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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5 소속의 숙련자인 발터 슈크의 회고록에서 발췌번역


편제번역을 일반적인 번역방식인 한국공군 편제에 맞춰봄.

대괄호를 친 부분은 발터 슈크가 추가한 부분.

중괄호는 번역하면서 설명이 필요해 추가한 것.




이해를 돕기 위한 지도. 원본 크기로 넣었으니 클릭해서 볼 것.


1944년 11월 9일 에를러(Ehrler)는 북부 비행사령부(Fliegerführer Nord)로부터 그의 작전기지인 바낙(Banak)의 남서쪽 수백km 떨어진 바르두포스(Bardufoss)로 날아가 그곳에 주둔하며 Bf109에서 Fw190로 기종전환하는 비행대대(Staffel)를 조직하도록 명령받았다. 비행사령부는 그에게 단 하루 동안 이 일을 끝내라고 지시했으며, 그는 그의 작전기지인 알타(Alta)/바낙으로 11월 11일까지 복귀해야 했다. 프란츠 되어(Franz Dörr) 대위가 에를러와 함께 바르두포스로 날아갔고, 그는 에를러가 떠난 뒤에도 남아 계속 기종전환을 감독할 것이었다. 그리고 에를러는 1944년 12월 17일부터 12월 20일까지 진행된 재판 끝에 그에게 넘겨진 판결의 사본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 문서에는 명백히 에를러의 결백을 입증하는데 필요한 모든 증거가 포함되어있었으나, 티르피츠의 침몰을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법정은 법정에 제공된 이런 사실들을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하인리히 에를러


다음 발췌들은 제국 군사법원의 판결과정에서 가져온 것이며 여기에 고대로 복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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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 에를러는 11월 9일 항공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그의 작전기지인 바낙에서 바르두포스로 이동했다. 그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IV.비행전대(Gruppe) 소속 9.비행대대의 재조직 및 재무장. 이는 9.비행대대에 Fw190을 인계하는 것을 포함한다. 추가적으로 다수의 젊고 아직 전투경험이 없는 IV.비행전대 소속의 조종사들을 9.비행대대 및 III.비행전대의 작전 손실을 메울 보충병력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재훈련 시킬 것.(원문은 재훈련(retrain)이 아니라 유지(retain)였는데, 뒷 내용을 보나 문맥을 보나 r 빼먹은 오타인걸로 보임.) 피고 되어(Dörr) 대위는 1944년 11월 10일 에를러의 부관이자 III.비행전대의 선발대로써 같이 바르두포스에 도착했다. 피고 에를러는 그의 비행사령부로부터 인도를 마치는 즉시 1944년 11월 11일까지 알타의 작전기지로 복귀할 것을 명령받았다. 새로운 포케볼프 기체를 9.비행대대에 인계하는 동안 에를러는 거의 모든 비행대대 멤버들이 이 기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경고했다. 특히 비행대대부장(Staffelführer-부사관이 비행대대를 지휘할 경우 받는 보직)과 편대장(Schwarmführer)들이 이 기체로 전혀 비행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또한 보충병력이 될 젊은 조종사들이 전선경험이 없고 현지 기상과 기타 작전에 필요한 전제조건들은 물론이고 하나의 부대로서 비행해본 적도 없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그는 9.비행대대에게 [새] 기체에 익숙해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특임비행대대(Kommandostaffel)"을 구성할 젊은 파일럿들에게는 장주비행과 편대비행의 연습을 지시했다. 이러한 활동들을 감독하기 위해 그는 바르두포스에 머무는 것을 연장했고 그의 복귀 비행은 1944년 11월 12일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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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장 모든 티르피츠의 비극 중에 가장 심각하고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실수가 벌어진다.




티르피츠 공습에 참가한 영국공군 617비행대대의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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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1월 12일 0800시 조금 전 바르두포스 사단통신본부는 3기의 랭카스터 폭격기가 0739시에 모조엔(Mosjøen) 상공 중고도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직후 일부 랭카스터 폭격기가 북쪽에서 발견됐으며 북동쪽을 향해 비행 중이라는 보고가 추가로 들어왔다. 이 두 보고서가 사단통신본부에 도달하는 것이 지연된 이유는 모조엔 초소가 먼저 보되와 파우스케(Fauske)를 거쳐 주 관측본부에 전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피고 베니어스(Beniers)[베니어스 중위, 바르두포스 통신본부에서 복무하는 장교]는 0800시에 즉각 두 메시지를 티르피츠에게 전송하기 위해 트롬쇠(Tromsø)의 주 관측본부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무시당했으며 또한 즉각 전투기 작전기지에 알렸다. 피고 베니어스는 0818시가 되어서야 일반 통신망으로 두 보고서를 넘겼으며, 그 결과 군단통신본부와 작전기지 "마이제(Meise)" 양쪽이 이를 수령했다. 그 뒤 "보되 상공 대공경보"가, 0858시에 "보되 상공 대공경보 종료"가 이어졌다. 0834시에는 4기의 추가적인 랭카스터 폭격기가 0754시부터 0826시 사이에 중고도에서 OI/MK 4/LL2코스를 따라 비행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든 남부 지역에서의 침범 보고 중에 첫번 째 보고에 있었던 것만을 구역 지정 지도의 대격자 16 N에 추가했다. 이는 즉 0739시에 보고된 3기의 랭카스터들이다. 피고 뵈크(Boehk)[바르두포스의 전투기 작전기지에서 복무하는 상병]이 임무 중이었다. 그는 들어오는 보고서에 따라 작전기지의 상황지도에 표정{좌표를 표시}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 지도는 대격자 16 N(바꿔말하면 모조엔과 보되)을 커버하지 못했다. 이 대격자는 주요 상황지도 옆에 걸려있는 작은 규모의 일반 전체지도에만 나타나 있었으며, 이 지도는 표정하는데 사용되는 지도가 아니었다. 뵈크는 수령한 보고서를 대격자 27 S에 어긋나게 기입했다. 이는 3기의 랭카스터가 함메르페스트 북서쪽에 있으며 북쪽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작전기지의 사무원인 울리히 하사는 표정된 위치를 보고 실재로 기체들이 함메르페스트 지역 동쪽에서 철수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그리고 그는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는 알타와 바낙 비행장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11월 12일 에를러가 실재로 있었던 곳과는 북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곳이다!] 이 보고가 바르두포스의 비행장에 배치되어있는 전투기들과는 관계없을 것이라 추정했다. 따라서 그는 이 보고를 그의 사령관인 에를러 소령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전투기 조종 장교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단통신본부는 이어지는 그 어떤 보고에서도 (참조점이) 대격자 16 N이라는 것을 반복하지 않았으므로, 피고 뵈크는 여전히 자신의 실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되려 그는 이 새로운 보고서들을 계속해서 대격자 27 S에 기입해 그들이 함메르페스트 지역에서 동쪽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보이게했다. 따라서 피고 뵈크와 목격자 울리히는 이 보고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이는 에를러 소령과 되어 대위 뿐 아니라 그 어떤 전투기 조종사들도 남쪽에서 벌어진 침범에 대해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으며 영국 폭격기 대형이 [노르웨이를 가로질러] 스웨덴 지역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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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로 랭카스터 폭격기들이 해안을 지나고 있는 보되가 있는 지역의 노르웨이는 폭이 70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의 레이더 추적을 받지 않는 스웨덴 영공으로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들이 다시 남쪽으로부터 노르웨이 상공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이미 트롬쇠인근에 있었으며 비행시간으로 몇분이면 바르두포스와 티르피츠의 정박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 에를러는 전투기 통제기지의 맵에 표정된 잘못된 좌표에 속아 폭격기들이 북쪽으로 수백km 거리에 있으며 북동쪽의 알타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상태였다. 판결문은 이어진다. 




노르웨이에 주둔해있던 JG5의 Bf109G-6. 



2편 - http://cafe.naver.com/bitethatbait/32109

3편 - http://cafe.naver.com/bitethatbait/3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