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요..."


나는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다

그녀를 쳐다보았다.

세달 전 산 엘프노예.

금발에 키가 크고 아름다운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흔들었다.

은은한 달빛이 연극 무대위의 조명처럼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노예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물론 내 멋대로 그렇게 여기는 것뿐이지만...


나는 다소 복잡한 기분이 섞여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까지는 읽지 못한 듯했다.

이야기를 꺼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정작 말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얘기를 듣고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경멸할까? 이해해줄까? 그것도 아니면...실망하며 떠나고 싶어할까?

하지만 이미 꺼낸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노릇.

천천히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제가 나이 얘기를 했던가요?"

"아니요. 하신 적 없습니다."

"어디보자...올해로 16살이네요. 

다다음 해면 성년이에요. 별 의미는 없지만."

".....그래보입니다."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스티아 씨 나이는..."

"......"


그녀의 움찔하는 표정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묻지 않을게요. 

엘프시기도 하고...

여성에게 나이를 묻는 건 실례라고 들었으니까요."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장난은 이쯤하고...본 이야기로 들어가볼까요.

제 나이를 알게 되셨으니, 하나 떠오르는 의문이 있을 거에요."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묻지 않았을 뿐. 생각하고 있었구나.


"자금의 출처....이런 어리고, 체격도 작은 소년이.

2000헤르라는 엄청난 거금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지불할 수 있었는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용서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런 떨림을 감춘 채.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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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 잡아라!"


내 생애 첫 기억은,

누군가의 고함소리로부터 시작한다.


고아.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를 말한다.

그게 바로 나였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 때쯤엔,

이미 나는 거리에 내던져져 있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어딜가나 이런 아이들은 존재했고,

그 중 하나가 나였다.

이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다.

뒷세계에 몸을 담거나,

빌어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하거나...

그도 아니면 몸을 팔거나.


그날도 나는 오늘을 살아남기 위해,

빵을 훔쳐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비쩍 곯은 아이의 다리로는

건장한 남성을 따돌리기는 무리였고,

얼마 가지 못해 잡혀 흠씬 맞고 말았다.

훔친 빵을 도로 빼앗긴 건 물론이다.


"으...."


나는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터덜터덜 뒷골목을 걸었다.

어느새 어둠이 거리에 내리고,

기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자비없는 찬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가자,

나는 뼈가 시린 느낌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다시 찾아온 가을은,

나같은 부랑아에게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하루하루 쌀쌀해지는 날씨로 우리에게 곧 겨울이 올 것임을 경고하며,

대비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비책 따위 있을리가.


".........."


건물의 창문 너머로, 행복해보이는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의 품속에서 꺄르르 웃고 있는 내 또래로 보이는 어린아이.

난로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부모.


나는 왜 저러지 못했을까.

무슨 차이가 있기에.

그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보다가,

그들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창문에서 손을 떼고 허겁지겁 그 골목을 벗어낫다.

그들이 쫓아올까봐 두려워서였다.


"아..."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이 희미해지고,

세상이 빙빙 돌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음식을 입에 마지막으로 댄 것이 이제 3일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게 죽음이라는 건가....

나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고통뿐인 나날의 연속이라면.

지금 끝나는 게 낫겠지.


털썩.


차가운 도시의 돌바닥이 나를 맞이했다.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일 기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순간 주마등이 스쳐지나간다는데,

내게는 떠오르는 게 하나 없었다.

하긴, 행복했었던 기억이 있었어야 말이지...


몇 시간 뒤.


"야, 일어나."

".............."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내가 누워있는 곳은 도시의 차가운 돌바닥도,

뒷골목 구석의 더러운 거적떼기도 아닌

제대로 된 이불 속이었다.

낡긴 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것보다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꿈인가...?"


영문을 모르겠던 나는 볼가죽을 꼬집어봤지만,

아픔만 느껴질 뿐이었다.


"형님, 이 녀석 좀 보세요.

여기가 꿈인 줄 아나 본데요?"

"내비둬라. 주워온 애 하루이틀 보냐?"


킥킥거리는 호리호리한 남성과

거구에 근육질인 애꾸눈 남성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동굴에 가까운 흙벽...범상치 않은 도구들...

약간 매캐한 냄새까지...이곳이 대충 어디인지 짐작이 되었다.


"여기가....뒷세계..."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어? 그래도 이놈은 눈치가 빠르네요.

좀 쓸만하겠는데요."

"레온 녀석이 사람 보는 눈은 탁월하잖냐.

가서 설명해줘라."


아까 나를 보며 웃던 호리호리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나를 놀릴 생각으로 가득해보였다.


"어이, 신입. 이제 여기 규칙을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커억?!"


나는 규칙을 설명하려는 그에게 펀치를 날렸고,

예상 외의 일격에 그는 제대로 복부를 맞아 뒤로 넘어졌다.


"?????"

"뭐, 뭐야...이 자식..."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의 이목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어...뒷세계에서는 얕보이면 끝장이라고...그러던데..."


나는 예상과는 뭔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무안해져 머리를 긁었고, 이내 침묵은 두 남자의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와하하하하하! 이거 재밌는 놈이 들어왔구만!"

"이, 이자식! 기껏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놈을 살려줬더니,

다짜고짜 주먹질을 해? 죽여버리겠다! 죽여버릴 거라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내게 달려드려는 것을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이 뜯어말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의자에 앉아있던 애꾸눈의 거구 사내가 내게 다가왔다.


"여기서 얕보이면 끝장이라고?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잘 배웠군.

마음에 들어. 이름이 뭐지?"

"이름은 따로 없는데요."

"그것도 그렇군. 이름조차 주지 않은 채 버려지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어디보자...뭐라 부르는 게 좋을까..."


그는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아인' 이다.

뒷세계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 아인."

"어....네."


그 남자의 악수를 받아들인, 이 날을 기점으로 나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나는 빠르게 그들의 생활에 적응해 갔다.

아무리 무법천지라 불리는 뒷세계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수많은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

나는 그들의 룰을 배우며 금세 그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빅터라 불리우는 이 거구의 사나이는 이 뒷세계에서 나름 거물이었다.

그의 조직은 이 뒷세계의 세력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그는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재능 있는 부랑아들을 정보원을 통해서 확보해 키우는 것으로,

자신의 세력의 추가적인 확장을 도모했다.

그리고 그 레이더에 나 또한 걸린 것이었다.


나를 눈 여겨본 그는 마침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사업에 나를 이용하려 했다.

그것은 바로 지하 투기장이었다.

용병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은 시기에 유행했다가 가라앉아버린 그것을 부활시켜

새로운 자금줄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원래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범적으로 도입해본 지하 투기장이 대호황을 기록했기에,

그는 이번에 본격적으로 지하 투기장을 운영해 한 몫 잡아보려 했다.


내 스피드와 반사신경을 유심히 지켜본 그는

나를 지하 투기장의 선수로 키웠다.

그리고 나는...재능이 있었다.


"뭐야 이 쥐방울만한 건?

어이, 이런 거랑 경기하라고 날 내보낸 거야?"

"어린 아이를 쥐어패는 취미는 없지만, 

경기는 경기니까...날 원망하지 마라."


상대 선수들은 호리호리하고 빈약해보이는 나를 보고

코웃음을 치며 펀치를 내지르곤 했지만,

나는 그런 공격들을 어렵지 않게 피하고는 치명타를 가하곤 했다.

내게는 그런 것들이 보였다.

날아오는 펀치, 던지는 돌, 발사된 마법의 궤적이 눈에 보였다.

내가 스카웃된 이유도 쫓기면서 화난 빵집 주인이 집어던진 물건들을

죄다 피한 것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온이 거물을 데려왔구만."


경기를 지켜보던 빅터는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앞으로 더 커질 자신의 사업을 위해 해야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그의 뒤로,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관객의 환호성과 욕설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나는 그의 지하투기장의 간판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치란 것을 느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존중해 주었으며,

잠자리도 식사도 고급으로 바뀌었다.

매우 낯선 느낌이었지만, 나는 아무렴 좋았다.


사람을 대했을 때, 욕설이 날아오지 않고,

잠에 들었을 때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며,

배고픔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딱히 나는 야심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빅터가 나를 신뢰하는 이유가 이런 내 성격 때문일지도 몰랐다.


빅터의 지하투기장의 규모는 점점 커져서,

조직의 중요한 자금원으로 급부상했다.

처음엔 맨손 격투만 허용이었지만,

관중의 재미를 위해 무기도, 마법 사용도 허용되었다.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도 잇따랐지만,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국지적으로 있던 다른 작은 규모의 투기장은

전부 흡수당했고, 자연스레 빅터의 조직이

뒷세계의 최고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이제 그는 지상의 권력에도 손을 뻗치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 빅터 씨, 이 분이 당신이 자랑하는 그 전설적인 선수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레벤토 경. 명실 상부 제가 자랑하는 최고의 투사이지요."


내가 연습하는 곳에 빅터와 다른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이 지방의 유력자로서, 왕실과도 연이 닿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더니, 내 몸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젊음이란 건 좋군요, 늙은이인 저로서는 이런 혈기 넘치던 때가 그립기만 합니다.

저도 왕년에는 한 주먹 했었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군요."

"오히려 저야말로 이 젊은 친구가 링 위에서 어떨지 궁금하군요.

실례일 지도 모르지만, 명성에 비하면 다소 평범하고 왜소한 체격인데."

"하하, 그렇게 생각하다 많이들 큰코 다치곤 했습니다.

조만간 이 친구의 진가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내가 연습하는 것을 구경하더니,

조만간 경기를 보러 가겠다며 작은 보따리를 놓고는 떠났다.

나는 딱히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유력자건 뭐건,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난 그저, 그날 내게 정해진 승패에 따라 경기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얘기가 다른 듯 했다.


".....호출? 빅터 씨가?"

"그렇습니다. 지금 바로 와달라는 전언입니다."


그가 나를 직접 호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 어서 오게.

시합 전인데 늦은 시간에 불러 미안하네."


그는 잠깐 뜸을 들이는 듯 하더니,

이내 얘기를 시작했다.


"저기 뒤에 성벽 보이는가?

지하생활만 하던 우리가 지상에 올라온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네.

이 곳으로 우리 본부를 이전했을 때가, 내 꿈의 첫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지."

"딱히 오래되진 않았는데 말이죠."

"뭐, 감상이 그렇다는 게지.

자네는 여전하군. 꾸밈없이 솔직해.

그 점이 참 좋아."

"....."


그 답지 않게, 서론을 빙빙 돌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 본론이 뭐냐는 표정이로군.

저번에 훈련장에 왔던 레벤토 경을 기억하나?"

".....기억합니다."

"나는 그와 일종의 동맹을 맺었네.

같은 편이라는 의미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였거든."

"저는 정치적인 일에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습니다만."

"말을 끝까지 듣게. 그 쪽에서 의뢰를 해서 말이야."


다음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링 위에서 사람을 죽여주게."

"그게 무슨..."

"레벤토 경의 반대파 중 한 사람이 투기 스포츠의 광팬일세.

이번에 이벤트 매치에 참가하게 만들걸세.

링 위에서 격투하다 사망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

사고사로 위장하기 좋지 않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는 뒷세계에 있으면서도,

더러운 일을 하지 않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로 올 줄이야.


"고민하는 표정이군."

"..........."

"미리 말해두지만, 선택권은 없네.

내 약속하지. 이번 한번 뿐이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그는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먼저 자리를 떴다.

거절하는 것이 옳았을까.

거절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잊고 있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절했다면, 몸 성하진 않았겠지.

빅터가 어찌어찌 봐준다 할지라도,

레벤토 쪽에서 손을 쓸 게 뻔했다.

비밀이 누설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이니까.

나는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투기장에 오신 신사, 숙녀 여러~~~~분! 환영합니다!"


사회자의 요란한 인사가 내 귓 속을 울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고민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오늘은 무려 이벤~~~~트 매치!가 진행됩니다!

현장에 있는 왕년에 힘 좀 깨나 썼다 하는 여러분들을 위한 이벤트죠!

무려, 이 링의 챔피언! 우리의 '작은 거인'! 아인과 대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와----


사회자의 말에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생각에 잠긴 나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팔을 들어 관중의 함성에

기계적으로 호응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챔피언의 도발로 비친 모양이었다.


이윽고 3명의 당첨자가 링 위로 올라왔고,

관중 속에서 빅터가 손을 들었다.

'이 자가 타겟이다'라는 표시.

호기롭게 달려드는 젊은 남성을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번 한 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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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욱..."


헛구역질이 났다. 항상 그랬다. 

가끔 꾸는 악몽에서도, 이 장면은 항상 나를 괴롭혔다.

실로 끔찍한 장면이었다.

빈틈을 노려 찌른 단검은 남자의 복부를 정확하게 관통했고,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잔뜩 날을 세운 검은 내 힘과 상관없이

그의 복부의 일부를 열어젖혔다.

그가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듯한 관객의 비명,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죽은 자의 내장과 피.

다급하게 의사를 부르는 심판.


"우웨에에엑..."


나는 도저히 그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뒤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광경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엉금엉금 기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나는 바닥에 내 모든 것을 게워냈다.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다시금 머릿속에 그 때의 광경이 떠올라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아요?"

"아마도...우욱..."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아직 환자입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매는 중상을 입었던."


식은 땀을 잔뜩 흘리는 나를 보며

그녀는 걱정스레 수건으로 내 이마를 훔쳐주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지만,

그녀는 못 본 체하며 등의 땀을 닦아주었다.


"이제 좀 괜찮나요?"

"네...고마워요."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그곳에서 빠져나온 건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산 돈은...그 때 번 돈이구요."

"....맞아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다지 놀라지 않으시네요."

"조금은...예상을 했으니까요.

이름에 성이 없는 경우는...대부분 버려진 아이들 출신이니까."

"아."


나는 오히려 그녀의 반응에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환경이 그랬다지만, 살인을 한 사람인데도..

그녀는 경멸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눈 뜨고 보았던 걱정스러운 얼굴 그대로 내 얼굴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반대로 그럼 제가 물어보죠."

"네, 무엇이든."

"왜 저를 산 건가요?"


내가 예상한 가장 껄끄러운 질문이 그대로 들어오자,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고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딱히 많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가정부나, 그냥 일반 노예를 사는 게 훨씬 싸게 먹힐 텐데..."

"........."


그 말대로였다. 

가정부를 고용해도, 그것도 고급 가정부...흔히 메이드라 불리는

전문 사용인을 고용해도 1년에 그녀의 몸값의 100분의 1도 안 될 터였다.

넉넉잡아 50헤르면 노예 시장에서 가정부 대용의 노예를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어요."

"예?"

"세레스티아 씨를 처음 본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름모를 감정을 그녀에게 토해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한 번 떼어진 입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가격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당신을 본 순간, 가슴이 뛰고, 멍해져서....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저...그녀에게 솔직하게 내가 품은 감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첫날 밤에 세레스티아 씨가 저를 공격했을 때...기억 나나요?"

"....기억합니다. 왜 노예문을 쓰지 않았는지 물었었죠."

"맞아요, 그 말 그대로에요.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당신을 굴복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억지로 제 곁에 붙잡아두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뺐다.

차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얼굴이 지금 어떤 모습일지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새 저는 당신에게 여러 가지를 바라고 있었어요.

나를 이해해주었으면.

나를 받아들여주었으면.

나를....싫어하지 말아주었으면."


눈물이 흘렀다.

왜 흐르는 지는 나도 몰랐다.

그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쏟아내서일까.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그녀가 진심으로 날 싫어할까 봐.


"웃기는 말이죠.

노예문 때문에 거부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다니. 위선적이기 짝이 없어."


나는 침대 옆의 서랍에서, 도장처럼 보이는 마도구와 단검을 꺼냈다.


"그건..."

"노예문을 해제할 수 있는 도구에요.

......이걸 쓴다면 자유롭게 될 수 있겠죠.

원한다면...원한다면 떠나도 좋아요.

잡지 않을게요."


내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나를 떠난다면....나는 차마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악몽을 꾸던 날, 그녀가 들려주던 옛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들 수도,

부드러운 목소리도...더는 들을 수 없겠지.

이 세 달 동안, 그녀는 내 안에서 너무 커져 있었다.


"바보같은 사람."


다음 순간, 나는 그녀에게 안겨 있었다.


======================================


나는 당황했다.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눈 앞의 소년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실망할까봐, 내가 그를 싫어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가 내민 노예문 해제의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주인이 좋다 하더라도 노예를 벗어나면 갑을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기에.

하지만 탈출하겠다는 내 목표는 이제 녹아내린지 오래였다.


눈 앞의 사랑을 모르는,

혼자 숨죽이고, 떨고, 울고 있는 소년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속에서 내가 커져 있는 만큼...

내 속에서도 그가 크게 자리잡아 버려서.

그가 해맑은 미소를 보여줄 때마다, 가슴이 저릿거렸다.

사실, 이미 결정은 내가 그를 구한 순간부터 정해져있는 셈이었다.


"바보같은 사람."


나는 떨고 있는 그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그는,

지금까지 수없는 싸움을 넘기며 살아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담했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럴 때는, '좋아합니다.' 라고 하는 거랍니다."


내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품속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파르르 떨 뿐이었다.

어떤 길을 걸어왔든 간에, 그는 16살 소년에 불과했다.


"떠나지 않을 건가요...?"


눈물 콧물로 엉망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 그의 말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왜 떠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런 표정은 반칙이에요."


그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더 물어왔다.


"저,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닌데도요?"

"어머, 저라고 착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가...가끔 욕망 어린 눈으로 세레스티아 씨를 쳐다봤는데도요..?"

"알고 있었답니다. 황급히 눈을 돌리는 게 귀여웠죠."


나는 그의 얼굴을 닦아주며 스스로 되뇌였다.

아아. 나도 바보같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로맨스를 찾아 다니다,

결국, 노예가 되서 사랑을 하다니.

나도 정상은 아니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여러 감정을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랍니다."


나는 그가 꼬옥 나를 붙잡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도 좋지 않은데다, 감정을 소모해서인지,

그의 숨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니 받아들일게요. 당신의 모든 것을.

내 꼬마 주인님."


품 속에서 잠들어 편안해진 그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나는 조용히 되뇌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미소를."





구상할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아...아쉽네...아...다음 편에는 순애 야스를 쓸 것이며,

이건 5부작 생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