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어지간히도 밝았다.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사람들은 바다를 보통 무서운 곳으로 치는 편이다. 육지의 사람은 바다를 모르기에 바다를 두려워하고, 바다의 사람은 바다를 알기에 바다를 두려워한다. 알 수 없는 깊은 곳, 그리고 칠흑. 의지도 의도도 없이 마냥 무자비하기만 한 파도. 그로부터 나오는 원초적인 공포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하늘은 어떨까.


 하늘은 뱃사람의 벗이자 적이다. 정확히는 깊은 어둠 속은 그들의 벗이고, 그것을 가리는 것이 그들의 적이다. 별을 이정표로, 달을 방향계로삼아 뱃사람은 바다를 누빈다. 하늘은 땅에서도 사람에게 길을 알린다. 하물며 바다에서는 어떻겠는가. 하늘만이 바다의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에 바다를 누비는 사람들에게 하늘은 또 다른 바다이자 삶의 터전이다. 닿을  수 없는 바다였고, 공포를 숭배하는 그들에게 있어선 찾아오지 않는 공포였다. 빛이 사라질 때가 되서야 바다는 빛난다. 


 어촌에 발에 치이도록 많은 괴담 중에서도 보름달 이야기는 여러모로 튀는 구석이 많다. 일단 해석이 갈리는 미신이라는 점부터가 다른 미신과는 차별화됐다. 보통은 풍요의 상징으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재액의 상징이기도 한 보름달. 달이 뚜렷할수록 항해가 원활해지니 어찌 보면 어느 쪽으로나 해석 가능한 게 당연한 듯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점에서 미신과는 차별화되는, 일종의 이론스러운 성격을 띠는 부분도 있는 게 보름달 미신이었다. 


 그중에서도 낚시 부분은 특히나 논쟁이 심했다.


 한가한 어르신들이 밤중에 낚싯대를 잡을 때마다 가장 이견이 갈리는 사항이 바로 달에 관한 것이었다. 밀물 썰물 흐름을 논하며 낚일 만한 어종을 분석하는 뒷방 늙은이도, 경험에 의거해 주장을 펼치는 젊은 편인 아저씨도, 어떤 달에 낚시가 잘 되는지는 다들 의견이 갈렸다. 각자 펼치는 주장은 다양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확실해진 사실이 두 개는 있었다. 오늘은 글렀다. 그리고 보름달 아래서는 쓸데없이 감수성만 풍부해진다. 나는 내가 산만해지고 있음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달을 논하기 이전에, 낚시, 그것도 조각배 하나에 몸을 맡기고 하는 바다낚시에 이로울 환경이 뭐가 있겠냐마는. 그렇지만 오늘따라 평탄한 바다에서 내가 책임을 전가할 만한 것은 달밖에 없었다. 고기가 안 잡힌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둘째치고 환경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낚싯줄은 본래의 용도로 쓰이길 거부하고 파업이라도 하는 건지 수면에 파문만을 그리는 붓으로 돌변한 채였다. 찌는 한참이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지독히도 안 낚였다.


 달이 꽉 찼건만 파도는 느렸다. 그래서 고기가 안 낚이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이 들었다. 아니면 달이 밝아 고기가 놀라 물밑 깊숙이 도망쳐버린 걸까. 아무튼 이건 글렀다. 오늘은 확실히 글렀다. 못 낚겠다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연달아 들자 맥이 확 빠져버렸다. 달이 뻔히 움직일 동안 고기 하나 못 잡은 나는 끝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낚싯대에 소금기 묻은 손을 문질렀다.


 "저, 영감님."


 텁텁한 갈증에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찬바람 섞인 짠 냄새가 눈을 찔렀다. 쪽배에 앉아 밤새도록 바다를 온몸으로 느껴버린 나는 지친 지 오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나는 결국 영감을 부르며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이게 지금 되긴 하나? 메리치 하나 안 낚이는디. 낚숫대가 도무지 꿈쩍도 안 하는고만. 이래서야 도망갈 고기도 없겠수."


 최대한 기교를 짜낸 내 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영감은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셨다. 영감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해질녘부터 쭉 파도 소리에 시달린 탓에 귀가 멍멍해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희미하게 번진 달빛에 영감의 윤곽만이 보였다. 낚싯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편하게 말해, 총각."


 낚시의 결과를 위로하듯 영감은 술병을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취기 하나 안 느껴지는 인자한 목소리 끝자락에 이번에도 껄껄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걸쳐져 있었다. 내 말이 꽤 우스꽝스러웠나 보다. 나는 조금 전부터 영감이 쭉 웃고 있었음을 깨닫고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어색합니까?"


 "어색하고말고. 그래도 석 달째 치고는 나쁘지 않아."


 3개월. 우라질 3개월. 영감은 짧고 굵은 거절의 의사를 내보였다. 이렇게 단호하게 끝내버리다니. 지친 심신에 괜히 욕지거리가 치밀어올랐다.


 "우라질, 혀 꼬인 발음만 들어서야 어떻게 말을 제대로 익히냐고요."


 나는 기지개를 켜고는 혼잣말 삼아 불평했다. 나름 자신 있던 술집에서 단련된 사투리마저도 퇴짜를 맞았다. 뒷골이 땡겼다. 이번에도 실패다.


 이걸로 세 번째 도전도 끝나버렸다. 빌어먹을 낚시, 그리고 사투리 때문에. 멸치 한 마리 안 내주는 바다에 소심하게 불평하는 셈 치고 나는 찌뿌둥해진 목을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참 높이도 떠 있었다.


 어르신들에게 이번에는 반드시 붙는다고 호언장담하며 술 내기까지 걸었는데. 낭패다. 낚싯대도 좋은 걸 따로 빌려오고, 미끼도 직접 사 봤는데. 바늘 관리도 한 달 내내 벼르고 있었는데. 망할 놈의 고기가 도무지 걸리지를 않았다. 허무한 결과였다. 내 한 달도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까.


 "그러게 힘 좀 빼고 하라니까. 그렇게 악을 쓰면 잡을 고기도 안 낚인다네. 잡을 게 아니라 놓칠 걸 생각해야지."


 "놓칠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니까요?"


 "음, 그런가? 너무 북쪽으로 나갔네. 돌아가자."


 "아오..."


 달을 통해 위치를 잡던 중 지금 여기가 남쪽인지 북쪽인지 헷갈리던 나를 어떻게 눈치챘는지 영감은 귀신같이 방향을 잡았다. 나를 배려하는 건지 영감이 출발할 때와는 반대로 다르게 나를 대신해 노를 잡았다. 백발과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팔이 꼭 그 녀석 같았다. 뱃일 불합격 구두 통보에 비격식적인 이의 제기도 불가능하게 됐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각배 뒤편에 주저앉았다. 구시렁거리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음 달까지 기다리라고요? 또?"


 "시험을? 아님 뱃일을?"


 영감은 모르는 척 내게 되물었다.


 "둘 다요. 누가 술꾼 욕지기나 주구장창 치우려고 여기 온 줄 아나."


 "뱃일은 총각에겐 아직 이르다니까 그러네. 총각도 알잖아."


 영감의 고리타분한 반박도 신물이 난다. 뱃머리 쪽으로 몸을 기울여 갑판을 더듬었지만 빈 술병만이 잡힐 뿐이었다. 밤새 기진맥진해진 나는 몸을 돌려 반쯤 누웠다. 귀향이 늦어진다는 생각에 밤바다가 괜히도 서럽게만 느껴졌다.



 항구에 온 지도 어느덧 석 달이 넘어가는 중이건만, 나는 도통 제대로 된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뭍에서만 살아온 도시 촌놈이래도 사지 건장하므로 배에서 잡일거리라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잡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워 큰 배에 타고, 긴 항해 두세 번으로 목돈을 벌어 귀향하겠다는 계획은 의외의 변수가 나타나는 바람에 파토가 나고 있었다. 저놈의 영감이 문제였다.


 항구의 사람들은 그녀를 '영감'이라고만 불렀다. 토박이 마을 사람들은 물론 그녀와 면식이 있는 다른 항구의 선원들도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나이 예순을 앞뒀다는 백발 무성한 할머니가 어쩌다가 영감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조각배를 세 번 같이 타보면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게 됐다. 마을 사람들 왈 "이 영감은 해룡이랑 싸워도 이긴다"라고 평할 만한 실력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뱃사람들이 그녀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자 일종의 영예로운 호칭이었다. 그녀가 그런 호칭을 얻게 된 까닭을 짐작해 보자면 오밤중에 얕은 바다에서 짜리몽땅한 낚싯대 하나로 눈 깜짝할 사이 참다랑어 세 마리를 낚는 등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할머니를 영감이라 부르는 비상식적인 광경과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바닷가에서 흔히 사용되는 자살 수단으로 여겨질, 쪽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는 짓이나 업무 도중 음주 행위조차 그녀가 저지를 때에는 연륜이 배어 나오는 그런 행위로 취급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바닷가 사람답지 않은 사투리 없는 뚜렷한 말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항구의 최고 책임자는 보통 영감 소리를 듣는 사람이기 마련이었고, 그녀는 영감이라 불렸다. 민물낚시와 수영 경험까지 빼면은 가진 것이라곤 튼튼한 몸밖에 없는 청년이 바다에 나가고자 한다면 꼭 만나볼 사람이 바로 영감이었다. 


 일단 어찌 됐건 간에 영감은 마음씨 넓은 사람임은 분명했다. 기행이 좀 많다는 사소한 부분은 어르신의 애교라 치고 평가하자면 그렇다. 주변 평판도 그렇고, 다짜고짜 찾아와 일거리를 소개해주지 않겠냐고 물은 이방인을 받아준 것만 해도 그렇다. 그에게 뱃일을 직접 가르친 것도 단순히 시간이 남아도는 한가한 노인네의 취미 생활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시간이 남아돌 리가 없는 모두의 영감이었으니까. 그리고 청년에게 있어서도 따로 시간을 내서 교육을 시켜주는 그녀는 영감이었다.


 기행이 좀 많다는 점을 고려하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좋은 영감이었다. 가르쳐 놓고 쓸 기회를 안 주는 기행만 아니었으면 이견의 여지 없이 확실히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이래 봬도 나는 왕도의 중등 교육 과정까지는 이수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 내가 보기에 영감은 속 터질 정도로 이상했다. 성격이 아니라 행동이. 항구에 처음 왔을 때, 분명 영감에게 내 사정을 확실하게 설명했다. 급전이 필요할 뿐이라고. 그때 영감이 지은 영문 모를 갸웃하는 표정을 의심했어야 했을까. 영감은 내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뱃일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높은 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능숙한 뱃사람이 되고 바닷말에도 익숙해지면 나를 바다로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손해 볼 부분은 없는 합리적인 약속이긴 했다. 이놈의 낚시와 사투리만 차치하고 본다면 그렇다. 그리고 익숙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영감의 주관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본다면 그렇다. 뱃일에 필요한 상식이 영감의 낚시질로 인해 시험대에 올라가는 것도 세 번째가 되니 슬슬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낚시야 영감 같은 규격 외의 낚시꾼이 아니라면 소위 말하는 운칠기삼의 소일거리 아닌가. 사투리는 어차피 배 타고 여기저기 외지로 나가면 그저 사투리에 불과할 뿐일 테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행 수준이 아니라 광기 섞인 노망이 아닐지 의문만이 생겨나는 영감의 방침이었다. 


 뱃머리 근처에 놔둔 물통을 더듬어 찾아내 한 모금 축였다. 뱃머리 밖으로 고개를 기댔다. 남쪽에는 마을의 조명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해안선 아래로 물에 비친 작은 달이 보였다. 정점을 찍은 뒤 천천히 내려가는 달이. 보름달이.


 다음 보름달까지 기다리라고?


 화가 쌓이자 다른 방향으로 오기가 생겨났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왜 바다낚시를 배우라는 겁니까?"


 기습적으로 외쳤다. 영감은 놀랐는지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노골적으로 씩씩거리며 노 젓는 영감 옆에서 낚싯대를 거두었다. 세 번째 실패에 지쳐 조급해진 나는 낚싯바늘에 꿰여 있던 미끼를 내던짐과 동시에 마침내 묵혀 두던 의문을 영감에게 꺼냈다.  


  "어차피 큰 배 타면 바다낚시 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물을 만지거나, 아니면 무역선에 타고 있겠지. 바다낚시는 그냥 취미로 하는 유흥거리잖습니까."


너무 거슬리게 말했나 보다. 노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지며 영감의 고개가 흘끗 돌아갔다. 그렇지만 첫 문장을 띄우니 불평이 술술 나왔다.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다. 


 "저는 돈을 벌려고 온 거지, 바다에 눌러살려는 건 아니라니까요."


 요즘 어업에 젊은 일손이 부족해서, 젊은 사람을 몰래 붙잡아다가... 따위의 뱃사람들이 술집에서 떠들던 괴담이 떠올랐다. 영감이 그럴 리는 없어 보였지만, 이쯤 되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지침은 노골적으로 나를 묶어두려는 태도 아닌가. 단기간에 빠르게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일거리를 찾던 내가 긴 고민 끝에 드워프에게 밀릴 광부일 대신 뱃일을 고른 보람이 없었다. 나도 알 건 안다. 어지간한 직업 연수는 이렇게 길지 않다고.


 "영감님. 저 그동안 일하는 거 보셨잖아요. 노끈 묶는 법 배우겠다고 손가락 다치고 밧줄 다루다가 손 다 까지고. 술집에서 노련한 다른 영감분들 계시면 최대한 요령도 배우려 들고. 그물질도 이젠 돈 받고 정리해 줄 정도입니다. 다른 아저씨들 다 저를 인정하시는데, 왜 영감님만 저를 붙잡는데요? 저도 일 좀 해봅시다!"


 나는 전력으로 짜증을 냈다. 영감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노를 저었다. 너무 과했나? 초조함에 의심까지 붙는 바람에 자제력이 떨어졌다. 나는 수습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영감님이 텃세 부릴 꼰대는 아니시잖아요. 적어도 이유는 듣고 싶네요."


 갈매기 잠든 밤에 파도 소리만 무성했다. 떼를 쓰고 나니 개운해지긴 했지만 상쾌하지는 않았다. 무반응에 역으로 기가 죽어버린 나는 다시 걸터 누웠다.



 솔직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벌써부터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입이 하나 있는데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조심성 없고 밤눈도 나쁜데다가 어딘가의 신묘한 할머니처럼 주량이 좋은 것도 아닌 멍청한 마부 놈 때문에 그 녀석의 팔이 너덜너덜해진 지도 어언 반년이 지났다. 그래서 그 녀석은 대장장이 일을 그만두어야만 했다. 위자료도 받았고 치료도 했지만 한 번 으깨진 힘줄은 어쩔 도리가 없다나. 숟가락질이 가능해졌다고 기적적인 재활이라 떠드는 구식 의사들은 한심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치유마법사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모두 가난했으므로.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아니다. 하지만 내 가문은 몰라도 녀석의 가족과 나는 가난했다. 내 집안의 돈을 쓰는 건 어불성설이고. 집안 어르신이라는 사람들은 나와 그 녀석의 사이를 수준 안 맞는 철없는 모임이라고만 여겼으니까. 나 또한 굳이 부모의 손을 빌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지 건장한 사나이답게 무턱대고 일을 벌일 자신은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사관학교를 때려치우고 15년 지기 친구를 위해 어촌으로 오게 된 계기였다.


 '응? 너 누구니? 아, 새로 이사 온 집이구나! 나는 저어기 새비나무 골목 대장간 딸이야. 너는?'

 

나는...


 '아빠가 승진해서... 근위병으로? 대단하시다! 나는 아빠 따라 대장장이 되고 싶어. 경비원 아저씨 갑옷 멋지지? 그거 우리 아빠가 만든 거야! 나도 그렇게...'


 나는 군인이 꿈이야.


 '야! 학교 가야지, 일어나야지! 늦잠만 자고는. 꿈에서 군인 되려고? 왜 학교 가는 날만 오면 항상 내가 깨워줘야 일어나? 야, 지금 웃는 거야? 너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거야?'


 꿈이었어.


'야! 씹썌꺄! 잠 좀 자자. 운동을 꼭 새벽부터 해야겠냐? 아니, 것보다 왜 구우욷이 우리 골목까지 와서 하는 건데? 공터는 마름나무 골목 쪽이 더 크잖아! 야! 군바리! 못 들은 척하지 마! 야!'


 힘을 기르고 싶었었어.


 '야. 띨띨아. 대장장이는 군바리 도와주는 사람이잖아. 그럼 군인은 누구 도와주는 사람이야? 죽고 죽이는 일이라던데. 너는 왜 예비땅개가 되려고 하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도록 사람을 지킬 수 있거든. 그것도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그러면 그냥 공무원을 해. 띨띨아. 뇌도 근육이셔? 예비 아쎄이야? 아참, 니는 장교 전형이지. 아, 그럼 그거구나? 근육은 다치면서 큰다잖아. 단련을 위해 창칼에 맞아 근육을 키우려는 생각이구나. 와! 즈엉말 똑똑하다! 역시 예비 장교야!... 그럴 바에 차라리 모루질을 같이 하지 그래? 어때?'


 너는 싫어했지만. 

 

'헐, 사관학교 수준 실화냐? 푸핫, 네가 왜 합격인데? 공무원 나으리? 우리 못 미더운 울보가 나라를 지킨다는 게 말이 되냐. 팔씨름도 나 못 이기는 녀석이 어딜 가겠다고...'


 ...근데 네 팔뚝이 지켜질 필요가 있을 줄은 몰랐었지 뭐야. 하하. 육시럴.


 '하아아... 어쩔 수 없네. 이거 챙겨. 이것도. 튼튼해. 아빠랑 같이 힘 좀 써서 만든 거야. 야. 네가 국민을 못 지켜도 국민은 너를 혈세로 지켜준다는 걸 좀 고마워하면서 살아라? 응? 나랏밥 먹을 합법적 세금 도둑님아. 그래. 그래. 넌 나중에 훈장에 연금까지 쳐먹으면서 군무새로 살 거지? 그래. 그래. 나라가 또 사람 하나 망쳐 놓는구나. 아이고... 팔다리 잘리고 병신되서 울고 돌아오지는 말고. 응?'


 고맙고말고.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어... 안녕. 벌써 외출일이었구나. 팔? 음... 좀 다쳤어.'


 우라질.


 '뭐야. 표정 왜 그래. 야. 간만에 만나자마자 헛소리부터 하기야? 야. 귀하디귀한 외출인인데 웃으면서 보내야지. 응? 후흡. 이제 너같은 띨띨이는 누가 지켜주나 몰라...'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거야.



 정적 속에서 갑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물 묻은 손이 얼얼했다. 내가 할 일은 명확하고, 이건 시간 낭비가 분명하다. 늙은이의 자기만족을 위한 오지랖에 시간을 날릴 수는 없다. 이런 배려는 바란 적 없다. 술집에서 허드렛일에 시달리며 주정뱅이 따라 욕 솜씨만 늘어나는 건 바란 적 없다.


 "영감님. 저 급하다니까요... 염병, 더 말해봐야 뭐 합니까. 그래요. 관둡시다. 저 내일 안 보이면 바다 나간 거로 아세요. 궨트 씨한테 부탁하면 어지간해서는 태워주시겠죠. 그 양반도 절 인정해준 지가 언젠데. 그러니 그리 아세요."


 노곤한 몸으로 신음에 가깝게 마지막 말을 꺼냈다. 사람이 막막해지니 심술이 많아졌다. 영감은 무슨 생각인지, 말이 없었다.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부르튼 입술에 침을 바르며 시간을 보냈다. 달은 미묘하게 내려가 있었고, 마을의 빛은 점점 밝아졌다. 노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기만 했다. 괜스레 양심이 찔린 나는 더 몰어봐서 공식적으로 허가를 제대로 받아볼지 말지 갈팡질팡하는 채로 몸을 뒤척였다.


 "사투리 어렵지?"


  뻘줌함 속에서 슬슬 내 독기가 꺾이고 다시 의기소침해질 쯔음, 영감이 흐름을 읽었는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질문으로. 나는 갑작스럽게 꺼내진 질문에 놀라 어버버거렸다.


 "네? 네. 네?"


 "총각은 뱃사람이 아니야."


 뚱딴지같은 소리가 연이어 날아왔다. 급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나는 잠시 대화를 복기한 끝에 영감이 당연한 소리를 무게감 잡고 참 뜬금없게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 그런데요?"


 조류만큼이나 난해한 영감의 의도를 읽기를 완전히 관두고는 나는 그대로 물었다. 


 "바다는 총각이 있을 자리가 아니야. 틀림없어."


 "그러니까 대체 왜요?"


 "흠..."


 미세한 암시 속에서 영감은 순순하게 나를 고의로 막고 있었음을 시인했다. 별로 의외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영감의 태도는 확실히 나를 향할 때에만 이상했으니. 다른 외지인 뱃사람이 없어서 검증은 불가능했지만, 영감이 유난히 나를 더 챙기고 과보호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것도 과보호의 연장일지도 모르겠다. 필요 없는. 나는 확실히 하기 위해 영감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영감은 바람에 고개를 기울이며 뜸을 들였다.


 "총각. 별을 좀 아는가?"


 시간의 결과물은 의외의 화젯거리였다. 영감은 저만치 손을 들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 퍼진 은색 사이로 작은 빛이 희미하게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영감의 손끝을 따라 별을 찾고 다시 영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은한 빛에 조금은 선명해진 윤곽 속에서 나는 영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영감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서글픈 미소를.


 "별이요? 예... 어느 정도 읽을 줄은 압니다."


  그 묘한 미소에 나는 무어라 따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잠자코 뭐라 이유를 대는지 들어나 보자고 합리화를 마친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별이라면 사관학교에서도 좀 많이 배웠었지. 북극성, 별자리와 방향, 지금이 여름이니까... 나는 배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비교적 최근에 자명해진 사실을 손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읽는 별 말고."


 그렇지만 이번에도 퇴짜였다.


 "가벼운 미신 말야."

 

 "미신?"


 퇴짜를 먹은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되새김질했다. 술집에 들른 뱃사람들의 주정 중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 중에서도 미신 이야기는 최상위권이다. 특히 놀리기 딱 좋은 촌놈 풋내기에게는. 부두 끝자락 턱 밟고 출항하면 배 위에서 병 걸려 골골거리다 죽는다, 출항할 때마다 바다에 동전을 뿌리는 게 신에 대한 예의다, 출항할 때는 인사하지 말고 입항할 때만 인사해라, 그리고 입항하는 선원과 출항하는 선원은 풋내기께서 알아서 잘 구분해 보시고... 별의별 괴담에 시답잖은 헛소리까지. 나는 거둬들였던 불신을 다시 꺼냈다. 


 "그런 거 있잖아. 바다에서 죽은 사람은 별이 된다는 말. 주점에서 한 번도 못 들어봤나?"


 "죽어서 별로 변한다? 그거라면 알긴 압니다."


  미신이라기도 하기도 뭣한 굉장히 순한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바다에 빠져 사라진 선원은 별이 된다는, 죽은 사람은 별이 되는 식의 지천으로 널린 장례성 미신. 그렇기에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영감이 내 눈치를 살피고는 잔잔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 하늘의 바다로 돌아가는 셈이지."


 덜떨어진 음유시인 놈들의 닳은 표현보다는 세련된 표현일지도. 나는 턱을 괴고는 영감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럼 이것도 아나? 육지에서 죽은 사람은 달에 깃든다는 말."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늘의 육지는 달인가? 간단하게 추측해보고 나는 말했다.


 "달...? 아뇨. 처음 들어봅니다."


 "그럴 만도 해. 별로 유쾌한 소리는 아니거든."


 그럼 수장당한 사람이 별로 박제된다는 미신은 상대적으로 유쾌하다는 소리인가. 미신은 항상 이 꼴이다. 


 "이런 미신들이 왜 생겼는지는 혹시 알고 있나?"


 대화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미신이 생긴 배경을 묻다니.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신이 점점 커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둑한 그림자가 움찔거렸다.


 "사실 딱히 없어. 구색 맞추기일 뿐이야. 그러니까 미신이지."


 천천히 간을 보며 돌아가던 말이 당돌한 영감의 고백으로 순식간에 흐름이 꺾였다. 내 마음을 진짜 읽기라도 하는 건지 원.


 "말은 그쯤 돌리시고. 제가 왜 배를 타면 안 되는지 이유부터 좀 알려주실래요."


 그 녀석이라면 오히려 좋다고 들으면서 나를 성질 급한 돌대가리라고 놀렸겠지만, 나는 나다. 말이 베베 꼬이는 걸 견디지 못하고 끊었다. 


 "말을 너무 끌었나? 음, 더 말할 게 있었는데. 그렇다면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미신이 주는 교훈이야."


 말이 더 길어지겠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또 끊지는 못했다. 영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소금기와는 뭔가 다른 촉촉함이 느껴졌다. 바다 특유의 미신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약간은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미신의 해석도 그렇고, 영감을 이해할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얌전히 운을 텄다.


 "뭐가요?"


 "별은 위치를 보여 주고, 달은 방향을 보여주거든. 선원은 하늘에서 동료를 지켜보고, 땅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가야 하는 곳을 알려주는 거야. 어때? 꽤 그럴싸하지 않나?"


 "그렇군요. 정말 멋있는 이유네요. 감동적입니다, 영감님."


 "쩝. 별론가."


 영감은 내 기색에 다시 기가 죽었다.


 "저는 별도 달도 못 읽으니 바다 누비는 뱃사람 일은 안 맞는다는 뜻이시겠지요. 암요."


 영감과는 조금 다른 식으로 기가 죽은 나는 싸늘한 티를 팍팍 내서 답했다.


 "아닌데?"


 그런데 이것도 읽혔나 보다. 영감은 바로 어조를 밝게 높이고 슬쩍 비아냥거리던 나를 역으로 놀렸다. 


 "음..."


 그런데 놀리다가 말았다. 이번엔 또 말을 까먹은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그냥 서로 속 편하고 좋게 타협하자고. 그렇게 자신 있으면 뱃일 한 번 나가보시던지! 한 마디면 끝나는 일이라니까.


 "뭐 하세요?"


 "생각."


 "그건 척 보면 압니다. 무슨 생각이요?"


 이제 소모적인 기싸움을 끝낼 마지막 한마디만 더 하면 됩니다. 영감님.


 "달."


 "달?"


 "응. 달."


 꿋꿋하게도 안 하신다. 돌겠다. 이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강력한 의구심이 들었다.


 "무슨 달을 생각하시길래 그리 오래 걸려요. 소싯적 물에 비친 달 보고 흥에 취해서 바닷물로 다이빙한 썰이라도 푸시려고?"


 "그거 말고. 좀 더 옛날 이야기."


 '그거 말고'라는 부분이 조금 신경쓰였지만 뒷문장은 더 거슬렸다. 대놓고 운을 띄워달라는 투였다. 이제 드디어 본론일까. 나는 마지못해 대화를 이었다.


 "그렇군요."


 "한 번 이야기해도 되겠나?"


 이젠 기어코 직접 운을 띄우시는군.


 "뭐, 해보시죠."


 영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흘끗 영감을 쳐다보니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냥 옛날이야기야. 깡촌 영감댁 자식의 기구한 사연이지."


 "...그거 혹시 영감님 젊을 때 이야기인가요?"


 술집 책상에서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식상한 도입부를 듣자마자 바로 촉이 왔다. 영감은 예끼, 소리를 한 번 내고는 허허 웃었다. 제대로 짚어버렸나 보다. 복수에 성공했다.


 그러다 보니 영감님의 과거를 직접 듣는 건 처음이다. '영감' 호칭도 사실 세습제로 계승되는 것이었나? 영감이 이야기를 계속하겠다는 티를 내자 나는 영감에게 집중했다.


 "그렇지. 깡촌 영감댁 따님의 기구한 사연일세. 지금부터 딱 50년 전이었나? 그때는 나라끼리 사이가 좋았거든. 무역이 정말 잘 됐어. 배만 빌려줘도 돈 마를 일이 없는 호황기였지. 어촌보다는 무역이 더 잘 나갔고. 그리고 그때의 영감은 돈의 흐름을 잘 읽는 눈치 빠른 아저씨였지. 호황기 때의 촌장은 배도 많았어. 시대를 잘 탄 그 아저씨네 가족은 부유해졌어. 그래서 깡촌의 흔한 아낙이었을 소녀 하나는 얼떨결에 부잣집 아가씨가 됐지."


  "흐음."


 "사실 뻥이야."


 "......"


 영감이 입가를 훔쳤다. 방심했다.


 "농담일세. 미안하네. 총각. 놀릴 생각은 없었어. 그러니 화 풀게. 음, 그러니까 깡촌 소녀 하나만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이거야. 자기 집안이 부유하니 자기도 부유한 사람일 거라는 착각에 빠져버렸다, 그런 뜻이라고.


 그래. 그리고 ...그런 사람답게도, 소녀는 오만했었어. 바다 일은 자기 격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 소는 마법사가 꿈이었거든. 소녀는 머리가 특별히 나쁘지도 않았고, 집안에 학비도 충분했으니 안될 건 없다고 생각한 거지."


 "어... 혹시 그동안 마법 쓰면서 낚시하던 건가요?"


 "지금 일부러 말 끊은 거지?"


 "들켰네."


 "...아니. 마법은 제대로 못 배웠거든... 이런, 순서가 틀렸네. 급한 건 알겠지만 조용히 좀 들어 줘, 총각. 마을에 닿으려면 아직 시간 좀 있잖아. 그럼 어디서부터 제대로 꺼내야 하나... 


 좋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볼까.


 소녀의 가족부터 소개해야겠네. 그래. 소녀의 부모, 그러니까 영감댁 부모는 수완 좋은 상인이었어. 무역업인지라 수입이 안정되지는 않았어. 하지만 충분히 부유한 편이었어. 특히나 소녀가 태어날 적에는 경기가 역대급으로 호황일 때여서 돈이라면 잔뜩 벌어 뒀지. 아, 벌써 질린 표정 짓지 말게.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니야. 의외로 그들은 돈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아니었어. 돈을 벌면서 장사치 일에 환멸이 생겨버렸거든. 


 그래서 딸만은 그렇게 크질 않게 바랬어. 좋은 바람인지 나쁜 바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적어도 딸이 깡촌 장사치로 크길 바라지는 않았지. 그만큼 다른 쪽으로 소녀가 성장해주길 바라는 기대도 컸고. 그런 바램 속에서 소녀는 무럭무럭 컸다네.


 그래서 소녀는 착각할 수밖에 없었어. 부모는 소녀가 무엇을 해도 응원했고, 전력으로 지원해줬거든. 그러니 자기는 특별하고 우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거야. 아, 그래. 딱히 틀리지는 않지.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소녀는 부모의 이상과는 다르게 그다지 특별하고 우월한 그런 사람인 건 아니었던 거야. 부모와 소녀만이 그렇게 착각했을 뿐. 소녀 자체는 결국 고만고만한 범인일 뿐인데. 


 뭐, 세상만사에 믿음과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안 될 건 없지. 그렇지만 소녀는 노력해서 뛰어난 사람이 된 게 아니잖아. 부모의 노력 밑에서 특별하게 여겨졌기만 했지. 그걸 소녀는 몰랐어. 마을은 언제나 떠나야 할 장소, 도시에서 성공하기 전에 거치는 유년 시절의 장애물일 뿐이라고만 여겼다네.


 그치. 장애물. 소녀는 마을을 장애물로만 보고 깔봤지. 그러니 마을도 소녀를 안 좋게 볼 수밖에. 애초에 소녀는 정감 가는 아이가 아니었고, 소외된 채로 우물 안 개구리마냥 살며 도시로 나가길 기다렸어. 물론 자신이 깔보는 다른 꼬마들에게 똑같이 깔봐지면서. 성격 문제도 있지만... 소녀는 못생겼기도 했거든. 지금 나보다 주름은 적지만 못생겼었다고. 상상이 가나, 총각? 에이, 이럴 땐 좀 웃어줘. 센스가 없구먼. 매정하기는.


 알겠어. 하던 말이나 계속 해야지... 그렇게 매정한 소녀에게도 따스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어. 재수 없는 소녀를 편드는 소년이 말야.


 그때 말한 게 진짜 가관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성대모사를 못 하니 이럴 때 아쉽단 말이지. 그냥 내용만 말할게. 소녀는 단지 야망이 확고할 뿐이고, 외모로 발목 잡힐 사람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소년은 소녀를 응원했어. 신기하지 않아? 부모님도 차마 내 외모에 좋은 소리를 낼 수는 없었는데. 걔는... 뭐, 그래. 애늙은이었어. 항상 남들보다 빠르게 철드는 친구였지.


  음, 그래서 소녀는 궁금해졌어. 사실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고. 우리 총각만큼이나 싸가지 없는 의도였지. 돈도 많고 잘나기까지 한 내 환심을 사보려고 이러는 거냐, 뭐 그런 식으로... 좋아. 이제야 웃는구만. 그래, 그래, 나도 안다고. 그때는 나만 잘난 줄 알았지. 그렇지만 그때는 소년이  진짜로 못나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소년은 낚시꾼 나부랭이였거든. 직업이 낚시꾼이었다고. 아직 배에서 일하기는 힘들고, 그래서 낚시를 하거나 종종 먼 뻘로 가서 조개를 캐거나 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것도 애송이. 그러니 의심해볼 만도 하지 않아?


 그렇지만 소녀의 뒤틀린 의심에 비하자면 그 친구가 나를 도운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어. 그는 낚시꾼이었지만, 뱃일도 낚시도 하고 싶지 않아 했거든. 게으르다거나 호불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질색을 했어. 바다에서 썩어 죽고 싶지는 않다고. 도시로 나가서 돈도 벌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년과 소녀의 꿈은 같았던 거야. 그래서 도시에 나가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품고 당당하게 구는 내 모습이 좋다고 말했지.


 음? 음. 그렇지. 자, 다시 소녀 이야기. 소년의 야망도 나름 거창했지만, 소년의 포부를 들은 소녀는 딱히 이렇다 할 감상을 받지는 않았어. 그래봐야 나보다는 더 잘나겠냐, 네가 감히 허황된 꿈을 꾸는구나. 이런 느낌이랄까? 소녀는 소년이 우스웠어. 무슨 낚시꾼 나부랭이한테 도시와 출세냐고.


 소녀는 그렇게 여기고 자길 도와주던 소년마저도 공평하게 깔보고 다녔지.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그런 모욕마저 자기를 발전시킬 시련으로 받아들였던 것이겠지... 그렇게 어중간한 채로 시간은 흘러갔어. 


 소녀는 숙녀가 다 되었고, 장애물을 뛰어넘어 홀로 나아갈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어. 소년도 결국 그물과 밧줄을 잘 다루는 어엿한 사내로 자랐고.


 소녀는 멋진 학자, 마법사가 되기를 원했지. 부모도 소녀의 꿈을 반겼어. 근데 하나 문제가 있었어. 학비. 도시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마법까지 배울 학비는 슬슬 호황기가 끝나가는 깡촌 항구 장사치의 저축만으로는 좀 빠듯했어. 가진 재산 안에서 무리하는 것보다는 빚지는 게 더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돈을 조금씩 빌려 학비를 마련했어. 응. 이상하지? 이상할 만도 해. 그냥 장사 밑천까지 써버릴 엄두는 없던 거겠지. 


 아무튼 그 중에서 소년이 모은 돈도 있었서. 낚시꾼 생활로 모은 목돈이.


 소녀가 도시를 향해 출발하는 날이 됐을 때 소년은 소녀를 찾아갔어. 그리고 말했지. 나는 도시로 못 나갈 것이라고. 그렇지만 너를 동경하고 존경하고 응원하고 있다고. 내 몫까지 열심히 해달라고. 소녀는 소년의 동경이 우스웠어. 형식적인 감사만을 표하고 소녀는 소년을 등진 채 떠났다네.


 그리고... 하필 그때 전쟁이 났지.


 가뜩이나 불안정했던 영감댁의 사업은 크게 휘청였어. 그리고 혼란스러운 통에 물가와 학비도 올라버렸지. 열심히 마법을 배워나가던 소녀는 어느샌가 돈에 쪼들리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야.


 소녀의 가족은 빚을 갚는 것조차도 버거운 상황에 놓였어. 그래서 소녀의 부모는 소녀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솔직히 이쯤 되니 다 짐작이 가지? 그렇고말고. 소년이 있었지. 


 소년은 열심히 고기를 잡았어. 군에 넘길 군수품 가격은 절인 고기만큼이나 짭짤한 법이니. 뭍에 제대로 돌아오는 날도 없이 바다로 나가서 고기를 잡았지. 


 그리고 소녀에게 학비를 부쳤어. 편지와 함께.


 너와 언제나 함께하고 싶었다. 성공해서 만나자. 그런 요지의.


 근데, 소녀가 이걸 알 턱이 있나. 소녀는 부모의 사업이 안 돌아가는 것도 몰랐어. 음, 이것까진 그럴 수 있어. 소년이 알아서 돈을 부치겠다고 나서니 딱히 소녀에게 언질을 주질 않았거든. 


  하지만 소녀는 돈도 많고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렇게나 굴었지. 촌뜨기가 도시에 나가면 학업과 노름 중 어디에 더 관심을 가지겠어? 어느 정도 마법을 배워 가뜩이나 기고만장한데 더 시건방져진 그녀는 오히려 향락을 즐기기 시작했어. 다들 불경기인데 혼자 돈이 넉넉했으니까. 넉넉해 보였으니까. 소년은 안중에도 없었지. 편지는 읽지도 않았고. 


 아니, 애초에 소녀는 소년을 만만하게만 여겼어. 어렸을 때부터 늘 자기를 도왔고, 지금도 쭉 그러고 있으므로. 자기가 우월한 입장이라고만 생각하며 소년을 노예 여기듯이 했지. 돈 바치고 몸 바치는 촌뜨기 얼간이일 뿐이라고. 소녀는 소년이 쌓아준 자리 위에서 소년을 밟고 탐욕을 부렸다네.


 그런 위태로운 생활이 또 몇 년은 계속됐어.


 소녀는 완전히 어른이 되었고, 소년의 몸에는 굳은살이 가득해졌지. 소년은 여전히 소녀를 위해 일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하지만 소녀는 달랐지. 소녀는 점점 더 방탕해졌어. 그리고... 잘못된 쾌락에도 손을 대곤 했지.


 그래서 결국 사단이 났어. 소녀는 몸만 어른인 채였으니까. 


 소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소녀였다네. 그리고 몸은... 소녀는... 소녀는..."


 "... 자, 눈물부터 닦으세요.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아, 말하겠네... 아니... 그래. 관두자. 고맙네, 총각.


 한마디로 말하자면, 소녀는 배신당했어. 몸도, 마음도 크게 망가져 버렸지. 빈털터리가 돼버렸고. 소년의 돈으로는 향략이나 배움은 커녕 도시에 발 붙이기도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소녀는 동냥까지 하면서 마차를 얻어타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왔다네. 


 사실, 소녀는 이때까지도 그릇된 마음을 품고 있었지 뭐야. 매달 오는 돈이 부족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더 좋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했으면 그럴 일도 없지 않았겠냐고 합리화를 계속하면서. 그리고 부모와 마을 주민에게 뭐라 따질 생각만 하면서.


 고향에 돌아오고 나서야 소녀는 진실을 마주하게 됐지.


 나름 부유했던 집안은 어느새 위험할 정도로 빚이 불어나 있었어. 부모가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고향에서 온 편지는 제대로 읽지 않던 소녀는 알 턱이 없었지. 늘 듬직하게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부모마저도 천천히 무너지는 걸 보자 소녀는 뒤늦게서야 현실을 파악하게 됐어.


 그런 상황에서 딸을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부모는... 부모...는... 미안하네. 이것도 좀 넘기겠네.


 부모는 크게 충격받았어. 너무 크게. 심하게 몸져누워버렸지. 기껏 키운 딸이... 그렇게 됐으니까. 


 소녀는 울었어. 한참이고 울었어. 무시하던 아이들은 자기보다도 건실한 삶을 살고 있었고, 가장 잘날 줄 알았던 자신은 한심한 몰골이었으니.


 울면서 소녀는 뉘우치고 또 뉘우쳤어.


 뉘우치며 소녀는 가장 먼저 사과해야 할 친구를 찾아갔어. 


 그리고...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점점 호흡이 빨라지던 영감이 애매한 때에 이야기를 끊었다. 나는 맥이 끊기는 느낌을 받으며 혀를 찼다. 뭍에 거의 다 와서 끊은 건가. 늙은이마다 하나쯤은 있는 고만고만한 비극이기는 해도 영감의 이야기는 묘한 구석이 있었는데.  식상한 비극의 필수적인 요소를 술집 생활을 통해 익힌 지식을 바탕으로 추려보며 나는 뒷내용을 추측해 보았다.


 "소년한테 버림받았나요?"


 별로 기대하지는 않으며 답을 찍었다. 


 "...응."


  그리고 영감은 입을 다물었다. 


 "그랬군요."


  기대한 대답대로는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나는 아무 말을 지껄였다. 


 "그랬지."


 허탈한, 초연해보이기까지 한 표정이 영감의 얼굴에 계속해서 걸려 있었다.


 "총각."


 그 야릇한 미소 속에서 영감은 나지막히 나를 불렀다. 가슴 깊은 곳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담긴 소금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감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나와 영감은 서로를 지긋이 마주보았다.


 "총각이 말했었지. 다친 친구의 꿈을 고쳐내야 한다고. 총각한테 중요한 사람이라면서. 정말 멋있는 말이었어. 그치만 말야. 꿈이라는 게 꼭 이뤄야 하는 것은 아닐세. 이뤄야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언제나 이미 이뤄둔 소중한 것이거든. 밑천까지 판돈으로 다 걸어버리는 도박꾼을 보고 배운 건 아니지?"


 "...술집에서 좀만 더 죽치고 있다가는 보고 배우게 되겠죠."


 "요즘 젊은 것들은 까칠해서야 원... "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텅 빈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미 이뤄둔 건지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표정이 충분히 가려지는 각도가 되자 나는 무심결에 말을 흘렸다. 심야의 바다만큼이나 잔잔한 배에서 나는 영감도 어쩌면 나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버렸다. 영감은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자루의 노가 바다를 그리고 있었다.


 "그냥... 언제까지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 친구가 좀 야무진 구석이 많거든요. 제가 무식하고 성질 급하고 싸가지 없고 그래도 그 친구가 항상 저를 이끌어줬어요. 뭐, 저도 나름대로 그 친구한테 활력을 넣어줬고요. 그렇게 적당히 주고받는 관계면 항상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인지 목구멍이 메이는 느낌이었다. 짠 바다가 날이 갈수록 습해지나 보다.


 "뒷내용은 굳이 안 말해도 되죠?"


 "...그 친구가 멈춰버렸다고 했지."


 "예."


 띨띨한 녀석.


 "이제는 제가 이끌어줄 겁니다."


 자기 몸 간수 못 하는게 누구냐고. 그날 몇 번이고 품었던 결의가 떠올랐다. 쓸데없는 곳에서만 군기가 잡힌다고 네 녀석이 말했었지. 


 "...그리고 이렇게라도 안 해두면 그놈이 자꾸 기어오른다고요. 빚을 꼭 만들어 둬야지 원."


 꼭 그렇지도 않아. 실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무마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위험하게 나가는 게 아니에요. 위험해질 게 있기는 한 지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그럴 가치는 있다고 봐요."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을 보였다. 이대로도 안 된다면 그건 영감의 지혜가 맞겠지. 보름달 아래에서 덩달아 초연해지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고등어배, 원양어선 다 상관 없어요. 어떻게든 안 됩니까?"


 오늘따라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던 영감은 검지를 들어 콧잔등을  천천히 쓸었다. 바다가 점차 느리게 그려졌다. 영감은 슬픈 눈빛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총각. 동성애자인가?"


 나는 신음했다.


 "이제 와서 왜 모르는 척이야, 이 영감아! 당연히 이성 친구지."


 "그래, 그래."


 영감은 낄낄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처음과 같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억지로 낸 웃음인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감사합니다."


 영감은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쪽배는 모래사장에 닿았다. 부두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의 산책로 같은 곳이자 영감의 은신처이기도 한 곳이었다. 쪽배를 세운 뒤 물기 묻은 신발을 모래에 비비고 나와 영감은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마 내일 모래쯤 되면 영감이 배를 알아봐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짧으면 1년 정도 안에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문득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이야기 말입니다. 거짓말이죠?"


 영감은 나를 곁눈질했다.


 "배에서 해준 영감님 이야기 거짓말 아니냐고요."


  "...티 많이 났나?"


 영감은 머쓱한 척을 했다. 얼버무리려는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소금으로 간 보다가 짜서 죽겠다. 오늘 밤은 저 가득찬 달만큼이나 뚜렷하고 확실하게 일을 풀고 싶다. 나는 영감을 몰아붙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뇨. 그게 아니고... 이상해서요."


 뭔가 의심스러웠지만 그 근거를 나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이해한 영감과는 조금 어긋나는 이야기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화를 더 해보기로 했다.


 "영감님. 그래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됐나요?"


 "글쎄? 식상한 이야기라서 관뒀는데. 정신 차린 소녀는 가업을 이어서 성실하게 살게 됐다네, 정도로."


 영감은 가볍게 얼버무렸다. 나는 모래를 푹 걷어찼다.


 "정말로?"


 영감은 진흙을 피해 먼저 걸어가며 가볍게 콧방구를 뀌었다.


 무언가 민감한 부분에 다가간 게 확실했다. 그렇지만 미묘했다. 이게 맞는 건지 확신이 안 들었다. 여유 있으면서도 조금 막 나가는 구석이 있던 영감과는 자뭇 다른 인상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위화감을 짚어내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턱대고 발걸음을 넓혀 영감을 따라잡았다.


 "영감님.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하늘 미신 있잖아요. 왜 바다에서 죽으면 사람은 하늘로 가는 거죠?"


 내가 정확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아무 말을 했다. 영감은 내가 나답지 않은 소리를 해서인지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미 조각배 위에서 결론이 난 시시한 동화를 이제 와서 다시 꺼내는  것이니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그러니까요. 좀 전 내용 말고, 어, 그러니까, 죽어서 될 다른 것들도 있잖아요. 동료를 빠르게 집으로 보낼 바람이라던가, 마실 물을 주는 비라던가. 선원을 도울만한 그런 것들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왜 하필 하늘이에요? 너무 멀리 있잖아요. 그리고 밤에만 보이잖아요?"


 영감은 더듬더듬 이어지는 내 말을 유심히 들었다. 내가 마지막 문장까지 꺼내자 영감은 골똘히 생각하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다나 하늘이나 세상과 먼 건 똑같으니까."


 영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두운 곳에서만 빛날 수 있으니까. 바람이나 비 미신도 많지. 그렇지만 떠나간 사람은 한순간에 사라지게 둘 수는 없어. 그래서 항상 함께하는 별과 달이 된다고 하는 거야."


 "음."


 "...그래. 이 말을 하고 싶었지." 


 영감은 걸음을 멈추고는 모래사장 끝자락에 주저앉았다. 모래먼지가 얕은 바람을 타고 일렁였다. 나는 그 옆에 따라 앉았다. 슬슬 수평선에 닿을 조짐이 보이는 보름달이 아른거렸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네."


 이놈의 감이란.


 "총각은 역시 속이 깊어. 조금 더 쉽게 말하려고 거짓말을 했어. 미안."


 "더 쉽게?"


 "응. 위험하다고 설득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군."


 영감은 한 번 쭈뼛거리고는 무표정하게 말을 계속했다.


 "시시하게 끝난 이야기는 아니야.  그는 사랑이라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거든.


 아, 하나 식상하기는 하겠네. 그래. 소년은  소녀를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었어. 뻔한 이야기일까?


 아니지. 그는 진정 성숙한 남자였어. 말했잖아. 그는 진작부터 어른이었다고. 항상 성숙했지. 비록 꿈은 현실에 막혔지만 이상을 간직하고 나아갈 줄 아는 어른이었어. 꼭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일을 벌일 필요도, 화려함을 즐길 필요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 그저 자기 손이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며 건실하게 살 뿐이었고, 그걸로도 충분했지.


 훌륭한 어부로 자라난 그는 실패해서 돌아온 소녀를 마주하게 되었다네. 소녀는 퍽이나 다채롭게도 소년을 배신했지만, 소년은 괜찮았어. 사실 별로 기대도 안 했다나. 그저 조금 믿었을 뿐이라더구만. 그렇지만 오직 사과만을 위해 다시 자기를 찾아온 소녀를 보며 비싼 값을 치뤘기는 해도 드디어 제정신을 차린 걸 알았다더라. 그래서 소년은 소녀를 용서했어. 쑥쓰럽게 진짜로 이런 식으로 말하지 뭐니. 흐흐.


 소녀에게 고향은 더 이상 방해가 아니었어. 출발점이었지. 소녀는 드디어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알게 된 것이니까. 소년은 이렇게 말했어. 그러니 이제 방향만 다시 잡으면 된다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오글거려? 아이고, 내 앞에서 그러지 마. 나는 아직도 그게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그래. 소년은 소녀를 믿어준 거야. 자기 손이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꼴통 계집 하나를 기어코 사람으로 성장시킨 셈이지.


 소녀는 부모의 위로와 소년의 격려를 받고 드디어 어른이 되었네. 마을에서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했어. 낚시에 자신이 있는 자기 재능도 알게 되었고. 불경기에 시달리는 고향을 살리기 위해 고기잡이에 직접 뛰어들어 어업이라는 새 활로를 찾아내었고. 소년과 함께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서로 사귀기라도 했어요?"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영감은 등을 펴고는 고개를 펴들어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등을 굽혔다.


 "...그래. 사귀었지. 간신히 소녀는 소년의 어른스러움을 존경했고, 소년은 소녀의 성장에 기뻐했으니까... 이건 좀 이상한가? 아무튼. 일이 잘 풀린 덕분에 소녀의 부모는 웃으며 소녀를 떠나보낼 수 있었어. 혼자 남은 소녀에게는 소년이 있었지. 언제나 함께할 만한 친구가. 마을 사람에게 인정받아 소년과 소녀는 촌장 부부와 비슷하게 살았어. 그러다가 마침내 약혼 계획도 잡혔고. 둘 다 번듯한 사람이 됐으니까"


 "그렇게 영감님이 되신 거군요."


 영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마음에 드네요. 잘 됐어요."


 "응."


 그런데 영감의 목소리는 왜 유난히 슬픈 건지.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그 뒤는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이 겪은 일이지. 항상 일찍 철이 드는 영감과 그보다 조금 늦게 철이 드는 영감의 이야 말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때가 됐던 걸지도 모르고, 내가 받은 천벌일지도 몰라. 이제 나는 언제까지나 그가 가던 길을 따라갈 수밖에. 그 친구를 위해서라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눈 뜬 장님이라는 표현이 왜 있는지 나는 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간신히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한 달마다 뜨는 엄지손톱만한 빛. 영롱한 보름달. 서쪽을 향해 떨어지는 보름달이 드디어 보였다.  

 

 "총각.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총각을 말리는 일 뿐이라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총각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혹시라도, 총각이 후회하거나 총각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생길까 봐 걱정이야. 뒤늦게 후회할 사람은 한 명으로 족해. "


 "......."

 

 "고기를 낚고 안 낚고는 중요하지 않아. 잡기 위해 놓치는 것을 생각해야지. 낯선 것에 홀리지 말고 잊혀질지도 모르는 소중함을 생각해야지.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안 돼. 진정으로 있을 곳이 어딘지를 놓치지 말게."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고요히 들을 뿐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밤을 보냈다.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갔다. 동쪽에서는 새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밝은 빛이 우리 둘을 함께 비쳤다.  


 바다가 끝났다.


 "감사합니다."


 나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야. 병신아. 잘 지냈냐?"


 무거운 짐보따리에 비틀거리며 문을 두드리니 기대했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능성은 낮아도 기대는 하고 있었던 반응이 날아왔다. 묵직한 통증이 복부에 자리잡았다. 근육을 수축하며 몸을 웅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살아는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놈의 팔뚝. 왜 다치기나 해 가지고. 이왕 때릴 거면 기절할 정도로 강하게 후리란 말이다. 차라리 그게 덜 아프지. 너나 나나.


 "어? 야? 어... 야!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다음은 등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촉각을 느낄 수 있었는데, 고체가 아닌 액체였다. 점이 등에 가라앉는 감촉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꺠달았다.


 "미안해."


 "편지 한장 달랑 날리고 가면 다야? 뭔 돈이야, 멍청아 걱정했다고..."


 "미안해."


 그래서 나도 복수했다. 노리는 곳은 녀석의 어깨였다. 대장간은 건조해서 피부에 안 좋댔지. 지금부터라도 촉촉하게 만들어 주기로 했다. 물론 녀석도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바닷물 먹고 촉촉해진 나는 녀석에 의해 수분 그 자체가 되어 펑펑 울었다.


 

 내가 도시 생활, 그리고 군인으로 크면서 얼마나 술집을 만만하게 봤는지을 깨달을 수 있던 게 보름 전의 일이다. 석 달 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받은 돈은 작지 않았다. 토사물을 치우고 진상의 주정을 받아주는 서비스업이 확실히 고되고 보람찬 행위이기는 한 모양이다. 어쩌면 이것도 영감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위험을 감수하고 번 돈보다는 작다만 충분히 많은 돈이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왜 그랬어?"


 "병신 다된 우리 친구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주려고."

 

 "야이, 씨..."


 그래. 이것도 술집에서 배웠지. 웃고 즐기는 농담이 항상 유쾌한 건 아니지. 


 "누가 해 달래?"


 "미안해."


 녀석이 나를 쳤다. 나도 답했다. 서로 등을 토닥이니 몸에서 습기가 더 빠르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녀석의 마무리 일격은 강력했다. 목이 막힌 나는 잠자코 울 수밖에 없었다.


 거의 100일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겨우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집에 정착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팔은 다른 사람이 대신 써 줄 수 있으니까. 그 팔뚝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어도 보조하는 건 나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조했다. 


 달이 기울었다. 흐려진 고리 변두리에 가려저 보이지 않던 빛들이 찬란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잘 손질된 모루에 별들이 하나둘 걸렸다.

 

 

바다에 별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