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동영상 Mark Felton Productions: Waffen-SS Soldiers Guarded the Nuremberg Trials

아래 내용은 동영상 요약한 내용이니깐 관심있으면 원본동영상을 보는걸 추천함



1945년 ~ 1949년 포격으로 박살난 독일도시 뉘르베르크에서 나치독일 전범재판이 시행됨

헤르만 괴링, 칼 되니츠, 루돌프 헤스등 유명한 나치인물들이 전범재판에 섰고 기타 고위 독일정부 공무원, 군인, 거물 기업가, 의료인등 총 199명이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음



흥미롭게도 이 전범용의자들을 관리하는 경비원들 대부분은 미군이 아니라 한때 무장친위대였던 사람들이었음 ㄷㄷ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독일이 항복하고 잿더미 독일땅에서 그나마 재판소로 쓸만한 뉘른베르크 정의궁은 군사재판소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고 처음에는 미 육군 26보병사단과 미헌병대에서 차출된 병사들로 이루어진 경비대가 창설됨



경비대가 사용한 부대마크, 미군복 부착물중 유일하게 스와스티카가 그려져있음



하지만 정의궁 외에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관련된 건물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곧 뉘른베르크 도시 전체를 관리해 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추가적인 병력을 놀랍게도 과거 무장친위대 병력들이 쓰이게됨. 과연 미국은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짓을 한 걸까?



물론 여기서 추가된 인원들은 평범한 나치 무장친위대가 아님. 

1940년 소련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발트3국을 점령하고 공산화 시켜

 많은 현지인들을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집단 이주를 시킴. 



덕분에 소련에 대한 발트3국 국민의 적개심은 치솟았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발트3국에 다다르자 발트3국 국민들은 독일군들을 ‘해방군’으로서 환영함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발트3국 사람들은 나치와 열정적으로 협력하였고 1942년 나치는 이를 이용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무장친위대를 설립해 3개의 사단급으로 확장하게됨



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독소전에 참전하였지만 전쟁 말기에 들어서 결국 미군이나 영국군에 항복하고 다시 소련치하의 발트3국으로 돌아갈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들이 돌아가면 혹독한 시베리아 노동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당할게 뻔했음. 그렇다고 서방 연합군도 어쩔 수 없는게 이들을 먹고 재워줄 장소도 없고 이유도 없었음… 그렇게 그들은 소련으로 돌아갈때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기다리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몇몇 에스토니아 SS장교들은 미군과 접촉해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소련에 돌려 보내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였는데 미국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임



미국도 나름 속사정이 있었는데,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군 대부분이 전역하게 되고 독일 점령지를 관리하거나 소련의 침공에 대비할 인력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였음



미국은 ‘비록 무장친위대는 불법 준군사 조직이지만 발트3국 무장친위대는 대부분 강제 징집되었으므로 문제가 없다.’ 라는 반만 맞는 논리로 발트3국 무장친위대를 재징집하고 점차 그 수를 늘림



선발된 300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은 2개월간의 미군식 훈련을 거쳐 1946년 뉘른베르크 4221 경비대를 창설하고 이중 92%는 과거 무장친위대원 이였고 이들의 지휘관 또한 에스토니아인 SS 장교였음



비슷한 시기에 라트비아 경비대대도 같은 방식으로 창설되었고 이들도 대부분 무장친위대 출신으로 이루어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경비대원들은 거의 다 영어와 독일어에 능숙하였고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소 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추가적인 에스토니아인 경비대대가 창설되어 재판소 외에도 감옥경비나 창고, YMCA, 간부숙소등 다양한곳에서 근무함



소련의 베를린 봉쇄시기에 베를린 국경경비에 지원가는 등 여러임무에 활용되다가 1950년쯤 부대가 해산되고 대부분 미국, 캐나다, 벨기에, 스웨덴, 호주등 서방으로 이민가거나 계속 미군에 남아 타부대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고 함



결국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대부분 고향 땅으로 가지 못했고 해외에 정착하게됨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