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bot wiki, 픽시브 같은데서 로봇물 읽어보다가 나도 삘받아서 써봄


야하진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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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출입문이 닫혀 있습니다, 경비실에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기계적인 목소리였다, 아니 기계가 내는 소리가 맞다. 지금은 밤 11시, 아무리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지만 입사 한지 8년 된 내가 이 시간까지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너의 명령과 일하기 싫어하는 직속 상사의 콜라보레이션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다. 더군다나 나 말고는 이걸 제대로 이끌어나갈 능력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직속상사인 최부장은 오너와 임원들 앞에서는 유능한 척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실상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한다 쳐도 초짜 주니어들은 다들 6시에 불금을 즐기러 퇴근하고 나 혼자 사무실에 남아서 새벽까지 야근을 하는 건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는 처사이다. 게다가 지금 바로 이 순간, 집에 가려고 사무실을 나서니 문이 열리지 않는다.



"기획팀 이미라 과장입니다. 지금 출입문이 안 열리는데 제가 수동으로 열 방법은 없는 건가요?"



"아 이 과장님 죄송하지만 그 문 수동으로는 못 열어요, 지금 이 일대가 정전인데 비상 전원만 들어가 있어서 시스템 관리업체가 현장에 가야합니다. 헌데 내일이 이 근방이 다 난리라 관리업체가 빨리 갈지는 모르겠네요 일단 회사에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일단 알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세요"


인프라관리팀에 전화해봤으나 뾰족한 수가 안보인다. 하긴 예전 같았으면 당직서는 시설팀에 찾아가면 해결되겠지만 그놈의 원가절감 열풍에 모조리 원격근무로 전환되어버렸다.


수동으로 열 방법이 없으면 내가 해볼 일은 없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니 갑자기 얼굴에 땀이 흐른다. 한여름 열대야는 에어컨이 안 돌아가는 건물 로비를 땀이 흐를 정도로 달궈 놓기에는 충분했다. 일단 바닥에 앉아봤다. 항상 자동으로 청소 되는 대리석 바닥이니 옷에 먼지가 묻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누가 본다면 이상한 모습일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 안에 나 혼자 뿐 아닌가? 비록 CCTV 몇 대가 나를 지켜 볼 테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났다.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회사 건물 내부는 보안망이 따로 개설되어 있어서 일반 인터넷은 하지 못하는 환경이다. 달리 무언가를 해볼 겨를도 없이 그저 두 시간 동안 바닥에 앉아 있기만 한 것 같았다. 매일 같이 격무에 치여 사느라 이렇게 많은 시간을 여유있게 있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이 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아침 해가 뜨고 다른 사람들이 출근 할 테니 이대로 더 있어도 되지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무실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무실들을 슥슥 훑어보다가 오너 사무실 앞에까지 왔다. 오너 사무실은 중요한 보고 외에는 들어가기 힘드니 이런 때가 구경하기 좋은 절호의 찬스지만 출입문이 잠긴 시점에서 이런 중요한 공간에 문이 열릴까 싶긴하다. 그래도 호기심에 문을 슥 밀어보았는데, 어? 문이 열린다?


먼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안쪽을 먼저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긴한데? 문을 더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으아아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에 나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문 바로 뒤에 숨어서 나에게 비명을 지른 사람은 다름아닌 오너의 비서인 성지혜 주임이었다.


"어우 놀래라! 성 주임 여기서 뭐하는거야?"


"아! 이 과장님이셨네요, 왜 이 늦은 밤에 아직도 회사에 계시는거에요?"


"일하다 보니까 이 시간이더라고, 성 주임은 여기서 뭐하는거야"


"아 저도 사장님 뒷 처리 하느라고 야근을 하는데 아무도 없는 회사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서 이러고 있었네요 헤헤

그게 과장님일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소리쳐서 미안해요"


"어휴 진짜 십 년 감수했네.."


"과장님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일이고 뭐고 그냥 퇴근 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그게 나도 퇴근을 하고 싶은데 정전이 나는 바람에 문이 죄다 잠겼어"


"아 정말요? 정전 된지도 몰랐는데, 내일 토요일이라 출입문이 아예 안 열릴건데 어쩌죠?"


"뭐어? 토요일에는 문이 안 열린다고? 그게 무슨소리야"


"아 그게 사장님이 직원 복지차원에서 주말에는 아예 출근을 못하게 하신다고 그렇게 해 놓으셨어요"


"참나 고약한 방법이네 아주"


"그건 그렇고 지금 못나가면 월요일까지 갇혀있어야 하는데 어쩌죠?"


"나한테 생각이 있어"



일단 주 출입문을 제외한 다른 문이 열리는지를 확인했다. 화장실을 비롯해서 다른 문들은 모두 다 열리는 것 같았다. 온갖일을 도맡아 했던 내가 앞장서서 회사 이곳 저곳을 다 돌아다니며 체크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문은 도통 열리지를 않는다. 회사 지하로 통하는 문인데 다른 문들과는 다르게 두꺼운 방화문으로 되어 있었다. 이 문을 열면 연구소에서 제조 된 샘플을 임시로 보관 해놓는 창고로 이어진다. 샘플을 바로 넣어야 하기 때문에 지하주차장 하고도 연결되어 있어서 문을 열 수 있다면 어떻게 밖으로 나가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문 옆에 달려 있는 단말기를 뜯어냈다. 건물의 경비를 비롯한 출입문이나 보안관리 시스템들은 얼핏보면 최첨단 기술들이 적용되어 있지만 기기 자체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면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처음 여기에 회사가 입주할때 보안시스템 관리 업체의 입찰부터 시작해서 공사하는 과정에서 관리감독까지 내가 맡았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아는게 많을 터.


"물리적인 해킹을 시도해보자고"


"과장님 이런것도 할줄 아시다니 대단해요!"


"훗 이래뵈도 공대 나온 여자라고~"



뜯어낸 단말기의 전원선만 남겨놓고 휴대폰과 페어링을 시도하니 바로 연결이 되었다. 전자공학과를 다니며 해킹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별 쓸모 없을것 같았던 잔재주가 고작 토요일에 집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일념하에 발휘되고 있었다. 정말 웃길 노릇이다.


절대 안열릴 것 같았던 철문이 쩌억 하고 열렸다. 창고에는 샘플이 들어와 있지 않아서 텅텅 비어 있었다. 앞이 보이질 않아서 불을 켜니 구석에 약간의 잡동사니가 널려있고 정면에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큰 문이 보였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만 열면 끝나는 문제인데 단말기가 구형이라 페어링으로 열만한 문은 아닌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기계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인데 전원이 꺼져 있었다. 최첨단 시설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최첨단 기술로 열지 못하는 문이었다.


"하아 여기까지는 어찌저찌 왔는데 이 다음 부터는 어쩌지?"


"왜요? 과장님 이거는 못열어요?"



성지혜가 큰 문을 주먹으로 톡톡 두들기며 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안되는건 안되는거지, 저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열어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곳을 둘러보니 사람이 올라갈 수 있을만한 높이에 환기구가 보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저런걸 열고 사람이 기어가서 다른 곳으로 잠입한다지만 굳이 회사를 탈출하자고 둘이서 환기구 뚜껑을 열고 먼지가 풀풀 쌓인 덕트를 기어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고개를 반대로 돌려봤다. 조그마하고 빨간 쪽문이 보였다.



"성주임, 저 빨간색 쪽문 처음보지 않아?"


"아, 그러게요 저도 저런건 처음보는데요?"



입사한지 8년째이고 샘플을 검토하러 이 창고에 온 것은 못해도 수십 수백번인데 왠지 모르게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원래부터 있었던 거지만 일에 바빠서 스쳐지나기 일쑤였다면 어렴풋이 저런게 있었지 라고 생각이라도 들텐데 이건 그냥 처음 보는 거고 그건 성 주임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강한 위화감에 휩싸여서 선뜻 다가가기 꺼려졌지만 왠지 저걸 열면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속는 셈치고 들어가보자"


"네 과장님, 전 과장님만 믿어요!"



잠겨 있을것 같았던 문을 손으로 스윽 만지자 그냥 허무하게 움직여버린다. 애초에 아무런 잠금장치도 없는 문 같았다.

문 너머로 길게 뻗은 어두운 복도가 나와 성 주임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들어갔다.










한참을 걸었다. 이 회사 지하에 이렇게 큰 시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참을 걸어간 것 같다. 문 너머에는 조명도 없어서 성 주임과 같이 휴대폰에서 은은하게 내뿜는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좁은 복도를 쭉 걸어왔다. 이 정도 걸어왔으면 무언가 나올법도 한데 끝없이 이어지는 이 복도는 사람을 점점 지치게 만든다. 그렇다고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기에는 마음 한 켠에서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애매한 상황, 그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단지 집에 가기 위한 일념하에 일어난다는것이 짜증나고 내 자신이 한심했다.




마침내 휴대폰 액정으로 비춘 곳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신형 샘플 보관창고, 1급 보안취급자 전용' 큼지막하게 쓰여진 경고판 하나만 빼고는 그냥 평범한 방화문에 옆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단말기가 덩그러니 달려있다.


"신형 샘플 창고? 애초에 이런게 있었나?"


"그러게요, 저희 한참을 걸어왔잖아요? 이 정도면 회사 밖으로 아예 나온 것 같기도 한데요..."


"저건 비밀번호를 못 풀 것 같은데, 하아.. 다시 돌아가야 하나"


아까처럼 페어링 해보려 해도 이건 스테인레스 박스로 만들어진거라 분해 해보기도 쉽지 않다. 지칠대로 지쳐서 문에 등을 기댄채로 쭈욱 미끄러져 앉았다. 성 주임은 내 곁으로 와서 나에게 손 부채질을 하며 울먹울먹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경비실에서 들은 말대로 그냥 관리업체나 기다리면서 로비에 늘어져 있을것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월요일에 문이 뚫린걸 보고 회사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는 일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성 주임이 같이 있어서 사장 핑계로 어찌저찌 빠져나가 볼 수 있겠다는 것?


"성 주임, 그냥 로비에 앉아 있을걸 그랬어, 이렇게 된거 월요일에 사람들이 보면 어쩔꺼야"


"아니에요 과장님, 괜히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걸요? 사람들이 뭐라하는건 괜찮아요 제가 사장님한테 잘 말하면 되요"


"그나저나 저 안에는 뭐가 있길래 이렇게 보안이 강하게 걸려 있는걸까?"


"글쎄요... 저는 그런건 잘 몰라서...."


"응? 사장님 일 거들면서 이것 저것 많이 본거 아니야?"


그러자 성주임은 손사래를 치면서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과장님이 생각하시는 것 만큼 저 그렇게 사장님을 많이 도와드리진 않아요, 그냥 스케쥴관리랑 법인카드 증빙 정도만 도와드리지 제가 같이 일을 하지는 않아요...힝..."


"아 그래? 소문과는 다른걸?"


"네에? 저에 대해서 소문이 어떻게 도는데요? 저는 사장님하고만 붙어있어서 이런거 잘 모르거든요"


"사장님이 사무실 가끔 돌때마다 성 주임 칭찬을 입에 마르도록 하셔, 요새 젊은 사람치고 일 정말 열심히하는 사람이라고 그 핑계로 각 팀 막내들 맨날 갈구잖아, 그거 때문에 관 둔사람도 몇 명 있을껄?"


"헉... 그건 완전 거짓말인데..."


"그야 모르지, 내가 사장 속마음을 어찌 알겠어? 에휴..."



그 순간 무언가 머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 주임, 생일이 몇일이야?"


"아 저.. 5월 21일이요"


"어 그래 잠시만.."


'0521'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하고 잠시 후 단말기에서 띠리링하는 소리고 나더니 곧바로 신기해할 겨를도 없이 문이 위 아래로 빠르게 열렸다.



"어... 성 주임 생일이 비밀번호인데?"


"네에? 왜 이런 중요한 곳 비밀번호가 제 생일일까요....?"


"일단 들어가보자"



안쪽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 휴대폰 액정을 밝혀 더듬더듬 걷다가 앞쪽에 커다란 제어패널이 놓여 있었다. 수많은 버튼 들 중에서 한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 버튼 아래에는 '신제품 1모델 출하' 라고 쓰여있다. 어딘지도 모를 이상한 공간에서 버튼 하나로 신제품이 출하된다고?  말도 안되는 상황에 일단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이게 뭐야!"


"성 주임....."


"허억.........."



빨간 버튼을 누르니 순간 환하게 불이 들어오면서 바닥에서 커다란 유리관들이 천천히 올라왔다. 유리관이 올라온다는것 자체에 놀란것은 아니다. 유리관 안에 있는 것은 나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수십개의 유리관 안에는 마치 잠을 자는 듯 눈을 감은 채 꼿꼿이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유리관 위쪽에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코일 다발들이 늘어져 뒷덜미에 연결되어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안드로이드 같았다.



하지만 내가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성지혜 주임과 똑 닯은 안드로이드였다. 동그란 얼굴에 큰 눈, 낮지만 오밀조밀한 코와 분홍색 입술, 그리고 자그마한 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라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영락없이 성지혜 주임이었다. 이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성 주임은 그 자리에서 얼어 붙은채로 멍하니 자신과 닮은 안드로이드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과장님.... 이게 다 뭐에요?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이거 안드로이드에요???????"


"사장의 고약한 취미인가, 성 주임하고 똑같은 안드로이드들을 만들다니"


사실 사장의 고약한 취향은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성 주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입밖에 내지않았다. 사장은 매일 같이 성 주임에게 성적 희롱과 폭행을 일삼았고 급기야는 아예 비서로 자리를 옮기게 해서는 가둬놓고 그 짓을 매일 한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성 주임은 항상 헤헤 거리며 웃고 다녔고 원체 따뜻한 사람이었던지라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조금 너무한 처사 아닌가? 아직 남은 궁금증 해소를 위해 제어 패널로 다시 가보았다.


패널 가운데에 있던 모니터에는 '출하 준비단계' 라고 뜨더니 각 안드로이드들의 상태가 띄워져 있었다. 모두 '활성화 준비완료' 라고 표기되어 있다. 근데 한 군데에는 비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 주임, 여기 하나가 비어있는데..."


"비어있다뇨?"


"가보자"


다리가 풀린 성주임을 일으켜세워 부축하면서 비어있는 유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석진 곳에 있는 유리관으로 가보니 텅텅비어 있는 유리관, 바닥에 무언가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MODEL1 JH, S/N : 0521'



성지혜 주임 이름의 이니셜과 생일이라고 말한 숫자가 시리얼번호로 적혀있었다.




성 주임이 신제품이구나.







그 광경을 본 성 주임이 바닥에 쓰려지려는 찰나 내가 부축해서 앉혔다. 아직 자신이 안드로이드 라는 걸 깨닫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어패널을 제대로 살펴본 나로서는 성 주임이 안드로이드라는 걸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신제품이 담긴 유리관은 총 50개, 50개 중 49개가 아직 비활성화되어 있고 1개만 활성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활성화 된 신제품이 있는 곳은 바로 여기이고, 활성화 된지는 불과 1달.


머리 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 성지혜 주임은 입사한지 3년이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2년 11개월 까지는 진짜 '인간'인 성 주임이 있었고 1달전에 안드로이드로 교체 된 걸까? 그런데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바꿀수가 있나? 모든 것이 기록되고 감시되는 세상에서? 그게 아니라면 그럼 그동안의 기억들은 뭘까, 이 신제품은 활성화 된지 1달밖에 안되었다. 그럼 나머지 3년간 내가 성 주임을 만나온 기억들은 뭐지? 갑자기 머리속이 복잡해지며 두통이 몰려왔다.




그 때였다.



'쿵쿵쿵쿵쿵'



'이 과장! 이미라 과장! 거기 안에 있어??'



사장의 목소리였다. 곧바로 비밀번호를 풀고 안으로 들어온 사장은 눈이 휘둥그래한 채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사... 사장님..!!"


"아니, 이과장...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그건 모르겠고, 이건 다 뭐에요?"


"일단 진정 좀 하고 이야기하자고 응?"


사장이 제어패널 한 쪽 끝에 있는 빨간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그 앞을 가로막으며 두 팔을 벌렸다.


"내 질문에 답해주세요"


"이 과장, 비켜"


"알려주시면 제가 정지 시킬께요"


"아냐 넌 그렇게 하지 못해, 어서 비켜"


"설명부터 하시라고요!"

"이게 어딜 감히!"



사장은 나의 뺨을 세게 쳤다. 바닥에 쓰러질 듯 휘청 거렸고 귀가 멍해졌다. 살면서 처음 누군가에게 폭행당했다.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사장은 내 배를 수없이 걷어찼다. 사장의 구둣발이 나를 가격할 때마다 단발마의 신음소리가 났다. 억울함과 아픔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강간을 하려는 범죄자의 얼굴을 하고는 내 옷을 벗겨냈다. 자켓과 블라우스가 찢어지고 속옷들만 남아 있던 찰나 사장이 나에게 윽박질렀다.


"너 따위는 감히 나한테 반항할 수 없어"


그 순간


"과장님한테 뭐 하는 짓이야!!"


쓰러져 있던 성 주임이 뒤에서 사장의 목을 팔꿈치로 조이며 힘을 주었다.


"이것들이!"


"아악"


사장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성 주임과 몸싸움을 벌였다. 사장은 이내 성 주임을 패대기 치고 실랑이 끝에 성 주임의 머리채를 잡아 제어패널 쪽으로 내리쳤다. 성 주임은 정신을 잃은 채 엎어졌고. 이제 내 차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사장이 내 머리채를 잡았다.



"어디 신제품 주제에 인간에게 반항하는거야"


"이봐 이미라 과장, 너라고 뭔가 다를 줄 알아? 저 년이나 너나 어차피 내 말에 복종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그 순간 사장은 품 속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나는 체념한 채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난 신이야! 인간과 똑 닮아서 절대 구분 못하는 것을 만들어냈으니까 말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임신과 출산만 빼고 말이야!!"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내 울타리 안에 넣고 실험을 해봤는데, 실패했군 여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고! 빌어먹을 정전 때문에 크로마키가 꺼져버렸어!"


무슨소린지 모를 말을 사장이 했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장이 미친사람 처럼 보여서 거짓말로 치부하고 싶었다. 사장이 나에게 소리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옆에 쓰러진 성 주임이 꿈틀대면서 정신을 차리는게 눈에 들어왔다. 이때가 마지막 기회다 싶었다.


"이야아아아악!"


소리치며 몸을 일으켜 사장을 넘어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뺐었다. 꿈틀대던 성주임이 쓰러질랑말랑 하는 사장을 몸으로 덮쳤고 그대로 칼을 목에 찔러넣었다.


"커억... 크어어억"


사장은 목에 꼽힌 칼을 쥔채 피를 쏟으며 모로누웠다. 그러고는 눈을 뜬채 그대로 숨이 멎었다.

사람을 죽였다. 비록 나와 성 주임을 위협하던 변태새끼라 할 지라도 사람을 죽였다. 머리속이 하얘지며 바닥에 축 늘어져 앉아버렸다.



성 주임은 자기 옷을 하나 벗어 나에게 덮어주었고 나를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유리관 쪽에서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유리관에 있는 신제품 하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호흡을 시작한다. 아마도 사장이 성 주임에게 해꼬지를 하면서 실수로 활성화 시킨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바라보더니 나와 성 주임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자연스레 뒷덜미의 코일 다발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갈 때 마다 비틀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나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신제품은 마치 영혼 없는 사람처럼 어기적어기적 허공을 응시한채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 주임과 닮은, 아니 성 주임과 똑같은 신제품은 그렇게 멍하니 창고 안을 돌아다녔다.



"그냥 껍데기만 있는건가봐, 우리를 인지하지도 못해, 다시 넣어놔야겠어"



혼란스러운 모습에 새로 깨어난 신제품을 다시 비활성화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제어패널로 가서 비활성화 시키려 하는데 아래쪽에 새로운 메시지가 수신되었다.


'새로운 메시지 수신, 신제품 활성화 상태 업데이트 완료'

'현재 활성화된 신제품 총량 3'


3개라고? 메시지를 자세히 보기 위해 패널을 조작했다.


'현재 활성화된 신제품 총량 3'

'모델1 : 2'


'모델0 : 1'





모델1은 아까 본 듯 성 주임을 말하는 것이다. 근데 모델0은 뭐지?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의심이 온 몸을 휘감았다. 성 주임 내 뒤로와서 같이 패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궁금증을 풀 마지막 단계다.



'모델0 상태를 확인하시겠습니까? Y / N'


'Y'



'위이이이잉'





신제품으로 가득 차 있던 한쪽 편이 접히듯이 스르륵 열리고 새로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바쁘게 뛰는 심장박동을 부여잡은채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얀 벽에 하얀 바닥인 정신병원 같은 공간속에 우웅우웅 하는 낮은 저주파음 만 간간히 들릴 뿐이다. 이윽고 유리관이 슈우욱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솟아 올랐다. 그 안에는 내가 절대 아니었으면 하는 것이 있었다. 170cm 정도 되는 키에 허리까지 오는 생머리, 가지런히 배 위로 모은 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몸과 내가 너무나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얼굴. 그건 명백히 나였다. 모델1이 있었던 유리관 처럼 여기도 하나가 비어있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MODEL0 MR, S/N : 0907'




거기엔 그렇게 적혀있었다. 0907, 내가 생일이라 믿고 있었던 숫자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나와 닮은 신제품을 바라보았다. 아예 유리관을 열고 여기저기 만져보며 자세히 살펴봤다. 모델0은 내가 손으로 잡던 여기저기 살펴보던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피부와 얼굴에 나 있는 잡티까지 구현되어 있어서 누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인간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얼마나 인간과 친숙한 존재를 만들어내려고 했으며 나와 성 주임도 이 광경을 보기 직전까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도록 해놨을까 뒤따라온 성 주임도 가까이서 모델0 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과장님도 신제품....."


"말도 안돼..."




"성 주임"


"네 과장님..."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어,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사람들이 알아낼꺼야"


"네,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그래 방법을 찾아보자"



정신없는 공간에서 어디 나갈 길이 없나 바삐 찾았다. 신제품들 사이를 비집던 중 한쪽 구석에 환풍구 같은게 있었다. 성 주임과 같이 손으로 잡고 들어올려 그 아래로 일단 들어가봤다. 몇 시간전 어떻게 하면 회사 밖으로 나갈 까 생각했을 때 환풍구로는 들어가는 것 만큼은 정말 하기 싫었는데 지금 지혜와 함께 엎드려서 환풍구로 천천히 기어가고 있다.


방금 전 그 광경을 같이 목격한 뒤로 헤헤 거리던 성 주임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풀이 죽어버렸다. 때때로는 훌쩍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하면 짓는 특유의 방실방실한 표정이 있었는데 나도 성 주임도 정체를 알아버리고 나서는 그런게 싹 사라져버렸다. 나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왜 인지 앞으로 해야할 것들을 빠릿빠릿하게 생각해서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어갔을까? 어둠만 가득하던 환풍구에 미세하게 빛이 스며드는 공간이 나왔다. 구멍이 조그맣게 송송 뚫려있는 철판이 나왔고 손으로 쉽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옆으로 치워놓고 내려갈 준비를 마친 뒤 성 주임을 기다렸다.



"먼저 내려가서 받아 줄 테니까 조심해서 내려와 성 주임"


"네 과장님"



2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곳이지만 그냥 폴짝 뛰어내렸다. 아까 사장이 옷을 다 망가트려버린 바람에 성 주임이 입고 있던 자켓만 걸치고 있던 터라 바닥에 착지하면서 자켓이 그냥 훌렁 벗겨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챙겨입을 새도 없이 성 주임이 위에서 어쩔줄 몰라 매달려 있는 걸 잡아서 받아주었다. 어두운 공간에 비프음을 내며 반짝이는 기계들과 나즈막히 들리는 저주파음 만으로는 뭐하는 곳인지 가늠하기 너무 힘들었다.



"과장님, 여기 스위치가 있어요!"


딸칵




"헉 과장님..."


"세상에..."




불 켜진 방안에는 비스듬히 놓여진 수술대 처럼 생긴 테이블 두개와 그 양옆과 사이로 수많은 기계들과 모니터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모니터에는 영상과 이미지가 수없이 깜빡거리며 지나가거나 변화하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표시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두 테이블에는 신제품이 각각 누워 있었다. 나와 성 주임과 똑 닮은 모델0과 모델1이었다.


온몸에 케이블들이 꽂혀 있고 마치 데이터를 주입당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때때로 얼굴과 몸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땀도 흘렸다. 마치 꿈을 꾸는 사람과 같았다.



"창고에서 여기로 가져와서 제품화 시키는건가..."


"과장님과 저도 그럼 여기에서 나온건가보네요"


"이런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밖으로 나가야지"


"나갈 문을 찾아볼께요"



방 한구석에 문을 찾아 문고리를 잡고 슬며시 돌려보았다. 왠일로 그냥 슥 열리는 문밖으로 복도가 이어져 있었는데 창고로 가는길 처럼 외길로 이어져 있었는데 성 주임의 손을 꼭 잡고 살살 뛰어서 복도 끝으로 갔다.



'불용품 배출장소'



아 여기가 폐기물처리장하고 연결되어 있는건가? 그러면 이쪽을 통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으로 여는 철물은 성주임과 같이 힘겹게 밀어내자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문이 열렸고 천천히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고무 타는 냄새 같아요"



코를 찌르는 고무 타는 냄새를 맡으며 들어선 곳은 거대한 소각장 같은 곳이었다. 천정에는 거대한 집게가 매달려 있고 그 앞에는 폐기물을 버리는 듯한 큰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뚜껑이 닫혀 있는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성 주임과 함께 뚜껑을 열자 우리는 동시에 뒷걸음질 치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엔 나와 성 주임, 그러니까 모델0과 모델1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마에는 '불용품, 유효기한 초과' 라고 쓰여진 스티커가 붙어 있고 온 몸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다. 모델 1은 지금 성 주임과 헤어스타일은 약간 달랐지만 한쪽 눈이 뽑혀있고 배에는 커다란 칼자국들이 나있었다. 마치 배를 갈랐다가 다시 꿰맨것 처럼, 나는 머리카락이 아예 없었고 왼쪽 팔이 절단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끔찍한 모습이다.


그때였다.


'불용품 처리 프로세스 시작'


'위이이이잉'


갑자기 천장에 있던 거대한 집게가 내려왔다. 별안간 불용품 스티커가 붙은 모델0과 모델1을 집어들어 소각로에 집어넣었고 이윽고 고무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바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는데 성 주임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껴안았다. 나는 성 주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용품 처리 프로세스 재시작'



"아아악! 과장님!"



또 다시 들려온 안내음과 함께 사방에서 튀어나온 작은 집게들이 성 주임을 잡아챘다. 성 주임을 잡으려고 따라가는 순간 나도 집게들에게 잡혔다. 성 주임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집게들은 성 주임의 배를 가르고 무언가를 꺼냈다. 성 주임은 죽은 듯이 축 늘어져 버렸고 집게들이 팔과 다리, 목을 하나씩 분해하는 사이 나를 잡은 집게들도 내 배를 가르고 무언가를 꺼냈다. 그 순간 눈 앞이 까매지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오작동을 일으킨 안드로이드 둘을 폐기물처리장에서 발견하여 처리했다. 본래 1달에 한번씩 다른 신제품으로 바꿔가며 테스트해야 하는데 이번엔 예기치 못하게 신제품 창고까지 들어와 말썽을 일으켰다. 사장이 본의 아니게 일에 휘말려 들어 사망했고 투자자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신제품의 개발예산은 한푼도 지급되지 않게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미 만들어놓은 안드로이드들을 밖으로 빼내어 암시장에 내다 파는 수 밖에 없다. 회사에서 안드로이드 개발팀을 아예 해제해서 다시 만들어낼 여지가 아예 없어질 판이니 이렇게라도 하는 게 그나마 살아날 길인 것 같다. 비서와 프로젝트 매니져 타입으로 만든 여성형 안드로이드라서 가정용으로 들일 사람은 없겠지만 다행히도 여성성은 남겨놓은 모델들이라 다른 곳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