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이나 현재나 이 하늘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누구나 잠깐의 망설임 없이 미 공군을 고를 것이다. 보잉과 록히드 마틴과 같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항공우주 기업과 다른 나라보다 우월한 군수 지원 능력, 그리고 파일럿들의 우수한 기량 덕택에 미군은 이제껏 단 한번도 하늘에서 패배한 적이 없어 "전쟁에서 이기려면 하늘에서 이겨야 한다" 라는 제공권의 중요성을 알려 준 교과서적인 사례다.

그러나, 그런 미군도 항상 성공적인 건 아니다. 신앙심에 가까울 만큼 맹신하던 신기술이 가진 잠재적 문제점들이 외적인 문제 몇개와 결합되어 당한 패배에 큰 코 다치는 경우도 있었고, 이는 그 간의 평가와 상반되는 결과로 자존심에도 매우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바로 미 공군의 흑역사 중 하나였던 F-4 팬텀 II의 경우 처럼 말이다.


2차 대전의 말엽에 등장한 제트 엔진은 압도적인 속도와 기동력으로 공중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왕복 엔진을 사용하던 이제까지의 항공기들의 최고 속도가 빨라봐야 700km/h대 였는데, 최초의 제트 전투기 Me262는 800km/h를 간단히 넘어갔을 정도였고 이 속도를 이용한 상승력으로 당대의 다른 그 어떤 전투기들 보다도 에너지 파이팅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제트 엔진 기술의 발달로 뜨거운 연소가스에 연료를 뿌려서 추가적인 추력을 얻는 애프터 버너, 즉 재연소 장치가 들어가고 항공기가 본격적으로 초음속에 들어서게 되자, 포구 초속이 1050m/s로 간신히 음속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는 기총만으로 때려 잡기엔 너무나 힘들었다. 

이 상황에서 혜성 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공대공 미사일 이었다. 최초로 미 공군에 배치된 AIM-4 팰컨을 시작으로 미 해군에도 AIM-9B 사이드 와인더가 배치되며 기총 탄약 보다 더 빠르며 꽁무늬만 제대로 조준하면 단숨에 적기를 향해 날아가 정확히 맞출 수 있는 미사일은 기총의 상위 호환이었다. 그렇게 이 미사일은 타이완과 중공 사이에서 벌어진 진먼다오 포격전에서 그 진가를 드러냈다. 분명히 타이완 공군의 F-86F는 중 공군의 J-5(MiG-17) 전투기 보다 성능은 떨어졌지만 개량을 통해 AIM-9B를 인티해 놓은 상황이었고, 이 작은 차이는 타이완 공군이 중 공군을 공중전에서 압살해 버리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공대공 미사일이라는 존재가 본격적인 조커 카드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결과에 놀라움을 표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미군 수뇌부였다. 당시 미군은 해군과 공군을 막론하고 공대공 미사일이라는 신무기의 유무가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물에 고무되어 "제트기 시대에 대한 해답은 기총이 아닌 공대공 미사일이다!" 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이제 결과물도 나왔겠거니, 위험한 도박을 하나 하게 되는데, 그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간 발전하던 것은 미사일과 제트 엔진 뿐만이 아니었다. 전파의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먼 곳의 표적을 포착하고 조준할 수 있는 레이다의 개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먼 곳을 볼 수 있는 레이다와 연동해 사이드 와인더 보다 더욱 멀리 날아가는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AIM-7 스패로도 개발되며 시계 외 거리, 즉 BVR 공중 전투가 본격적으로 가능해졌고, 이는 굳이 근접 전투로 가지 않고도 원거리에서 먼저 압도해 버릴 수 있는 위치에 와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공대공 미사일이 미래 공중전 승리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확신으로 굳힌 미 공군은 차세대 전투기 F-4 팬텀 II 전투기를 개발하며 미사일 운용에 초점을 두기로 한다. 덩치는 기존의 다른 전투기들 보다 확연히 커져 더 많은 미사일들을 싣고 더 강력한 J79 터보젯 엔진을 탑재해 더 빠르게 날고 더 멀리 쏠 수 있는 미사일을 더 많이 장비 할 수 있었으며 더 큰 AN/APQ-72 레이다를 장착해 멀리 볼 수도 있었다. 주익은 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단순 후퇴익 보다 후류와 저항을 적게 일으키는 장점이 있었고 그 덕에 팬텀의 속도는 마하 2.27에 달했다. 이러한 장점을 이용해 공중전 뿐만 아니라 지상 공격도 큰 폭장량을 십분 활용해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전투기는 기총을 탑재하고 있지 않았다. 기총으로 쓰이던 M-61 20mm 벌컨포는 엄청난 발사 속도로 인해 진공관으로 만들어져 충격과 진동에 취약했던 당대의 레이다 에겐 쥐약이나 다를 바 없었고, 결정적으로 수뇌부는 그냥 대충 조준해도 알아서 날아가는 사기급 아이템에 꽃혀 있던 지라, "충격에 약한 진공관 레이다"는 자신들의 이론을 현실로 옮겨 놓는데 사용할 최고의 명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팬텀은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었고, 이젠 모두가 학수고대하던 실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온 실전의 결과는 장밋빛 미래로 가득했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엄청난 참극이었다. 조그마한 구소련제 전투기나 굴려대던 북베트남 공군의 전투기는 밀리긴 했지만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미군에 예상치 못한 수준의 큰 피해를 입히며 2차 대전과 한국 전쟁만 해도 5.86:1로 선전했고 중공과 북괴를 상대로는 10:1 까지 찍던 구세대 제트기와 프롭기로 무장했던 선대보다 한참 개악된 3.21:1로 크게 고전하게 만들었다. 땅에서는 지대공 미사일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어 무방비 상태의 팬텀을 떨어뜨렸고, 하늘에선 둔중하고 기총 조차 없던 팬텀을 가볍고 날렵한 MiG-17/19/21은 근접전에서 기총을 긁어대며 신나게 두들기고 다녔다. 분명히 이론 상으론 잘못된 것이 없었는데, 무엇이 잘못됬을까?


원인은 애초부터 진먼다오 포격전의 전과를 오해한 데 있었다. 진먼다오 포격전에서 비행성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세이버가 J-5(MiG-17)를 상대로 압도한 것은 맞지만, 애초에 사이드 와인더 미사일을 직접 맞고 떨어진 전투기는 얼마 되지도 않았고, 대다수는 생전 처음 보는 신무기인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하강하다가 6시 방향 후미를 내주게 되었고, 그렇게 취약점을 드러낸 적기를 기총으로 처리한 것이 대다수 였다. 또 당시의 낮은 성능의 진공관 회로를 쓰던 미사일들은 고온 다습한 열대 우림 기후에 비포장 험로가 많은 베트남에서 뒤떨어지는 성능의 현가 장치를 장착한 군용 트럭으로 운반하며 상당수가 회로 파손과 습기로 인해 작동 불량율이 기하 급수적으로 올랐고, 어찌저찌 발사된다 쳐도 적외선 유도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의 경우 사용하던 센서의 성능이 조악해 배기구 외에 하늘의 태양, 지표면과 수면 까지 락온해 날아가는 경우도 파다했고, (아직 플레어가 없던 시절) 에이스들은 일부러 이 점을 이용해 6시 방향을 잡히면 지표면이나 수면, 태양이 있는 쪽으로 기수를 틀어서 미사일의 락온 기능을 교란 시키기도 했다.


한술 더 떠, 당시 미군의 공중전 교리는 원거리에서 적기를 포착해도 사령부에서 피아 식별을 확인해 교전을 허가해야 전투를 진행 할 수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레이다에서 사정거리 안에 나타난 적기는 원거리에서 스패로 미사일로 처리하기도 전에 근거리에 들어와 버려 안 그래도 낮은 명중율을 더 떨어뜨리거나 그 마저도 쓸 기회 자체가 거의 없어 근접전을 주로 강요당했고, 이는 둔중한 체구에 강력한 엔진을 단 "무쇠 썰매"에 불과해 선회력이 떨어지던 팬텀에겐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뿐만 아니라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 만든 고출력 터보젯 엔진도 문제였다. J79 터보젯은 당시의 낮은 기술력으로 높은 추력을 만들어 내려다 보니 무작정 연료를 많이 들이 부으면서 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연료가 분사되어 불완전 연소를 일으키는 바람에 새까만 매연으로 뚜렷하게 꼬리를 그리며 나는데다 덩치 까지 커 둔중했던 팬텀은 작고 날렵한데다 불완전 연소가 적은 저출력 터보젯 엔진을 단 소련 전투기들 보다 저시인성 측면에서 확실히 나빳다.


그렇게 미사일 만능주의의 환상이 처참하게 깨져버린 후, 미군은 작정하고 SUU-16/A 같은 건 포드를 달아 기총을 억지로라도 운용하게 하거나 아예 부분적으로 재설계를 거쳐 기수 하단에 M-61A1 벌컨을 고정 기총으로 운용하고 레이다도 충격에 강하고 성능도 훨씬 뛰어난 트랜지스터 회로 기반의 레이다로 교체한 E형을 도입해 미그기들을 기총으로 격추하는 설욕에도 성공하는 등 성과를 어느 정도 보여 주었다. (단, 이러면서 룩/슛 다운을 못하는데 이 때문에 공군만 E 형식을 썼다.) 신기술을 맹신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최고의 반면교사였던 셈이다.

그렇게 얻는 것 없이 패배하며 베트남에서 물러난 미군의 수뇌부는 결국 원래대로 "작고 날렵한 전투기가 싸움도 잘한다" 라는 사상으로 돌아왔고 공중전의 근본인 기총도 다시 달아야 겠다고 생각을 고쳐 먹었고, 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전투기가 바로 F-16 이었다. 그리고 미군은 1982년 레바논에서 활약하기 전 까지 팬텀 처럼 "크고 빠르며 먼저 보고 멀리 쏠 수 있는" F-15 전투기를 한동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며 불신하는 등 한동안 그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소련군은 팬텀을 보고 정 반대로 더이상 기총에 의존하는 기존의 공중전 방식은 쓸모 없어질 것이라 여겨 큰 레이다를 장착해 BVR 전투는 물론 룩/슛 다운을 통한 지상 공격도 할 수 있는 가변익 전투기 MiG-23을 개발해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소 양국이 정 반대의 결론을 내리게 만든 팬텀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었지만, 미군에선 대다수가 4세대 전투기의 대표 주자들인 F-15/16, F/A-18로 교체 되었고 방공망 제압 임무를 담당하는 와일드 위즐 등 일부 특수 목적기들은 걸프전기 까지 꾸준히 지상과 공중에서 활약하다 퇴역했지만, 영국, 독일, 그리스, 터키, 일본, 한국 등의 제 1세계 동맹국 들에도 많은 수가 수출되며 일부는 현재 까지 운용되며 현대 전투기의 역사를 아직도 써 내려가는 중이다.