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e was Hyuga's Sister," watercolor on paper, Standish Backus, 1946. Wreck of the Japanese battleship-carrier Ise, Kure, Japan (88-186-AL).


H-Gram 053, Attachment 1

Samuel J. Cox, Director NHHC

September 2020


45년 7월 18일,요코스카 공습



45년 7월,잔존 일본제국 해군은 연료부족과 중대한 유지보수로 인해 항구에 발이 묶여있었다. 일본군함은 여러 기지의 대공방어에 기여하고 있었으며 특히 구레에 있는 주 기지의 경우는 해안에 위치한 대공화기까지 있어 항공공격을 만만찮게 만들었다. 일부는 일본 해군이 완전히 아작난 상태이기 때문에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그들이 완전히 파괴되기를 원했고 윌리엄 홀시 제독이 그것을 이행했다.


7월 10일 도쿄지역에 가해진 TF-38의 공습 이후 행해진 사진 정찰 분석결과 일본 전함 나가토가 요코스카의 만 깊은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가토는 진주만 공습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기함이였으나 45년 봄에 나가토는 사가미만과 도쿄만의 상륙 저지를 위해 해상 부유포대로 강등당했다. (1970년에 제작된 진주만 공습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오프닝 신에는 매우 정밀하게 재현된 나가토의 풀스케일 모형이 나온다. 초중전함 야마토는 41년 12월 16일에 취역했으며 야마모토는 42년 2월에 그의 기함을 야마토로 옮겼다.) 그녀의 대공화기 대부분은 철거되어 근처 고지에 설치되었으며 부포 또한 철거되어 요코스카만의 상륙저지를 위해 분산배치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어뢰로 공격하기에는 너무 얕은 해안에 정박중이였으며 위장망과 화분에 심은 나무들 및 다른 식물들로 철저하게 위장한 상태였다.


7월 18일 1530시경 항모 에식스,요크타운,랜돌프,샹그릴라에서 발진한 SB2C 헬다이버 급강하 폭격기 100기가량이 벨로우드에서 이함한 헬켓을 따라 나가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중 선체 피해를 극대화시키기위해 급강하폭격기들은 배 근처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습은 0400시에 개시될 예정이였으나 악천후로 인해 지연되었다. 592기의 항공기가 세차례에 걸쳐 요코스카항과 도쿄 인근에 있는 다른 표적을 500파운드 폭탄 4발로 무장한 62기의 어벤져가 이끄는 가운데 공습했으며 요코스카 인근에 배치된 154문의 중대공포와 225문의 기관총에 반격당했다. 


1540시에 요크타운과 랜돌프 함재기가 이끄는 가운데 60기의 헬다이버가 나가토를 향해 강하를 시작했다. 1552시에 나가토가 500파운드 폭탄에 직격당했고 함장인 오츠카 미키 소장과 그와 함께 있던 부장,레이더 장교,12명의 수병이 함께 사망했다. 소위 한명이 심각하게 화상을 입은 중령 (주포술장)이 지휘권을 인계 받을때까지 잠시 지휘했으며 잠시 뒤, 또다른 폭탄이 함미 대피갑판을 강타하여 3번 포탑 바벳에서 폭발해 25명이 사망하고 25미리 대공포좌 4개가 파괴되었다. 후에 5인치 로켓이 함 최후미를 직격했으나(일부 자료에서는 11.75인치 '타이니팀' 로켓이라고도 함) 이것은 불발되었고 우현으로 빠져나갔다. 개조 소해함 하라시마 마루는 나가토 옆에 있었고 두동강나면서 폭발했다. 270톤가량의 폭탄이 나가토에 떨어졌음에도 나가토는 떠있었으며 46년 7월 29일에야 24일에 있었던 비키니 환초에서의 두번째 핵 폭발의 여파로 전복되어 침몰했다(7월 1일의 첫번째 실험에서는 일반적인 피해만을 입었다).


요코스카 공습은 1610시에 끝났다. 오래된 장갑순양함 카수가(1905년의 쓰시마해전 참전함),미완성된 소형 구축함 야에자쿠라, 잠수함 I-372가 침몰했으며 전드레드노트급 후지(역시 쓰시마해전 참전함이며 훈련용으로 사용됨), 구식 구축함 야카제(표적 통제함으로 사용되고 있었음)가 손상되었다. 미국은 항공기 14대와 18명의 항공승무원을 잃었으며 대다수는 요코스카의 강력한 대공망으로 인해 발생되었다. 공습 결과는 실망스러웠으나 야마모토가 진주만 공습을 지시한 장소인 나가토의 함교가 직격당해 파괴되었다는건 알려지지 않았다. 

Japanese battleship Nagato, moored off the Yokosuka Naval Base, Japan, 9 September 1945 (80-G-374671).


45년 7월 24일-28일,구레와 내해 공습


고속항모전단(TF-38)과 3함대의 다른 부대들은 7월 초부터 흩어진채로 방대한 해상보급을 받으며 일본 본토를 타격중이였으며 몇몇 태풍을 회피했다. 7월 21일부터 22일까지 3함대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해상보급작전을 수행했으며 100척 이상의 배들이 6,369톤의 탄약, 37만 9,157 베럴의 연료, 1,635톤의 기타물자와 식량, 99기의 보충 항공기, 412명의 교대 인원이 유조선,탼약 운반선,보급선, 호위항모를 통해 보급되었으며 이들은 30.8 임무그룹을 지휘하는 이차대전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인 도널드 B.베리 소장의 지휘하에 있었다(그는 44년 10월부터 종전시까지 3함대와 5함대의 물자 보급을 지휘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공훈장을 두번 수여받았다.).


3함대 사령관 윌리엄 F. 홀시 주니어 제독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중무장했으며 일본 내해(미국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안전했던 혼슈,시코쿠,규수 사이의 수역)에 있는 기지인 구레에 남아있는 일본 해군의 잔재를 모조리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TF-38의 사령관인 존 '슬루' 메케인 중장은 이 임무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으며 그의 참모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구레는 3월 19일에 5함대 사령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실행한 일본 본토에 대한 세번의 공습으로 타격을 받았었다. 마크 '피트' 미쳐스 중장이 지휘하는 TF-58의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 240기가 구레에 있는 일본 함정들을 공격했으며 다른 부대는 내해 인근의 다른 목표들을 공격했다. 이날 구레에 있던 대부분의 일본군 함정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가라앉은 배는 없었고 오히려 F6F 헬켓 11대와 TBM 어벤져 뇌격기 2기가 강력한 대공포화에 손실됬었다.더 나쁜것은 일본의 소규모 반격이 항모 프랭클린을 침몰 직전으로 내몰고 호넷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와스프는 45년 7월 25일에야 일선으로 복귀했고 프랭클린은 복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시는 그의 명령을 실행했다.


그동안 일본군은 구레에 남은 함선들을 보호하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여기에는 신규 항모 2척(함재기 없음), 3척의 소형항모, 3척의 전함, 중순 두척과 기타 보조함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모두 연료부족으로 인해 움직일수 없었다. 배들은 항구 주변에 넓게 흩어져 있었으며 해안선의 언덕 바로 옆의 얕은 물에 정박해 있었고 언덕에는 대공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다가 항모들은 가짜집,화분에 심어진 나무,비행갑판에 모래 '도로'까지 만들었으며 광적으로 페인트칠을 하고 위장망을 덮어 잘 위장된 상태였다. 이것들은 표적을 식별하고 공격하는데 어려움을 줬으며 설령 함이 침몰하더라도 수심 25피트 아래로 내려가지 않게 만들었다.


구레항의 얕은 수심과 더불어 항 주변의 광범위한 대공망 덕에 해군 작전기획자들은 어뢰를 사용하는것이 너무 어렵고 뇌격기에 위협적이기에 뇌격을 공격 옵션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TBM 어벤져는 이 작전을 위해 신무기를 도입했다: 바로 레이더 신관 공중폭발탄이였는데 이 폭탄은 기존폭탄보다 엄폐한 대공화기를 공격하는데 매우 효과적임이 입증된 상태였다. 포는 공격에서 살아남을수 있었으나 운용병은 아니였다. 또 이번공격에서 어벤져가 사용한 또다른 무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2천파운드 통상 폭탄이였는데 이는 소수의 항모에만 실려있었다. 


TF-38이 공격지점에 위치하기 위해 남쪽으로 항해하는동안 T.H. 헤더만 대령이 지휘하는 제61구축함 편대가 분리되어 22일부터 23일 밤까지 통상파괴전을 수행하기위해 사가미만을 통해 이동하였다. 자정을 막 지난 시간, 61구축함 편대는 4척을 레이더로 접촉하였고 포와 어뢰를 발사하면서 교전을 개시해 800톤급 화물선 하쿠테츠 5호를 침몰시키고 6,919톤급 벌크 화물선 엔번마루를 손상시켰다. 소해정 W-1,구잠함 CH-42와 해안 포대는 열정적이였으나 방어하기에는 무리였고 지역을 떠날때까지 어떤 미군함도 피격되지 않았으며 이것이 전쟁에서의 마지막 수상함간 교전이였다(소련에 의해 발생한것을 제외한다면).


7월 24일 아침에 TF-38은 1200기 이상의 함재기를 탑재한 고속항모 15척(에섹스급 9척,인디펜던스급 경항모 6척)이 있었으며 다음날 와스프가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자 수가 더 늘어났다. 거기에 더해 TF-37의 영국 항모 4척이 전력을 보강시켜주었다. TF-38은 또한 8척의 고속전함과 15척의 순양함 61척의 구축함들이 보호하고 있었다. 영국군 또한 전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6척의 순양함과 18척의 구축함이 있었다. 구레군항 공습은 진주만에 대한 마지막 복수로 니미츠가 생각해두었기에 영국 함대는 작전에서 배제되었으며 대신 오사카 인근의 다른 목표가 할당되었다. 간단히 말해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최후라는 전과를 다른 이(미 육군항공대나 왕립 해군)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주목할점이 있다면 미국 항모들은 진주만 당시에는 한척도 진수된 상태가 아니였으나 에섹스급들은 40년에서 41년 사이에 건조 허가가 나고 주문이 들어간 상태였다.


TF-38은 세개의 테스크 그룹으로 나뉘어졌는데:


렉싱턴,행콕,베닝턴,벨로우드,산 주신토가 포함된 TG 38.1(토마스 L. 스프리그 소장이 지휘)


에섹스,타이콘데로가,랜돌프,와스프,몬터레이,바탄이 포함된 TG 38.3(제럴드 F. 보간 소장이 지휘)


요크타운,샹그릴라,본 햄 리차드,인디펜던스,카우펜스가 포함된 TG 38.4(아서 W.레드포드 소장이 지휘)


로 나뉘어졌다.


샹그릴라와 본 햄 리차드는 새로 도착했으며 거의 모든 다른 항모는 어느 시점에서 가미카제로 인해 타격을 입어 수리받은 후 복귀한 상태였다.


7월 24일,TF-38의 공습


45년 7월 24일 0440시에 TF-38은 1338개의 소티중 첫 소티를 구레 군항과 내해 주변의 수많은 표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시키기 시작했다. 일본은 주 상륙을 기다리면서 대부분의 항공기를 지상에 대기시켜둔 상태였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중이였다. 첫 파이터 스윕은 헬캣과 콜세어로 이루어졌으며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지만 공중에서 일본 전투기 18기를 격추하고 지상에 있던 전투기 40기를 파괴했으며 80기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날 하룻동안 TF-38의 함재기들은 599톤의 폭탄을 떨어트리고 1615발의 로켓을 발사했다. 구레에 있는 배들이 최중요 목표였으나 미약한 항공 대응 세력에 의해 미군 전투기들은 내해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으며 눈에 들어오는 어떤 가치 있어보이는것은 다 쏘고 보았는데 여기에는 기관차 16대와 구레 있는 기름탱크 3개,다노에 있는 기름 탱크 하나도 포함되었으며 병영,창고,발전소,공장,격납고 20채 가량을 손상시켰다. 구레에서만도 군함 22척,총 25만 8천톤가량이 침몰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추가로 선박 53척,총 만 7천톤가량의 선박이 내해 주변의 다양한 항구와 만에서 침몰했다.


신규 항모 아마기(44년 8월 취역)는 숙련된 항공 승무원 부족으로 단 한번도 작전을 해본적이 없었으며 비쩍마른 승조원들만이 탑승해 있었으나 7월 24일의 주 목표였다. 그녀는 히류의 설계를 개조해(17,500톤,함재기 52기 탑재 가능) 일본이 전쟁중 건조하려한 항모 6척중 두번째 함이였고 초도함 운류는 완공되었으나 항공기와 탄약 수송임무를 하던중 44년 12월 19일 잠수함 레드피쉬에 의해 침몰하였고 아마기와 카츠라기도 완공되었으나 항공대를 탑재하지는 못했다. 카사기,아소, 좀더 대형화된 설계인 이코마는 자원 부족으로 건조 중지되었다.


아마기는 3월 19일의 공습으로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7월 24일 그녀는 아침에 함재기 30기의 공습을 받았고 오후에 20기의 공습을 받아 수많은 지근탄이 발생하자 1000시에 2천파운드 폭탄이 직격했고 이것은 거대한 폭발과 광범위한 파괴를 이끌어냈다. 이 2천파운드 폭탄은 베닝턴 혹은 행콕에서 발함한 어벤져에서 투하된것이였다. 침수가 이어지자 함장은 보수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으나 이 명령은 조급한 것이였고(그 후로 함장은 지휘에서 벗어났다) 성공적인 역침수로 함의 기울기를 되돌려 공격이 끝날무렵 아마기는 여전히 떠 있었다. 


신규 항모 카츠라기는 3월 19일의 공습에서 약간의 손상을 입었으며 7월 24일의 공습에서도 위장이 잘 작동해 공습이 아마기에 집중되면서 약간의 피해만을 입었다. 카츠라기는 10대에서 12대의 항공기에만 공격받아 500파운드 폭탄 한발이 포 스폰슨에 직격해 포 조작요원 13명이 모두 사망했지만 구조적 손상은 거의 입지 않았다.


경항모 류조(함재기 30기 탑재 가능)는 필리핀해 해전에서 살아남았으나 3월 19일의 공습에서 폭탄 세발과 로켓 두발을 맞아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이는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위장은 매우 훌륭했으며 대공포 요원들이 함이 공격받지 않게 하기 위해 포를 쏘지 않아 7월 24일에는 공격받지 않았다. 


오래된 항모 호쇼(일본의 첫 항모이자 세계 최초로 항모로 설계되어 진수된 함)는 24일의 공습에서 폭탄 한발을 맞아 약간의 피해를 입었으나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호위항모 카이요는 3월 19일 공습에서 지근탄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녀는 24일에 미군 전투기들에 의해 발견되어 로켓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는 경미했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항구로 이동하던중 미군이 설치한 자기기뢰에 접촉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후방이 침수되기 시작했고 헬켓 전투기들이 로켓을 쏴 두발을 명중시켰을때는 구축함 유키카제에 의해 예인되는중이였고 침몰을 막기위해 좌초되었다. 


미드웨이 전투에서 4척의 항모를 잃은후 1943년에 전함 휴우가와 이세는 함미의 14인치 포탑 두기를 철거한후 그자리에 항공갑판과 격납고를 설치해 '혼종' 항공전함으로 개장되었다(그들은 전방의 포탑과 중앙부의 포탑 두기는 유지시켰다.). 그들은 22~24기의 항공기를 탑재할수 있었는데 절반은 주디 급강하 폭격기였고(착함은 기존 항모나 육상기지에 해야함) 절반은 회수가능한 수상전투기였다. 탑재한 항공기가 없었음에도 두척의 항공전함은 44년 10월 레이테만 해전당시 일본의 미끼 항모부대의 일부였으며 항모 4척을 모두 잃었으나 이세와 휴우가는 살아남았다. 그둘은 3월 19일의 공습에서도 살아남았으나(이세가 폭탄 두발 명중,휴우가가 폭탄 세발 명중) 그들의 운은 7월에는 끝난 상태였다.


0615시부터 이세는 30기의 항공기에 공격당해 수많은 지근탄과 4번의 직격탄을 맞았다. 정오 무렵 다른 항공기 30기가 공격해 함교에 직격탄을 맞았고 함장 무타구치 대령이 사망했다. 승조원 50명 이상이 사망했고 그녀는 함수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함수는 바닥에 착저했지만 공습이 끝났을때 엄밀히 말하자면 물위에 떠있는 상태였다.


50기 이상의 항공기가 하룻동안 200발 이상의 폭탄을 투하해 10발이 직격했고 지근탄 30발이 용접부를 찢어 침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5차 공격에서 폭탄 세발이 함교 인근에 연쇄적으로 명중해 함장 키요시 쿠사카와 소장이 전사했다(사기를 올리기 위해 일본 전함 함장들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휴우가는 200명 이상의 사망자와 6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내고 함미부터 침수되어갔으며 7월 26일 얕은 바다에서 안식을 취했다.


전함 하루나는 1차대전중 건조된 순양전함 4척중 마지막 생존자였으며 그 속도로 인해 일본 항모전단의 호위역을 자주 맡았다. 그녀의 자매함인 키리시마와 히에이는 42년 11월 과달카날에서 수상함간 교전을 펼치던중 침몰했으며 콩고는 대만 해협에서 잠수함 씨라이온에 의해 44년 11월 21일에 침몰했다. 하루나는 미드웨이,산타크루즈,필리핀 해,레이테만에서 살아남았으며 과달카날에서 해병대의 포탄을 맞기도 했다. 그녀는 3월 19일 공습에서 폭탄 한발을 맞아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녀의 운은 7월 24일에도 이어져 겨우 10기의 항공기에게 공격당해 함미에 맞은 폭탄으로 수선상에 상처를 입었을 뿐이였다(그러나 이 상처는 결국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질것이였다).


중순양함 토네는 진주만 공습에 참여한 배였으며(그녀의 수상기는 미 태평양함대가 마우이섬의 라하이나 정박지에 없다는것을 공격 한시간전에 확정시켰다) 동부 솔로몬해 해전,산타크루즈,필리핀 해,레이테만,그리고 수많은 소규모 작전에서 살아남았다. 그녀는 폭탄 한발을 3월 19일 공습에서 맞아 3번 포탑이 작동하지 않았다. 7월 24일,그녀는 하룻동안 100기가량의 항공기에 공격당해 4발이 직격했으며 지근탄 7발을 기록했다. 침수가 심각했기에 그녀는 의도적으로 좌초되었다.


토네처럼 아오바 또한 산호해,사보섬,에스페란토 곷을 포함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한 베테랑이였다. 3월 19일 공습에서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24일 공습에서는 함재기 30기가 공격해 한발이 직격했으며 지근탄이 수선하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역침수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해 얕은 해저에 우현으로 기운채로 착저하였다.


Camouflage scheme comprising false buildings, trees, and foliage used on Japanese carrier Katsuragi while she was moored at Kure, 1945 (NH 82539).


Camouflage scheme used on Katsuragi while she was moored alongside Mitsuko Island, Kure Bay, 24-28 July 1945 (NH 82540).


비교적 새 경순양함인 오요도(43년 2월 취역)는 44년 9월에 연합함대 사령부가 육지로 이동하기 전까지 연합함대 총기함이였다. 그후 그녀는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끼 항모부대를 지휘하는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기함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3월 19일의 공습에서는 폭탄 세발을 직격당해 승조원 52명이 사망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어 침몰을 막기위해 좌초되었었다. 그후 수리되었고 7월 24일에는 함재기 50기가량에게 공격당해 폭탄 5발을 맞았고 그중하나는 소화까지 이틀이 걸린 화재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그날 하루가 끝날무렵 그녀는 여전히 떠있었으며 반격을 가할수 있었다.


낡은 경순양함 키타카미는 44년 말 8발의 가이텐을 탑재가능하도록 개수되었으나 그것들을 탑재하고 작전하지는 않았다. 7월 24일에는 기총소사와 지근탄을 맞았으며 32명의 승조원이 사망했다.


1909년 건조된 드레드노트급 전함 셋츠(1940년까지 무선조종 표적함으로 사용되었다)는 에타지마의 일본 해군 사관학교인근에서 30기의 헬켓 전투기들에 공습당했다. 폭탄 세발이 명중했으며 수많은 지근탄이 발생해 의도적으로 좌초시켰으며 26일에 얕은 해저에 착저하였다.


아마도 2차대전중 침몰한 가장 오래된 군함인 장갑순양함 이와테(1901년 취역)는 지근탄 세발을 맞고 용접부가 찢어져 침수되면서 침몰했다.


구레 공습에서 대형 유조선 한척과 구축함 두척도 포함하여 기타 보조함들도 침몰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거기에 더해 고베에서 건조중이였던 항모 아소(60퍼센트가량 건조된 상태였음)도 미군 함재기에 의해 손상되었다.


영국 테스크포스는 오사카지역에서 24일에 252소티를 출격시켰으며 구축함 몇척과 호위구축함 몇척을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공습은 잘 위장된채로 시도 만에 들어가 있던 호위항모 시마네 마루를 발견하게 했다. 시마네 마루는 유조선을 개조한 새 호위항모였으나 한번도 작전을 해보지는 못했고 3월 19일의 구레 공습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이번에는 영국 항모 빅토리어스에서 발진한 함재기의 공습을 받아 두동강난채로 침몰했다. 비록 항모같지는 않았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이 영국해군 역사상 유일한 항모대 항모 작전이였다(42년 3월 9일 일본 항모가 항모 허미즈를 침몰시켰을때 첫번째 사례가 될수 있었으나 허미즈는 항공기를 탑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시마네 마루도 똑같이 무방비한 상태였다.).


24일 밤에 TF-38은 야간 교란폭격을 실시했다(본 햄 리차드가 '야간작전 항모'로서 작전 위해 훈련받고 관련 장비를 장착한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캐리 존스 소장이 지휘하고 경순양함 윌키스-바렌,파사데나,아스토리아와 6척의 구축함이 포함된 TG 38.3도 시모노세키 곶에 있는 구시모토 수상기기지를 포격해 중파시켰다. 


7월 25일,TF-38의 공습


25일 아침 TF-38은 나고야-오사카 지역까지 공습 범위를 확대하여 내해 지역에 대한 추가적인 공습을 시작했다. 항모들은 악천후로 인해 1300시에 작전을 중단하기 전까지 655소티를 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F-38의 함재기들은 185톤의 폭탄을 떨어트렸으며 1162발의 로켓을 발사해 상선 8척,총 8천톤가량의 격침을 기록했으며 구축함 한척과 35척의 기타함들을 손상시켰다. 일본군 항공기 18대가 격추되었으며 61대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격파했으며 68대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지상표적에는 기관차,가솔린 트럭,격납고 20채,터널,기타 철도 시설들이 포함되 있었다.


7월 28일,TF-38의 공습


7월 28일,TF-38과 37은 내해 주변의 목표물에 또다른 대규모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주 목표는 여전히 구레 해군기지를 공격해 일본군함들을 끝장내는것이였으나 일부 경우는 좀더 안쪽을 폭격하기도 했다. 0443시에 공습을 시작해 TF-38은 1602회의 소티수를 기록하고 폭탄 605톤과 로켓 2050발을 소모했다. 전혀 조율되지 않은것으로 보였던것이 있었는데 오키나와 욘탄 비행장에서 날아온 미 7공군의 B-24 4발 폭격기가 날아와 하루종일 구레에 있는 일본 해군 함선들에 공격을 진행했으나 이미 침몰한 배에 직격한 한발을 제외하고는 전과가 없었다. B-24들은 상당한 대공포화의 어그로를 끌어 2기가 격추되었고 8기가 손상되었다. 


이미 심각하게 손상된 항모 아마기는 아침에 함재기 50기의 공습을 받았고 오후에 30기가 공격해 폭탄 한발이 직격하고 수많은 지근탄을 맞았다(B-24가 1200시경에 폭격했으나 하나도 맞지 않았다). 7월 29일 1000시에 아마기는 70도로 기운채 얕은 해저에 착저했다. 함체 대부분은 물위에 있었으나 아마기는 2차대전중 침몰한 마지막 일본군 항모로 기록되었다. 


항모 카츠라기는 24일에 경미한 피해만 입었으나 이번에는 10기에서 15기의 항공기에 공격당해 두발의 직격탄을 맞았는데 그중 한발이 치명적인 2천파운드 폭탄이였고 그것이 아일랜드 바로 뒷부분에 직격해 부장과 함교 내 인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상부 구조물 대부분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흘수선하 부분은 경미한 피해만을 입어 배가 떠있을 수 있었고 종전시까지 떠있었다.


작전 불가능한 경항모 류조는 또다시 훌륭한 위장덕에 공격을 피해갔고 호쇼또한 피격당하지 않았다.


이미 좌초된 상태인 호위항모 카이요는 에섹스에서 발진한 VBF-84 소속 콜세어 16기가 발사한 로켓 54발에 공격당했다. 18발이 명중했다고 주장했으나 아마도 세발만이 명중했을것이다. 그리고 카이요는 이미 얕은 해저에 착저한채로 있었다. 엄밀히 말해 침몰한 상태인 카이요는 8월 9일 미 육군항공대의 B-25 쌍발폭격기 12대에 공습당했다. 선두 B-25의 윙팁이 카이요의 위장망에 닿았고 항공기는 물에 추락했다.


항공전함 이세를 항공기 60기가 공격해 6발이 명중했고 9발이 지근에 떨어져 피해를 입혔다. 1100시에 행콕에서 이함한 헬다이버들이 이세에 폭탄 4발을 더 맞췄고 뒤이어 역시 행콕에서 이함한 콜세어들이 더 큰 천파운드 폭탄을 들고와서 5발을 명중시켰다. 이 상남자같은 전함은 마침내 주갑판에 물이 들어오면서 착저했다. 1400시에 24기의 B-24들이 침몰한 배를 공격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이미 착저한 상태임에도 전함 휴우가는 수많은 탄을 맞았고 마침내 함은 포기되었다.또 24기의 B-24가 공격했으나 역시 명중탄은 없었다.


전함 하루나의 운은 마침내 바닥났다. 그녀는 하루종일 계속해서 공격받았고 13발의 직격탄과 10발의 피해를 준 지근탄을 기록했다. 함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24일 공습에서 발생한 상처가 수면 밑으로 내려가 수십톤의 침수를 발생시켜 마침내 얕은 해저로 착저하였고 승조원 65명이 사망하였다. B-24가 그녀를 공격했으나 역시 명중탄은 없었다.


이미 좌초한 중순양함 토네는 또다시 수많은 함재기들의 공습을 받았고 두발의 직격탄과  7발의 지근탄을 추가로 기록했다. 역침수에도 불구하고 함은 좌현으로 21도가량 기울었으며 얕은 해저에 착저했다.(일본 해군은 육군보다 일반적으로 국제법을 더 존중한 편이였으나 토네는 예외였다. 44년 3월 18일 영국 화물선 SS 베허에서 잡힌 선원 72명이 참수당했다. 처형을 지시한 사콘조 소장은 전후 영국에 의해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이미 착저한 중순양함 아오바는 아침에 10대의 함재기에 다시 공격당했고 오후에도 10기의 함재기에 다시 공격당해 총 4발의 직격탄을 맞았고 화재가 발생했다. 1600시에 육항대의 B-24가 마침내 뭔가를 맞췄는데 폭탄 4발이 침몰한 아오바에 맞았고 함미를 날려버렸다.

Surrendered destroyers, submarines, and other ships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moored at Kure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circa October 1945. Ships include destroyers, Hanatsuki, Natsutsuki, Harutsuki, Yoitsuki, and Yukaze; and submarines I-47, I-36, I-402, I-203, I-58, and I-53 (NH 94884).


경순 오요도는 40기의 급강하 폭격기와 전투기에 공격당했고 4발의 직격탄과 수많은 지근탄을 얻어맞아 선체파열이 일어났다. 함이 기울기 시작했고 함교 주변에 몇발의 명중탄을 추가로 기록한후 함장은 함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역침수를 지시했으나 실패했다. 총원 퇴함 명령이 내려왔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1200시에 함은 측면으로 전복되었고 승조원 223명이 공격으로 사망하거나 배가 뒤집혔을때 안에 갇혀 사망했으며 추가로 승조원 180명이 부상당했다. 잠시 뒤에 미군 전투기들이 함의 노출된 하부를향해 로켓을 발사했다. 


남은 목표보다 폭탄을 탑재한 항공기들이 더 많았고 일본 에타지마 해군 사관학교에 정박중이던 쓰시마 전투에 참가한 장갑순양함 이즈모를 미군 함재기들이 공격했고 세발의 지근탄이 함을 전복시켰다.


신규 구축함 나시(45년 3월 취역)도 구레 인근에서 TF-38의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아 폭탄 한발이 직격하고 지근탄 한발을 기록해 침몰했다. 영국 항공기들도 4호 해방함과 5호 해방함을 격침시켰다.


TF-38의 전투기들은 28일 공습에서 구레 인근의 일본군 비행장 30개를 동시에 공격해 지상에서 115기를 격파하고 21기를 공중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공격받아 파괴된 다른 목표는 기관차 14량,유조차 4대, 원형차량사업소 두채, 기름 탱크 3개,창고 3동, 격납고 한채,변전소 하나가 포함되며 피해를 입은 목표는 기관차 8량, 격납고 13채,공장 8개,구리 제련소 두개, 등대 둘,기차역 하나, 다수의 원형차량사업소, 수많은 기름 탱크, 라디오 방송국 둘, 다양한 병영과 가와사키 항공기 공창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것이 없다면 일본 전함이 극단적으로 튼튼히 건조되었다는점은 사실이지만 구레 공습은 정지해있는 배라도 폭탄만으로 공격해 격침시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관해 연구해볼만한 사례였다. 조준을 방해하기 위한 엄청난 대공포 탄막은 양측모두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4일간의 작전에서 TF-38은 3,620회의 공격 소티를 띄웠고(추가로 영국군 TF-37에서 672소티를 띄웠다) 미군 항공기들은 1389톤의 폭탄을 떨궜으며 4827발의 로켓을 발사했으며 52기의 일본군 항공기를 격추하고 216기를 지상격파했다고 주장했다. 해군수훈십자장 170개가 수훈되었으며 그중 5개는 사후 수훈이였다. 손실은 높았는데 미군 항공기 101기가 격추되었고 88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다.


구레에 대한 공격이 끝날무렵 일본제국 해군은 사실상 괴멸했다. 일본 항모와 호위항모 25척중 5척만 떠있었고 모두 손상된 상태였다. 전함 12척중 나가토 혼자만이 떠있었고 중순양함 12척중 2척만이 심각한 손상을 입은채로 싱가포르에 있었다. 경순양함 22척중 두척만이 생존했으며 177척의 구축함중 5척만이 남아있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전쟁중 총 334척의 전투함(총 611척중)을 잃었고 30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일본 상선 2천척 이상이 침몰했으며 수만명의 선원이 사망했다.

Japanese aircraft carrier Amagi, shown capsized at Kure, October 1945 (80-G-351749).


8월 9일-10일 반격작전 "쓰루기"


45년 8월 미해군 정보부는 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B-29 폭격기 기지에 대한 장거리 공중 자살 특수부대 공격을 실시하려 한다는 일본 해군의 정보를 입수했다. 작전명 "쓰루기"(검)은 여러번 반복됐으나 최종형태에서는 해군 P1Y 프랜시스 쌍발폭격기 30기와 G4M 베티 60기가 300명의 제101 구레 해군 특설 상륙팀과 300명의 육군 제1레이더 연대를 마리아나 제도로 보낸다는 계획이였고 실행날짜는 45년 8월 19일로 정해졌다. G4M 20기가 해군 특수부대를 괌으로 보낼 계획이였고 추가로 G4M 20기가 육군 특수부대를 사이판으로 보낼 계획이였다. 또다른 G4M 20기에는 육군과 해군 특수부대를 같이 태워 티니안으로 향할 계획이였다.개조된 G4M들이 비행장에 동체착륙하기전에 P1Y들은 비행장을 기총소사할 계획이였고 동체착륙한 G4M에서 특수부대원들이 내려 가능한 많은 피해를 입힐 계획인 자살임무였다. 온전한 B-29를 노획해 일본으로 돌아올 계획또한 있었다(효과는 없었을것이다).


사전 경고와 함께 니미츠 제독은 홀시 제독에게 3함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혼슈 북부의 미사와 인근과 훗카이도에 있는 수송에 사용될 비행장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8월 9일,소련이 일본이 점거한 만주와 사할린섬 남부를 침공하면서 TF-38의 대규모 공세는 절정에 달했다. TF-38은 1212회의 공격 소티를 보냈고 함재기들은 지상에서 251기를 격파하고 141기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쓰루기 작전을 위해 배정된 P1Y중 최소 20기와 G4M 29기가 파괴되었다. 8월 10일에 TF-38의 함재기들은 다시 공격했고 1364번의 소티를 띄워 이전에 지정되지 않은 비행장 두개와 다른 목표들을 타격했다. 영국 TF-37 또한 참가했다. 파괴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실제로 작전을 취소하지는 않았으나 천황이 8월 15일자로 항복했을때 의문이 제기되었다. 미해군은 공격중 34기의 함재기와 항공승무원 19명을 잃었고 영국군은 항공기 13대와 9명의 항공승무원을 잃었다. HMS 포미더블에서 F4U 콜세어를 조종한 왕립 캐나다 해군 조종사는 일본군 호위구축함 아마쿠사를 격침시킨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장이 사후 추서되었다.(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그가 만에 추락했다고 하지만 수훈사유에 의하면 그는 500파운드 폭탄을 탑재한채로 아마쿠사에 충돌했다.)

Battleships and heavy cruisers steam in column off Kamaishi, at the time they bombarded the iron works there, as seen from USS South Dakota (BB-57). USS Indiana (BB-58) is the nearest ship, followed by USS Massachusetts (BB-59). Cruisers Chicago (CA-136) and Quincy (CA-71) bring up the rear (80-G-490143).


Bombardment of the iron works at Kamaishi, 14 July 1945: Sixteen-inch shells explode at the target. Photographed from USS South Dakota (BB-57) (80-G-K-6034).


일본에 대한 해안포격


45년 6월 말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면서 일본은 대규모 가미카제 공격은 중단하였으나 때때로 소규모로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실제로 그들은 본토결전을 위해 항공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모든종류의 항공작전을 중단했다(B-29 요격 포함). 대부분의 항공기들은 비행장에서 벗어나 분산된채로 조심스럽게 위장되었다. 일본 항공활동의 부재가 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에게 용기를 줘 전함을 이용한 일본 해안의 산업목표에 대한 해안포격을 조심스럽게 시작했고 갈수록 대담해졌다. 포격의 근거중 하나로는 일본군 항공기를 끌어내 격추시키는 것이였으나 일본군은 끝까지 미끼를 물지 않았다.


혼슈 북부 가마이시,7월 14일


7월 14일 대낮인 1210시에 고속전함 세척,중순양함 두척,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진 테스크 유닛 34.8.1(에이블 포격그룹)이 혼슈 북부 동쪽 해안에 있는 일본 제철소의 가마이시 공장에 포격을 개시했다. 존 샤프로스 소장이 지휘하는 함대는 전함 사우스다코타,인디아나,메사추세츠와 중순양함 퀸시와 시카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샤프로스는 윌스 '칭' 리 중장(해군내 레이더 관제사격 최고 전문가)을 임시로 대리하고 있었다. 리는 일본 가미카제를 물리칠수 있는 개선된 전술 개발을 위해 킹제독에 의해 불려가 메인에 있는 카스코 만에서 제69실험 테스크포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리는 극동으로 돌아오기 전 8월 25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가마이시에 대한 포격은 사전에 수개월간 정밀한 계획을 세운후 이루어졌으며 테스크 그룹 38.1의 함재기 20기가 특별 공중 전투초계를 통해 호위하고 있었다. 1055시에 기함 사우스다코타가 "진주만을 잊지마라"라는 신호를 올렸다. 해무가 시야를 14,000~20,000야드로 제한시킨 상태였기에 함들은 26,000야드 거리에서 레이더 관제 사격을 실시했는데 600피트짜리 만에 깔려 있을지 모르는 기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당황했고 비효율적인 대공사격이 공중전투초계기에 향했다. 전함포격이 이어지는 동안 세척의 대형 상선과 소형 호위함이 만에서 빠져나와 미군 구축함의 폭풍같은 포격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기적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콜세어 전투기 한대가 호위구축함에 기총소사하던중 격추당했다. 


미군함들은 1419시에 포격을 중단했는데 16인치 포탄 802발, 8인치 728발, 5인치 825발을 소모한 상태였다. 포탄 대부분은 표적 지점내의 개방식 난로,코크스 오븐,용광로,압연기,다른 제철소 시설들에 직격했다. 항구에 있던 유조선,소형함 한척,바지 두척도 침몰했다. 피해와 파괴는 보기보다 심했고 생산을 2개월(즉 나머지 전쟁기간 내내) 지연시켰다. 폭발로 인한 진동은 요리용 스토브를 뒤집고 도시에서 수많은 화재를 일으켰으며 일본의 프로파간다는 이를 이용했다. 그러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영향은 컸다. 전후 분석에 의하면 전함포격은 고폭탄 혹은 소이탄 폭격보다 일본 대중에게 더 많은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폭격기는 멀리서 왔으나 전함은 바로 코앞에 있었고 어떤 선전도 이를 덮지 못했다.


7월 15일,훗카이도 남부 무로란


7월 14일에서 15일 밤에 오스카 C. 베저 소장이 지휘하는 테스크 유닛 34.8.2(베이커 포격그룹)는 항모 테스크포스에서 분리되어 훗카이도 남부 무로란으로 향했다. 그 대담한 접근 방식은 3면에 땅을 두었으며 출입하는데 3시간이 걸리는곳으로 가는것이였다. 7월 15일 0936시에 고속전함 아이오와,미주리,위스콘신과 경순양함 애틀랜타와 다이톤,그리고 구축함 8척이 일본에서 두번째로 큰 코크스와 선철 제조사인 니혼 철강회사와 와니시 제철소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베저의 기함 아이오와는 니혼 철강회사의 용광로를 제2제사로 직격했으며 미주리의 포격은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고(미주리가 홀시의 기함이였기에 그는 만족했다), 위스콘신의 제9제사는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1025시에 미 함대는 860발의 16인치 탄중 170발을 명중시키고 사격을 중지했다. 무로란의 공장들이 입은 피해는 가마이시 보다 심각했다. 진동으로 인한 2차 화재로 무로란시의 가옥 2,500여채가 파괴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심리적 영향은 신체적 영향보다 더 컸을것이다,홀시는 나중에 포격이 일본인에게 "우리가 그의 앞마당에서 놀면서 어떤 시체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일본 전쟁성 대신은 3함대의 공격에 어떤 대응도 할수 없던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혼슈 동해안 히타치,7월 17-18일


첫 두번의 포격과 일본의 반격이 없다시피한것을 본 홀시 제독은 더욱 대담해져 또다른 해안포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혼슈 동해안이며,밤이긴 했으나 도쿄에서 고작 80마일 밖이였다. 또다시 베저 소장이 지휘했으며 이번에 베이커 포격 그룹 에는 전함 아이오와,미주리(홀시가 탑승한체로),위스콘신,노스캐롤라이나,엘러베마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경순 애틀랜타와 다이톤,구축함 8척이 포함된 상태였다. 베저의 함대는 영국 전함 킹 조지 5세(TF-38의 지휘관인 영국 해군 소장 버나드 롤링스경이 탑승중이였다)와 합류했으며 두척의 영국 구축함도 합류했다. 목표는 히타치에 있는 주요 전자제품 생산공장이였다. 7월 17일 2314시에 함대는 포격을 개시했으며 1,206발의 16인치탄에 더해 267발의 14인치탄이 영국 전함에서 발사되었고 몇몇 공장과 시설물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데다가 히타치 광산의 구리 생산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시점부터 3함대 함정들은 날씨및 급유요건이 허용하는한 거의 매일 일본 본토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노지마 곷,7월 18-19일


7월 18~19일 밤,칼 홀든 소장이 지휘하는 테스크 그룹 35.4가 사가미 만을 휩쓸었을때 덜 성공적인 포격이 이루어졌다. 어떤 선박도 찾지 못한 후, 경순양함 토피카,덜루스,오클라호마 시티,애틀랜타와 구축함 5척이 노지마 곷에 있는 레이더 사이트를 포격했다. 순양함들은 240발의 6인치포탄을 발사했으나 모두 짧았고 논과 마을만 날려버렸다.


하마마츠,7월 29일-30일


7월 29일-30일 밤동안 샤프로스 소장의 에이블 포격 그룹은 하마마츠(혼슈 동해안에 있으며 나고야 인근에 있다)로 빠르게 이동했는데 이 함대는 전함 사우스다코타,메사추세트,인디아나, HMS 킹 조지 5세와 중순양함 퀸시,보스턴,상 파울,시카고와 10척의 미영 구축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거기에 더해서 본 햄 리차드의 야간항공대도 야간 포격 관측을 해주기로 되있었다. 이 함대는 2315시부터 0027시까지 두번의 포격을 가해 제국 정부 철도 기관차공장에 피해를 입히고 다른 중요한 철도 시설들을 날려버렸다. 이것이 영국 전함이 실전에서 주포사격을 가한 마지막 일이였다. 또한 하마마츠는 이전에 30번 이상의 공습을 받았으나 해안 포격으로 3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갔다.


시미즈,7월 30일-31일


7월 30일-31일 밤,존 로저스에 탑승한 J.W.루드위그 대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9척(제9구축함 전대 사령관)이 쓰루가 만(사가미만 남쪽의 두번째 주요 만) 깊숙히 진입했지만 어떤 배도 찾을수 없었다. 그후 함대는 시미즈 인근의 공업시설에 매우 효과적인 7분간의 포격을 퍼부었고(5인치탄 1,100발 소모됨) 원유 공장과 알류미늄 공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공장 118동이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음). 알류미늄 공장은 이미 원자재 부족으로 가동을 정지한 상태였다.


가마이시,8월 9일


45년 8월 9일, 샤프로스 소장이 지휘하는 에이블 포격 그룹은 가마이시를 두번째로 공격했다. 전함 사우스다코타,인디아나,매사추세츠,중순 시카고,퀸시,보스턴,상 파울과 구축함 9척은 영국 경순양함 HMS 뉴펀들랜드와 뉴질랜드 경순양함 HMNZS 감비아 그리고 세척의 영국 구축함과 합류했다. 영국 전함 킹 조지 5세는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 참가하지 않았다. 나중에 홀시가 말하길 "일본의 방어에 대한 우리의 멸시가 너무도 철저해 이번 포격을 계획할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것은 고향에 있는 라디오 청중들의 편의였다."고 했으나 일본군은 12,000기의 가미카제 항공기를 보호하기 위해 출격을 금지시켜둔 상태였다. 


8월 9일은 이미 중요한 날이였다. 0001시부로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고 엄청난 속도로 대규모의 공격을 일본이 점령중인 만주와 일본 본토로 간주되던 사할린 섬 남부에 가했다. 1102시에 B-29 '복스카'는 일본 나가사키 시에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이후 두번째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247시에 연합군 함대는 포격을 개시에 가마이시에 있는 모든것을 마음대로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전투 공중 초계중이던 항공기(20기의 전투기)와 포격관측기에 무지막지한 대공포화를 날렸다. 감비아가 대공포화를 맞는 동안 전함과 다른 순양함들은 제철소와 다른 시설들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16인치 탄 850발과 8인치탄 1,440발, 5인치탄 2,500발을 소모한 후 남아 있는것은 거의 없었다. 도시에서 수많은 화재가 발생했고 일부 포탄이 공습 대피소를 직격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수많은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과 42명의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다.


가마이시에 대한 포격은 종종 2차대전의 마지막 해안 포격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과의 전쟁은 15일의 종전후에도 9월 3일까지 이어졌고 쿠릴 열도 점령기간동안 소련 선박들이 해안포격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중순양함 상 파울은 전쟁중 마지막으로 일제사를 가한 주력함이였다. 또한, 상 파울은 한국전쟁 당시 해리 샌더스 장군이 서명한 8인치 포탄으로, 1953년 7월 27일자로 휴전 협정이 발효되기 몇 초 전에 북한군 포대를 타격하는데 성공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기아작전:일본에 대한 공중 기뢰부설 작전,1945년 3월-8월


일찍이 1942년 초에 미 해군에서 육군항공대의 장거리 전략폭격기를 이용해 일본에 대한 공중 기뢰부설 작전을 시행할 계획이 만들어졌다. 그해 해군은 육군항공대에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 있는 해군 기뢰전학교에 올 인원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항공대는 그후 올랜도의 고급 전술학교에 기뢰부설과목을 추가했다. 1944년 미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은 일본의 범위 내에 있는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을 확보한 후 B-29를 발진시켜 일본 수역에 기뢰를 부설하기 위한 세부계획을 세웠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안을 강력히 지지했다. 육군항공대의 반응은 가장 나은것이 미온적인 것이였는데 육군항공대장 헨리 '헵' 아놀드 장군은 이것을 일본 산업시설 파괴라는 전략폭격 임무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겼다. 


1944년 12월 22일자 지시에 의해 아놀드 장군은 마침내 기뢰 부설작전에 동의했지만 니미츠 제독이 요청한것보다 훨씬 적은 자원과 여러 조건들을 내걸었다. 이 작전은 제 21폭격기사령부(마리아나 제도의 B-29들)가 충분한 전력을 갖출때까진(45년 4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실행되지 않을것이며 날씨가 해안의 산업 목표들을 공격하는데 좋지 않을 때에만 실시하며 한달에 150~200소티만을 실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45년 초 일본의 산업 목표에 전통적인 주간 고고도 '정밀' 폭격 전술을 사용한뒤 B-29들의 성적이 부진하자 새로 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으로 취임한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B-29로 더 큰 성공을 거두기위한 전술을 찾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야간 소이탄 폭격으로 전환하는것이였고 더 효과적이였으나 수십만명의 일본 민간인들도 사망했다. 또 하나는 르메이가 열광적으로 지지한 공중기뢰부설이였다. 사실 그는 아놀드 장군이 원래 승인한것보다 더 많은 작전을 해야한다고 성공적으로 주장했다. 


르메이 장군의 강화된 "기아 작전"에 따라 그는 공중 기뢰부설에 제 21폭격기사령부 전체를 동원하여(160기의 B-29) 원자재와 식량이 일본 본토로 들어가는것을 막으려했다(일본은 자급자족하는 국가가 아님). 이 작전은 또한 일본 본토로 수비대가 수송되거나 증원되는것을 막고 강력한 항공엄호와 기뢰로 인해 미군 잠수함에서 안전했던 일본 내해의 물자 운송을 방해할것이였다. 


제313폭격비행단은 45년 2월에 티니안에 도착했고 미 해군은 B-29 승무원들을 교육시키고 B-29에 기뢰를 장착 가능하도록 개조하기 위해 12명의 장교와 171명의 수병이 있는 제4기뢰창을 만들었다. 각각의 B-29는 12발의 천파운드 마크 26 혹은 36 기뢰나 7발의 마크 25 2천파운드 기뢰를 탑재할수 있게 개조되었다. 이 모든 기뢰는 낙하산감속 착저식 유도기뢰로 음향센서나 압력신관,자기신관을 장착한 상태였다. 모두 가변 감도 설정과 무작위로 신관을 해제하는것이 가능했으며 배의 수를 셀수도 있었다(1~9까지). 기뢰는 어떤 종류의 비활성화 장치도 없었고 압력신관식 기뢰는 당시에는 '해체 불가능한'것으로 여겨졌다(일본은 소해를 위해 자폭보트를 이용하는 방식을 통해 접근했다.).


기아 작전의 1단계는 혼슈와 규수 사이의 시모노세키 해협을 목적으로 했다. 3월 27일 밤,313폭격비행단 사령관 존 H. 데이비스 준장은 102기의 B-29를 이끌고 시모노세키 해협에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항공기 3기를 잃고 8기가 손상되었다. 4월 12일까지 B-29들은 7번의 임무에서 252소티라는 비행 횟수를 기록했고 해협에 2030개의 기뢰를 뿌렸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였다. 한달만에 해협에서 상선 113척이 기뢰에 접촉해 침몰했으며 이는 남아있는 일본 상선단의 9퍼센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성과였다.


작전 2단계는 5월 3일에 시작되었다. B-29들은 도쿄,나고야,오사카,고베로 접근하는 수역에 기뢰를 부설했고 시모노세키 해협에도 다시 부설했다. 이 단계에서 대부분의 기뢰는 '소해 불가능한' 2천파운드 마크 25 착저식 유도 기뢰였다. 3단계는 아시아 본토에서 일본으로의 해운을 막기 위해 일본 서해안과 한국까지 부설 작전을 확장했다. 5월에 기뢰는 미군 잠수함보다 더 많은 배를 가라앉혔다(이는 물론 공해를 항해할 일본 선박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아 작전의 4단계는 6월 7일에 시작되어 이전단계의 기뢰밭을 더욱 넓히고 보충했다. 5단계는 '완전 봉쇄'로 칭해졌으며 7월 9일에 시작되 전쟁이 끝날때까지 진행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313 폭격비행단은 46회의 임무동안 1529회의 출격을 했고 26개의 서로 다른 기뢰밭에 12,135개의 기뢰를 부설했으며 15기의 B-29를 상실하고 항공승무원 103명이 사망했다.


약 670척,총 125만톤 이상의 일본 선박이 기뢰에 접촉해 침몰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고(침몰은 500척 미만이다) 전쟁 마지막 6개월간 기뢰는 다른 모든 원인을 합친것보다 더 많은 일본 선박을 침몰시켰다. 일본은 별로 성공적이지 않은 소해작전에 350척의 배(대부분은 징집된 트롤어선)와 2만명의 병력을 바쳐야했다. 기뢰전은 식량난을 증대시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수많은 일본인이 기아상태로 내몰렸을것이다. 제 21폭격사령부 총 출격수중 5퍼센트 미만만이 제313비행단의 것이였지만 전후 조사와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원자재 유입 차단이 일본 산업시설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과 같은 손실률을 보이면서도 일본 전시 생산을 더 많이 줄였다. 단위 비용단 입히는 피해측면에서 기뢰는 전쟁중 선박을 침몰시키는 가장 가성비 좋은 수단이였다. (또한 미 해군 잠수함들도 650기의 기뢰를 부설했다) 기아 작전에서 부설된 기뢰들은 전후에도 많은 일본 배들을 침몰시켰다.






Sources include: The Naval Siege of Japan: War Plan Orange Triumphant, by Brian Lane Herder, Osprey Publishing, 2020; Hell to Pay: Operation Downfall and the Invasion of Japan, 1945–1947, by D.H. Gianreco, Naval Institute Press, 2009;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XIV: Victory in the Pacific, 1945, by Samuel Eliot Morison, Little, Brown and Co.,1960; “Lessons From an Aerial Mining Campaign (Operation Starvation)” by Frederick M. Sallagar, Rand Report R-1322-PR, April 1974; The Admirals: Nimitz, Halsey, Leahy and King—The Five-Star Admirals Who Won the War at Sea, by Walter R. Borneman, Back Bay Books, 2012; The Fleet at Flood Tide: America at Total War in the Pacific, 1944–1945, by James D. Hornfischer, Bantam Books, 2016; Nimitz at Ease, by Captain Michael A. Lilly, USN (Ret.), Stairway Press, 2019; combinedfleet.com for Japanese ships; and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 Dictionary of American Fighting Ships (DANFS) for U.S. ships.


원문:https://www.history.navy.mil/about-us/leadership/director/directors-corner/h-grams/h-gram-053/h-053-1.html




후기:24시간동안 붙잡고있으니까 죽을맛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