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따 나갈 때 재활용(쓰레기) 좀 버려줘.”

 

“네.”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재활용 쓰레기가 잔뜩 담긴 봉투를 들고 아파트의 분리수거장으로 갔다. 봉투를 한 손에 들고 페트병, 플라스틱, 캔, 그리고 유리병과 종이까지. 쓰레기 더미를 다 버리고 마지막으로 봉투까지 비닐에 버렸다. 분리수거장을 나서다가 발치에 페트병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봤다. 그 페트병을 주워 페트병을 버리는 마대에 집어 던졌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페트병은 유리병 분리수거함에 들어갔다. 나중에 경비 아저씨가 보시면 화내시겠지. 하지만 그대로 분리수거장을 떠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혹시 또 여자친구가 생기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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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10년 전, 그러니까 내가 5학년이었을 때 우리 반은 종례 시간에 선생님께 단체로 기합을 받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누가 일반쓰레기에 페트병을 버렸다는 것. 얼마 전부터 계속 지적받던 문제여서 다음에 또 걸리면 연대책임으로 혼난댔나? 아무튼, 우리 반은 단체로 의자를 머리 위로 높이 드는 체벌을 받고 있었다. 범인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고, 선생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연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평소에 여자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이어서 여자아이들은 못 보던 선생님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 선생님께 조인트를 까인(친구들과 석전을 벌인 것이 원인이라, 할 말은 없다) 나는 무신경하게 이 기합이 언제 끝나는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15분을 들고 있으니까 슬슬 팔이 저려오기도 했고.

 

‘훌쩍…’

 

그런데 옆자리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의 시선이 내게서 벗어난 순간 살짝 고개를 돌렸더니,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눈물을 글썽이며 팔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평소엔 내 옆자리에서 스스럼없이 장난도 많이 치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애였는데, 선생님이 화난 것에 놀라 울먹이는 모습에 무신경했던 나도 적잖이 놀랐다. 팔에서 힘이 빠진 건지, 그 여자애 머리 위에 있는 의자가 점점 내려왔다.

 

“누가 의자 내리래!!!”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 애는 다시 억지로 팔을 쭉 펴며 의자를 들어 올렸다. 선생님이 무서워 팔이 아픈데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 애는 어떻게든 고통을 참았지만, 눈물을 참지 못해 점점 일렁이던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 눈물을 보자니 문득 이 상황이 짜증 났다. 누가 버렸는지도 모를 쓰레기 때문에 반 전체가 의자를 머리 위로 쳐들고 15분 넘게 서 있어야 한다고?

 

“마. 의자 이리 도.”

 

난 예전부터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뭐, 대놓고 버럭버럭 화를 내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화난 걸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야 화난 걸 참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내 나름대로 화를 삭이는 과정이었다. 난 그 애한테서 의자를 억지로 빼앗아, 한 손에 의자 한 개씩을 치켜들었다. 내게 의자를 뺏긴 걔는 눈물을 그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 어?!”

 

“…손만 들어라.”

 

“응…!”

 

그렇게 우리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잠시, 또다시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애가 힘들어하잖아요.”

 

다른 애들이 나보고 미쳤냐고 생각했을 것 같다. 어떻게 하늘 같은 선생님께? 하지만 의외로 선생님께 제대로 먹혔다.

 

“…여자애들 의자 내리고 손만 들어.”

 

여자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내렸다. 의자를 내린 건 여자애들이기 때문에 다른 남자애들이 의자 1개를 드는 동안 나는 꼼짝없이 의자 2개를 들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끝났다. 선생님이 뭐라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잔소리와 마지막 경고로 끝난 것 같다.

 

아무튼, 잔소리를 늘어놓은 선생님이 교실을 나간 뒤, 아이들은 저마다 하교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나와 옆자리 여자애를 일제히 바라봤다. 그리고 누군가의 ‘올~~~’ 이라는 감탄사를 시작으로, 나와 그 애를 한참을 놀려댔다. 겨우 울음을 그쳤는데, 옆에서 계속 놀려대니 또 우는 거 아닌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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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교실이 한산해졌다. 나를 놀리는 듯한 음흉한 시선들은 빼고. 나는 축구부에 늦었다며 축구화를 챙기고 있었다. 덕분에 체력 훈련을 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걔는 발간 눈시울을 소매로 닦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맙디.”

 

감사인사를 건네는 그 애한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됐다 마. 별로 도움도 안 됐구만.”

 

“그래도. 그냥 고맙다고.”

 

“…그럼 먹을 거나 쏘든가.”

 

“그래. 내 먼저 간디? 축구부 잘해라.”

 

그 애는 등을 돌려 먼저 교실을 빠져나갔다.

 

‘뭐야…’

 

언제 사준다고 말이나 하지. 그날따라 축구부 훈련에 집중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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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났나?”

 

축구부 훈련을 끝내고 운동장 옆의 스탠드에서 가방을 챙기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애였다.

 

“어? 니 아직 안 갔나? 학원은?”

 

내가 멍청한 질문을 하자 그 애는 어른스럽게 받아쳤다.

 

“오늘 학원 없다. 니 끝나는 거 기다리고 있었지. 먹을 거 사준다 했다이가.”

 

‘온나.’ 그렇게 그 애에게 이끌려 나온 나는 그 애랑 같이 분식집에서 500원짜리 떡볶이를 먹었고,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비밀연애를 약속했지만, 이 세상에 비밀이란 없었다. 다음날 등교하자마자 나는 주변에서 놀림을 받아야 했다. 초등학생의 철없는 연애가 으레 그렇지 뭐.

 

그래도, 학창 시절에 손꼽힐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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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쓰레기 버리다가 떠오른 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