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지도들은 1951년 4월 22일~30일 동안 중공군의 5차 공세로 인한 한국전쟁의 전황도를 나타냄


중공군은 서부의 개성, 중부의 철의 삼각지대, 동부의 양구 펀치볼을 거점으로 하여 남진을 위해 전면적인 공세를 시행함. 


원래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 후 점진적으로 북상하여 1951년 4월 초 러기드 작전을 통해 임진강 하구~연천~화천저수지~양양 선, 즉 캔자스선까지 북진하였으며 1951년 4월 11~21일에는 중부전선이 좀 더 북상한, 즉 철의 삼각지대의 남부인 철원과 김화까지 돌출된 와이오밍선까지 북진함.

-> 국군 한 부대가 5차 공세 이전에 서부전선에서 개성 시내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북쪽 송악산부터 시작되는 임진북예성남정맥은 진출하지 못한 상태


그러나 4월 22일부터 30일까지 그 동안 힘을 비축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중공군이 춘계공세를 일으켜 힘들게 북진한 전선은 다시 남쪽으로 밀려나게 됨

-> 이 춘계공세로 인해 개성 시내까지 진출한 국군은 다시 후퇴했고 이 이후로는 두번 다시 서부전선에서 개성으로 진격하지 못함


아래 지도를 보시면 전선은 서울 바로 위까지 내려왔을 정도로 서울이 재함락될 위기에 처함. 그러나 밴 플리트, 리지웨이 등 주요 장군들은 이 시기를 잘 넘겼는데 두번이나 적에게 빼앗긴 서울을 이번에 또 내주게 되면 이젠 한강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화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보고 어떻게 해서든지 서울을 사수함. 


그 유명한 감악산의 설마리 전투 및 가평 전투, 사창리 전투도 바로 이 4월 말에 벌어짐. 사창리 전투에서 국군은 큰 패배를 안았지만 대신 설마리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필사적인 전투 끝에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고 질서정연한 후퇴를 이루어내어 유엔군이 병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고 서울이 재함락되지 않게 막아줌. 또 중공군은 화천-가평 축선에서 서울-춘천 간 동서 도로를 끊기 위해 남진하였지만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선전하여 중공군을 무찌르고 남하를 저지. 즉, 설마리 전투와 가평 전투에서 힘들게 중공군을 저지한 덕분에 서울이 재함락 되는 것을 막고 중공군의 5차 공세를 실패로 만들 수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