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벚꽃은 다 지고 이제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며 사람들의 옷소매가 짧아지는, 여름의 초입


언젠가 봤던 흩날리는 벚꽃잎은 이제 전부 사라지고 버찌가 맺히며, 사람들의 이마에 구슬땀도 송골히 맺힌다.


그럼에도 나는, 이 거리에 서면 항상 벚꽃 사이에 있는 느낌이 든다. 작년이고, 재작년이고, 아니면...


'쓸데없는 감상이려나.'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지운다. 그렇다고 그 기억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 하고 싶다.


어쩌면 죽기 전까지 남을 기억이 아닐까. 청춘을 내달리던, 아니, 내버리던 어느 한 소년의 삶이 바뀐 날일지도 모르니까.



**********



"... 올해도 벚꽃이 활짝 피었구나."


학생의 본분은 무엇인가. 공부? 아니면 친구와의 교우? 그것도 아니면, 진로 탐색?


그 무엇을 말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학생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아니, 그걸 당당하게 말하면 안될 것 같지만 아무튼.


늦은 사춘기라도 온 건지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학교를 땡땡이치고 그저 산책을 나온 한 소년이 바로 나였으니까.


교우관계가 나쁜 건 아니다. 공부도 잘 하고 있었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남들에게는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부모님도 닦달하진 않으셨지만 내심 뿌듯해하며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같으면서도 나 스스로 공허해지는 감각은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열정을 태우는 것도 내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불에 옮겨붙어 이제는 서서히 꺼져가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조차 어느 순간 꺼졌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라고 하기에는,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을 사유였다.


어른들은 아이의 일탈에 사유를 붙여 정당화하는 것보다, 본분을 다하지 않음에 벌을 주는 걸 더 쉽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벌이 두렵지 않느냐 하면, 글쎄.


공허해진 이 마음에 타인의 분노가 들어와도, 채워질 수 있을까?


그저 지금은, 잠시 본분에서 벗어나 나 스스로 뭘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며 걷고, 또 걸을 뿐이다.


그렇게 흩날리는 벚꽃을 헤치며 걸어가니 보이는 건 평일임에도 나와서 청춘을, 봄을 만끽하는 사람들과 순수하게 웃으며 벚꽃잎을 잡아 친구에게 주는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것 말고도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라던가, 벤치에 앉아 서로 기대고 있는 연인이라던가.


그 사이에 이질적인 건 아마도 내 존재겠지. 무언가를 만끽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쫓기다 잠시 도망친 내 존재가, 이 사이에 이질감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 전화."


지금 전화가 울리는 것도 선생님이 전화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기를 꺼내니 정말로 선생님이었다.


"... 오늘은 잠시 나쁜 학생이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짧막하게 말을 남긴 후 전화를 끊었다. 이후 2번 정도 더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제는 더이상 전화가 울리지 않는다. 아마 부모님이 따로 연락을 취한 거겠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부모님의 문자가 왔다.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만 있거라. 집에 오고 싶으면 오고. 하루 정도는 학교 빠져도 되니까. 단, 진도는 네가 알아서 챙기렴.]


자식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식을 잘 믿는 건지... 짤막하게 [네]라는 답장을 남기고 다시금 거리를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벚꽃이 제일 많이 흩날리는 곳에 온 것 같다. 다리는 슬슬 무거워지고, 휴식을 취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 거리를 걸으며 내 감정이 채워졌는가 하면, 아마 약간은. 하지만 다시금 빠져나갈 감정일 것 같다.


이질적(異質的)인, 그러기에 섞이지는 못한. 사회의 시선에서는 평일 낮 시간에 교복을 입고 거리를 나도는 학생을 좋게 봐주는 어른은 없을 거니 당연한 걸지도.


난 그런 어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본분은 무엇이며, 청춘은 무엇인가.


앉을 곳도, 기댈 곳도 아직 찾지 못한 이질적인 존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벚나무 아래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 잠은 자지 않는다. 그저 관망하고 또 관망한다.


"나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혼잣말을 하며 다시금 감정을 되새긴다. 공허해진 마음 속에 채워지는 감정은 덧없고 또 스쳐지나가지만, 잠깐의 채워짐조차 위안이 되는 지금이라면, 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들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위로가 되겠지.


바람이 약하다. 벚꽃은 그럼에도 떨어진다. 만개한 벚꽃 사이 만개한 사람들의 웃음에 무표정이 하나. 풀 컬러 세상에 모노크롬 하나.


그럼에도 모노크롬은, 컬러를 꿈꾸는 거겠지. 이진법이 아닌 십육진법 여섯 자리로 표현할 수 있는 스스로를.


"아름답네..."


다시금 혼잣말. 하지만 그 말조차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른 걸까. 갑자기 강해진 바람은 하나, 둘 흩날리던 벚꽃잎으로 시야를 가렸다.


잠시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약간의 분홍빛을 머금었다 해야 할까.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벝나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올리다, 바람이 잦아들더니 내 시야는 벚꽃잎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가리고 있었다.


"... 누구시죠."

"... 지금 이 시간에 학생이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데요."


힘없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흔한 어른이 할 법한 말을 한다. 하지만, 목소리는 어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또래라 생각할 정도.


게다가, 그 말을 하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 그러니까, 소녀는 솜사탕 두 개를 들면서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었다.


"풋."

"... 우, 웃지 마세요!"

"학생이 그러면 안된다면서요. 그런데, 저랑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설득력이 없는데요?"

"그, 그러니까... 청춘! 청춘을 즐기는 거에요!"

"솜사탕 2개로 즐기는 청춘이라면, 가성비가 좋은 것 같네요."

"으으..."


조금은 엇나간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약간은 독특하다고 해야 할까.


이것이, 어딘가 나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스스로를 다채롭게 드러내던, 풀 컬러의 소녀와의 첫만남이었다.



*********


"벌써 몇 년이 지난 걸까. 난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뒤로 하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아, 뒷이야기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우리 학교의 부학생회장이라는 걸 알게 된 정도.


생각보다 평판이 좋았던 나와 그녀였기에 선생님들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며 약간의 경고로 끝났다.


진도는... 서로 나가지 못했던 진도를 빌미로 같이 공부하다보니 조금 많은 부분의 선행학습이 이루어졌다.


보건체육 부분은 절대 아니다. 진짜로, 진심으로. 맹세코.


그 때를 회상하며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벚나무 아래에 앉아 몸을 기댄다.


잠시 눈을 감는다. 다시금 바람이 분다. 그 때의 기억에 맞춰 세상이 또 물들어간다.


다만 그 색은 모노크롬의 흑백 중 백색만 가득한게 아닌, 십육진법의 어느 색이었다. 그래, 분홍색. 분홍색일 거다.


그리고 이럴 때면, 이 다음의 장면이 바로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는 그 때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기다리고 있었어, 여보."

"미안, 오래 기다렸어?"


다만, 서로의 말은 조금 많이 달라진 채로.


두 개의 솜사탕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학생 때의 모습과 달라져 있었다. 다만, 잘 정리된 흑발과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다.


아마 여기에서 제일 많이 달라진 건 내가 아니었을까.


여러 색채로 나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에 거부감이 없게 되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솜사탕을 하나 가져간다. 예전에는 건네준 걸 받았지만, 이번에는 2개를 사 온 이유를 뻔히 알았으니 그녀도 웃으면서 건네주었다.


솜사탕의 맛은, 참 달았다. 그 때 그 맛보다도 더. 똑같은 단맛도, 색채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화보 찍는 줄 알았네. 그래서, 나 기다리는 사이에 무슨 생각 했어?"
"전여친 생각."

"흐음~? 대담하네, 아내 앞에서 그런 말도 하고?"

"사랑했으니까. 아직도 첫 만남을 잊을 수가 없는걸."


눈매를 살짝 올리고는 뭔가 요망하게 웃는다. 예전에 남아있던 약간의 딱딱한 모습이라던가 당황하던 귀여운 모습은 조금 줄었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지.


게다가, 다 알면서 그러는 거였으니 그녀도 나도 그러려니 한다. 낯부끄러운 건 맞지만.


"그러면, 전 여친이랑 현 아내 중에 누가 더 예뻐?"


하지만,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대답을 늦춘다. 대답은 정해져 있지만, 그걸 말하는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여보야? 누가 더 예뻐?"


이제는 내게 더 달라붙으면서 이런 말을 하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답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현 아내."

"당연한 대답이네. 왜?"

"... 그 때보다, 지금 더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원하는 답을 들은 아내는 기뻐하며 나에게 더욱 달라붙는다. 5월의 햇살에 맞춰 약간의 더위가 느껴졌지만, 그게 무슨 대수일까.


흑백의 소년은 이제 없다. 컬러풀한 부부가 남아, 다시금 거리를 거닌다.


첫 만남에, 같이 손을 잡고 걸었던 그 때를 떠올리고 다시금 손깍지를 끼며 다음 봄날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