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에서 돌풍이 붙어왔다. 흩날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그녀가 말했다. 로맨스물의 판박이 표현은 개소리라 일축하는 선배에게 동조하면서.





 애매한 학군의 애매한 인문계 공립고등학교에 존재하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동아리인 독서부. 내가 다니는 이 학교는 학생이 많은 게 유일한 특징인지라 시설이 넓고 좋다, 동아리가 많고 재밌다 등등의 이런저런 장점이 은근히 많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이 동아리는 예외였다. 이놈의 동아리는 척 봐도 지루해 보이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이렇다 할 특징과 장점이 없는 그저 그런 동아리였다. 장르 문학 따위를 읽고자 하는 학생들은 동아리 시간 두 번마다 반드시 독후감을 한 번 작성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도망간 지 오래요, 내신 관리에 열심인 학생들은 생활기록부 채우기에 더 좋은 수학이나 과학, 의학 동아리 따위로 가버린 지 오래였다. 동아리와 내신에 별생각 없는 학생들은 체육계 동아리나 영화감상, 미국드라마 동아리 따위로 가서 재미있게 시간을 때우길 택했다. 그런고로 매년 독서부로 들어오는 학생 대다수는 동아리 활동에 별 관심은 없으면서도 동아리 활동이 내신에 도움이 되길 원하는 어중간한 문과 지망생들이었다. 생활기록부에 독후감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나도 그중 하나였고. 사람이 재미없어서 모임도 재미없어진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스러운 시원찮음의 굴레를 상징하는 게 우리 독서부의 따분한 특징이라 볼 수 있었다.


 있었었다.


 그렇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저 그런 곳으로 보여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특이한 일 또한 생기기 마련이다. 따분한 동아리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자면 학교 내에서 권력 있는 꼰대 체육선생의 취미생활을 위해 설립된 배드민턴부가 뜬금없이 지역대회에서 입상한다거나, 미술부(정확한 이름은 디자인 어쩌고 부였는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뜬금없이 돈 받고 그림을 파는 데 성공한 학생이 나왔다던가, 뜬금없이 독서부 동아리 부장 자리를 내가 떠맡게 되어 활동 끝마다 교실 뒷정리를 하게 된다거나, 동아리 담당 교사가 게으른지라 하교 종 치기 5분쯤 전에 미리 조기퇴근을 해버리며 부원들에게 종 치면 알아서 집 가라고 지시한다던가, 그래서 동아리 시간이 끝나 하교 종이 친 뒤에도 꿋꿋이 앉아 하드커버 영어 원서를 읽는 여학생 후배와 단둘이 교실에 남게 된다거나.


 초현실적인 전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입시 위주 교육의 정수인 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질 일 없어 보였던 꿈만 같은 낭만적인 상황이 내게 닥쳤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 편한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우리 둘은 이미 격주로 이루어지는 동아리 시간의 끝자락이 되면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어느 정도 친해진 뒤였다. 학교가 배경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구도라니.


 거기에 오늘은 특히나 낭만적인 상황이었다.


 대화 주제부터 연애 이야기. 푸른 하늘이 노랗게 칠해지기 시작하는 시간. 중간고사가 끝난 첫 동아리 시간에서 남녀 단둘이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는 그런 상황. 늦게 찾아온 꽃샘추위에도 정갈한 교복을 고집하는 그녀와 교복 셔츠 아래로 티셔츠를 겹쳐 입고 바람막이도 껴입은 남학생. 등장인물까지도 완벽했다. 거의.


 상황에 놓인 주인공이 낭만적이지 않아서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애초에 동아리 끝나고 남아 이루어지는 한 시간 남짓의 대화 네 번에 사람이 그렇게 친해질 리가 있나. 그녀는 학원 가기 전 남는 시간 동안 독서를 즐기면서 불쌍한 청소 담당 부장의 잡담에 의례적인 호의로 잠시 어울려 줄 뿐인데. 사랑을 다룬 미디어에 호되게 당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호의와 호감을 구별할 수 있는, 그 정도의 현실감각은 있는 등장인물이었다.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쓰레받기와 빗자루로 교탁 아래에 쌓인 먼지를 쓸고 대걸레로 닦아내며 나는 대답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상대에 대해 아는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데 뭔 감정을 느껴. 그건 성욕이지. 성욕은 욕구지 감정이 아니라고."


"...욕구도 감정의 일종이긴 한데."


"아. 그랬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교과서 표지 모델이나 취할 법한 완벽한 자세로 책을 읽으며 그녀는 대답했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차분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게 모범생의 기품인가, 이런 게 사람의 차이인가 싶은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읽는 책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 감상은 웃음으로 변할 테지만.


"그렇지만 외모에 능력까지 있다면 한눈에 반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 보이는데요. 재력이라거나, 지력이라거나... 생각해보면 외모를 가꾸는 데 들인 노력에도 반할 수 있는 거고. 어떤가요?"


"그러면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을 사랑하는 거잖아. 자기가 직접 재력이나 지력을 늘리면 해결될 자기애기도 하고... 음, 일단 메타적으로 정의를 해 보자. 자기애 같은 그런 건 빼고, 이성 간에 사람 대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사랑. 그 뭐라고 하더라,"


 내가 말을 더듬자 그녀는 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하드커버가 덮이며 ‘탁‘ 소리를 내었고, 나는 책 앞면을 볼 수 있었다. 


"성애?"


"그래. 성애."


 꺾여진 장미. 금박으로 수놓아진 영어를 볼 수 있었다. 독자만큼이나 범상치 않게 생긴 책인지라 추리 소설이나 평범한 장르 소설의 제목처럼 느껴졌다. 표지에 제목과 저자 외의 다른 내용이 없었다면 말이다. 무슨무슨 로맨스 따위의 회사 이름은 책의 장르를 단박에 보충 설명해 주었고, 우측 상단에 위치한 18+ 빨간 딱지는 책 제목의 의미를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읽는 책은 보통 그런 종류였다.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내신 관리와 지역균형선발전형을 노려 일부러 학군을 낮춰 온 거라느니, 공공연하게 SKY를 노릴 거라고 교사와 학생 모두 짐작하던 그녀의 주된 독서 분야가 영국산 싸구려 로맨스 소설이라는 게 말이다. 뭐, 사람마다 숨겨둔 취미라는 게 따로 있는 법이니 거기에 일본식 아니메에서나 나올 법한 호들갑을 하는 건 과민 반응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타고난 외모로 수많은 고백을 받아왔고 그 고백 수만큼이나 단호한 거절을 해온 여학생의 취미가 로맨스 소설 원서 탐방이라는 건 확실히 놀랄 수밖에 없는 반전이 아닌가.


"성애라..."


 오늘의 대화가 시작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놀라움 때문이었다. 남의 취미에 간섭하는 오지랖이기는 했지만, 로맨스 책까지는 그렇다 쳐도 솔직히 책에 18+ 딱지까지 붙어 있는 걸 보게 됐는데, 인간적으로 호기심을 어떻게 참으란 말인가. 대놓고 작업 거는 모양새로 시작된 노골적인 연애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녀의 책을 빌미로 삼아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연애관을 이야기하다 보니 싸구려 로맨스물을 까는 주제로까지 흘러간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로맨스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내 지분이 압도적이었지만, 그녀도 싸구려 로맨스물은 싫어했으므로 대화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첫눈에 반해 사랑하는 건 판타지겠지만, 그 사람에 자기관리에 동경이나, 호감을 느끼는 건 가능하잖아요. 그 호감을 키워 사랑으로 이루기 위한 고백을 첫눈에 반했다고 표현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의자 정리를 하지 않고 나간 부원들의 자리를 정돈했다. 나는 의자 밑에 숨겨져 있던 먼지를 쓸어넘겼다.


"글쎄. 상대방은 나를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일방적인 사랑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너도 그래서 사람 차고 다닌 거 아니었나."


 감정을 담았다. 직접 일방적인 사랑을 해 봤다가 된통 깨져 중학생 시절을 조리돌림당한 경험이 있는 자의 진심이었다. 그녀는 내 말투의 변화를 인식한 건지, 아니면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남아 있는 부원으로서 내 청소를 소소하게 보조한 그녀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저도 일방적인 사랑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신을 어필하고 호감을 원하는 노력 정도야 봐줄 수 있죠. 그렇게 주고받는 게 사랑이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첫눈에 호감이 생겼다면, 상대방도 자신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죠. 다가가서 호의를 끌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의 능력만 볼 수 있었던 첫 만남을 벗어나 상대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상대도 자신을 이해할 기회를 주고... 이렇게 일방통행의 감정에서 벗어나 쌍방으로 주고받는 사랑과 노력은 저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학교의 인기인, 유치한 일본식 아니메에서나 나올 법한 표현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그녀를 통해 전교생 모두 알게 되었다. 외모가 개연성이니까. 신발장을 열었더니 러브레터가 한가득, 같은 구닥다리 아니메식 연출 대신에 카톡을 열어보니 모르는 번호로 온 작업 메시지 두 자릿수는 가능했으니까. 길거리 캐스팅도 받아본 적이 있다 하는 1학년 여학생의 묘한 신비주의는 그녀에게 말 한번 걸어 보려는 헤픈 선배와 동급생 남학생들을 잔뜩 만들어냈다. 


"그건 동감이야. 사랑이라면 고백부터 하고 연애가 아니라, 서로 알아가고 친해지기 위한 교제로 시작하는 게 맞지."


 내 얼굴도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진실게임으로 고백했다가 완전히 꼬인 중학 시절의 추억이 쓰라리게 되살아났다. 그런 시츄에이션의 대표적인 피해자인 그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원동력 말이다.


"근데 그럼 왜 고백을 거절한 거야? 교제는 받아준다는 말 아니야?"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그녀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작게 미소지었다. 비웃음인가? 그녀가 웃는 걸 본 적 자체가 드물었기에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근데 저한테 한눈에 반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꼭 사랑을 들이미는 거 있죠. 사귀어 달라고. 그러면 저는 거절하죠. 저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귀겠냐고. 이렇게. 그러면 또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사귀면서, 연애하면서 알아가 보자.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건 뒤틀린 소유욕 표현일 뿐이잖아요. 이해하고 싶어서 연애하는 게 아니라, 연애했으니까 이해해 달라는 앞뒤가 바뀐 말. 다른 사람과의 접촉도 바람이랍시고 틀어막고. 자기만 봐 달라고. 그게 제가 시달려온 고백이에요.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랑. 얼굴이랑 몸만 보고 다가온 색욕 섞인 소유욕을 자백하는 고백. 그러니까 차버렸죠." 


 아아, 연애하면서 알아가 보자는 멋들어진 말조차 꺼내지 못한, 4년 전 중2병이 1년 일찍 온 어리석은 소년이여. 건강한 정신상태는커녕 멋조차 없이 대체 왜 사랑을 품었느냐.


"그런 거였구나. 잘했네."


"첫눈에 반한 게 사랑이라니, 진짜 웃기는 소리죠. 선배 말대로 그건 그냥 욕정이에요."


 그녀가 이례적으로 빠른 말투로 말했다. 지금 보아하니 그녀의 미소는 헤픈 남학생을 향한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씁쓸한 자조였다. 그녀는 그런 고백들에 진심으로 질린 모양새였다. 아아, 이제는 얼굴조차도 기억 안 나는 내 첫사랑이여. 정말 미안하다. 내 욕정이 희생양을 만들어 버렸구나.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새록새록 떠오르는 죄책감 속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자백했다. 죄책감을 털듯 쓰레받기를 쓰레기통에 대고 탈탈 털었다.


"...나도 어릴 때는 그랬었는데. 하하, 젠장. 고백이랍시고 헛짓거리 잔뜩 해 보고 놀림거리가 되니까 그제야 내가 얼마나 철없는지 알게 되더라. 일찍 알아서 오히려 다행인 건지..."


"그래서 로맨스스럽게 첫눈에 반하는 건 헛소리다, 그런 철학이 된 건가요?"


"응. 동경이나 호의를 호감이라고 착각하는 거, 좀 역하긴 하잖아. 음, 이 개똥철학도 좀 극단적이긴 하네."


"괜찮은데요. 철없이 구는 것보다는 낫네요.“


 모방범이 만들어낸 또다른 피해자에게 사상을 옹호받으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하긴,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고백하면 놀림거리라도 됐는데, 이놈의 고등학교는 고백 연애가 유행처럼 취급되니까. 정신연령이 높아진 게 맞는지 모르겠어."


 교탁, 사물함, 책상 위를 빨아 놓은 걸레로 닦으며 가벼워진 입으로 말했다. 이미 성장은 다 끝나고 성인이 되길 기다릴 나이니 인생의 쓴맛은 필요 없다는 것일까. 학교의 분위기는 묘했었다. 자기 잘났다 싶은 사람은 그녀에게 고백하는 게 일종의 도전이 된 느낌이므로. 달이 바뀌고 시험 기간이 한 번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소강된 유행이었다.


"하아, 그러게요. 너무 유치하게 군다니까요. 칼같이 차이니까 철벽이니 뭐니 떠벌리고, 뭔 드라마에서 주워온 명대사나 말하고 있고. 애초에 절 알아가고 싶으면 먼저 섬세하게 다가가면 되는 거잖아요? 같은 학교인 것부터가 인연이고 계기인데, 특별한 계기 없이 자연스럽게 학교 선후배나 동급생 관계로 접근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기 힘드니까 무리수를 던지는 거겠지... 아마. 근데 첫 고백도 그렇게 대응했어? 잘 아네."


"인터넷 썰이나 삼류 로맨스물만 봐도 대충은 알 수 있잖아요. 연애도 공부가 되는 거잖아요?"


 그녀는 자리에 놓인 책을 손끝으로 탁탁 두드렸다. 독서 활동의 유익함을 어필하는 제스쳐였다. 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읽는 책은 하드코어하면 하드코어했지 사랑에 대한 엄숙하고 진지한 고찰을 담아낼 법한 제목은 아니었으니. 속 내용은 또 다른 걸까. 저게 여성향의 세계인가. 원서를 읽을 자신은 없지만 좀 얇은 책이라면 한 번쯤 빌려 읽어볼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항상 400페이지는 돼 보이는 두꺼운 책만 가져오는지라 항상 생각으로만 끝났지만.


"남성향 묘사의 폐해지, 뭐."


 나는 폐해의 산증인으로서 다시 한번 대답했다.


"아, 생각해보니 남성향이 문제네요. 고백 안 받아준다고 사람을 무슨 이상한 사람으로... 연애도 공부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굴어서 문제죠. 등교 시간을 맞춘다거나 하교를 기다리는 건 변태나 할 짓거리니 피하는 거고, 매일매일 수업 끝나고 도서관에 있을 때 책이나 공부에 이야기하면서 정서적인 스킨십을 한다거나 그런 접근이라면야 당연히 받아들이죠. 유익하고 생산적인 인간관계라면 얼마든지 어울릴 자신 있는데, 음침하게 사람 따라다닌다거나, 근처 자리에 앉아 흘끗흘끗 사람을 엿보고 있다거나, 그런 일방적이고 욕정 가득한 접근을 해놓고는 흑흑 난 차였어, 흑흑 내 사랑. 그러고 멋대로 사람 철벽 취급... 양지에 나온 여성향 작품도 많아서 좀만 알아봐도 화술 공부가 되는 세상인데, 모르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 최소한의 공부 정도는 하고 오는 게 예의 아닌가요. 여심을 알아주고, 좀 더 섬세하게 사람한테 공감해주고 대화해주면서... 하아... 흥분하니까 말이 두서없이 나오네..."


 아아. 정말 정말로 미안하다. 날 피해 이사까지 간 내 첫사랑이여. 앞으로 나는 남에게 민폐인 낭만과 사랑 없이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내 모자람을 반성하고 죗값을 치러야겠다.


"선배님? 표정이 왜 그래요? 어디 이상한 부분이라도 있었나요?"


"그렇게 생각하니 내 첫사랑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그래."


“... 저번에 말한 그 중학교 이야기?"


"응."


"진짜로 고백해서 혼내주기라도 했어요?“


"그런 셈이지. 철이 없던 중딩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이 나아진 건지 자신은 없지만."


"그래서 로맨스를 싫어하는 건가요? 차여본 경험이 있어서?"


"그렇지."


 칠판지우개도 빨았고, 사물함도 끝났다. 남은 건 창문 쪽.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창틀에 낀 먼지를 닦아내었다.


"낭만이 깨졌으니까. 어디 만화에서도 그러잖아. 동경은 이해와 거리가 먼 감정이라고. 직접 해 보고, 이해하고 나니까 환상이 깨지더라고. 그런 거야. 내가 고만고만하고 능력도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내가 품어온 게 사랑도 뭣도 아닌 더러운 욕망임을 알게 되고. 하,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책으로나마 연애 열심히 공부해두는 건데. 잘난 것도 없으면서 상대도 나한테 반할 거라 생각한 내 잘못이지. 젠장."


 푸념하며 마지막 창틀을 닦았다. 하늘의 끝자락은 이제 주홍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 벌써 5시 다 됐네. 준비해야겠다."


 교사들이 전산 작업이나 회의를 마치고 교실을 점검할 시간이자 그녀가 학원으로 향할 시간, 그리고 내가 귀가할 시간이 다가왔다. 창문을 잠근 뒤 나는 걸레를 빤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교실로 돌아갈 때쯤이면 그녀는 늘 그랬듯이 먼저 교문을 나서 있겠지. 


 너무 오글거리게 굴었나 고민하며 나는 홀로 복도를 걸어나섰다.


 *


 "있잖아요,"


 내 예상은 깔끔하게 빗나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예상한 선배에게 한 방 날리는 낭만주의인지, 그녀는 가방을 멘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청소를 그렇게 열심히 해요?"


 분위기와 동떨어진 궁금증과 함께.


"보는 사람도 없는데 한 시간 내내 그러고 있고."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교실 앞에서 멈춰섰다.


"글쎄, 그냥 버릇. 결벽증 같은 건 아니고. 어릴 때 집 청소 깨끗하게 하면 엄마가 간식을 줬고, 초등학교 때도 청소 열심히 하면 청포도사탕 받았으니까. 쭉 이어진 거야. 애초에 적당히 노닥거리면서 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린 거고."


 기억에서 우러나온 의식의 흐름 속에서 후배의 호기심을 해소한 나는 가방을 메고는 교실 문을 잠갔다. 이래서야 같이 하교하는 꼴이다. 무슨 변덕일까.


"...뭐 할 말 있어?"


"...제가 로맨스 소설을 왜 좋아하는지 아세요?"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독후감은 과학 서적으로 내면서 정작 동아리 시간에는 로맨스 소설을 애독하는, 은밀한 취미 이야기를 그녀가 먼저 꺼냈다. 


"낭만이 있잖아요. 비참하게 살아가다가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으로 서로 구원받아 함께 행복하게 사는 낭만. 운명 같은 사랑. 아름다운 이야기... 그런 낭만 말이에요. 어설픈 고백이 가득한 제 인생사를 생각해보면 판타지라면 판타지지만, 그래서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고요. 진짜 사랑을 찾는 이야기가 책에는 있어요."


"네 말대로, 현실에는 그런 상황 보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소설이고, 낭만이지."


"그거야 그렇죠. 사랑 때문에 사람이 비참해지는 경우도 많고. 저도 학기 초에는 그랬고. 근데 있잖아요, 애초에 그게 사랑 때문인가요?"


"무슨 뜻이야?"


"보통 사랑하다가 불행해졌다는 예시에서는 사랑 자체가 엇나가 있잖아요.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랑한다거나, 소유욕이나 메시아 신드롬 따위의 정신병이 더해져 있거나,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다른 물질이나 능력을 사랑한다거나."


"성애가 아니라는 거야?"


"네."


 운동장을 지나쳐 교문으로 나섰다. 연주홍빛 제복의 학교 경비원 할아버지가 의아하다는 듯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가볍게 목례해 교문을 지났다. 조용히 거리를 걷던 우리는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섰다. 아마 말을 생각하던 거겠지.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중학생 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다면서요. 모르니까 선배도 그랬던 거겠죠. 그 애가 자기처럼 한눈에 선배 보고 반해야 사랑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안 그래요?"


"그랬지. 멍청했어."


"그러니까 그렇게 침울하게 있지 말라고요."


 옆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호는 파란불로 변해 있었지만, 나는 홀린 듯이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지평선에 닿을 듯 말 듯 애매하게 노을이 떠 있었다. 노을을 등진 그녀 또한 발을 떼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던 입술이 움직였다. 


"좀 전에 말했잖아요. 첫눈에 반하는 게 어떻게 사랑이냐고. 선배는 사랑도 안 해놓고 왜 혼자 의기소침해지나요. 선배가 소설에 나오면 자기 혼자 찌질하게 구는 남주인공이라고 욕먹을 걸요. 어릴 적 일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찌질해 보였구나. 다시 빨간불로 바뀐 신호등 앞에서 나는 사과했다.


"미안. 푸념이 너무 길었네."


"아뇨. 푸념이라면 제가 더 많이 했죠. 뭘."


 그녀는 고개를 쓱 돌려 눈을 피하고는 이어 말했다.


"선배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에요. 성실하고, 붙임성 좋고, 남 푸념도 잘 들어주고, 생각도 깊고. 외모야 뭐, 자기관리라면 나름 잘 해뒀고."


"글쎄. 너보다는 아니지.“


"혼자 낭만이랑 공상에 빠져서 남이랑 철벽 치던 저랑 얘기하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선배예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거 영광이네."


 이번엔 내가 고개를 돌렸다. 칭찬이 영 쑥스러웠다.


"내가 말을 거는 걸 네가 받아주는 거잖아."


"재미는 있으니까요. 은근 생산적인 대화도 많이 하게 되고, 서로 알아가는 대화도 나쁘진 않고."


"그랬나?"


"네. 눈에 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보다 보면 호감이 가는 그런 사람이라고요. 저랑은 다르게. 그러니 오늘 말한 고백한 사람들 이야기를 중학생이던 선배한테 대입하지는 마세요. 선배는 선배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신호등이 다시 푸른빛을 발했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 기구를 눌렀는지, 맑은 기계음이 삐리리릭, 하고 흘러나와 말을 끊어냈다.


"내가 로맨스에 안 맞는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네."


"그래. 칭찬이랑 격려 고맙다."


 아스팔트를 건너 역사를 내려갔다. 그녀는 학원을 가기 위해서. 나는 귀가를 위해서. 하교 시간과 퇴근 시간 사이에 낀 시간대의 역은 한가했다.


”너는 반대쪽이었지?"


"네." 


 교통카드를 충전하는 그녀를 기다리며 지갑에서 천 원 세 장을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차가운 캔 두 개와 동전 네 개가 떨어졌다.


"마실래?"


"이미 두 캔 뽑아놓고 물어보는 건 무슨 심리인가요?"


"...그러게. 미안."


"아무튼, 감사히 받겠습니다."


 로맨스 얘기를 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과장되게 공손함을 차려 커피를 받았다. 나는 캔을 따고 홀짝 마셨다. 





"선배."


 개찰구를 넘어설 찰나, 그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아무래도 선배는 연애소설이나 그런 걸 좀 읽을 필요가 있어 보여요.“


"그래야겠다. 그럼 다다음주에 또 보자."


"다다음 주 말고, 내일부터 바로 학교 도서관에 가볼래요? 은근 좋은 책 많더라고요. 여성향으로. 시험도 끝났으니 시간이 되면 한번 읽어보는 게 어때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는 멈춰서서 멀뚱거렸다. 그녀와 잠시 눈싸움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 뒤에 입을 열었다.


”나로 괜찮겠냐. 남성향에 찌들어 노맨스를 선호하는 사람인데."


"플라토닉하고 드라이하게 사랑에 대해 토의할 수 있으니 나쁘진 않아 보여서요. 애초에 여성향인 그런 섬세한 걸 좋아하고. 또 원래 취미는 다른 사람도 끌어들여야 재밌잖아요."


"뭐, 그래. 네가 상관없다면야. 그럼 내일 또 보자. 잘 가."


"네. 내일 봐요."


 LED 전광판에서 전 역 출발 표시가 떠올랐다. 그녀는 시계와 전광판을 한 번 흘끗 보더니 빠르게 개찰구를 지나 지하로 사라졌다.

 도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의 스크린도어는 어두워 반대편을 확실하게 볼 수 없었다. 


 한눈에 그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집중하고 살피니 사람의 인영을 구별할 수는 있었고, 나는 얼마 안 가 그녀와 비슷한 체구의 인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딴따란 따란, 반주가 들렸다. 이제 시야는 가로막히고 서로 갈 길을 떠나게 되겠지. 


 그리고 내일 다시 만나겠지.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반대편 철로에서부터 스크린도어 틈 사이로 새어온 거친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달려오는 열차가 잔상을 남겼다. 그녀가 나와 함께 말하고 싶은 건 호의일까, 호감일까.


 나야 어차피 사랑하는 법은 까먹었고 뒤틀린 지 오래였다. 나는 또 상대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그녀는 괜찮을 거라 말했지만, 모든 일이 낭만적으로 풀려나갔다면 세상의 이혼율이 이렇게 높지는 않았겠지. 


 열차가 떠나고, 인영이 사라졌다. 


 그래도 그녀와는 계속 만나 얘기하고 싶었다. 얘기 정도라면 괜찮지 않은가. 


 교제가 상처가 될지 어떨지는, 교제하며 서로를 알아가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역시 만나자. 취미를 나누는 친구 정도라면 얼마든지 괜찮잖아. 나는 결론을 내리고는 내 쪽에서 온 열차에 올라탔다. 감상을 정리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면서.  고2병으로 진화한 중2병은 착실하게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은 호의인지 호감인지 너무나도 모호하게 남겨둔 채로.





 역시 로맨스 소설을 좀 읽어보는 게 좋겠다. 그렇게 마음먹게 된 낭만이 충만한 해질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