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5시 30분. 800번대 서가에서 분류기호의 지옥을 헤매던 도서부가 귀가하고, 그들을 이끌던 사서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매점으로 향할 시각. 한적해진 도서관에서 그녀가 내게 감상을 물어볼 때이기도 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런 학교에 존재하는 그저 그런 동아리인 독서부. 나는 부장이고, 그녀는 부원이다. 중간고사를 무사히 넘겨낸 두 독서부원은 마음의 양식을 원했다. 그래서 막 깨끗하게 청소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로맨스 소설을 탐구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자신의 취미에 나를 끌어들인 거지만.


 그녀는 로맨스물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소설을 좋아했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시공간의 제약이 적어 학원 뺑뺑이에 시달리면서도 즐기기 좋은 게 그 이유라나. 만화나 영화와 달리 상상으로 내용을 보강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고 한다. 아무튼, 그녀는 로맨스물을 좋아했고, 사랑 이야기를 즐겼다.


 나는 그게 참 놀라웠다. 동아리 후배의 선호도서야 독후감 걷을 때 말고는 내가 관심 가질 필요도 그럴 자격도 없을 테지만, 나는 그녀의 취미에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취미와 불일치하게도 그녀는 입학 직후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연심을 짓밟고 있었으니 말이다.


 주목받기 부담스러워한다거나 쑥스러움이 많다거나 그런 성격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무뚝뚝하게 굴어서 그렇지 속은 강단 있고 낭만적이다. 장난기도 은근 있고.


 그러니까 취미에 걸맞지 않은 가치관의 문제였다.


 낭만적인 그녀가 사람을 차고 다닌 이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면 '내 외모만 보고 좋다고 하는 거잖아.' 되시겠다.


 더 세련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디 싸구려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느낌이다. 로맨스 탐독이 취미인 이 독서부 후배는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사랑 아닌 사랑에 질린 것이었다. 그녀가 받은 고백 대부분은 외모만 바라보고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이해야 간다만.


"응. 개연성이 약하다고 생각해."


 그러면 나는 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내가 그녀와 방과후에 따로 만날 수준으로 친해진 경위였다. 고작 동아리 선배로서 만난 내가 어쩌다가 그녀의 취미 생활에 낄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이 되었냐, 이 말이다.


 동아리 선배이자 부장으로서 그녀를 만나게 된 나는 내 분수에 맞게 동아리 선배이자 부장으로서 잡담만 나눴을 뿐인데, 그녀에게는 나름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동아리 시간에만 이 주 간격으로 만나기보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만나 같이 책 보고 얘기도 나누지 않겠냐고 권유까지 받게 된 것이다.


"흐음, 이 정도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데요. 감정 묘사도 세밀하고."


 그녀와 어울리기 시작하니 평생 경험하지 못한 오묘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죽치며 다른 도서관 죽돌이들과 도서부원들의 시선을 느껴 보니, 내가 참 기묘한 만남을 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한 학년 차이 나는 남녀 둘이 도서관에 앉아 로맨스를 읽는다니. 그것도 감각적인 묘사가 가득한 18+ 딱지 붙은 해외 로맨스물을. 아무리 원서라도 그렇지 왜 그런 책이 고등학교 도서관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그녀가 정확히 왜 나와 친해지고 싶었는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 은밀한 취미라고 부를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사랑 얘기를 나누는 사이까지 온 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고작 다섯 번쯤 만나서 얘기했던 거로 내가 더 궁금해졌다고? 잡담 좀 재밌게 했다고? 이건 뭔 빌드업 내다 버린 망가도 아니고. 농구하게 머릿수 좀 채워달라는 또라이 녀석이나 미팅 한 번 가보자고 지랄발광을 하는 반병신 대신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생겼으니 나쁠 건 없었지만, 당황스러운 급전개였다.


 설마 '나한테 이런 건 네가 처음이야'같은 그런 건가? 책 한 권을 완독할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자존감 낮은 찌질이에게 있어서 부담스러울 정도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쁘지는 않았어. 나도 재미있게 읽었고. 근데 그냥... 그런 클리셰 자체가 좀 별로야."


 그런 클리셰에 낚여본 경험자로서 말이다.


 아아, 내 첫사랑이여. 철없는 남자아이의 헛된 망상 때문에 18년의 인생 중 3년을 손해 본 첫사랑이여.


 책을 덮어 놓은 채 내 말을 기다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픈 과거를 잊기 위해서.


"저번에 했던 말이랑 비슷한 건데, 첫 만남에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잖아. 그래서 첫 만남으로 사랑에 빠지는 건 이상한 짓이라 생각하고..."


 의자를 책상에 가까이 붙이며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대화에 집중하는 자세를 취하고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낯선 사람 앞에서 좋은 모습 보이려는 게 상식이잖아."


 이어서 책을 바라보았다. 정석적인 신데렐라풍 구원물이었다. 원서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점이 없는 현대 로맨스였고, 그녀가 수작이라 평한 대로 무난하게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운명적인 만남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가 거슬려서 그렇지. 적어도 파란만장한 실전연애를 겪어 본 고2병 환자에게는 거슬렸다.


"성선설이라도 믿어요? 의외네요."


 독후감은 뇌과학이나 철학 도서를 읽어 제출하면서도 평소에는 로맨스를 탐독하는 그녀가 사상검증을 시작했다. 유교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적어내고는 수위 높은 멜로 장르를 즐기다니. 그녀답다면 참 그녀다웠다.


 그녀는 내가 인간관계를 부정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였나. 나는 정정하며 말을 계속했다. 비관적인 건 맞긴 한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사람이 사람답게 예의 차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공자님 말씀보다는 의무론 쪽이라고 해야 하나. 도덕 법칙 아래로 살아가는 같은 사람으로서 서로의 존엄성을 존중해 주는 건 의무다, 그런 느낌으로."


"그래서요?"


"그러니까 그런 행동에 큰 의미를 줄 이유도, 거기에 반할 이유도 없어."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턱을 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엄선해준 책에 대한 내 반응이 흥미로우면서도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첫 만남 때의 인상은 잘 보이기 위한 가식이니 특별히 의미를 둘 없다. 그런 뜻인가요?"


"일단은. 가식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아. 정신병자라면 모를까, 나쁜 인간관계를 원하는 사람은 없잖아. 첫 만남에서 원활하게 호의를 주고받으려면 좋은 면을 보여주는 게 맞지."


"그럼 가식이 아니잖아요. 방금 전 누구 말대로 최소한의 존중이지."


 미심쩍다는 듯 그녀가 물었다.


"좀 비약했네. 아무튼, 그것 중에 가식도 있으니까."


"...하긴."


"첫 만남이라도 좋게좋게 대하는 건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문명인으로서 지킬 예의범절 아니냐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당연한 호의 말야."

 그걸 착각해서 떨어진 펜 주워줬다고 손주계획까지 세우는 그런 게 문제다. 나처럼 말이지.


"그런 최소한의 호의를 호감이라고 착각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 또 운명적인 첫만남이란 말은 당연한 호의를 호감으로 착각해서 만들어진 바보 같은 말이라 생각하고. 물론 첫눈에 반했다든지 해서 사심을 담은 호감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번에 말했잖아."


 첫눈에 반하는 건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와 그녀의 공통된 견해. 나는 그것을 근거로 말했다.


"호의를 호감으로 착각하든, 진짜로 호감을 처음부터 보냈든, 뭐가 됐든 간에 바보 같은 소리야."


 아아, 바보 같은 짓거리에 질리도록 당한 내 사랑들이여. 그대들을 위한 빈틈투성이인 연역적 추론을 끝마치겠다. 스멀스멀 떠오르는 바보의 흑역사를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나는 말을 끝맺었다.


"호의가 호감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니 그런 첫만남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나요?"


"그렇지. 근데 물건을 주워주거나. 위기에서 구해주는 거로 반하는 건 좀 아니라고 봐."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반함은 외모가 개연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말이다. 이런 책처럼.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나를 바라보고 답답함 섞인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짐작은 했는데, 조금이라도 낭만적인 전개가 나오면 아주 발작을 하시네요."


"음. 금방 사랑에 빠지는 캐릭터는 이질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좀 거북하게 느껴져."


 경험에서 기인하는 생리적인 거부감이 드는 건 어떻게 통제할 수 없다. 아아, 금방 사랑에 빠지던 불타오르는 청춘 시절의 나여. 생각 좀 하고 살지 그랬냐. 두고두고 후회할 일 없도록.


"그런 사고방식은 대체 어쩌다가 생긴 건가요."


 내 사상에 좀 질렸는지 그녀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본인 말로는 나와 만나는 이유가 바로 이거란다. 자기는 상상도 못 해온 연애관이 신기해서. 


 이해는 간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내 인생이 18년의 짧은 기간치고는 인상 깊은 추억이 정말 많이도 있다고 느껴진다. 아. 젠장. 출처 불명의 명언 하나 소개하겠다.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는 너무 아름답기에 금방 바스러지고 마는 것. 그렇기에 잊을 수 없고, 가슴 한구석에 평생 고이 묻어둔 채로 살아야 하는 것. 그게 바로 추억이랬나. 정말 맞는 말이다. 동남아시아 IP를 쓰고 인터넷을 헤집던 어린 애새끼 시절의 나에게는 남아메리카 도메인 사이트(지금은 바스러졌다.)에 걸려 있던 음란물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음이 틀림없다. 그런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그딴 짓을 했나 보다.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게임업계에 종사하며 대사를 썼을 그 사람에게 찾아가 묻고 싶다.


 고려장도 취급해 주냐고.


 나는 내 썩은 추억을 유기하지 못했고, 결국 내 가슴 한구석에는 존나게 크고 아름다운 무덤이 자리 잡게 되었다. 어르신을 잘못 묻으면 인생 운수 꿈자리가 다 흉흉해진다고 어디 납량특집에서 들었었는데, 내 전두엽 어딘가도 그렇게 사고방식이 뒤틀려 버렸겠지.


"그동안 보고 배운 것도 있고, 몇 번 직접 차여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관련된 사상 책도 읽어봤고."


 소위 현자타임이라 불리는 현상에 대해 나는 풀어서 설명했다. 만족했냐. 도굴꾼아.


"비관적이시네요. 저번에 격려해 준 건 그새 다 잊으셨나."


 열흘 가까이 나를 지켜본 그녀는 나에 대한 감상을 한 문장으로 나타냈다.


"사람 가치관이 그렇게 쉽게 변하진 않더라. 너도 비관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내가 합리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평가해 보지 않겠니?"


 고인돌 위로 탄탄히 쌓아올려온 개똥철학으로 대답했다.


"인생 롤모델이 혹시 칸트세요?"


 낭만주의자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글쎄. 독신 생활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칸트주의자 또한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이에 다시 한숨 쉬더니 홀로 책을 펼쳤다.


"그러게 왜 불렀어."


 그 기회를 타서 나도 직설적으로 물었다. 차라리 동네 교회 개신교 목사님 하나 불러서 BL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지 그래. 거기

는 무려 2000년 역사와 전통의 무덤 숭배인데.


"같이 책을 읽으면 더 재밌어질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게 취미잖아요."


 저번에도 말해준, 예상한 대로의 이유였다.


"생각보다 별로지 않아?"


"뭐, 연애 상담 미리 받았다 치면 유익함은 있죠. 황당해서 그렇지 재미도 있고. 그런 감상은 어디 인터넷에서 찾기도 힘들어요."


 아직 읽혀보고 싶은 책이 많으니 기대하세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었나.


“재미있는 유익함을 따지자면 차라리 연애 직접 해 보는 게 어때? 어떻게 끝나든 간에 인생에 값진 교훈을 얻을 텐데. 고1이면 딱 적당할 시기야."


"사귈 만한 사람이 없는 걸요. 어지간한 연애 교훈은 이미 많은 작가가 책으로 낸 지 오래고. 그 시간에 책 연구하는 게 나아요. 안 그래요?"


"낭만이 없네."


 그녀는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로맨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작가의 인생이나 가치관이 확실하게 들어가는 장르잖아요. 보다 보면 작가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연애관을 가졌는지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좋아요. 재미도 있는데 유익하기도 해서요. 작가와 인물이 느꼈을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다 보면 제가 겪지 못한 상황에 몰입해 대리 체험도 가능하죠. 경험을 체험하면서 생각도 넓어지고요."


 물론 양질의 작품들만. 읽어봐야 가치 없는 대리만족 양산형은 제외.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근데 제 주변에는 그런 대리 체험보다 의미 있을 만한 사람이 안 보이네요."


"...사람 보는 눈이 높다는 걸 길게도 말한다. 20년도 안 살아본 니 주변 사람이랑 작가 될 정도로 나이 먹은 사람이랑 경험이 같겠어?"


"낭만은 때때로 잔인해지는 법이죠."


"그런 이해타산 다 내려놓고 감정을 불태우는 게 낭만 아니니."


"낭만에도 취향이나 종류가 있잖아요."


 누구보다도 더 문과 같은 이과 후배가 가볍게 받아쳤다.


"그럼 선배는 대체 뭔 일을 겪었길래 낭만이 전혀 없으신가요. 좀만 더 자세히 말해줘요. 저만 길게 말 시키시는 건 아니겠죠?"


"싫은데. 네 취미보다 더 개인적인 일이야."


"남의 프라이버시에 먼저 참견한 게 누구였더라."


“평소 동아리 시간에는 어디 로맨스 출판사 책만 보고 있던 정체불명의 후배가 뇌과학 논문 엮어둔 책 독후감을 냈는데 참견을 안 하라고? 독후감 이상하게 제출하면 부장 자리면서 검토 안 했었냐고 나만 욕먹는데?"


 망할 담당선생. 격주로 이뤄지는 학교의 동아리 활동 중에서 독서부는 반쯤 버려진 동아리였다. 정확히는 문과 동아리 자체가 반쯤 버려졌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버려진 동아리였다. 동아리 교사도 대놓고 게으름을 피울 정도로. 대놓고 놀지만 않으면 자습을 하든 독서를 하든 잠이나 자든 상관없는 분위기였다. 2차시 단위로 독후감을 내야 한다는 최소한의 활동만 한다면 그랬다.


 부원이 읽던 책과 다른 독후감을 대놓고 제출하니 나는 뭐라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 첫 시간에 간략하게 통성명한 것밖에 없었지만, 개인적인 일을 바로 다음 시간에 묻게 된 것이다. 나는 부장이었으니까. 그녀는 평소 학원이나 집에서 읽는 책이 정해져 있다고 대답했다. 내가 그녀와 잡담을 오래오래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첫 만남이 아닌 둘째 만남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왜 말이 없어. 


 일부러 대답 안 하네.


 내가 대답을 기다리면서 과거를 회상할 동안 그녀는 딴청을 피우며 내게 추천해 줬던 책을 다시 읽고 있었다. 허탈해진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사서 누나는 화장실이라도 추가로 들른 건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동아리 겸 1교시 단축이 있는 수요일은 5시, 그 외 요일은 6시에 학원으로 떠나는 그녀. 원서 독해도 지쳤고,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수다나 더 떨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내가 읽을 책이 더 있어? 여기 도서관에?"


“네. 진짜 많아요. 저도 놀랐어요."


 그래서 학원 따로 다닌다는 핑계로 야자 신청 안 해놓고 도서관에서 농땡이 피우는구나. 내가 뭐라 따질 처지는 아니지만.


"사서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전임 사서가 도서신청 예산이 남을 때마다 멋대로 자기가 읽을 책을 주문했다네요. 그게 로맨스였고."


"18+ 딱지 붙은 해외원서를 어떻게?"


"저야 모르죠."


 거참 빌드업 빻은 망가 같은 개연성이네. 덕분에 뜬금없이 영어독해능력을 번역기로 키우고 있는 남학생이 하나 생겨났다. 번역본은 상업성 위주라 진짜 명작은 없는 경우도 많고, 편집이나 오역 투성이니 원서를 읽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견해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추천 도서 때문에 평소에도 안 하던 원서독해를 뜬금없이 하게 되었고, 덤으로 유사 야설도 읽게 된 것이다. 영국식 영어로 가득 찬 그렇고 그런 부분은 문학적 표현이라기엔 좀 진득했다.


"이런 것도 다 운명이 아닐까요. 제 인생을 이끄는 운명."


 그녀가 책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또 낭만적인 부분을 다시 읽는 걸까. 갑자기 운명 타령이었다.


"그냥 우연이지. 우연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게 운명이고."


 나는 어디 판타지 소설에서 읽었던 구절을 꺼내 답했다. 그녀는 다시 논쟁을 즐기고 싶어졌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입을 열었다.


"세상 살아가는 게 다 그렇잖아요. 철학도 가치관도 그렇고 해석하기 나름이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해석하기 나름이고. 그러니 운명이라 믿는 것도 좋지 않아요? 우연을 멋지게 해석하는 일 말이에요."


"그게 왜 좋은데. 그냥 자포자기 아니야? 운명이니까 뭔 일이 닥치든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겠다, 그런 뜻이잖아."


"불행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그렇죠. 하지만 우연은 예상치 못한 미래잖아요. 고정된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미래로 이끌어주는 우연. 인생을 바꾸는 만남. 그런 우연이 말 그대로 운명 아니겠어요? 말 그대로 삶을 옮기는데."


 말 그대로라. 한문으로 따지면 그랬었나.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와, 이제 대답이 생각나네? 첫 만남에서 베푸는 호의는 당연한 거라고 말했었죠? 그런데 그 호의가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세상에 꼭 멀쩡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사람한테 시달리던 여주인공에게 있어서는 그런 만남이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잖아요. 불행한 운명처럼 뻔하게 놓인 가시밭길을 벗어나게 해주는 만남. 인생에 놓인 개연성을 초월한 채 이루어지는 만남."


 그녀의 말이 빨라졌다. 얌전히 있다가도 감정에 취할 때마다 꼭 저러는데, 이번에는 대답을 찾아낸 기쁨인가 보다.


"합리성을 왜 따져요. 불합리 속에서 합리적으로 사는 거야말로 자포자기지. 삶을 바꿀 계기를 붙잡고 정해진 걸 바꾸는 만남이 바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운명적인 만남이 좋고요. 어때요?"


 목소리에 미세하게 힘이 실렸다. 의기양양해진 건가? 그녀의 미세한 톤 변화를 조금씩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운명이라. 옛날에 참 많이 들었던 단어다. 만화 영화 드라마 책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단골 소재 중 하나였으므로. 소년만화의 영향으로 자유 의지의 신봉자가 된 나는 그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행동이 아무 가치도 없어지는 것 같았고, 또 행동하지 않는 걸 정당화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많이 색다른 해석이네. 미래를 바꾸는 운명이라.

 행운을 받아들이는 해석이었다.


"글쎄. 그건 낙관적인 자포자기로 보여. 계기가 있어야 꼭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능력 있는 누군가가 우연히 찾아와 줘야만 바뀌는 삶이라니. 너무 비참하지 않냐. 역시 난 운명적인 첫 만남이 별로야."


 그래도.


 그래도 역시 운명이라고 해석하는 건 편한 짓일 뿐이다. 해석하기 쉬운 멋진 우연이 있어야만 변하는 삶이라니.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진짜 독하시네요."


"네가 선택한 독서부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적당히 농담으로 둘러대고는 책을 챙긴 채 북트럭으로 걸어갔다. 시계를 보아하니 6시였다.


"아, 살짝 지났다. 안 늦었어?"


"...10분쯤 늦었네요. 선배는 바로 갈 건가요?"


"좀 더 읽다가 갈게."


"오늘은 무슨 책이세요?"


 원서에서 해방된 내가 무슨 책을 읽을지 궁금한 모양이다.


"운명론이나 더 연구해 보게. 확실히 재밌긴 하네."


"... 저도 다음 책 추천을 다시 고민해봐야겠네요. 그럼 가볼게요. 내일 봐요."


"잘 가."


 인사를 마친 그녀는 가방을 챙기고는 도서관 문을 열어 떠났다.




 홀로 남은 나는 100번대 서가로 걸어갔다. 누가 신청했는지 모를 교양서적들이 한가득 보였다. 제목도 보지 않고 아무 책이나 빼 들었다. 철학사 해설서였다.


해석하기 나름인 건가.


"...아으!"


 도서관 입구의 유리문이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문을 향해 돌아보자 사서가 보였다. 왼손과 겨드랑이 사이로 거대한 사탕 통을 껴 놓고 오른손에는 검은 봉투를 들고 있었다. 화장실이 아니라 오늘은 그냥 매점에서 장을 보고 왔나 보다.


"무거우세요?"


"어? ... 어! 이거 좀 저기 놔 줄래?"


 지시대명사로만 말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도서부한테도 그러십니까. 나는 사서의 시선 이동을 통해 대충 내용을 짐작하고는 사탕 통을 들어 사서 컴퓨터 근처 구석으로 옮겼다.


"땡큐. 하나 먹을래?"


 컴퓨터와 책상 곁과 사탕 통 옆에 있는 그녀의 의자에 풀썩 주저앉으며 사서가 사탕 통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에서 봉투 덮인 말랑말랑한 음식을 꺼냈다. 초록색 겉봉지를 보아하니 사과 맛으로 추정되었다.사탕을 받아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대출 되나요."


 할 말이 없어서 들고 있던 책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렇게 뚝 때고 말하니 신용 불량자가 된 기분이다. 사서는 바코드 리더를 들어 책의 라벨을 찍었다. 사서랑 면식 있는 도서관 죽돌이의 특전인 학생증 없이 책 빌리기를 성공하고는 가방을 챙겼다. 책이 좀 커서 가방에 욱여넣어야 들어가졌다.


"너 걔랑 싸웠니?"


“예?"


 사서가 검은 봉투를 풀며 말했다.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걔가 뭐라 구시렁거리면서 가던데."


"뭐라고 했는데요?"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좀 뾰로통해 보이더라. 싸웠어?"


"그냥, 논쟁을 좀 했어요."


"흐응."


 사서는 의미심장한 추임새를 넣고는 다시 먹을거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도서관 내 음식물 반입금지 수칙의 유일한 예외인 사람다웠다. 자리가 자리라고는 해도 나이치고는 묘하게 열정이 없는 선생이었다. 오지랖이 별로 없는 점은 좋았다.


 근데 오늘은 웬일로 개인사를 물어본 걸까. 선만 지킨다면 도서관 안에서 작게 떠드는 거나 장난도 어느 정도 용인하는, 좋게 말하면 융통성 있는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무심한 사람이 저 누나였다. 기묘한 일이 요즘 들어 많아졌다.


"기분 나빠 보였어요?"


"응?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포켓치킨과 만두를 뜯으며 사서가 대답했다. 그냥 말 그대로 신경만 쓰이는 정도였나. 나는 좀 더 물어볼지 고민하다가 역으로 뭔 얘기를 했냐고 물어봐지면 대답하기 곤란해질 게 뻔해서 그대로 나가길 택했다.


 축구하는 사람들을 지나 교문을 나섰다. 경비원 할아버지에게 인사하자 그 할아버지도 손을 흔들었다. 날이 흐려서인지 벌써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원서를 읽던 때는 좀 더 읽어 보겠다고 시간차를 두고 나갔고, 이번에는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서 늦게 나섰다.


 그때 처음 같이 하교한 뒤로는 쭉 이 상태다. 더 깊고 개인적으로 만나는 걸 나는 꺼리고 있었다.





 애새끼도 아니고 유치하게 왜 이러는지.


 바닥에 굴러다니던 콜라 캔을 걷어찼다. 이상한 거리감이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은 거 아니었냐. 친해지기 무서운 거냐.


 멋대로 망상하고 해석하는 건 여전히 내 쪽 아니냐. 저쪽에서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했는데 왜 혼자 또 지레 겁먹었냐.


 그냥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고, 운명도 뭣도 아니다. 어중간하게 굴지 말자 좀. 저쪽이 사람답게 굴면 나도 좀 제대로 굴자.


 멋대로 의미부여 좀 하지 마. 광대 놀음은 익숙하잖아. 서로 건전하게 어울리는 게 뭐가 문제냐고. 그냥 호의다. 이건. 오늘 알아냈잖아. 취미에 어울리고, 다양한 해석을 해 주고. 이건 날 바꿀 운명도 뭣도 아니잖아. 이상하게 해석하지 말자.





 어중간한 사색을 끝마치고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한가한 빨간 불이다. 한숨을 내쉬고는 주머니를 만졌다. 사탕이 만져졌다. 포장을 까고 입에 넣었다.


 멜론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