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보다가 전열보병시기 수레를 쓰면 어쩌구 해서 삘받아서 써봄 조선의 전투용 수레에 대한내용으로 본 내용은 전부다 이 책에서 나옴 참고로 이 책은 목록이 아주 볼만하지만 절대 믿을 만한 책은 아님 연구에 반하거나 작가의 생각이 들어가서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책임ㅇㅇ 그래도 나름 목차별로 정리가 잘되어있어서 이책에 나온 전투용 수레나 화거에 대해서 써볼려고함.


 고대국가 형성기에는 말이 끄는 전차가 핵심이었지만 고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대규모로 전차가 운용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함.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전거는 인력이 끄는 수레로 주로 북방 기병의 돌격을 차단하는 용도였음. 이후 원나라 지배를 받으며 소실되었다가 조선초기 북방의 기마민족과 싸우면서 화약무기를 탑재하는 대량살상 무기로 다시 등장하게 됨. 토목의 변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문종은 몽골족의 대량의 기병에 맞서기위해 종선의 화거를 개량하여 대량의 화전과 총통을 발사할 수 있는 전거를 만듬 그게 바로 문종 화거임. 

이 문종화거는 개량을 거치면서 조선중기까지 사용되는데 행주산성에서 대활약하는등 값어치를 톡톡히 하게됨 이때 또하나의 화거가 나오니 변이중이 만든 변이중 화거가 나옴. 임란시기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전거의 운용방법이 상당히 개선되었으며 명나라 군사 수백이 전거를 몰고 조선으로 왔기에 우리병사 400에서 500명에게 배우라는 지시를 내리기도함. 광해군 이후 전거나 화거 제작및 훈련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숙종때 대량의 화거를 제작하거나 영조때에는 훈련대장 이기하가 신형화거를 만들어 바치기도 하였으며 순조 당시 간행된 '만기요람' 에는 훈련도감에는 전거가 모두 51량이 있었는데 오륜이 5량, 양륜아 20량, 독륜이 26량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산악지형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전거전을 행할 정도로 대규모 전거를 제작한적은 없는것으로 보이며 또한 조선후기가 되면 화기의 성능이 개선되고 그 보유량도 크게 늘면서 기병을 이용한 충격전은 큰 위협이 되지않았음. 대신 조선 말기에는 대형화포를 운영할 목적으로 서양의 근대식 포거를 도입 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결과 고종 당시에 훈련대장 신헌은 중국에서 간행된 해국도지를 바탕으로 불랑기동거, 마반포거, 쌍포양륜거 등을 제작하였으며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근대식 양륜포거와 소포 중포 대포를 개발함.





 거기보전

 병자호란당시의 실패는 조선에 충격을 주어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려고함 기존의 삼수병체계로는 어렵다고 생각한 조선은 기병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던 조선전기의 오위진법 일부를 복원하는 한편, 척계광의 연병실기에 수록된 전ㄱ전을 도입하게 됨. 전거와 기병,보병을 함께 운영하는 거기보전은 각 부대의 화거와 대형 화기 보유량을 증가시켰고 조총수의 비중을 늘리는 한편,쾌창 등 보조 화기를 도입함 또한 장창이나 투창 등 기병을 상대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무기들은 무기 편제에서 제외하고, 대신에 구창과 협도곤등을 추가함.

 '융월필비'의 화거 방진도를 보면


하나의 방진은 100량의 화거와 20량의 목화수거로 편성되는데, 화거의 한 대 당 50개의 조총을 장착하여 대량의 화력을 적에게 퍼붓고, 진문에 배치 된 목화수거는 15개의 조총을 장착하여 진의 위엄을 보이는 한편 화력통제기의 역할을 함. 보병과 기병은 모두 방진의 안쪽에 들어가 화거와 함께 사격을 하다가 적이 물러가면 기병이 출격하여 편곤과 언월도 등으로 적을 타격하며 보병은 화거를 밀면서 전진하는 구조임. 조선은 거기보전의 구현을 위해 '융원필비'화거를 포함한 다양한 화거를 개발했지만 산악지형의 특성상 많은어려움이 있었기에 실제적인 조선후기병사들은 대부분 혹은 절대다수가 조총수였고, 활과 편곤으로 무장한 기병과 불랑기등 대형 화포로 무장한 포수가 조총수를 지원하게 됨.






 1. 문종 화거


(다연장미사일간지)

  너 나 우리 판타지세계관에서 아주 익슉한 조선의 최고병기일뜻

 조선시대에 제작된 최초의 화거는 태종9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과 군기도감 이도가 만든것임. 이 화거는 쇠로 만든 깃이 달린 철령전 수십개를 구리 총통에 넣어서 작은 수레위에 싣고 발사하는 제도로서 적을 능히 제어할만하다고는 할수있지만 대량 제작된 기록이 없으며 문종때에 비로소 본격적인 화거 제작에 돌입하게 됨.

 문종1년에 만들어진 화거는 수레 위에 사전총통 50개를 장착하여 한번에 세전200개를 발사하거나. 중신기전 100개를 발사할수있도록 만들어짐. 사전총통과 중신기전을 장착한 발사기는 각각 착탈식으로 제작되어 필요에 따라 수레 위에 설치할 수 있었음. 수레는 화기의 발사 각도를 자유롭게 조정하도록 높게 만들어졌으며 화살을 쏘는 발사기 구멍은 철판으로 덮어서 화재를 막았다. 수레의 좌우에는 방패를 붙이기도 했으나 이동하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제거됨.문종 1년의 화거 배치 상황을 보면, 서울에 50량을 두고 기타지방에 407량을 두는 등, 총 457량에 이르는 화거가 실전에 배치됨. 문종 화거의 형태는 '국조오례의'의 그림을 통해 자세히 확인이 가능함.

 임진왜란 이후에 간행된 '화포식언해'에는 중신기화거와 화거 두 종류가 소개되어 있는데 중신기화거는 중신기전 100개를 발사하고,화거는 사전총통 대신 주자총통을 50개 장착하는 등, 문종화거와 큰 차이가 없음. 








2.변이중 화거



(미스테리)


'연려신기술'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에 호남 소모사 변이중이 화거 300량을 만들었고 이듬해에 순찰사 권율에게 40량을 나누어주었다고함. 권율은 이 화거를 동원해 대승을 거두었다고함. 

 변이중 화거는 40개의 구멍에 각각 승자총통을 넣고 심지를 연결하여 철환을 발사하였는데, 승자총통이 끊이지 않고 서로 잇따라 발사되면서 산악이 진동하니 왜군이 도망갔다고 전해짐.

 변이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성룡도 화거를 제작하였지만 유성룡은 설치된 총통의 숫자가 15문에 불과했고 화거의 실전사용여부도 불분명 하다고함. 따라서 철환을 본격적으로 발사하는 본격적인 화거는 변이중 화거가 가장 최초일수도 있음.(류성룡의 화차는 이동과 사용이 편리했다는 설 도있음)

 변이중이 지은 망안집에는 자신이 고안한 화거의 그림과 설명이 있기에 1번째짤과 2번째짤처럼 복원을 하지만 최근에는 3번째짤처럼 생겼다는 다른 견해도 내놓기도함.





3.융원필비 화거




(개간지 기관총)

'융월필비'에 그려진 화거는 숙종1년에 윤휴의 제안에 의해 훈련도감에서 만든 화거와 동일한것일수도 있음. 윤휴는 북벌을 위해서는 병거와 화거를 대량으로 갖추어얗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직접 화거와 병거를 고안하여 왕에게 바쳤다. 그가 만든 화거는 가운데에 두 방퀴를 설치하고 그 위에 다섯 층의 널빤지를 올리며 각각의 널빤지에 10개의 구멍을 뚫고 조총을 설치하였음. 화살대에 불을 붙여서 조총 위에 얹어놓으면 10개의 조총이 차례로 발사되었다고함. 

 '융월필비'에 그려진 화거는 윤휴의 화거와 거의 동일한 구조로서, 바퀴는 2개이고 총 50개의 조총을 탑재함. 또한 화거의 좌우에는 짧은 나무 방패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는 소가죽을 드리워서 병사를 보호함. 수레의 지붕에는 소 생가죽을 씌우고 기름을 먹여서 적의 공격을 대비하는 한편, 비가 와도 조총을 발사할수 있도록함. 화거의 좌우에는 호랑이가 그려진 삼지창을 세우는데,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적 기병의 돌입을 막는 역할을 함.






4. 목화수거




(호랑이형님)


'융월필비'의 목화수거는 진의 위엄을 보이고 적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호랑이의 나무로 조각하여 화거 위에 설치한 것이다. 호랑이 조각의 입에서는 신화,독화,법화,비화,열화가 발사됨. 또할 수레 아래에는 조총을 5개씩 3열로 배열하여 총 15개의 조총을 탑재한다. 호랑이의 좌우에는 나무로 만든 날개를 달아서 적의 시선을 막는 한편, 날개에 있는 구멍으로 적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함. 이 목화수거의 형태상으로는 '무비지'의 화룡권지비차를 거의 그대로 모방했으나, 수레의 아래쪽에 창검 대신 조총을 장착한점이 다름.

 '융원필비'의 화거방진도'를 보면, 목화수거는 진문에만 배치하여 진문에 세우는 익호기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적이멀리 접근해오면 1층에 배열된 조총을쏘고, 적이 가까워지면 2층의 조총을 쏘고 적이 100보안에 들어오면 3층의 조총을 쏘아서 다른 화거들에 대한 사격 통제기 역할을 했다. 현재 육군박물관에는 5개의 총열을 목판위에 한줄로 배열한 오연자총이 있는데 목화수거에서 사용했던 목화수총판일지도 모른다.





5. 신경준 화거



(조선의 판타지 전차)

 영조당시의 실학자이자 제주목사를 지낸 신경준은 '여암전서'의 거제책에서 현대의 전차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는 화거를 제시함. 신경준 화거는 바퀴가 3개달린 수레 위에 철판으로 보강된 나무판자를 둘러서 적의 원거리 공격에 대비하고, 적을 수 있는 칼날을 수레의 둘레 달아서 적의 근거리 공격을 막아냄. 수레의 맨 위쪽에는 사방으로 회전이 가능한 복토라는 이름의 포탑을 설치하고, 그 위 에 지자총통,불랑기 등을 장착했다. 또한 화거는 화약과 포환을 실어 운반하는 기능도 겸했다.'여암전서'에 화거의 제작방법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어 적어도 시험제작은 했지만 대량 양산을 했는지는 불분명 하다.







6. 편상녹각거


(씨발 구글에 이미지가 안나오는건 처음이다 왜없지?)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를 지낸 양완이 순조 때에 지은 '악기도설'에는 바퀴 2개가 달린 편상녹각거가 소개되어 있음. 이 편상녹각거는 수레의 앞쪽에 칼날이 달린 2개의 녹각목을 설치하여 적의 접근을 막으며 수레 위에는 나무지붕을 얹고 소가죽을 덮어서 적의 시석을 막을수 있도록 함. 지붕의 길이는 6척, 높이는 3척이며 지붕의 좌우는 각각 2척 5촌임. 편상 녹각거 1대에는 2명의 병사가 앞에서 끌고 2명의 병사가 뒤에서 밀며 차장 한 명이 조정을 담당했음. 양완은 편상녹각거로 50보 간격으로 4갸의 층을 이루면서 부챗살 모양으로 진을 펼치면 수비하기에 편하고 공격하기 쉽다고봄.

 이 편상녹각거가 대규모로 제작되어 배치된 적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음.






7.검거


송규빈은 1778년에 간행된 '풍천유향'이라는 책에서 검거를 이용한 상승진을 운용할 것을 주장함. 이 검거의 구조는 '무비지'에 소개된 충노장륜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것으로 보인다고함(보인다고 하거나 생각한다고하는건 다 작가피셜). 송규빈 검거에는 앞뒤로 각각 커다란 바퀴가 하나씩 달려있고. 수레의 중간부분 좌우에는 작은 보조바퀴 2개가 달려있으며 수레의 앞쪽에는 긴 창을 여러개 꽂고 수레 위에는 세 겹으로 만든 방패를 설치하며, 방패에 그려진 호랑이의 입에서는 대포를 발사함.

 송규빈이 지은 또 다른 병서인 '방수잡설'에는 '풍천유향' 검거와는 약간 다른 검거가 소개되어 있음. '방수잡설'의 검거는 큰 바퀴 하나가 중앙에 있고 보조바퀴 4개가 큰 바퀴의 둘레에 있음.이 보조바퀴는 검거가 멈추었을 때 펼쳐서 검거를 고정함.

 송규빈이 이 검거를 이용한 상승진을 구상했는데. 이 상승진은 검거 128량을 네모 모양의 방진에 3열로 배치하고 진의 안쪽에는 8대의 예비 검거와 포수 300명,기병600명을 배치한다. 또한 3열로 배치된 검거에는 4대마다 100명의 병사가 배치되므로, 상승진의 전체 병사수는 3200명이 됨.







8.비거



(조선의 제공권담당 현실은 글라이더 비행기아니다)

신경준이 지은'여암전서'를 보면 임란때 영남의 한 성이 왜군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울 때, 성주와 친한 어떤 사람이 비거를 제작해 성중으로 날아들어가 그의 친구를 태우고 30리를 날아간 뒤 지상에 착륙해 왜적의 칼날을 피하게 했다고 함. 이 비거는 김제의 정평구가 만들었다고도 전해지며,정평구의 비문과 '왜사기'에는 이 비거가 조선군의 통신과 보급에도 이용되었다고도 함. 당시에 사용된 비거는 글라이더 형태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형만 허락되면 한두 사람 정도는 상당히 멀리까지 태우고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고니나 따오기 형태를 만들어 복중을 쳐서 바람을 일으키면 공중으로 떠오르는"기계나 "바람을 타고 올라가고 먼지를 일으키며 천지 사방을 돌아다니 것" 등 여러가지 형태의 비행기구에 관한 소문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책이 간행될 당시에는 이미 서양에서 개발된 비행기와 열기구에 관한 소문이 조선에도 전해지던 시기였으므로, 이들 대부분은 서양의 비행기나 기구에 관한 풍문이 와전 된 것일수도있다.


 참고로 산해경에도 비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탕왕시절 기굉국사람들이 비거를 타고와서 탕왕한테 인사했지만 탕왕은 위험을 느끼고 비거를 부수고 기굉국사람들을 가두었다고 전해지며 훗날 기굉국사람들은 다시 만들어 탈출했다함 ㅇㅅㅇ






9.구거

(이미지가 없습니다)

 구거는 효종3년에 박산남이 고안하고 전남 병사 구인기가 만든 화거임. 구거는 제작에만 3개월이 걸렸고 병사 70명이 있어야 한 대를 운영할 수 있는 초대형 화거였음. 구거의 구조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지만 그 이름으로 보건대, 거북선 모양으로 방호판을 덮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일종의 장갑전차로 추정됨. 또한 그 안 에는 조총뿐만 아니라, 불랑기 등의 대형 화포도 장착되었을 것으로 보임. 하지만 구거는 언덕을 오르기 힘들고 진창에 빠지면 하루종일 10리도 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량 양산은 이루어지지않음.







10 동거



동거는 원래 아이들이 타고노는 장난감 수레로서, 사각형의 나무틀에 작은 바퀴 4개를 단 것임. 조선시대에는 동거를 좀더 크데 만들어 돌과 같이 무거운 짐을 나르는데도 사용함. 총통의 경우에는 천자총통 등 대형 총통을 운반하거나 혹은 거치하여 사격을 할 때는 네 바퀴가 달린 작은 수레를 이용했는데, 이 역시 동거라고 했다.'융원필비'에 소개된 동거는 한쪽이 높고 다른 한쪽이 낮으며, 높은 쪽에 침목을 대고 그 위에 총통의 포구를 거치한다. 그리고 삼을 엮은 박줄로 동거의 좌우에 있는 둥근 철고리에 총통을 단단히 잡아매어 흔들리지 않도록 함. 천자총통을 거치하는 동거의 바닥 부분은 가로 길이가 3척5촌(73.5cm), 세로 길이는 1척 2분(21.42cm)이다. 그 위 사방으로 판자를 두르는데 앞부분은 높이가 1척3촌이고, 뒷부분은 1척이다. 바퀴는 4개가 달려 있으며 총통의 발사각도는 침목을 앞으로밀거나 끌어 당겨서 조절함'만기여림'에는 북한산성에 금위영 소속의 동거가 32좌 있다고 함. 이 동거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 만, 그 구조가 워낙 간단하기 때문에 총통이 개발되면서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잇음.








11 불랑기 동거와 마반 포거와 쌍포양륜거


불랑기 동거는 훈국신조기계도설에 나오며 고종4년에 훈련대장 신헌이 제작하였음 (사진이 또없더라 ㅡㅡ) 이 불랑기 동거의 아래쪽에는 4개의 통나무 바퀴가 달린 직사각형의 나무판이 있고, 그 위는 구름모양의 활차가 실려있다. 이 활차의 좌우에 있는 구멍에 포이를 걸어서 적재한다. 활차는 목판 위에서 좌우로 회전이 가능하고 불랑기는 포이를 이용해서 상하 조정이 가능하므로, 종전의 동거에 비해 포의 조준이 매우 신속했음. 또한 활차의 좌우에는 시렁을 달고 여기에 각각 2개씩의 자포 실어서 함께 운반함, 활차의 내부 구조는 훈국신조기계도에 그려져잇지않지만, 그 이듬해에 제자된 마반포거및 쌍포양륜거와 함께 중국에서 간행된 '해국도지'를 참고하여 만듬.


 쌍포양륜거는 '훈국신조군기도설에 나오며 마반포거와 함께 훈련대장 싱헌이 제작함. 상포 양륜거는 해국 도지와 사망포거를 참조하여 만든 것이지만, 본래의 사망포거와는 여러가지면에서 차이가있음. 

 양륜거의 앞쪽에는 큰 통나무 바퀴 2개가 있고, 뒤쪽의 수레채 사이에는 작은 바퀴가 하나 있음. 바퀴 위에는 구름 모양의 헌목2개를 좌우로 대고, 그 사이를 나무 시렁과 철봉으로 연결함. 쌍포양륜에는 구경으 작은 대신 포신이 상당히 긴 쌍포를 적재함. 현재 전쟁기념관에는 이 쌍포 한점이 소장되어있는데, 전체길이 134cm에 구경은 41mm 무게는 65kg임


 마반포거 역시 '훈국신조군기도설'에 나오며 활차가 좌우 회전할수 있도록 만들진 신형 포거로서 불랑기 동거와 쵸큼 유사한 형태임. 다만 활차 아래의 나무판에 원반형의 철판을 덮어서 좌우 회전을 보다 용이하게 했고, 수래의 끌채길이를 더 길게 만든 점이 다르다.

 '훈국신조군기도설'에는 마반포거의 상세 도면이 있으므로 내부구조를 자세히 살펴볼수있는데 포거의 아래에 있는 직사각형의 수레 위에는 원반 모양의 나무판을 얹고, 그 표면을 철판으로 덮었다. 원반의 중앙에는 마고주라고 부르는 목봉이 있고, 이 목봉에 움푹한 홈이있는 마고두를 끼우면 활차가 360도로 회전할수있게 된다,

활차는 구름모양의 현목 2개를 좌우에 대고, 그 사이를 나무 시렁과 철봉으로 연결했다. 총통은 활차의 좌우에 있는 구멍에 포이를 얹어서 장착한다. 헌목의 꼬리 부분은 길게 뒤로 뻗어서 수레의 끌채 영할을 하며, 여기에 다시 각각 하나씩의 지지대를 연결하여 땅에 고정한다.








12. 근대식 포거



앞서 말한 신헌이 제작한 포거들은 종전의 동거에 비해 여러모로 근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서양의 근대적 포가에대한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만든 실패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포를 발사할때 문제가 되는것은 반동으로 종래의 화포는 포 뒤쪽에 토담을 쌓아 충격을 흡수했으나 서양의 근대식 포가는 포가의 뒤쪽에 긴 꼬리를 달아 이 꼬리부분을 지면에 밀착시킴으로써 반동의 상당부분을 지면으로 흡수시켰다. 

 조선이 서양의 근대식 포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만든 최초의 포거는 1869년 운현궁에서 제작된 대포,중포,소포의 포거이다. 이들 신형 포거는 길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꼬리가 지면을 단단히 받치고 있으므로, 포의 반동을 충분히 흡수할 수있는 구조였다. 또한 수레바퀴도 종전에 비해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동이 용이할뿐 아니라, 반동을 흡수하는 능력도 개선됨. 이 포거의 제작과정에는 청나라에서 간행된 '연포도설집요'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임.







 이상 조선군이 운영하거나 개발한 수레들임 출저는  죄다 조선의 무기와 갑옷이며 뭐뭐로 보임 뭐뭐로 생각됨은 다 작가피셜임 ㅇㅇ 나름책이 욕을 먹는것도 같은데 그래도 꺼라위키급으로 정리는 잘되었다고 나는봄 근데 쓰고보니 이거 다 꺼라에도 있는내용이더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