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동영상 Mark Felton Productions: Japan vs Italy -The Forgotten Pacific War

아래 내용은 동영상 요약한 내용이니깐 관심있으면 원본동영상을 보는걸 추천함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2차대전에서 추축군으로 참전하였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안습한 전과로 유명해지고




멀지않아 1943년 9월 무솔리니 정권은 추출되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으로 갈아타고 

당시 극동에 배치된 이탈리아군들은 일제의 위협에 정면으로 맞서게 됨




왜 머나먼 극동에 이탈리아군이 배치됐는가 하면 1900년대 의화단 운동이 끝나고

이탈리아를 포함한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국내 조계지를 얻게 되었는데




이탈리아는 베이징, 상하이 톈진에 조계지를 얻고 군을 보내 중국 조계지를 지키게 함.



이후 삼국 동맹 조약으로 독일-이탈리아-일본은 연합국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이탈리아가 그리스와 북아프리카에서 죽쑤는동안 중국 조계지의 이탈리아군은 꿀을 빨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진주만 공습이후 참전한 일본제국이 방어준비가 안된 연합국 아시아 식민지를 손쉽게 제압하고 

이탈리아 조계지를 위협할 만한 연합군은 전멸했기 때문. 일본 응디ㅆㅅㅌㅊ ㅋㅋ


하지만 1943년 9월 연합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합세하게 되었고 

이는 극동에 배치된 약 700명의 이탈리아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되었는데 

이웃 일본 동맹군을 하루아침만에 적군으로 상대해야 했기 때문




거기다 아프리카전선에서의 졸전이후 아프리카에 주둔중이던 이탈리아 함선 대부분은 영국해군을 피해 아시아로 달아나 일본에 정박중 이였으며




아시아 각지 흩어져 연합군 상선을 공격하거나 독일-일본 군수물자 수송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잠수함들 또한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됨




한순간에 적군이 되어버린 이탈리아군은 두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1.    독일에 구출된 무솔리니가 새로만든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충성을 맹세할 것인가

2.    아니면 연합국 이탈리아에 충성을 맹세하고 스스로 위험에 빠질것인가




대부분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충성을 맹세하고 연합국에 맞서 싸웠지만 태평양에서 활동중이 이탈리아 해군 Eritrea 같이 항복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연합국으로 런해서 항복하거나 

앞서 일본으로 도피했던 이탈리아 해군들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노역을 하게됨…



태평양에서 활동중이던 이탈리아 잠수함들은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대부분 일본에 항복하고 

독일의 말레이 U-보트 베이스에서 계속 독일 지휘하에 계속 임무를 수행하지만 

1945년 독일도 항복하자 그때가지 살아남은 이탈리아 잠수함 승무원 20명은 일본해군과 함께 끝까지 연합군에 항전하였고

그 중 잠수함 토렐리는 8월 30일 1945년 일본해역에서 B-25미첼 폭격기를 격추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 일본해군의 마지막 격추기록으로 남음

이후 일본도 항복하자 이들의 이탈리아-독일-일본 해군생활도 끝이 남



한편 조계지에 주둔중이던 이탈리아 육군은 이탈리아가 항복할 당시 이곳저곳 분산되어 배치된 상태였는데

베이징 조계지 라디오타워를 지키던 약 100명의 이탈리아 해군, 육군은 카르카노소총, 베레타 권총, 수류탄등으로 경무장한 상태로 

포병과 15개의 경전차의 지원을 받는 약 1000명규모의 일본 보병연대를 상대하였고 

중화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4시간을 버텨 성공적으로 비밀문서와 통신기기를 파괴하고 항복함



여담이지만 일본군상대로 끝까지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 항복한 이탈리아군 대부분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다시 충성을 맹세하여 일본군의 동맹군으로서 다시 참전하게 됨. 어제의 적 오늘의 아군 ㄹㅇㅋㅋ



손쉽게 항복할거라 예상했던 일본군은 소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격렬히 저항한 라디오타워 이탈리아군에 당황하였고 병력도 더 많고 요새화된 톈진 이탈리아 조계지를 공략해야 되자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톈진에 주둔중이던 약 600명의 이탈리아군은 베이징 라디오타워에 주둔중이던 이탈리아군과 달리 

300정의 소총과 50정의 권총 50정의 경,중기관총등 다수의 화기가 있었으며 

충분한 탄약과 4문의 76mm구경 포로 무장하여 일본의 경전차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음



또한 4대의 Lancia 장갑차와 5대의 군보급차량, 그리고 일주일치 식량과 의약품을 비축한 상태여서 당장의 보급걱정은 없었던 상태임




이러한 톈진 이탈리아군을 공략하기 위해 일본군은 약 6천명의 보병을 보냈고 베이징에 주둔중이던 일본항공기 지원과 함께 각종 장갑차, 경전차, 포병 또한 보냈는데



일본군은 10:1 병력 우세를 이용해 이탈리아군에게 먼저 항복하라고 요구하였고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이 거부하자 일본군 포병은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톈진시내로 포격하기 시작함.



이탈리아군 병사들과 수병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를 원했지만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과 장교들은 일본군이 곧 추가로 증원 받아 더더욱 강력해 질것이고 무의미한 저항으로 톈진시내 수많은 이탈리아 민간인들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 예상하고 항복하자는 결정을 내리게 됨



결국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계속 복무하겠다는 170명을 제외하고 모두 항복해 한반도와 일본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이로서 이탈리아 vs 일본 태평양 전선을 막을 내리게 됨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