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 지명하겠습니다. 창경고 투타겸업 유.성.호."

나는 덤덤하게 삼성 모자를 받아 쓰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예상된 지명이었다.
원래 전체 1순위라면 한화의 순서였겠지만 단장의 과도한 원클럽맨 싹쓸이 기조에 연봉 총합이 샐러리캡을 2년 연속으로 넘겨버려 1라운드 지명순위가 맨 뒤로 밀려나버렸다.
이 소식이 들렸을 때 내 별명은 칰성호에서 삼성호, 칩성호가 되어버렸고, 결국 이변은 발생하지 않았다.

난 그저 야구하는 게 재밌었다. 왼손잡이로 태어나 공도 왼손으로 던지고, 타격할 때도 좌타석에 섰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르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에이스 투수, 4번타자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우수타자상을, 2학년 때는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난 마운드에 서면 평균 구속 145km의 직구와 타이밍을 뺏기에 적합한 커브와 체인지업을 적재적소에 구사하는 에이스 투수였고, 타석에 서면 끈질긴 컨택 끝에 담장을 곧잘 넘기는 창경고의 4번 타자였다. 마운드에 서지 못하는 날은 우익수 수비를 보곤 했는데, 강한 어깨에서 나오는 강력한 송구가 나의 가치를 더욱 올렸다.
운이 좋아서 청소년 국대에도 나가보았다. 비록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친구들과 일본도 가보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한 번은 메이저리그에서 날 보러 왔다는 얘기를 들었고, 며칠 뒤에는 신분조회 요청까지 왔다. 투타겸업의 새 지평을 연 오타니 쇼헤이의 스타성에 힘입어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이 투타겸업이 가능한 선수를 발굴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한국의 오타니"라는 별명을 가진 나 역시 자연스럽게도 그들의 시선이 꽂혔다.
감독님도 지원금 상관하지 말고 미국 갈 수 있을 때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적극적으로 추천하셨지만, 솔직히 두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갔던 선배들 대부분은 마이너리그에만 머무르다가 주눅 든 채 귀국하여 군대로 갔다가 자기들보다 몇 살은 어린 후배들하고 같이 신인지명에 나와 높지 않은 순번에 지명받고 2군에만 머무르곤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높은 순번에 지명받고 데뷔 첫 해부터 1군에서 지내던 선배들은 억만금을 받으며 미국에서도 카메라 세례를 받곤 했다. 아무리 마이너에만 머무르더라도 그 선배들은 귀국하면 원소속 구단에서 수십억씩의 계약을 체결했고, 팬들도 많았다.
그래서 난 한국에 남기로 했다. 인터뷰하러 오신 기자님께는 "한국에서 먼저 내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감독님도 내 선택을 존중해주셨다.
그렇게 난 별다른 이변 없이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삼성의 지명을 받아 푸른 유니폼을 입고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삼성보다는 두산이 가고 싶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가족과 함께 남색 유니폼을 맞춰 입고 경기를 보곤 했던 나였기에 두산이 제일 좋았다. 내가 여러 대회에서 받은 메달과 트로피를 진열하는 전시장 한켠에는, 유희관 선수에게 직접 사인받은 100승 기념구가 있었다. 틈만 나면 그 공을 쥐며 변화구 그립도 연습해보곤 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두산은 내가 지명되던 해에도 역시나 강팀이었고, 드래프트 순번은 뒤쪽이라 내가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는 한 지명받기에는 꽤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작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음 년도 신인지명 최대어라는 기사가 뜨면서부터 두산에 못 갈까봐 어린 마음에 매주 교회에 가면 하나님한테 1차 지명제도를 부활시켜달라고 기도했다. 물론 야속하게도 1차지명 부활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으로서 마지막 주일이 다가왔을 때 처음으로 다른 구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참 많이 따랐던, 그리고... 좋아했던 누나가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주하린. 나보다 1살 많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누나였다. 교회학교 초등부 때부터 같이 다녔으니 개인적으로도 꽤 오래 알고 지냈고, 부모님끼리도 자주 어울리곤 하셨다. 솔직히 사춘기를 지나서부터는 여자로 보이기 시작해서 고백도 했었는데, 연애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거절당했다. 어린 마음에 그 후로 교회에서 만나면 일부러 시선을 피했고 합석할 일이 생기면 자리도 눈에 띄게 먼 곳에 앉았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가 교회학교 졸업예배, 그러니까 한 해의 마지막 그 예배가 끝나고 하린이 누나가 잠깐 얘기 좀 하자며 날 데리고 비어 있던 교육실로 끌고 갔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얼핏 보면 화가 난 듯 내 손목을 세게 붙들고 잰걸음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끌려가다보니 내가 했던 행동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온 몸의 피가 전부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교육실에서 누나는 문을 닫고 날 안아주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왜 났는지는 모르는데, 일단 눈물이 났다.
그리고 누나는 내가 진정될 때까지 날 안아줬다.
내가 울음을 그치자, 우리는 마주보며 앉았다.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정됐어?"

"응.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해. 연애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고, 스스로 수험생이니까 공부만 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속이고 싶었어. 그런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나봐. 인서울 대학은 다 떨어지고, 지방 국립대는 붙더라."

"역시 내가 싫어서 도망치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네 탓이 아니야."

"하..."

"내가 차고 나서도 후회되었어. 네가 날 계속 피하는 걸 보면서 네 마음에 상처가 되었던 것 같아서 신경쓰였어."

"근데 지방으로 간다며..."

"맞아, 지금 당장 사귀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

"누나,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에이, 아니야. 너랑 연애, 하고는 싶은 걸."

누나가 다시 날 껴안았다.

"성호야, 누나가 약속 하나 할게."

"약속?"

"성호가 내년에 고3이니까 신인지명을 받겠지? 혹시 미국 가고 그러는 건 아니지?"

"나 미국 안 가. 국내에서 뛰다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맨날 말했잖아."

"누나는 대구에서 기다릴거야."

"대구면 삼성 아니야? 나 보고 삼성을 가라고?"

"글쎄, 벌써 별명이 삼성호라고 하던데. 성호가 대구 오면 사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싫어?"

"진짜 사귀는 거지? 약속하는 거다?"

"응, 약속할게. 성호도 꼭 대구로 와야 해?"

누나는 내 등을 몇 번 토닥이고는 다시 마주 앉았다.

"성호야. 기도하자."

나는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누나는 내 깍지를 감싸듯 잡았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저와 성호가 서로 가졌던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가 자라왔던 이 동네, 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주님을 위해 세상 속에서 귀하게 쓰임받으며 선한 영향력을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항상 지켜봐주시고, 이끌어주시길 소망합니다.
또 주님, 성호도 내년이면 신인지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야구할 수 있도록 주님, 성호를 지켜주시고, 마음을 붙잡아주시고, 훌륭한 선수로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게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를 마치고, 누나가 내 왼손을 어루만졌다.

"성호, 손이 꽤 크네. 예전엔 나보다 작았는데. 어머, 얼굴 엄청 빨갛다. 그렇게 자극이 심했어?"

"ㅈ, 좋아하는 사람이 손을 그렇게 만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작년에 있었던 이 일을 떠올리니 괜시리 미소가 지어졌다.

"새끼, 좋단다. 하린이 생각하니까 그렇게 좋냐?"

고등학교 야구부 2년 선배이자 역시 같은 교회에서 알고 지냈던 진수 형이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이 형은 포수인데 대학 야구부에서 얼리 드래프트로 나와 같은 해에 지명받았다.

"아이, 부끄럽게 그런 얘기를 꺼내고 그래요."

"야, 근데 부럽지 않냐? 난 두산 가지롱~"

"네 다음 4라운드따리~ 혹시 긁혔어요?"

이제 머릿속이 설렘으로 가득 차고 있다. 야구선수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자신감, 프로로서 마운드에, 타석에 설 거라는 기대감이 마음 속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또한 마음 속에서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