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치카와 시로이치고-


“그리고 너희들 다음 주부터는 한 달에 두 번 금요일에 동아리 활동 있으니까, 이번 주 금요일까지 무슨 동아리 들어갈 건지 체크해서 가져와.”


수업이 끝나기 직전, 벌써부터 나갈 준비 만반인 학생들을 눌러 앉힌 담임이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준다.


“아. 계획서만 잘 짜오면 인원 적어도 동아리 만들어서 활동하는 거 허락하니까 관심있으면 가져오고. 근데 그냥 있는 거 들어가는 게 나을 거야.”


종이 뭉치를 받은 소라치카와가 타래와 호림, 련에게 한 장씩 나눠주고는 종이 뭉치를 뒤로 보내달라며 건넨다.

동아리가 여러 개 있지만 련의 눈을 끄는 부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공부 아니면 여가인데 공부하는 동아리를 들어갈 만큼 범생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가 동아리에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지도 않았다.

슬쩍 종이를 확인하고 마는 타래, 그게 그거겠거니 종이를 집어넣는 호림, 련과 달리 소라치카와는 기대된다는 듯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라야. 너네 집은 어디야?”

“저희 집 말입니까?”

“집이랑 가까운 곳이면 같이 가는 게 좋잖아. 그렇지?”


련의 물음에 시선을 돌린 호림은 대답을 대신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호림쨩이랑 타래군은 저희 집 근처라고 했는데, 련군도 집이 그 근처입니까?”

“음…호림이 집이랑은 별로 안 멀긴 한데, 타래 너희 집은 어디야?”

“어?”


어물쩍 넘어가려던 타래에게 시선이 몰린다.


“안 갈 겁니까?”

“뭐가.”

“같이.”


어쩐지 아침과 비슷한 대화에 타래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인다.


“초람역 쥬드뷔, 너네 집은 어디야?”

“에.”


소라치카와는 눈을 치켜뜨며 집 주소를 떠올린다.


“초람초등학교 근처입니다. 거기 가면 압니다.”

“너넨?”

“난 문화센터 아래에 5단지, 얘는 조금 더 가서 민하역 근처.”

“가. 그럼.”


일견 귀찮은 듯하면서도 결국 초람역까진 길이 겹친다는 걸 알자 타래가 먼저 같이 가자며 일어난다. 겉옷을 입은 소라치카와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간다.

민곡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대개 정문으로 나가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주거지역으로 향하지만, 반대 방향인 넷은 뒷문으로 나와 도곡역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아. 동아리 기대됩니다! 세 사람은 뭐 할지 정했습니까?”

“음, 일본은 동아리 활동을 자주 하나?”

“공식적인 시간은 달에 두 번이지만, 대회나 행사 앞에 두고는 합숙도 하고 모여서 이것저것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시골이어서 그거 말고는 별로 할 게 없었습니다.”

“음…그런 걸 기대하면 좀 실망할 수도 있겠는데.”

“왜 그렇습니까?”


얄팍한 지식이지만, 련은 일본의 동아리 활동과 한국의 활동은 다르다고 알았다. 아마 소라치카와가 경험했을 활동보다는 형식적일 것이 뻔했다.


“한국은 그냥 이름만 동아리야. 대회에 나가니 뭐니 하는 건 거의 없어.”

“아쉽습니다…그래서, 세 사람은 뭐 할지 정했습니까?”

“글쎄, 나도 호림이도 아직은….”

“호림쨩은?”


굳이 호림이 정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소라치카와는 걸으며 허리를 숙이고는 호림을 빤히 바라본다. 타래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답을 강요하는 듯한 큼직, 솔직한 눈망울에 호림은 눈동자를 몇 번 굴리다 입을 연다.


“그냥…조용한 동아리….”

“오늘 하루 종일 있었는데 가까이서는 목소리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하하…타래 너는?”

“난 방송부야.”


가장 관심 없을 것 같았던 타래가 이미 부를 정했다고 얘기하자 련과 호림 모두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본다.


“방송부는 점심시간에 일 잠깐 하면 정규 동아리 시간에는 그냥 나가서 놀아도 되거든.”

“어떻게 알았어?”

“친구 형이 방송부야.”


어디서 그런 비밀 소스를 얻었나 했더니 아는 사람이 있었다.


“너네는 중학교 어디 나왔냐?”


과묵한 자신과 입도 뻥긋 안하는 호림 사이에서 떠벌대는 소라치카와의 대화를 끌고 나가는 련이 신경 쓰였는지 이번엔 타래가 먼저 주제를 연다.


“요코테마스다 중학교입니다!”

“너 말고.”


손을 번쩍 들며 끼어든 소라치카와에게 핀잔을 준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소라치카와가 손을 내리며 킥킥거린다.


“나는 성택중, 얘는 초람여중.”

“뭐야. 같은 학교 아니었어?”

“응.”


당연히 학기 초부터 같이 지내던 두 사람이 같은 중학교 출신이겠거니 생각한 타래가 의아하다는 듯 둘을 쳐다본다. 나란히 걷던 소라치카와는 잠깐 골몰하더니 손을 들고 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초등학교는 같은 곳 나온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셈?”

“초등학교 2학년때만 같은 반이었어. 그 뒤로는 다른 반이었고.”

“그런데 그렇게 친합니까?”

“아. 사정이 있거든.”


타인에 별 관심이 없는 타래도, 자기 주변의 모든 일에 과한 관심이 있어보이는 소라치카와도 사정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자 련이 호림을 바라본다.


“얘기해도 괜찮지?”

“응.”

“그러면! 저 카페 가보고 싶습니다!”

“뭐?”

“한국 하면 카페잖아요!”

“일본에도 많잖아.”


카페니 뭐니 하며 일이 커질 조짐이 보이자 타래가 먼저 제지하지만, 소라치카와에겐 먹히지 않는다.


“저희 집은 시골이어서 그런 번듯한 카페는 없었습니다!”

“그럼 잠깐 앉았다 갈까?”

“그래. 가자. 가.”


초람초등학교 앞까지 왔는데, 집 가는 방향에서 틀어 카페까지 올라간다. 한국인 3명에겐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여도 소라치카와는 신기한 듯 따뜻한 조명으로 채운 인테리어며 음료가 프린팅된 포스터며 보이는 모든 걸 눈에 담는다.


“뭐 마실래? 한 번에 계산할게.”

“난 여기 뭐 있는지 잘 모르는데.”

“호림이 너는?”

“샹그리아에이드.”

“나는 에스프레소 콘파나로 할까.”

“너네들 특이한 거 먹는다…난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저는 조각 티라미수에 달고나 카페라떼입니다!”


련이 키오스크에 대고 결제를 하는 사이, 세 사람은 먼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마주한 2인 소파에 타래가 들어가서 앉자 소라치카와가 그 옆을 채운다. 빈자리에 앉은 호림이 벽 쪽으로 몸을 붙인다.


“그래서, 무슨 사정?”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오는 타래의 질문에 슬쩍 호림을 쳐다본 련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초등학교 2학년때였는데, 그땐 몰랐지만 호림이가 학교에서는 한 마디도 못했거든, 선생님이 도와줄 만한 애를 찾았는데 내가 하겠다고 했어. 그때부터 집까지 같이 가고 같이 하는 활동은 다 하고, 1년 내내 붙어 다녔지. 3학년때부턴 다른 반 됐지만.”


련의 설명에 호림이 고개를 끄덕인다. 호림과 련을 번갈아 쳐다보던 맞은 편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재촉한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왔는데 같은 반이 된 거고.”

“한 마디도 못한다는 게 뭐 실어증 같은 병이야?”

“함묵증.”


실어증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던 호림이 그것을 정정해준다.


“그게 뭡니까?”

“나도 모르지.”


생소한 단어에 소라치카와가 타래에게 묻는다. 물론 알 턱이 없는 타래는 손짓으로 자신도 너와 같다고 표현한다.


“불안한 상황에선…표현이나 목소리가 안 나와.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그게 괜찮아진 거야?”


거의 입을 꾹 닫고 있는 호림이 괜찮아졌다고 얘기하자 타래가 어이없다는 듯 내뱉는다.


“응.”

“어릴 때는 정말 한 마디도 못했거든. 나도 여름방학 다 되어가서야 한마디 들었었어.”

“허어…그러면 지금은 그냥 얘기를 잘 안 하는 거고?”

“안 한다기보단….”

“아마 어릴 때 경험 때문에 대화하는 게 서툰 거겠지.”


련의 어시스트를 받은 호림이 고개를 끄덕인다. 타래는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얘기에 고개를 기울이고 소라치카와는 자신의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돕겠습니다!”


소라치카와는 양손을 내밀어 호림의 오른손을 부여잡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어안이 벙벙한 호림의 눈에 특유의 큼직한 눈을 마주한다.


“제가 얘기는 많이 할 줄 압니다!”

“그래 보여.”

“그래 보입니까?”


두 사람의 만담에 호림과 련 모두 피식 웃는다.

무언가 말을 해주기 위해 입을 떼려던 련의 주머니에 든 진동벨이 울리자 련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 말이야. 그러면 존댓말 쓰지 말고 우리처럼 말 놓는 게 어때.”


련이 음료수를 가지러 간 사이, 소라치카와의 존댓말이 내내 신경 쓰였던 타래가 묻는다.


“존댓말?”

“습니다. 습니다 하는 거. 원래 나이 같은 사람끼린 안 그런다고.”

“아…아!”


타래의 말에 호림도 고개를 끄덕인다. 호림은 그녀의 존댓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존댓말을 듣는 것이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럼 두 사람처럼 하면 됩니까?”

“그렇지.”

“응.”

“알았어.”


아무렇지 않게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꾼 소라치카와를 보며 호림과 타래 모두 말을 잇지 못한다.

당황한 것이 눈에 뻔히 보일 만큼 멈칫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실실 웃는 소라치카와가 되려 묻는다.


“왜 그래?”

“어?”

“그….”

“련이 왔다. 내꺼 줘.”

“어?”


쟁반에 음료수와 케이크를 담아 온 련도 대뜸 반말하는 소라치카와를 보며 멈칫한다. 반말을 하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일어나기 전까지는 존댓말을 하던 소라치카와가 반말을 하고 있었다. 사고가 멈춘 련은 뻣뻣한 몸짓으로 쟁반을 내려놓는다.


“야. 너 솔직히 말해 한국인이지.”

“우리 엄마가 한국인이지.”

“아니 반말해도 되는데….”

“사실 할 줄 아는데 장난친 거야. 원래는 내일 딱 들어가면서 반 애들한테 안녕! 이러려고 했는데. 킥킥.”


장난을 위해 하루를 통으로 쏟아부은 소라치카와의 스케일에 세 사람은 음료수가 든 컵을 쥐기만 하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질 못한다. 재밌다는 듯 웃으며 케이크를 떠먹는 소라치카와의 뒤에 소악마의 그림자가 비친다.


“그래도 도와준다는 건 진심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근데 뭘 도와주게?”

“뭐가 됐건 마음이 중요한 거야.”


타래의 핀잔 따위 소라치카와에겐 먹히지 않는다. 제멋대로인 농담에 당황했지만, 개구진 소라치카와의 모습에 호림이 큭큭대며 웃는다. 호림의 미소를 본 소라치카와가 포크로 케이크를 푹 떠서 그녀 앞에 밀어준다.


“것 봐. 되잖아.”

“응.”



카페에서 한참 떠들고 난 후, 슬슬 해가 내려가기 전에 네 사람은 일어난다.


“나는 갈게. 내일 봐.”

“응. 조심히 들어가고.”

“그래.”

“내일 봐.”


카페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일행은 각자의 집을 향해 걷는다. 타래는 아래 방향으로 소라치카와는 위로, 련과 호림은 길 건너서 걷다 갈라져야 했다. 호림이 고개를 돌리자 신호등을 건넌 소라치카와가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호림의 손이 슬쩍 들린다.


“좋은 애 같지?”

“응…조금 특이하지만.”

“조금인가…. 큭큭.”


솔직한 말로 아주 특이한 여자애였다. 타래의 주황 머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선사한 소라치카와가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러고 보니 동아리 어떻게 할 거야?”

“련이 너는 정한 거 있어?”

“글쎄, 허락만 되면 디저트나 커피 만드는 동아리를 아예 만들고 싶은데.”

“같이 해도 돼?”


호림에게 관심 가는 동아리는 없는 듯했다. 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고마워.”


고마워. 련은 그 단어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