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상 밖에 나갈 때면 집 앞의 전봇대에 한 소녀가 서 있다.


나이는 나랑 같은 17살.


어렸을 때부터 항상 가까이서 지내왔기에 별로 거리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내 소꿉친구, 리에다.


마치 혼혈인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금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비단결 같이 잘 손질된 머리카락은 한 눈에 봐도 관리하는 데 꽤 공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쁘고 선명한 하늘색 눈동자,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외모는 지금까지도 그래왔듯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어머니 쪽이 유럽인이시라는 모양이다.


하긴 이름조차 여타 흔한 이름들과는 거리감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성적은 빠짐없이 상위권을 유지하는 데다, 교우 관계도 원만하다 못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싸'라고 부를 정도 아닐까.


하지만 이렇듯 완벽해 보이는 소꿉친구에게도 한 가지 흠이 존재하는데 그게 뭐냐면...


"으응~?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바보 병신, 굼벵이, 달팽이♡"


서슴없이 저런 단어들을 입에 담는다는 점일까.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다름아닌 주변 사람들한테는 늘 모범생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주제에


어떻게 보면 가장 친하게 지낸다고 할 수 있는 내게는 저런 태도를 고수한다는 거다.


"허접~♡ 얼른 학교로 가지 않으면 지각하고 말 거라구우~? 너 같은 둔탱이는 어서 죽지 그래?"


"아, 저기 그게... 하하, 늦어서 미안하네."


"흐응~ 알면 됐어~."


"야야, 아무리 그래도 너... 팔짱을 끼며 밉살스러운 얼굴로 잘도 말하기냐...?"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싶지만, 일전에도 그런 일이 한 번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그런 해프닝을 몇 번이고 질리도록 우려먹어 날 놀리는 데 썼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이상하게 이런 시간들이 진부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변함없는 길거리를 걸으며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아~ 그런데 저기, 리에 있잖아."


"으응, 뭔데~? 말해봐~. 특별히 리에가 네게 말할 기회를 줄 테니까♡"


흥미롭다는 듯 입을 가리고 실실 웃는 저 표정은 틀림없이 날 비웃으려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괘씸해진 나는 한 번 더 궤로를 꺾어 참으로 오랜만에 골탕먹이기로 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게 호감이 있다는 것쯤은 나도 오랜 시간 같이 생활하면서 잔적애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나... 실은 말야. 여자친구가 생겼거든. 그러니 슬슬 너와도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은 리에의 발걸음이 순간 길바닥 한가운데서 멈추었다.


"아무래도 커플이 되면... 이런 관계를 정리하는 게 우선일 거 같아서, 너한테도 알려주려고... 리에?"


한 순간 표정이 웃음기가 싹 가시고 굳어버렸던 것처럼 보인 건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역시 허접은 허접이구나♡ 그래, 그럼 나한테서 멀어지면 되는 거지? 알겠어~."


그딴 걸로 고민하는 게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한 번 스윽 본 리에는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나보다 먼저 가버렸다.


"음... 뭐야, 생각보다 별 효과가 없네. 학교 끝나면 그냥 지어낸 거짓말이었다고 적당히 말해둘까..."


한 번쯤은 동요해줄 거라고 생각한 난 살짝 풀이 죽은 채 교실로 마저 향했다.


아니, 혹시 호감이 있다는 사실조차 이젠 의심될 정도였다.



내 반은 3반, 리에가 속한 반은 2반이었기에 아무래도 일과 시간엔 만나지 못하는 게 보통이었다.


점심 시간에도 두루두루 어울려 밥을 먹는 리에와 적당히 친구 2~3명끼리 모여 밥을 먹는 나는 눈을 마주칠 일도 없다.


"큭! 난 결국 영원히 리에한테 놀아나는 운명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비참한데."


결코 리에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단지 소꿉친구로 오랜 세월간 지내왔던 사이이기에 그 관계가 한 순간 어색해지고 무안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나도 리에도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껏 그녀를 소꿉친구로 봐왔던 나였기에 호감을 알아채버린 그 순간만큼은 나라도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관계를 정리하고 이젠 새로 연인으로 시작하라고 하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하다.


따라서 지금은 한심스럽게도 그 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보류 중이었다.


"~~~~~~♬♪"


그렇게 한창 마음 속을 정리하고 있자, 교내 스피커에서 익숙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곧 있으면 선생님이 들어오시기도 하니, 난 잡생각을 떨쳐낼 겸 그대로 교과서를 꺼내고 지금은 하루 일과를 충실히 보내기로 했다.



시간은 어느덧 흐르고 흘러, 하교 시간ㅡ.


오늘은 7교시인 날이라 학교가 비교적 일찍 끝났다.


이렇게 빨리 하교하는 날이면 날마다 나는 리에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마침 두 집 모두 조금 떨어져있긴 해도 같은 방향이었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교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에를 마중하러 교문을 향해 나섰다.



그런데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땐, 리에의 모습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리에...? 아, 혹시 벌써 집에 간 건가?"


딱히 짚히는 곳도 없었기에 그렇게 결론내린 나는 이제 곧 지려 하는 저녁놀을 배경으로 한 채 여느 때처럼 귀로를 거닐었다.


터벅터벅터벅.


"조금은 아쉬운걸. 오해는 지금에서 풀고 싶었는데 말야. 뭐 그래도... 내일 등교할 때, 잘 말해두면 괜찮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상점가 모퉁이를 돌아선 나의 귓가에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흑..."


아무래도 누군가가 슬프게 우는 소리 같았다.


어차피 내 일이랑은 상관없겠거니 싶어서 돌아가려 했지만ㅡ.


"어째서... 왜 그랬던 거야...? 흐윽... 멍청이... 바보... 개새끼...! 난 널 그토록... 흐윽..."


그 목소리가 살짝 낯이 익기라도 한 것처럼 난 무심코 그 목소리에 이끌려 몸이 저절로 그 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어둡게 그늘이 진 한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은 채 눈가를 훔치며 훌쩍거리는 교복 차림의 소녀가 있었다.


"...리에?!"


서글프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소녀의 정체는 다름아닌 리에였다.


먼저 집으로 돌아갔어야 할 그녀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나로썬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기에 일단 차근차근 경위를 묻기로 했다.


"야... 가, 갑자기 왜 울고 있는 거야? 설마... 누가 널 때리기라도 한 거야?!"


평소보다 한없이 약해진 리에를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무심코 큰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리에를 이렇게 만든 그 새끼를 철저히 되갚아줘야겠다고 내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자 리에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훌쩍... 아니야..."


목소리엔 왠지 힘이 없어보였지만 내 어림짐작을 모두 부정하는 완고한 목소리였다.


"그럼 왜 그러고 있는 건데? 난 그저 네가 먼저 집으로 돌아간 거 같아서 나도 뒤따라가려고 한 건데."


사건의 전말을 아직 전해듣지 못한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까보단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만 털어놔 봐. 대체 이런 데에서 왜 울고 있는 거야?"


"....니까..."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모기 소리처럼 하도 작아 내 귀에 닿을 리 없었다.


"응...? 뭐라고? 좀 크게 말해 봐."


"왜 모른 척하는 거야...?! 네가... 여자친구가 생겼대서... 조금... 토라져있었거든!"


리에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뭐, 뭐?! 아, 아니... 확실히 아침에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러자 말하고 있는 날 가로막듯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흐윽, 난... 널... 좋아한단 말야... 이 바보야! 그런데, 네가... 다른 여자랑 꽁냥대는 걸... 보고 있으면... 나라도 괜찮을 리가 없잖아..."


마지막에 가서는 기어가다시피 한 목소리가 조금이지만 이번엔 내 귓등에 확실하게 닿았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한동안 충격이 가시지 않은 건지 넋을 놓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알고 있었어... 근데 아침에 했던 말은, 내일 아침에 등교할 때 얘기할 거였다고."


"그, 그딴 건 몰라도 돼...! 어차피 넌... 내 앞에서 여친이랑 꽁냥대는 걸 늘어놓을 속셈이잖아! 어디 모를 줄...!"


"미안해, 실은 그거 거짓말이었어."


이번엔 내가 그녀의 말을 가로채갔다.


"...뭐?"


눈물을 눈가에 그대로 고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연신 깜박거리며 마치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그거 거짓말이었다고... 미안해, 나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럴 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딱히... 널 싫어하는 건 아니거든... 오히려... 굳이 말하자면, 좋은... 쪽일 거야."


""......""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우리는 마치 그 순간만 시간이 무한대라도 된 것처럼 엉겁의 침묵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말인 즉, 다시 말해... 날 좋아한다는 거 아냐...?"


"...뭐, 으응..."


가슴을 간질이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


그런 분위기에 녹아든 심장은 한없이 두근거렸고 사고는 한 순간 마비되고 말았다.


전격에 맞은 듯 저려버린 것처럼 몸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내 눈 앞에서 갑자기 리에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ㅡ.


"리, 리에...?! 왜, 왜 이래 갑자기! ...끄악?!"


그대로 말없이 내 품 속으로 안겨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결과는 엉덩방아로 마무리, 어찌 보면 약속된 전개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난 무방비 상태로 바닥에 성대하게 엉덩이를 찧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애써 용기내서 말해줬더니...!"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울상을 지은 내가 리에에게 항의하자ㅡ.


그녀는 내 옷 속에 그대로 얼굴을 맡기더니 날 그윽하게 올려다보곤 말했다.


"멍청이~♡ 설마 그것도 모르는 거야?♡ 앞으로 잘 부탁해~ 연인으로서...♡"


마지막 말은 아무리 리에라도 부끄러웠는지 내게서 시선을 홱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난 이번 일로 마침내 깨달았다.


'아아아, 난... 리에를 한 명의 이성으로 보고 있었구나.'


진정한 속마음을 자각한 나도 리에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응, 나도 잘 부탁해... 그리고, 저기... 다시 한 번, 속인 건 미안해."


"하여간 여전히 둔한 구석이 있다니까~. 왜 그걸 이제야 말해주는 걸까아~?♡"


"리, 리에...?!"



쪼옥♡



리에는 목을 쭉 올리더니 갑작스럽게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너 같은 멍청이 따윈 내가 너보다 훨씬 훨씬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잘 부탁해, 자기...♡"


"......푸웁?!"


"...가... 갑자기 왜 그래...? 저기, 재미없어... 일어나보라니까...?"


내 뺨을 누군가가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짐을 어슴푸레 느끼며 나는 그 자리에서 의식이 뚝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 나는 한동안 팔자에도 없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담당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코피로 인해 흘린 과도한 양의 출혈이 원인이라는 모양이다.


그 후에 리에가 날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준 건 장황하니 다음 이야기 때 다루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