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TS챈에 올렸던 글. 그냥 반응이 궁금해서 올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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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왜? 내가 이러는거 싫어?"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은 내가 이해하기에 너무 빠른 속도로 돌아갔고, 내 주변은 근 2주간 핵폭탄이 터지듯 연쇄적으로 변화해왔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임계점 직전의 핵물질이였지만, 나는 그녀가 터질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배 위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 사람 하나의 몸무게가 날 필사적으
로 눌렀다. 양 팔은 그녀 손아귀 안에 잡혔다.


"너 이런거 좋아했잖아.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주길 바랬던거 아냐?"


그녀는 나에게 끊임없이 물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행동이리고 했다. 그녀의 기준은 항상 나였다. 왜? 이해할 수 없어. 대체 왜 나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나는 되짚어봐야 했다. 그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그녀의 인내심을 낭비했고, 정작 중요한 때에 시간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이 상황과 마주하기 싫어서. 나는 도망쳤다. 이것은 결코 내 자의가 아닐 것이다. 촉촉한 입술이 다가오고, 콜라의 잔향이 혀와 함께 섞였다.




1.


여름. 나는 상당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천지가 바쁘게 돌아갔고, 고등학생의 일상은 한층 더 빠르게 가속되고 있었다. 여유로운 여름방학은 마치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한 수식어 같았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학원과 학원의 텀, 나는 인간관계를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허락받았을 뿐이다.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휴식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일상에서, 쉴새없이 돌아가던 챗바퀴를 걷어차는 일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안녕?"


씻고 나가려는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문을 열었고, 문 앞에는 생전 처음보는 여자애가 서있었다. 그 모습은 칙칙한 아파트 복도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이라서, 온 세상의 빛을 머금고 태어난 듯한 은발의 머리카락과, 핏기어린 붉은 색 눈동자가 잠시동안 내 신경을 마비시켰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조치 물을 수 없었다. 입만 뻐끔뻐끔 대는 찰나의 침묵, 그걸 깬 것은 문 앞에 서있던 미소녀였다.


"그... 중학교 때... 김민서... 기억해?"


목소리는 높았다. 어린아이 같은 고음. 하지만 조금 꾸민다면 매혹적인 요염함이 탄생할 법한. 푹신한 구름 같은 진동이 귀를 간질였다. 그녀의 말보다, 그 목소리가 더욱 끌렸다. 내가 되물었다


"네... 네? 다시 한 번 말해주실래요?"

"그... 김민서 기억하냐고... 한림중학교... 혹시 모르시면 가볼게요..."


망연자실한 표정. 빛나는 얼굴에 끝도없이 추락하는 어두움이 지나갔다. 나는 말을 곰곰히 씹었다. 김민서. 한림중. 너무다 익숙한 이름이였다. 과거의 향수가 느껴지는 이름. 중학교를 졸업한지 이제서야 6개월이었지만, 그 이름을 부를 일이 도무지도 없었다.


연락은 되지 않았다. 상당히 가까웠던 사이에 비해 떨어지고 나서 만날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김민서는 나를 아주 잘 따랐다. 내심 생각해보기로는, 그에게 있는 인간관계는 나로부터 뻗어진 것이 전부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라고, 언젠가 그렇게 추정해본 적이 있다.


"혹시 민서한테 무슨 일 있나요? 연락이 안 돼서."


등을 보이려던 그녀의 몸이 멈췄다. 덜덜 떨리는 손이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어깨에 맨 에코백을 양 옆으로 벌려 무언갈 애타게 찾았다. 급한 모습, 그리고 눈에 띄게 밝아지는 표정과 함께 그녀는 에코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매우 눈에 익은. 동전 주머니의 옆구리가 터져 동전이 줄줄 새는 그 지갑.


펼쳐서 보여 준 것은 모종의 양식으로 된 학생증 카드였다.


이름은 김민서. 증명사진은 그녀가 찍혀있는. 미소녀는 드디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내가 김민서야!"




2.



그녀를 집에 들였다. 집에는 부모님이 없다. 이미 일터에 나가셨을 터다. 항상 집을 맨 마지막에 나서는 사람은 나였다. 귀찮아서 치워두지 않은 그릇을 급히 싱크대에 넣어두고, 방금 껐던 에어컨을 다시 켰다. 조금 데펴졌던 공기가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마실걸 내놓을까 하다가 텅 빈 냉장고를 보고 컵에 물을 담았다. 자기를 김민서라고 지칭한 그녀는 불안한지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이 담긴 컵을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나는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김민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순 없었다. 긴 무소식의 끝에 날아온 편지 한 장이 희소식일지 아닐지는 뜯어봐야 아는 것이니까.


"그래서? 중학교 졸업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내가 먼저 물었다. 이야기의 물꼬는 항상 내가 틀었다. 그는 판을 깔아주면 잘 이야기 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이 먼저 말하는 걸 정말 못했다. 우물쭈물 거리는 것, 그녀에게도 찰나에 보였기에 나름의 배려라는 느낌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봄방학 때 잠깐 입원했거든. 뭔진 몰라도 그때 건강이 엄청 나빠졌어서. 처음엔 진짜 죽기 직전인데도 의사들이 원인을 모르고 그랬는데. 한 달 지나서 쓰러졌다가 일어나니까 이렇게 되어있었어."


"무슨 암 같은거야?"


설명에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쓰러졌다가 일어났더니 미소녀가 되어있었다는 편의주의적 전개였다. 그나 나나 덕질에는 상당히 조예가 있었고, 그게 그와의 친구관계를 유지하는데에 큰 몫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씹덕적 전개는 막상 닥쳐왔을 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건 아니래. 그냥... 몸이 여자가 되는거래. 자세한건 의사들도 모르고, 아무래도 내가 첫 번째 환자라나봐. 그래서 처리도 복잡하고, 과거 행적도 지워내느라 학교 가는 것도 좀 늦었지."

"연락이 왜 없었는지 알겠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을 홀짝였다. 그녀가 말이 없어지려는 기색이 보여서, 내가 궁금해진 걸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왜 온거야?"

"그... 그냥... 너한테 이런저런거 알려주려고... 혹시 연락 안 돼서 나 찾았나 싶어서. 너 얼마 전에도 내 옛날 계정에다 페메 보냈잖아."


저번달 쯤. 연락이 아예 없는게 걱정되어 보낸 메세지는 아직 그녀의 손아귀 안에 남아있었다. 성별이 바뀌고 몸이 바뀌면서 새로운 계정을 판 것 같지만, 아무래도 예전 계정은 계속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답장이라도 하질 그랬냐. 니 번호로 전화했을 때 없는 번호라고 해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아... 그건 미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무조건 바꿔야 된다고 해서... 내꺼 번호 저장할래?"


나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상당히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익숙함. 거의 반년 넘게 해오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편안하고 순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