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믿는 신이라는건 뭘까요?"

마법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 홀린 듯 중얼거려 보았다. 대답을 바라지 않고 지근거리에도 들릴락 말락한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지만 스승님, 하인즈는 그걸 들었던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 스승님. 들으셨군요..."


"꼭 귀로만 들으리란 법은 없지. 평소보다 잡음이 심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져서, 제자가 근심에 차 있는것 같아 그저 주의를 좀 기울였을 뿐이네."

역시 스승님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구나. 스승님은 평소에 눈도 귀도 안 보일만큼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시면서도, 모든걸 꿰뚫어보셨다. 극소수만 가능한 고위 꿈마법조차 상대의 무의식에 간섭하는데 그치는데, 역시 대현자라 불리는 분이라서일까.

"음, 그러니까 제 전직명은 비숍이잖아요? 그 전에는 프리스트, 더 전에는 클레릭. 각각 주교, 사제, 성직자를 뜻하는 말이죠."


"그렇다네. 성 속성의 마법을 익힌 마법사를 부르는 말이지."


"성 속성 마법들도 그렇죠. 신성한 빛으로 적을 제압하는 제네시스, 신의 사도인 천사의 이름을 사용하는 엔젤레이. 마법서에서는 이런 마법들은 신의 힘을 빌려 사용한다고 서술되어 있어요. 이런 신의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고 섬기는 교단조차 존재하지 않는건 넘어가더라도, 저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성 속성 마법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고, 이런 힘을 빌려주는 신이란 존재는 무척 자애로운 존재가 아닐까..."

"꽤나 깊은 고찰이로군. 지금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사실 이제는 존재하는지도 확신이 안 들지만, 만약 있다면 이 신은 도울 능력이나 의지, 둘 중에 하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호오. 어째서 그리 생각하지?"

"이 신은 세계에 직접 간섭하지는 않아요. 그랬다면 시간의 여신 륀느나 세계수 알리샤, 그리고 검은 마법사처럼 그 행적이 기록으로 남았을거에요. 반면에 제게 힘을 빌려줌으로써 간접적으로 도우려 했던 거라면...정말로 간절한 순간, 정말 이대로 죽겠구나 싶을때 저를 살렸던건 오르카의 변덕, 헬레나님의 헌신, 시그너스의 결단이었어요. 신이 아니라요."


"운명은 신이 결정하는게 아니라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이 결정한다는건가."


"그리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구할 수 없었던 이들도 있었어요.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괴롭힌 에델슈타인의 주민들을 살아서 제대로 마주하고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생각했던 스우...그리고 큰 죄를 저질렀지만...그만큼 큰 불행을 겪어온 혼혈마족 소년도 구할 수 없었죠. 저흴 도우려는 신이 만약 능력이 아니라 의지가 부족한거라면, 이건 너무 가혹한 운명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자네는 신을 부정하기로 했나?"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직 이 힘의 원천에 대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어서요. 물론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에요. 운명을 흘러가는대로 두기에는 메이플 월드의 적, 검은 마법사는 너무 강대한 적이니까요. 그리고 앞선 결전에서 깨달았어요. 신조차 돕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행동하는 이들에 의해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는걸요. 저는 이제 그들처럼 스스로 행동하려 해요."

"신이 뭐냐는 질문에서 시작했으니 우문현답이로군. 역시 자네는 대마법사의 그릇이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래서, 이제는 조금 후련해졌나?"


"아, 그런 것 같네요. 죄송해요. 너무 혼자 떠들어서."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그릇됐다면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스승의 일이지. 물론 내가 그러지 않아도 자네는 워낙 올곧아서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말이야."

스승님은 흡족하신 듯 웃음을 터뜨리시고는 하시던 일을 마저 하러 가셨다. 별로 웃으시는 분이 아닌데. 메이플 연합의 모두가 내게 거는 기대보다도 지금 이 순간은 스승님의 기대가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런건 슈가, 테스, 올리비아, 그리고 론도와 있을때 말곤 다시는 못 느낄 줄 알았는데. 그들 옆에 나란히 서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잡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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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