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59388933

얀첸꺼 돋거해옴 미안...


 [친가에 급한 일이 생겨 잠시 내려갑니다]



 얀순이가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그 메모를 발견한 것은 기념일을 10시간 앞둘 쯔음의 일이었다. 



 *


 얀순이는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었다. 얀붕이가 이마에 직접 키스를 해서 잠을 깨워 줬고, 미리 일어난 얀붕이가 준비해 놓은 아침식사를 함께 먹었다. 출근할 때도 포옹과 키스를 받았다. 일하면서 얀붕이를 떠올리다가 오늘부로 함께 동거한 지 딱 580일이나 됐다는 걸 의식하면 괜사리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날 연애 1000일차를 맞게 된다는 점이 얀순이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퇴근하면 얀붕이가 어떻게 기다리고 있을까, 얀붕이는 요즘 애교가 많아졌으니까, 기념일을 까먹은 척 기다리다가 12시 정각에 딱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주지 않으려나? 아니, 얀붕이는 상냥하고 성실하니까 중요한 날일수록 서프라이즈보단 정성스럽게 준비한 걸 보여주지 않을까. 아니, 얀붕이는 어쩌면 이런 날엔 퇴근을 기다리기보단 대담하게 회사 앞까지 마중을 나올지도 몰라. 그대로 저녁 데이트를 해버린 뒤 모텔로... 확실하게 기정사실을...'


 기념일 안 챙기는 커플이 어디 있겠냐마는, 얀순이만큼이나 기념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또 있을까. 얀순이에게 있어 얀붕이와 보내는 하루하루란 그런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이자 흔히 말하는 부잣집 규수, 그게 바로 얀순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인간관계는 결핍되어버렸고 냉정하기 그지없었던 얀순이.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면서 어느샌가 목표도 의지도 잃은 채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게만 된 얀순이를 바꾼 것은 대학 시절 운명적으로 만난 얀붕이었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상경해 학자금대출과 기타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대학 후배 얀붕이와 정식으로 교제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얀붕이와 사랑을 쌓으면서 집안의 반발을 무릅쓰기도 해보고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기도 했던, 소설(단편)어치 하나 분의 사건으로 점철된 3년이었다. 힘겨운 만큼 보람찬 시간이었고, 그녀의 시간은 얀붕이와 함께하며 커다란 의미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장기화되어 감에도 서로 간의 사랑과 신뢰는 날로 커져만 갔다. 그렇게 맞이한 1000일. 얼마나 기쁜 날이 될지, 얀순이는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얀붕와 함께할 밤시간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얀순이가 회사에 갑작스래 반차를 내고 집에 돌아온 건 그 기대가 좌절당했기 때문이었다. 얀붕이의 위치가 비정상적인 곳에서 감지되었다고 위치추적 어플의 알림이 보내져 온 게 그 발단이었다.



 *



 "친가?"



 얀순이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메모 속 묘하게 어색한 문장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반사적으로 얀붕이에게 전화해 보았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얀붕이의 자취라고는 몇 시간 전 위치추적 어플에 찍힌 기록밖에 없었다.


 점심시간 쯔음, 얀붕이가 갑자기 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얀순이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거실에 서 있었다. 도무지 사태 파악이 되질 않았다. 친가? 갑자기? 아니, 얀붕이가 몰래 집을 나갔다고? 연락도 씹어버리고?  얀순이는 처음 보는 얀붕이의 이상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마치 도망치기라도 하듯 획 사라져버리곤...


  도망이라는 단어에 문뜩 생각이 멈춘 얀순이는 황급히 얀붕이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은 아침의 모습에 비해 딱히 달라져 있지 않았고, 특별히 짐이 줄어든 흔적도 없었다. 다만 옷장을 뒤져본 결과 얀붕이가 정장을 입고 외출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선물해준 옷..."


 옷장의 빈 틈 사이에서 얀순이는 그 정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 일수로 따지면 1033일 전, 부모님에게 얀붕이를 소개시켜 주려고 할 때 정장이라곤 사이즈 안 맞는 아빠 정장밖에 없던 얀붕이에게 사줬던 옷이었다. 선물을 받고 그토록 기쁘게 웃던 얀붕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정말 기쁘다고, 반드시 연애를 허락받겠다고 각오를 다지며 방긋 웃던 얀붕이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얀순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휴대폰을 켰다. 위치추적 어플의 마지막 기록에서 얀붕이의 신호는 번화가 근처에서 잡혔었다. 정장을 입고 번화가에 가서는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친가로 돌아간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얀순이는 이마를 붙잡고 얀붕이와 함께 자오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애초에 친가로 돌아간다는 표현 자체가 낯설었다. 마치 그것이 알고싶다의 부부 관련 에피소드나 옛날 아침 드라마에서 가끔 본 것 같은 정적이고 옛된 말투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못한 아내가 남편한테 도망치기 위해 쓰는 말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은 아내를 험하게 대하다가 도망치게 만든 나쁜 가정폭력범이란 뜻일까? 얀순이는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영문 모를 불안감이 밀어닥쳤다. 자기도 모르게 얀붕이에게 나쁜 짓을 했던 걸까.


  62일 전 얀붕이의 생일날, 얀붕이를 위해 직접 차려본 아침식사를 얀붕이가 억지로 먹어주다가 그만 맛을 못 견디고 구토를 해버린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133일 전 크리스마스 때 얀붕이를 너무 심하게 덮쳐버린 게 원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얀붕이는 기념일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쫓아가 사과라도 해야 했다. 소중한 기념일을 얀붕이 없이 보낼 수는 없었다.


 얀붕이에게 한번 더 전화를 걸어보았다가 이번에도 전원이 꺼져 있다는 소리를 들은 얀순이는 어떻게든 얀붕이를 찾아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전화의 대상을 바꿨다. 자신의 아버지였다.


 "여보세요?"


 "우리 딸, 무슨 일 있니? 오늘 반차를 썼다던데."


 "응. 아빠. 갑자기 미안해. 혹시 얀챈대학교에다 뭐 좀 알아봐줄 수 있어?"


 국내 최대규모의 기업이자 얀챈대학교 기부금 비중 1위를 차지하는 얀얀그룹의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아직 대학생인 얀붕이의 스케줄은 그녀가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는 몰랐다. 혹시 대학 쪽에서 행사가 있나 이를 조사하기 위해 아버지의 힘을 빌린 것이다.


 "고마워 아빠. 끊을게."


 얀붕이의 일정은 얀순이가 이미 아는 그대로였다. 오후 수업은 없고 과 일정이 따로 있지도 않았다. 즉 얀붕이는 지금 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얀붕이가 사적으로? 이건 어떻게 찾아내지?


 "이래서야 의심하는 것 같잖아..."


 얀순이는 침착함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심호흡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불안함은 점점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을 끌여들이고 있었다. 먼저 사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심리가 점차 얀붕이의 뒤를 캐는 작업이 되가고 있었다. 얀붕이를 믿는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초조해진 감정이 그녀를 채찍질했다.


 "여보세요? 얀진 언니, 지금 한가해?"


 "왜. 굳이 따지자면 좀 많이 바쁜 편인데."


 "잘됐다. 언니. 그럼 잠시 얀붕이 계좌 좀 확인해 줄 수 있어?"


 "얀붕이? 왜? 뭔 일 생겼어? 음... 알겠어."


 다음으로 전화를 건 상대는 그녀의 친언니이자 얀얀은행장 얀진이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그럭저럭 끈끈한 자매이자, 남자친구 이야기가 나오면 서로 최대한의 협조를 해주는 관계이기도 했다. 


 "일단 메일로 보내 뒀어."


 "와, 이렇게 금방?"


 얀붕이 이야기가 나오니 놀랄 정도로 순식간에 자료를 보내온 얀진이에게 감사하며 얀순이는 휴대폰을 소중히 들었다.


 "남자 일에는 확실해야지. 안 그래? 하여간 넌 너무 얀붕이한테 휘둘리면서 살아서 문제야. 연하 남친이라고 너무 챙겨주고 받아주지만 말고 가끔은 확실하게 기강을 잡고 그러라고."


 "...아무튼, 고마워."


 어쩌면 자신이 얀붕이에게 너무 휘둘리는 걸까. 자료를 열며 얀순이는 생각해 보았다. 나와 얀붕이 중 어느 쪽이 상대에게 절실한 걸까. 1203일 전, 얀붕이를 처음 만난 그날부터 얀붕이는 얀순이의 삶에 있어서 구원이었다. 동시에 얀순이는 자신이 얀붕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착각이었던 걸까? 아침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느낌으로, 그저 물질을 위해 얀붕이가 자신에게 접근했던 건 아닐까. 아쉬운 건 자기뿐이었던 게 아닐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얀붕이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까.

 

 일단 얀붕이의 거래내역을 보며 얀순이는 좀 더 차분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어쨋건 별다른 수상한 내역은 없었고, 일단은 얀붕이가 예고했던 대로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비만이 거래내역으로 찍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얀붕이의 고향에는 자신이 얀붕이를 알고 지낸 1203일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었겠지. 얀순이는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지낸 1203일보다 긴 7113일이 그곳에는 있을 터였다.


 혹시 그 안에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자신은 모르는 그이의 소꿉친구라던가.


 얀순이는 손을 모아 양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상한 망상은 관둬야 했다. 얀붕이는 자신이 첫사랑이 끝사랑이 될 것이라고 말해 줬다. 이젠 얀붕이가 직접 해준 말마저도 거짓말로 의심하려는 지경이다. 더 이상 나가면 빼도박도 못하는 뒷조사다. 상호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얀순이는 점점 충동을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여보세요."


 "얀순 아가씨입니까?"


 "네. 김비서님. 지금 어머니와 통화 가능할까요?"


 엄마라면 무언가 알 지도. 얀순이가 얀붕이와 사귀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장 많이 반대한 게 바로 엄마였고, 그만큼 치밀하게 얀붕이를 알아보고 조사했던 것도 엄마였으니 얀붕이의 과거 역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랬으면 내가 교제를 끝까지 말렸겠지. 얀붕이가 널 속인 거였다면 진작에 내가 손수 잡아족쳤을 테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얀붕이를 직접 만나 이야기해보는게 어떻겠니? 얀붕이가 널 버릴 리가 없잖니."


 "...그렇겠네요. 고마워요, 엄마."


 통화해본 결과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볼 수는 있었다.


 "그래. 얀붕이가 나를 버릴 리는 없겠지..."


 하지만 얀붕이가 잠시 사라진 게 이리도 불안한 건 대체 왜란 말인가.


 의심이란 무섭다. 한 번 시작되면 완전히 해소되기 전까지는 끝없이 마음을 좀먹는다. 1203일 간의 만남, 999일의 연애, 580일의 동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한순간에 모든 믿음이 다 의심받을 수도 있는 노릇인데. 


 며칠 전 위치추적 어플을 서로 장난삼아 깔아둔 게 화근이었던 걸까. 의심의 실마리가 되어버렸으니. 얀순이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남아있으려고 노력했다. 얀붕이가 진지하게 외출 사실을 알리고 싶었으면 문자를 하던가 점심시간에 안부 인사라도 할 겸 전화를 했겠지 이렇게 메모로 남길 리는 없었다. 혹시나 얀순이가 일찍 들어올 수도 있으는 보험삼아 메모만 남기고 떠난 것이고, 원래라면 잠시 외출했다가 퇴근시간 전까지 돌아와 자기를 마중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비이성, 집착, 그리고 사랑이 판단 사이로 끼어들었다. 최대한 멀리 빠져나갈 시간을 벌려고 메모로 퉁치고, 자신을 머뭇거리면서 기다리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얀붕이의 고향은 꽤 멀다.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고향에 간다면 퇴근시간 전까지 돌아오기는 힘들 텐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얀순이는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얀순이가 이도저도 못한 채 안절부절하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렀다. 적어도 퇴근시간까지는 기다려 보자고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채 얀순이는 얀붕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퇴근 시간에 얀순이가 갑작스래 집 밖으로 뛰쳐나온 것은 위치추적 어플에 다시 얀붕이의 위치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


 "얀붕이 집이 여기 맞죠? 네. 정말 고마워요, 엄마."


 "내가 어쩌다 너를 남자 집에 보내게 됐나 몰라."


 얀순이의 엄마가 잠시 키득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얀순이는 어플에 찍힌 좌표가 얀붕이의 집이 맞음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차를 몰았다. 고속철도보다는 느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중으로는 도착할 터였다. 적어도 최악의 기념일을 맞이하진 않기를 바라며 얀순이는 액셀을 마구 밟았다.


 얀순이가 얀붕이의 집에  도착할 때는 밤 11시 남짓한 심야 시간대였다. 얀순이는 얀붕이네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아파트는 어두웠다. 엄마에게 전화해 들은 층수, 동수의 창문 역시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 얀붕이가 있긴 있는 걸까. 그곳으로 들어가면 생길 일에 얀순이는 긴장하면서 천천히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마저도 너무나 긴장스러웠다. 


 결국 얀붕이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초인종을 눌러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나, 얀순이는 생각했다. 얀붕이의 부모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문을 두드리기도 뭣한 노릇이었다. 차 안에서 하룻밤을 기다려야 하나, 999일째와 1000일 사이를 그런 식으로 보내는 게 맞을까. 얀순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 순간 문틈 사이로 빛이 생겼다.


 얀순이는 아파트 방 안에서 불이 켜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 깨어났거나 한 것이었다. 그게 얀붕이일까. 얀순이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해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얀붕이를 찾으러 왔는데요."


 "얀붕이? 잠시만요."


 문이 열렸다. 얀순이를 노부부가 맞이했다. 얀붕이의 부모님은 이런 사람들이구나, 직접 만나기는 처음인 얀붕이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얀순이는 생각했다.

 

 "얀순 양.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네? 저를 아세요?"


 "얀붕이랑 얘기할 때마다 어찌나 여자친구 자랑을 하던지 귀에 딱지가 생길 노릇이라니까요 원. 허허.."


 얀순이는 얀붕이의 부모님들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걸 의아해했다. 얀붕이가 미리 소개시켜 줬던 걸까? 그리고 실물로 보니 확실히 얀붕이가 저 둘을 닮은 것 같다, 같은 감상을 느끼며 얀붕이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짜잔~"


 그 안에는 정장을 차려입고 해맑게 웃는 얀붕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얀붕아!!"


 얀순이는 얀붕이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든 잡념을 다 잊고 얀붕이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반나절 가까이 시름하다가 얀붕이의 얼굴을 보니 얀순이는 괜사리 울 것 같았다. 얀순이가 가슴팎에 얼굴을 파묻자 얀붕이는 난처하다는 듯 얀순이를 끌어안았다.


 "으음... 많이 놀랬죠. 미안해요, 얀순 누나."


 "왜 갑자기 말도 없이 나가고 그래! 전화도 안 받고... 놀랐단 말야!!"


 거의 악을 쓰듯 목소리를 쥐어짜며 얀순이가 말했다. 얀붕이는 얀순이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얀순이를 달랬다.


 "죄송해요. 서프라이즈라고 준비한 건데 뭔가 일이 커져 버려서요..."


 얀붕이는 슬쩍 얀순이를 부엌 쪽으로 떠밀었다. 얀붕이가 손수, 그리고 부모님의 도움도 조금 받아 완성한 만찬이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촛불이 식탁 가장자리를 밝히고 있었다.


 "또 저희 부모님께서 누나랑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죠. 이왕 이렇게 된거 저희 가족도 소개시킬 겸 친가로 간다고 했었어요."


 "으응... 훌쩍."


 얀순이는 참지 못하고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의심이 눈물에 섞여 떨어졌다. 안도감과 기쁨이 섞인 눈물이었다.


 "그나저나... 얀진 씨나 장모님께서 아무 말도 안 해줬어요? 미리 그쪽에 알려드렸었거든요."

 

 "응?"


 "사실 상담을 했었어요. 1000일날 얀순 누나한테 뭐 해주면 좋을지. 그랬더니 가끔은 놀래키는 것도 좀 재밌을 거라고 그래서 일단 시키는 대로 해봤는데... 위치추척 어플 깐 것도 이번 준비 때문이었고. 얀진 씨랑 장모님께서 뭐라도 귀띔해주지 않으셨어요?"


 "아... 진짜... 다들... 너무해..."


 얀순이는 눈물을 닦으며 미소지었다. 농락당한 기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얀붕이만 곁에 있으면 그걸로 됐다는 걸 잘 깨달았으므로.


 "그리고 또 친가로 와서 하고 싶은 말도 있었거든요."


 "응?"


 얀붕이는 정장 주머니를 뒤적거리고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얀순이는 그걸 받아 열어보았다.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저, 결혼하고 싶어요."


 청혼이었다.


 "어?"


 "제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이렇게 얀순 누나랑 서로 사랑하게 된 것도 얀순 누나가 노력해줬기 때문이잖아요. 가족들도 설득하고, 저한테 직접 고백할 용기도 내 주고... 얀순 누나가 아니었으면 저 혼자 소심하고 외롭게 쭉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청혼만은 제가 반드시 먼저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어서... 어... 얀순 누나가 먼저 노력해줬으니, 이번엔 제가 저희 가족을 보여주고 설득할 차례잖아요?"


 얀붕이는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거렸다. 살짝 떨리는 손끝으로 얀붕이는 반지를 잡아 얀순이의 약지 사이로 끼웠다.


 "얀순 누나를 놀래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저도 용기를 내보고 싶었어요."


 "얀붕아..."


 "아직 제가 많이 변변찮지만... 잘 부탁드려요.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얀붕아!"


 얀순이는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엇박자로 홍당무가 된 얀순이가 얀붕이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해... 얀붕아... 우리 절대로 떨어지지 말자..."


 "네... 저도요."


 열두 시를 알리는 뻐꾸기시계가 소리없이 울었다. 그렇게 둘은 1000일쨰의 연애를 맞이했다. 그와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밤은 깊어만 갔다.



*


 "응. 있잖아, 얀붕아."

 

 깊은 새벽. 얀순이이와 얀붕이의 식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얀붕이의 부모님은 잠시 자리를 비워 주겠다고 나간 차였고, 촛불 속에서 단둘만이 남겨졌다.


 "네."


 "앞으로 나 자꾸 놀래킬거야?"


 얀순이는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얀붕이의 손을 잡았다. 반지의 감촉과 동시에 얀붕이의 손을 느끼니 얀순이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아, 아뇨... 정말 죄송하게 됐어요. 차라리 제 쪽에서 뭐라고 알려줬어야 됐던 건데. 얀진 씨를 너무 믿어 버린 걸까요... 하하하... 하하..."


 "저번 크리스마스에도 그런식으로 누나 놀리는 개수작 부렸었지?"


 "예? 예... 그랬죠..."


 "그랬다가 어떻게 됐었지?"


 "어... 벌을 받았었죠?"


 "그랬지."


 어쩜 이리도 귀여운 얀붕이란 말인가. 얀순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오는 하고 깝친 거지?"


 "...나름 하긴 했는데... 으악!!"


 "왕!!!"


 그렇게 두 사람의 기념일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고, 천일하고 하루를 넘어선 장기 연애는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결혼과는 별개로, 두 사람의 기념일... 아니 세 사람의 기념일이 하나 더 생긴 것은 이날로부터 10개월이 지날 쯔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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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글 바쳐봅니다


순애 서스펜스 스릴러를 의도해보았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못난 글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