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 시리즈의 사진은 장비명에 초점을 맞추고 사용하므로 실제 글 내용이 다루는 사건이나 시점과는 맞지 않을수 있으니 참고할 것


1편 링크: https://arca.live/b/military815/48100729?mode=best&p=1

2편 링크: https://arca.live/b/military815/48198424?mode=best&p=1

3편 링크:https://arca.live/b/military815/48291542?mode=best&target=all&keyword=%EA%B1%B8%ED%94%84%EC%A0%84%EC%9F%81+&p=1



본격적인 전투 장면에 앞서서 다국적군의 편제와 전투교리를 먼저 알아보고 가자



쿠웨이트 남부에는 동부합동군, 제1해병원정군, 북부합동군이 배치되었다


동부합동군(Joint Force Command East, 빨간색)은 사우디 10기계화여단과 아랍에미리트 기계화대대, 바레인 전차대대를 포함해 2개 여단과 1개 대대, 1개 임무부대로 구성되었다


미 제1해병원정군(1st Marine Expeditionary Force, 파란색)은 제1, 2해병사단이 모인 미 해병대의 주력부대였다

아랍군을 믿지 못한 슈워츠코프가 쿠웨이트 방면부대 중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던 부대였다


마지막 북부합동군(Joint Force Command North, 노란색)은 이집트 3기계화사단과 4기갑사단, 시리아 9기갑사단과 사우디-쿠웨이트 합동임무부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쿠웨이트의 이라크군을 잡아두고 추후 쿠웨이트시티에 진입해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18공수군단도 또다른 조공을 담당했다


18공수군단은 사우디에 최초로 전개한 부대로 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 24보병사단, 3기갑기병연대에 프랑스군 제6경장갑사단을 휘하에 두었다


이들의 임무는 서쪽 사막지대를 깊숙히 우회, 이라크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주공은 당연히 7군단이 맡았다


7군단은 1기갑사단, 3기갑사단, 1보병사단과 영국군 1기갑사단을 배치받았고 추후 1기병사단도 편입되었다



총사령관 슈워츠코프가 강조한 7군단의 임무는 단 하나, 공화국 수비대 섬멸이었다


이를 위해 7군단에 M1A1 2000대가 집중 배치되었다


7군단은 18군단과 아랍북부합동군 사이를 우회하여 쿠웨이트 서쪽으로 공화국수비대가 펼친 방어선을 섬멸할 예정이었고 이 작전을 레프트 훅 작전이라 칭한다



흔히 미식축구 플레이에 빗댄 헤일메리 기동작전이라고 잘 알려져 있지만 슈워츠코프는 자서전에서 헤일메리 플레이는 경기 종료 직전의 승부수이기 때문에 레프트훅 작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근데 그냥 헤일메리라 부르겠음 ㅋㅋ




7군단은 바르샤바군의 침공을 막는 주력이었기에 이를 위한 교리를 계속 발전시켰고 1989년 드디어 공지합동전투(Air Land Battle) 교리를 완성한다




공지전투의 핵심은 전장을 서독이 아닌 동독쪽으로 확대하는 데 있었으며 그 시작은 방어전 개념이었다


바르샤바군이 침공해올시 나토 육군이 출진해 1차 공세를 막아서는 동시에 적 2파를 각종 항공전력과 포병전력으로 종심타격을 가해 섬멸, 1파를 고립시켜 섬멸시키는 이론이었다


비록 걸프전은 다국적군의 공세였지만 전선과 후방종심을 동시에 타격한다는 개념 자체는 공세에서도 활용 가능했다



종심타격의 시작은 기본적으로는 해공군의 항공기가 맡았고 MLRS의 ATACMS 미사일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적 2제대가 폭격을 뚫고 전진하면 MLRS의 로켓탄이나 M110 자주포가 장거리 포격을 실시해 섬멸한다



2제대가 섬멸당해 적 1제대가 고립되면 CAS를 실시하는데 A-10이 활약하는 단계가 바로 이때이다



지상군과 적 1제대가 수km 거리까지 접근하면 AH-64 공격헬기나 M109 자주포의 간접사격으로 최종적인 화력지원을 실시한다



그 이후 전차부대와 기보부대가 약화된 적을 섬멸하는 것을 단계적으로 또는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공지작전의 교리었다


1991년 11월 11일 슈워츠코프는 각 부대 사령관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헤일메리 작전을 처음 설명했고 공지작전의 개요를 제시했다


처음 작전도를 본 장군들은 그 규모에 놀랐으나 슈워츠코프의 정열적인 설명을 듣고 놀람은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24보병사단장 베리 맥카프리 소장의 말을 빌리자면 작전안은 '환상적이었다'(This is fantastic!)


공세의 주역 7군단 사령관 프랭크스 중장도 헤일메리 작전에 맞춘 작전안을 제시했다


사막의 기병도 작전(Operation Desert Sabre)은 5개 중사단을 집중 운용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일거에 격멸하는 현대식 전격전과도 비슷한 작전이었다


프랭크스 중장은 "다섯 손가락을 펼쳐서 공격할 생각은 없다. 나는 손가락을 단단히 거머쥔 주먹으로 공격할 것이다" 라고 표현했다


이 '기갑의 주먹'을 위해서는 방어선 돌파에 1개 사단, 이라크 육군 견제 및 저지에 1개 사단, 공화국 수비대 격멸에 3개 사단 총 5개 사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프랭크스 중장 휘하엔 4개 사단 뿐이었고 이에 프랭크스 중장은 중부군 예비대인 1기병사단의 배속을 요청한다


하지만 슈워츠코프는 이 요청을 거절했는데, 아랍합동군, 특히 이집트군을 믿지 못한 슈워츠코프가 예비대로 1기병사단을 빼놨기 때문이다


거기다 18공수군단 또한 깊숙한 우회기동 도중 공화국수비대를 조우하면 전차 등 중장비를 갖춘 사단이 24보병사단 하나뿐이라 위험할수 있다는 이유로 7군단의 1기갑사단을 요구했다

(물론 이 요구는 거절되었다)


그러나 프랭크스 중장은 포기하지 않았대

2월 9일 딕 체니 국방장관이 합참의장 파월 의장과 함께 리야드를 방문해 장성들의 보고를 들은것이다

여기서도 프랭크스는 1기병사단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고 슈워츠코프와의 불화는 깊어져 갔다


슈워츠코프는 사막의 기병도 작전에 대해 "적을 섬멸할수는 있으나 지나치게 진격속도가 느리다"라고 생각했다

이는 두 장성의 성격차이에서 비롯된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슈워츠코프는 육군부대 사령관 요삭 중장에게 프랭크스를 설득하라고 압박했다

불화의 심화를 우려한 행동이었지만 사령관으로서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1기병사단은 예비대로 남았다가 지상전 개시 3일차에서야 7군단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프랭크스 중장도 사막의 기병도 작전을 8일(이중 전투후 상황정리가 2일)만에 완수해냈다

당초 중부군이 상정한 공세 2주, 정리 4주에 비하면 빛의 속도나 다름없었다


한편, 다국적군 육군이 작전계획과 부대편제를 놓고 씨름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하늘은 불타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