서 같이 음식을 먹을 때 아무 생각없이

음료를 받아먹은 것이 문제였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고, 

이미 정신이 들었을 때는 손발이 다 사슬에 묶인 채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모든 게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의뢰부터가 위조된 의뢰서였고,

그저 나 같은 바보를 낚기 위한 함정이었다.

파티원 전부 한통속이었고,

미궁도 가짜였다.

거기 있던 몬스터도 투기장에서 쓰이다 버려진 것을 싸게 매입해 들여놓은 것이었다.


분명 전령 언니들이

주의시켜준 철칙 중에

'다른 사람이 준 음식을 함부로 먹지 말 것' 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호의만을 경험한 나머지 바보같이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 대가를 비싸게 치뤘고, 더 치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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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당한 말로 못할 짓들을

되새기고 있자니, 다음엔 또 어떤 짓을 

당하게 될 지 몸서리가 쳐지고, 증오에 이가 갈렸다.


"오, 손님! 여기 엘프 노예는 어떠신가요?

마침 방금 들어온 신선한 노예입니다!"


그러는 사이, 손님이 도착한 듯 노예상이 호객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그나마도 나오기 어려운 엘프 노예다 보니,

상태가 어떻든 한 번 정도는 다 보고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주하는 시선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싸늘하게 날 훑는, 경멸과 우월감으로 가득한 시선.

끈적하게 내 몸을 훑는, 욕망이 흘러넘치는 시선.

어느 쪽이든, 역겹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그저 그들을 노려보곤 했다.


거의 노예상에게 끌려오다시피 한 손님은

멈춰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내 얼굴을 보는가 싶더니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다가,


"읏..."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하, 멋모르는 귀족가 자제인가.

노예생활하면서 늘게 된 것은 작은 요소만으로도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늘었다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키도 꽤 작아보였다.

노예상도 그걸 눈치챘는지, 

벌써부터 바가지를 씌우기 위해 밑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손님? 극상품이지 않습니까?

요즘 이러한 매물 찾기 정~말 힘듭니다!

더군다나 손상이나 성격 상에 문제도 없어요!

엄선한 루트로 마련한 것이라 손도 대지 않은 그야말로 궁극의 상품입니다!

다른 곳에서 바가지 쓰실까봐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 멘트의 90퍼센트는 사기였다.

봉 한 번 제대로 털어먹겠다는 저 욕심 그득한 눈빛에

나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님은 노예상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사겠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가격은 그럼..."

"얼마죠?"

"2000헤르 쯤은 받아야..."


2000헤르.

현재 세계 공용으로 통용되는 금화다.

모험가들의 의뢰 보수는 일반적으로 동화인 포터로 시작한다.

100포터가 은화인 1론.

그리고 일반적인 노동자의 1년 연봉이 보통 50론 정도다.

그리고 그 론이 100개 모여야 비로소 금화인 1헤르의 가치가 된다.

조그마한 집 한 채가 10부터.

작은 농장 하나가 대략 50.

대저택 하나가 최소 100부터 하니...

2000이면 얼마나 바가지를 씌운 건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돈이면 거래 성사 후 노예상을 접어도 노후 걱정을 접어도 될 정도였다.


"좋습니다. 그 가격으로 하죠."

"네...그럼 얼마부...예?"


원래 이 바닥에서는 흥정이 기본이기에

다소 과한 가격을 먼저 부르는 게 일반이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바로 손님이 승낙하자,

노예상도 당황했는지 순간 말을 더듬었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혹시 지불할 능력이 되시는지...?"


정신을 차린 노예상은 손님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2000이면 아무리 귀족 자제라 하더라도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귀족가의 당주 본인이 온다면 모를까.

의심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스윽.


"이...이건..?"

"무게 때문에 그만큼을 현금으로 가지고 오지 않아서요..

500헤르를 넘는 금액은 요즘에는 이런 방식으로 거래를 한다고 하던데..."


금화가 아니라 웬 종이쪼가리가 나오자 당황한 노예상이었지만,

증서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길드가 주관하는 연방 은행의 증표가 찍혀 있는 문서.


"확실히 그렇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정 의심 가시면 여기 선금으로 100을 치를테니 가서 확인하시죠."

"아, 예! 예!"


철그렁.


묵직한 금화주머니를 받아든 노예상은 자신의 부하에게

이 자리를 지키도록 명령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색이 만면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굽신거리며 손님에게 인사했다.


"아이고~ 손님! 제가 귀인을 몰라뵙괴 그만 무례를!!"

뭐, 더 필요하신 건 있으신지?

아니면 다른 노예 몇 명을 서비스로 붙여 드릴깝쇼?"

"됐습니다."

"아니면 다른 서비스라도?

노예문에 조건을 걸 수도 있습니다요.

특정 단어로 최면을 건다던지, 발정을 시킨다던지 하는 그런..."

"됐습니다. 정 그러면 대형 마차 하나만 수배해주세요."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노예상은 내 족쇄를 풀고 새 주인에게 소유권을 이전하기 위해

노예문 갱신 작업을 하러 새 주인과 나를 옆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새 주인의 맨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

나와는 나이 차이가 족히 150살은 날 법해보였다.

순수하게 빛나는 밤색 눈이 이 곳의 살풍경한 분위기와 대비되었다.


다만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후드 안쪽의 옷은 그리 좋은 재질인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손에 흉터와 굳은 살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귀하게 컸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이 사람은 내 주인이고, 외견만 이럴 뿐,

실상은 잔혹하기 그지없는 악취미를 가진 사람일 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경우를, 난 경험했다.

순수하기 그지 없어보이는 표정으로 날 능욕하는 걸 즐기던 이전 주인을.


"크윽...아흑..."


노예문을 갱신하는 의식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배를 지지고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것만 같은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에 나는 이를 갈았다.

이 어려 보이는 새 주인을 구슬려 자유를 되찾으리라고 다짐하며.


"자, 다 끝났습니다.

마차도 밖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노예문 갱신의식이 끝나자마자,

노예상은 우리를 바깥의 마차까지 배웅하고는 쏜살같이 돌아가버렸다.

보아하니, 이제 장사를 접을 듯했다.

내가 다시 반품되어 돌아와도, 먹은 금액만 삼킨 채 책임지지 않고

이 바닥에서 손을 떼려는 모양이었다.


"......웨인 크로프트로 가주세요."

"예이."


노예상이 어쨌든 내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그가 제발 번개에 맞기를 빌며, 나는 이후의 내 운명에 대해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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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어주세요."

"?"


걱정과는 달리, 내게 내려진 첫번째 명령은 몸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예상 외의 명령에 나는 당황해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의 명령대로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뭐, 뭘 시키든 깨끗해 보이는 게 좋겠지.

주인 쪽에서도. 그를 구슬려야 하는 내쪽에서도.


마법으로 데워진 온수에 몸을 헹구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거금을 치른 것 치고는 집이 평범한데, 뭐하는 사람이지?'

'애초에 집안을 보니 혼자 사는 것 같은데...

어린 소년이 혼자 산다고? 그만한 돈을 숨기면서?'

'뭐가 됐든 나한테는 이득 아닐까? 구슬려서 도망치기에는 딱이잖아.'


그리고 그 생각들 사이로 슬금슬금 한 가지 생각이 피어올랐다.


'이번 주인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물과 함께 그 생각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인간에게 당하고서도.

또 그런 바보같은 희망을 가지다니.

마족 이상으로 거짓말을 잘하는 게 인간인데.


똑똑.


그러던 와중에,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주인인 소년이 들어왔다.

갑작스런 개입에 나는 놀랐지만, 이내 납득했다.

아, 벌써 그렇고 그런 걸 시키려는 거구나.

역시 그걸 위해 씻으라고 한 거였나.

그래...결국 이번 주인도 똑같...


"씻겨줄게요. 가만히 있어 주세요."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조심스레 거품을 낸 비누로 

내 몸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최대한 내 몸으로부터 시선을 피하면서 말이다.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욕망에 찬 시선을 마주하던 나에게는 매우 낯선 일이었다.

그의 모습은 뭐랄까...정말 순수한 소년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몸의 비누거품을 헹구고는 그는 도망치듯 욕실을 나갔고,

나는 예상을 자꾸 벗어나는 상황 전개에 잠깐 멍해 버렸다.


"대체 뭐지..."


몸을 다 씻고 나올 나오니, 

탁자 위에 내가 입을 옷이 놓여져 있었다.

하늘하늘하고 보송보송한 부드러운 재질의 옷.

보아하니 지금 막 가서 새로 사온 듯 했다.


"사이즈는...그 눈대중으로 맞춘 거라 불편할 수도 있어요..

불편하면 나중에 더 큰 걸로 마련해줄 게요.

오늘은 지쳤을 테니 쉬어요.

침실 침대에서 자면 돼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노예에게 이렇게까지 한다고?

이런 주인은 지금까지 겪어본 적도 없고...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나에겐 좋은 일이니.

나는 얌전히 침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네?"

"침대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만..."

"아, 아! 침대는 조만간 하나 더 들여놓을 거에요.

일단 거기서 자세요. 저는 소파에서 자면 돼요."


계속되는 호의에 나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의심하며 자리에 누웠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맛보는 편안함과 따뜻함에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세레스티아!"

"정말, 쟤한테 책 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어허! 멋모르는 꼬마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쳐주지 말아라."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고향의 꿈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어 뛰쳐나온 고향이었건만,

끔찍한 노예생활을 겪다보니, 그곳이 그리워졌다.

최소한 그곳에서는 고통받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도, 풍경도 모두 희미했다.

물감이 번진 것만 같았다.

위화감이 엄습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허억!"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떠올려냈다.


침실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소년이 등을 들고 침실로 왔다.


"비명 소리가 들려서요."


보아하니, 내 비명 때문에 깬 듯 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악몽이라도 꿨나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하는 그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던 가증스런 이전 주인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나를 능욕하고는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롱하던 얼굴.

나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공격 마법을 날렸다.


"!!!"

"아..."


빛의 창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는 도망도, 방어도 하지 못했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아차 싶어 황급히 마법을 끊었고,

다행히도 창은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흩어졌다.

그는 뒤로 주저앉았다.


".....미안해요."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작게 떨렸고,

얼굴은 미소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제가...너무 무신경했네요.

멋대로 들어오고...

내일도 크게 시킬 일 없으니까 편히 쉬어요."


뒤돌아서서 방을 떠나려는 

그의 다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떠나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이대로 떠나게 두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잠깐만...곁에 있어주실 수 있나요?"

"....네."


갑자기 붙잡힌 그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돌아와 침대 옆에 앉았다.

나는 그런 그에게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머리를 숙이며 여러번 사죄했다.

그런 나에게 그는 손사래를 치며 결국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망가진 것도 없으니,

그건 잊어도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는 주인이었다.

묻고 싶은 게 여럿 있었지만,

나는 지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가장 큰 의문에 대해 물었다.


"왜 노예문을 쓰지 않은 건가요..?"


내 배 쪽에 자리한 노예문은,

주인의 말에 노예가 절대복종하도록,

그리고 노예가 주인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마법이다.

주인이 발동시키기만 해도, 끔찍한 고통이 엄습한다.

노예가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냥 이걸로 노예를 처분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크게 다칠 수 있었던 방금 전에도,

노예문을 쓰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취소하지 못했다면 최소 중상이었을 텐데.


"굳이 그런 걸...써야 하나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전 당신을 그렇게까지 해서 통제하고 싶지 않아요."

"........."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의 반짝이는 순수한 밤색 눈동자에서는

다른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제 이름은 아인이에요."

"저는 세레스티아 에른홀트에요.

이름이 기니까, 편하게 불러주셔도 됩니다."

"네, 세레스티아 씨."

"마음대로 하세요. 노예의 호칭은 주인의 재량인 걸요."


내 마지막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입 꼬리가 내려간 그였지만

그는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자, 이거 받으세요."

"....팔찌."


푸르스름한 돌이 대충 가공된 채로 박혀 있는,

투박하고 오래된 듯한 팔찌였다.

겉의 도금의 일부는 이미 일부분 떨어져 나가 있었다.


"제가 이전부터 쓰던 거에요.

저도 악몽을 자주 꿨는데, 

이걸 끼고 나서부터는 훨씬 덜하더라구요."

"..."


나는 못미더운 눈빛으로 팔찌를 쳐다보았다.

이런 물건에 그런 효능이 있을 리가.

그러다가 나는 자신의 행동이 무례하게 비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표정을 바꿨다.

하지만 그는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내가 그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는 말을 이었다.


"세레스 씨를 산 건,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서에요.

이 집이 그리 큰 건 아니지만, 저 혼자 살려니 항상 치우기는 어렵더라구요.

먹는 것도 대충 해먹기도 하고.."

"......."


그럼 다른 노예를 사는 게 훨씬 더 싸게 먹혔을 텐데 대체 왜?

이렇게 대해주면 다른 노예들은 발을 핥더라도 당신의 노예를 하려고 할 텐데.

라는 의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럼, 쉬세요."


소년이 다시 소파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누웠다.

그에게 받은 팔찌를 들어올려 쳐다보았지만,

낡고 투박하다는 것 외에는 딱히 특이한 게 없었다.

마법이라도 걸려있나 싶었지만,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주인들이 자신에게 준 것 중에 좋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의심이 들지 않았다.

의심이 든다면 과연 이걸 낀다고 악몽을 꾸지 않을까 하는,

효능에 대한 의심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도 헛되이,

나는 금세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정말 악몽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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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딱. 똑. 딱.


나무로 만들어진 시계에서 나는 타공음이

조용한 오후의 실내를 메웠다.


"..........후우."


내가 소년의 집에 노예로 온지 세 달이 지났다.

나는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시계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손댈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남성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깔끔하게 사는 편이었기에,

대청소를 첫 주에 하고나니 딱히 더 치울 만한 곳도 없었다.

그저 매일 하릴없이 바닥을 가볍게 쓸고 닦으면 그만이었다.


다른 집안일이라 해 봐야 두 사람몫의 빨래와 요리인데...

청소를 포함해도 넉넉잡아 반나절이면 끝났다.

그런 집안일마저도, 가끔 그가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내 집안 일을 뺏어서 해치워버리곤 했으니...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이래서야 주종관계가 뒤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통받으며 자유를 꿈꾸던 요 몇년간에 비하면 사치스러울 수준의

고요하고,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이미 자유를 쟁취하고 말겠다던 내 다짐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나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집에서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을 나를 위해

책을 여러 권 가져다 주었지만,

고향에 있었을 때처럼 재밌지 않았다.


노예인 자신에게도 존댓말을 해 주는 싹싹한 성격의 그가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외로움이라도 느끼는 걸까. 예전의 자신이었으면 코웃음칠만한 일이었다.

가끔 가다 잠이 안 오는 날 밤이면,

그는 내게 엘프에게 전승되는 옛이야기 같은 것을 들려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잠들어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행동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도 분명 있었지만

순수하고 아직 어린 면이 더 많아 보여서, 내 안의 모성을 자극하곤 했다.

뭐, 나는 미혼이지만.


터벅, 터벅.


문간에 울리는 반가운 소리에 나는 그를 맞으러 나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어.


"돌아오셨나....어?"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어깨에는 화상을 입었고, 붕대로 대충 감은 머리 쪽에서는

피가 아직도 배어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옷은 이곳저곳 찢어져 엉망인 상태였다.


황급히 그를 침대로 옮긴 나는

머릿속을 뒤져 잊어가던 치유마법으로 응급처치를 했다.


"안 돼...제발..."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곁을 지키며 마법을 걸었다.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닐까?

내가 술식을 잘못 기억했나?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조금 지나자, 숨소리도 안정되었고 신음도 잦아들었다.

고비를 넘긴 듯했다.

그제서야 나는 의사를 불러 그의 치료를 맡겼다.


"..........으"


그가 침대에 누워 잠만 잔지 이틀 쯤 지났을까.

그는 눈을 떴다.

그 소리에 나는 헐레벌떡 침대로 달려와 손을 잡았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그는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나를 껴안았다.

애착 인형을 뺏기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날 붙든 그의 작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갑작스런 그의 포옹에 놀랐지만,

그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남아주셨네요."

"노예가 주인 두고 어딜 간다는 건가요."

"내가 죽었으면, 자유의 몸이었을 건데."


실제로 그랬다. 주인이 죽으면, 노예문은 효력을 잃기 때문에.

만약 그를 치료하지 않고 죽게 놔뒀다면,

이곳을 탈출해 자유의 몸이 되겠다던 내 목표는

그를 구슬릴 필요도 없이 달성되는 셈이었다.

다른 노예였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두었겠지.

물론 그것도 그가 악독한 주인이었을 때의 얘기지만.


"...이대로 좀만 더 있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주인님."


평소에 잘 보여주지 않는 아이같은 취약한 모습.

그런 그의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그는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제가 얼마나 잔 건가요?"

"꼬박 이틀이요."

"이틀..."


그는 조용히 되뇌이며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얘기해주어야 할 게 있지 않느냐는 표정이시네요."

"그렇게 티가 났나요?"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그는 내 표정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그...뭐시냐...

앞 내용을 좀 소설처럼 바꾸다 보니까..어...

여기서 끊게 됐어! 오늘 밤에 진짜 2편 꼭 써올게!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줘!

그 쇠사슬이랑...화형대랑...밧줄은 내려놓고 얘기하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