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장교 하나가 제식 양철 잔 안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흰 거품이 보글보글 피어오르면서 잔에 담긴 홍차를 뿌옇게 만들었다. 그녀는 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역시 버려진 민가에서 주워온 찻잎은 그녀가 원하던 찻잎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있던 모든 얼음 사탕을 다 털어놓았지만 단맛이 부족했다. 도자기로 된 잔이 아니라 양철로 된 잔에 따라 마셔서 역한 쇠 맛도 함께 느껴졌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급조한 고향의 맛은 헬가 폰 프레덴 대위가 잠시나마 고민거리를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차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젊은 장교는 무의식적으로 늑대 귀를 쫑긋 세우며 하얗고 북슬북슬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대위님! 대위님!"


  다급한 부름이 헬가를 현실로 끌고 왔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양철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헬가는 최대한 행복한 표정을 지우려고 노력한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곱슬머리를 한 앳된 병사 하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걸맞지 않게 그가 입고 있는 카키색 군복 어깨에는 하사를 뜻하는 꺾쇠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비록 현지에서 직접 그려 넣은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폰 프레덴 여남작은 할 수 있는 만큼 짜증을 실어서 말했다.


"파월. 너 때문에 마지막 차를 엎지를 뻔했어."


  델윈 파월 하사는 상관의 짜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칼 사이로 튀어나온 고양이 귀를 꼿꼿이 세운 채 실없이 웃으며 돌돌 만 서류 하나를 건넸다. 대위도 엄숙한 표정을 그만두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어린 부사관이 건넨 문서를 그 자리에서 풀어 읽어보았다. 상부에 증원을 요청하러 간 전령이 가져온 답장이었다. 장교는 언어의 장벽을 뚫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느리게 전갈을 해독했다. 현재 귀관의 위치로 증원 병력을 보낼 수 없음.... 적 보병 대대가 장갑차를 대동하고 귀관의 위치로 빠르게 이동 중.... 무슨 일이 있어도 전선을 사수할 것.... 전 세계가 귀관과 그 부대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헬가는 서류를 다시 둘둘 말아 델윈에게 건넸다. 델윈는 귀를 쫑긋거리며 무슨 내용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냥 버티래."


  모든 일은 3개월 전에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 그녀가 살던 나라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침략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날 수 없는 새를 사냥하듯 주민들을 잡아갔다. 황제는 신민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 용맹하면서도 충성스러운 군대를 보냈다. 헬가 폰 프레덴 소위도 그중 하나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황제의 병사들은 침략자의 압도적인 화력에 그대로 녹아버렸다. 오직 헬가를 포함한 소수만이 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황제는 얼마 전까지 서로를 위협하던 다른 나라의 친척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렇게 수많은 국가의 군대가 미지의 존재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도착했고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 얼마 안 되는 생존자 중에는 델윈 파월 이병도 있었다. 이후 여러 생존자가 하나의 부대로 조직되며 시골 귀족의 딸과 시골 광부의 아들은 만나게 되었고, 몇 번의 전투에서 살아남으며 그 부대를 이끄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대위는 양철 잔을 내려다보았다. 차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솔직히, 인생 마지막 차가 될지도 모르는 것을 이런 대체품으로 때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심복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마실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대위님. 차에는 우유밖에 넣어본 적이 없어서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젠장. 헬가는 불만에 찬 얼굴을 하며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섬나라 놈들은 아무거나 잘 먹으면서 이상한 것에 깐깐하다니까. 간신히 잔을 비운 그녀는 델윈과 함께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참호의 상태는 어떤가. 기관포와 보병포는 잘 배치되어 있는가. 지뢰는 잘 깔려 있는가. 철조망의 상태는 어떤가. 병사들의 사기는 어떤가.


  체크리스트 작성이 끝나자 둘은 잠시 담배를 피우러 지휘실을 나왔다. 담배는 한 개비 밖에 없었기에 둘은 나눠 피기로 했다. 계급상 대위가 먼저 끽연을 즐기도록 했다. 젊은 장교는 입에 문 궐련 끝에 오일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녀가 한때 푸른 들판이었던 곳을 멍하니 보며 흰 연기를 내뿜는 동안 델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잠시 눈치를 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위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그래."


"...우리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헬가는 잠시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담배가 허공에서 타들어 가는 동안 그녀는 생각에 빠졌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전우는 둘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헬가도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자신이 살 수 있을까 생각할 때마다 흰 연기 속에서 몸부림치며 불타는 병사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아."


"...."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어린 부사관은 절망에 빠진 듯 귀를 완전히 젖혔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헬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지금 그녀의 오른손에는 불붙은 담배가 들려있었다. 장교는 부사관에게 담배를 건넸다. 그리고는 그를 격려하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살아남을 수는 있을 거야. 놈들도 총 맞으면 죽는 건 똑같잖아. 전 세계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고 후방에 있는 과학자들은 노획한 적 장비를 분석하고 있어. 그러니 언젠가는 놈들만큼 강력한 증원군이 올 거야. 그때까지만 살아남으면 우리는 영웅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델윈은 조용히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귀는 다시 쫑긋 세워지지 않았고, 가라앉은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악화한 것 같기도 했다. 결국 폰 프레덴 대위는 입을 다물고 더 말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결정 내렸다. 담배가 다 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결국 하사가 담배꽁초를 버린 뒤 몇 분이 지난 뒤에야 대위는 자신이 만들어낸 침묵을 깨기 위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다 피웠으면 이제 일하자."


  둘은 앞으로 벌어질 공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준비를 했다. 사실, 대부분이 이미 준비되어 있어서 특별히 할 것도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병사들이 열심히 판 참호는 웬만한 포격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깊었다. 기관총과 보병포도 확인했다. 둘 다 탄약도 충분했고 적당한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실 보병포는 좀 덜 적당한 곳에 있었지만, 대위는 이걸 제일 적당한 위치에 재배치했다. 매일 밤 조금씩 묻은 지뢰는 적이 섣불리 뚫지 못할 정도로 빽빽한 방벽을 이루었다. 여기에 몇몇 손재주 있는 병사들이 적 불발탄을 이용해 만든 깜짝 선물도 준비되어 있었다. 모든 확인이 끝나자 둘은 살아서 내일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었다. 델윈의 귀는 어느새 다시 쫑긋 세워져 있었다.


  공격이 시작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적의 포탄이 시작을 알렸다. 소총을 꼬나쥔 채 깊게 판 참호 속에 틀어박힌 병사들은 포탄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쾅 소리와 함께 사방에 흙이 튈 때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대부분의 포탄은 참호 밖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포탄들도 있었다. 포탄이 참호 안에 떨어질 때마다 운 나쁜 병사들이 쓰러지거나 날아갔다.


  델윈은 볼트액션 소총을 꼭 쥔 채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헬가는 목에 걸린 리볼버를 꽉 쥔 채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위치 사수"를 목청껏 외쳤다. 이건 부대원들에게만 내리는 지시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내리는 지시였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 뒤에 비명과 신음이 들릴 때마다 그녀는 유난히 큰 고함을 쳤다. 그렇지 않으면 몇 시간씩 떨어지는 포탄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때, 포격이라기에는 조금 다른 소리가 들렸다. 약간 먼 곳에서 들리는 폭음이었다. 장교와 부사관은 서로를 보았다. 둘이 생각하는 것은 똑같았다. 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델윈은 잠망경 앞에 멍하니 서 있던 병사를 밀쳐낸 다음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지뢰밭이 있던 곳에서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사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장교에게 외쳤다.


"놈들이 지뢰밭을 날려버렸습니다!"


  헬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박힌 동공이 점처럼 작아졌다. 처음 방어 계획을 생각했을 때는 지뢰밭이 적들을 오랫동안 묶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들은 그걸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대위의 방어 계획은 시작부터 헝클어졌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포탄이 근처에서 터졌다. 폭발의 충격파가 젊은 여남작을 덮쳤다. 그녀는 참호 벽에 기댄 채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술에 취한 것처럼 시야가 계속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계속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위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나서 처음 본 것은 전우가 참호 벽에 기댄 채 쓰러져있는 모습이었다.


"델윈?"


  대위는 떨리는 손으로 그가 입은 웃옷의 단추를 끌렀다. 이미 붉게 물들어 있는 셔츠까지 풀어 헤친 그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배 한가운데에 큰 쇳조각이 하나 박혀있었다. 피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심복을 최대한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급조 부대에 의무병은 없었다. 결국 젊은 지휘관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병사를 지목해 델윈을 후송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살아남아 왔다. 흙바닥 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만한 자격이 있었다.


"뒤로 빠질 수는 없습니다."


"뭐?"


"겨우 긁힌 겁니다. 다른 병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저 혼자 빠질 수는 없습니다."


  헬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자기가 입은 부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뻣뻣한 윗입술" 운운하는 섬나라 국민성이 튀어나온 걸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설득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델윈에게 그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고집을 꺾을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를 흙먼지 속에서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시도는 해봐야 했다.


"...괜찮을거야. 네가 잠시 빠진다고 해도 별문제 없어. 많이 준비해왔잖아. 그러니 가서 한숨 자고 와. 안정을 취해야지."


  헬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을 했다. 델윈은 조용히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점점 흐려져 가는 그의 녹색 눈동자는 흔들리지도 않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양옆에서 델윈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단지 어제 그랬던 것처럼 귀를 완전히 눕혔을 뿐이었다. 헬가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녀와 계속 눈을 마주치는 그를 보며 그가 자신의 운명을 눈치챈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포격은 그 뒤로도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더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자 대위는 피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전령들을 각 소대에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들은 한 명씩 돌아왔다.


"3소대 사상자 8명입니다."


  이 정도면 1할이다. 다행히 3소대는 운이 좋았다.


"1소대 사상자 18명, 소대장도 부상당했습니다."


  3할. 큰 피해였다. 대위는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를 기도하며 다음 전령을 기다렸다.


"4소대 사상자 4명 발생!"


  여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큰 피해는 아니었다. 지뢰밭이 뚫렸지만, 운이 좋다면 적을 막아낼 수도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전령을 기다렸다.


"2소대에 사상자 28명이 나왔습니다! 지휘부가 몰살되어 소총반의 뫼니에 병장이 대신 지휘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희망은 재앙으로 변했다. 그녀는 2소대를 철수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한 명이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젊은 대위는 계산했다. 58명. 여기에 지금쯤 싸늘하게 식어있을 친구까지 합하면 59명. 이는 전 병력의 2할을 넘는 피해였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금 당장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는 시작의 끝일 뿐이었다. 이들이 피해를 수습하기 전에 적들이 공격해 올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각각 한 정 밖에 없는 기관총과 3.7cm 보병포는 포격을 피할 수 있었다.


"놈들이 옵니다!"


  보초의 외침이 들렸다. 대위는 참호 밖을 내다보았다. 납작한 장갑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흰 연막 구름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뒤를 적병들이 뒤따랐다. 장교는 전령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한 뒤 다시 하위 부대로 보냈다. 그러고는 가죽 권총집에서 리볼버를 뽑아 들었다. 그녀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지금은 침략자의 손에 넘어간 고향. 자신이 지키지 못한 부하들. 이 전투로 대피할 시간을 벌 수 있는 민간인.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지원군. 적 부대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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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말 피어스 주니어는 참호 안을 뛰어다녔다. 이번 전투는 최악이었다. 점령지에서 징발한 석유를 전부 모아도 헬리콥터는커녕 험비 몇 대 굴릴 분량밖에 없었다. 포격 지원도 믿을 수 없었다. 저번 전투까지 신나게 포탄을 빵빵 쏴 갈기던 포병대는 포탄 부족을 들먹이며 하루에 쏠 수 있는 포탄의 양을 제멋대로 제한했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이번 전투에서만 험비 두 대가 적의 대포에 맞아 박살 났다. 다른 한 대는 적이 설치한 IED를 밟고 말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맙소사. 험비가 공중제비를 돌며 조약돌처럼 날아가는 광경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된 지원 없이 참호를 공격한 결과 적지 않은 병력이 구식 볼트액션 소총과 기관총의 희생자가 되었다.


  물론 큰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지 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관총과 대포는 남아있던 험비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동안 용맹한 보병들이 적 참호선에 가까이 다가가 40mm 유탄으로 중화기 두 개를 전부 날려버렸다. 그러자 일이 훨씬 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병들이 산탄총과 카빈총을 앞세운 채 참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벌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이러한 전력 차에도 적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적병들은 착검한 소총과 야전삽과 단검을 든 채 달려들었다. 그럴 수 없는 부상병들은 흙은 뿌리고 돌멩이를 던지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이 소름 끼치는 광경에 자말은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가 생각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자원을 빼앗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자였다. 이는 과거 백인들이 했던 짓 그대로였다. 자말은 시체로 가득 찬 참호를 거닐며 생각했다. 왜 토착민들이 입은 군복과 장비가 다채로운지. 브리핑에서 나온 "동물의 귀와 꼬리가 달렸지만 내부 장기는 인간과 비슷하다"라는 정보가 어떻게 나온 건지.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전부 긁어가면 토착민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유가는 200달러를 돌파했다. 수많은 기업이 원자재를 확보하지 못해 차례차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의 세상은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헐떡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이 세계를 침공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석유 한 줌을 위해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중국인들이나 러시아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딴 짓을 하는 것보다는 이 유사 19세기 군대를 상대하는 게 훨씬 더 나았다. 그는 어머니, 아버지, 아내, 아들,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하며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되뇌었다.


  자기 세뇌를 하며 참호를 뒤지던 자말은 한 토착민 여군과 마주쳤다. 그녀는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 머리 위에는 흙먼지가 쌓여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흰색 늑대 귀는 오른짝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자말은 그녀가 입은 회녹색 군복을 보았다. 가슴에 달린 훈장들과 사제임이 분명한 가죽 부츠가 보였다. 아마 장교거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른손에 구식 리볼버 권총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제일 먼저 봤어야 하는 것이었다. 인제야 자말은 미군 병사 하나가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장교는 새 희생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틱."


  공이가 빈 약실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몇 번 더 손가락을 당겼지만 틱틱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자말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보아하니 리볼버에 남은 탄은 없는 것 같았고, 그녀 역시 일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여장교는 포기한 듯 권총을 바닥에 내던졌다. 한쪽만 남은 늑대 귀가 힘없이 접혔다. 자말은 분대장을 불렀다.


"병장님! 포로를 한 명 잡았습니다! 아마 장교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